유송
劉頌
(? ~ 300)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인물. 자는 자아(子雅). 광릉 사람으로 광릉왕 유서의 후손이고 법에 관한 상소를 많이 올렸다.
2. 행적
2.1. 위나라 시절
젊어서 사물의 이치에 대해 잘 알았다. 효렴에 뽑히고 수재로 천거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으며, 사마소의 부름으로 상부연이 되어 촉에 사신으로 갔다. 촉의 신평에 있을 때 사람들이 굶주리자 쌀을 빌려 그들을 구하면서도 갚지 않게 했고 이 일로 인해 제명되었다.
2.2. 무제 시절
진무제가 즉위하자 상서삼공랑, 전과률, 신원송 등을 지내다가 중서시랑으로 옮겼다. 함녕 연간에는 각지를 돌아다녀 백성들을 위로하고 형벌을 집행한 것이 칭찬받아 산기랑에 임명되었다.
상서령사 호인이 죄없이 하옥되자 조사하고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근거를 가지고 무죄로 처리해 호인은 면할 수 있었으며, 당시 사람들은 유송을 장석지에 견주었다. 관직에 6년간 있으면서 상세하고 공평하다고 일컬어졌다.
280년에 오를 멸망시키고 돌아와 장수들이 공을 두고 다투자 유송이 파견되어 조사했는데, 유송은 왕혼을 가장 큰 공, 왕준은 중간 정도의 공을 세웠다고 보고했다가 진무제는 법을 자르고 이치에 맞지 않다고 여겨 유송은 경조태수로 좌천되었다가 실행되지 않고 하내태수로 옮겼다. 군의 경계에서 물방아를 공공으로 사용하는 것이 많아 흐르는 물이 막히거나 잠기지 않게 그만둘 것을 표로 올리자 백성들이 편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관직을 떠났다가 상의 기간이 끝나자 회남상에 임명되었으며, 관직을 지내면서 가지런히 정돈되었고 정치하면서 성과가 뛰어났다. 예전에 작피를 다스리면서 매년 수 만 명의 사람이 움직이고 호강한 사람이 모두 소유해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은 직업을 가지지 못하자 유송은 힘을 모아 크고 작은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공을 헤아리고 나누자 백성들이 편안하고 은혜롭다고 칭송했으며, 육형의 부활과 수정이나 당시 정치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법령을 개편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2.3. 혜제 시절
291년에는 사마윤을 따라 입조해 양준을 죽이는 일에 참가해 밤에 궁전 안에 주둔해 지켰으며, 삼공상서가 되어 조서를 올렸다. 이부상서로 옮겨 구반의 제도를 세워 백관들이 승진하는 것을 성적의 우열에 따라 판별해 상벌을 시행해야 한다고 했지만 가밀, 곽창 등이 조정을 독점해 시행되지 않았다.
300년에 사마륜이 장화를 죽이자 매우 통곡했으며, 장화의 아들이 도망쳤다는 것을 듣고 기뻐했으며, 사마륜의 당파인 장림이 이를 듣게 크게 노했지만 유송이 바른 도리를 지켰기에 해칠 수 없어 유송을 꺼려했다. 손수가 사마륜의 공을 추숭해 구석을 더해야 한다고 하자 백관들은 함부로 반대하지 못했는데, 유송은 한나라에서 위나라, 위나라에서 진나라에게 하사했지만 이는 특별한 일로 평상시의 제도로는 안되고 주발이나 곽광은 공이 크지만 구석은 주어지지 않았다면서 반대했다.
장림이 분노해 유송이 장화와 결탁했다면서 죽여야 한다고 하자 손수는 장화와 배외를 죽인 일로 민심을 잃었기에 유송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반대했으며, 유송은 광록대부에 임명되어 문 앞에 인마의 통행을 막도록 했다.
2.4. 죽음
해가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해 사자를 보내 애도의 말을 전하고 20만 전, 조복 1구를 하사하고 시호를 정(貞)이라 했다.
중서시랑 유침이 유송을 개부에 임명해야 한다고 했지만 손수는 유송에게 한을 품었기에 들어주지 않았으며, 유송은 자식이 없었고 의붓동생인 유화의 아들인 조카 유옹이 후사를 계승했지만 일찍 죽었다. 유옹의 동생인 유후의 아들 유언의 적출 소생 장손이 봉작을 계승했으며, 300년에 가밀이 감독하는 무리들을 주살한 공이 있다고 해서 양추현후(梁鄒縣侯)에 추증되어 식읍 1500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