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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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西晉)의 초대 황제. 자는 안세(安世). 위의 대신 사마의의 손자이며 사마소의 장남이었다. 어머니는 왕원희다.[1]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
삼국지의 끝을 장식한 인물이며, '''중국 역대 통일왕조의 초대군주 중 집안 덕을 가장 많이 본 인물'''이기도 하다.[2] 반대로 자수성가의 대표격 인물은 빈농 고아 출신의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다.
2. 상세
사마염처럼 통일왕조를 거저먹은 군주도 없다. 역시나 부친의 죽음 이후에 마치 당연한 절차를 밟듯이 선양받은 조비의 경우는 10살에 종군했다가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고[3] 한참 뒤에 본인이 20대에 들어설 때에야 조씨가 패권을 잡지만, 사마염은 11살 때 조부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서 사마씨가 실권을 틀어잡는다.[4] 조비는 이릉 대전을 겪고 골골대는 동오와 촉한을 무찌르지 못했지만 사마염은 독발수기능의 난까지 진압하고 오나라도 무찔러 천하 통일을 이뤘다. 하지만 말년에 사치와 향략으로 다 말아먹었다.
머리카락이 땅까지 닿을 만큼 길고 두 팔이 무릎까지 왔다고 한다. 머리카락 묘사로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계속 장발 일러스트로 등장한다. 그리고 유비 또한 팔 길이에 과장된 묘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유비와 사마염을 일치시키려고 한 사가들의 의도 같다는 의견이 있다. 후연의 창업자 모용수도 이런 묘사가 있는데 아마 당시에는 7척 5촌과 더불어 제왕의 필수요소였나보다.
3. 생애
3.1. 초기
위나라 가평 연간에 북평정후에 봉해졌다가 급사중, 봉군도위를 지내고 여러 차례 승진해 장군이 되었다가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또 여러 차례 승진해 호군이 되어 가절을 받았다가 동무양에서 조환이 즉위하기 전에 영접해 중무군으로 승진하면서 신창향후로 진봉되었다.
3.2. 진나라의 초대 황제
아버지 사마소가 진왕이 되자 세자가 되어 무군대장군에 임명되었다가 사마소가 사망한 뒤, 사마염은 황제 조환을 폐위하고 자신이 제위에 오른 뒤 국호를 진(晉)으로 바꾼다. 여기서 웃기는 게 등장하는데 사마소 사망 후 3년상 문제가 거론되는데, 사마염이 '내가 이래 봬도 (백성들을)예(禮)로 교화해 온 집안 사람인데 3년상 해야지' 하며 강행.[5] 선양 문제 등으로 상복을 벗었다가, 이듬해 여름 숭양릉 방문건으로 상복 문제가 불거지자 사마염은 '나만 입을 테니 늬들은 괜찮다' 하고 상복을 다시 입는다. 그러니 제일 찬탈에 앞장 섰던 인간이 꼭 효 관련으로 뭔가 어필을 했다.[6]
특히 사마염의 발상 해프닝은 당시는 물론이고 후대의 사마광조차도 '한 문제가 폐한 것을 진 무제가 다시 살렸는데, 이건 꽤 잘했음' 이라고 크게 칭찬했을 정도니 상당히 큰 의미가 있었나 본데, 어쩌면 이게 쓸만한 공적들은 선대들이 다 먹튀하고 마지막 카드인 동오 정벌은 한참 후에나 이룰 수 있었던 사마염의 체면을 세워준 '껀수'는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거나 이것이 서진의 건국으로 왕년에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받은 것을 그대로 똑같이 따라했다. 그러나 조조와 사마의의 찬탈은 결코 같은 급으로 논할 수 없다. 조조는 이미 쇠약하던 후한 정권을 황제를 대신하여 20여 년간 유지시켰다. 또 조조는 반대파와 황후,황족들, 서주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지만 황제를 폐위하거나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마의는 비록 어린 황제 조방이 즉위하고 권력자 조상이 무능했으나 그래도 쇠약하지 않았던 위나라의 권력을 기회를 보아 탈취했고, 사마사는 황제 조방을 폐위시켰으며 사마소는 황제 조모를 죽였다. 실제로 그럭저럭 평화스럽게 마감한 조위의 말로에 비하면 서진의 말로는 훨씬 비참하다.
3.3. 삼국 통일
15년 뒤인 280년에는 독발수기능의 난이 진압되자, 오까지 멸망시키면서 삼국시대를 마감한다. 이것이 삼국지의 끝. 하지만 말년에는 부패했고, 거기다 아들과 며느리가 나란히 막장이었다. 끝내 그가 죽은 뒤 서진의 말년은 팔왕의 난으로 동족 간 대혈전이 벌어진 다음, 영가의 난으로 이민족들에게 쫓겨나서 중국의 북쪽 지역은 이민족이 차지하고 한족은 남쪽에서 동진을 건국한 오호십육국시대였다.
3.4. 긴장감을 놔버리다
천하 통일을 하기 전이었던 즉위 초반에는 태의령 정거가 바친 꿩의 머리 가죽을 이어 만든 호화스러운 모자 또는 가죽 옷인 치두구를 대주전 앞에서 불태우고, 다시는 이런 걸 바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을 정도로 청렴하고 유능한 이미지였다. 사마염이 즉위했을 당시에는 현명하고 덕이 있는 여성으로 이름 높았던 사마소의 아내 문명황후 왕원희가 태후로 있었으니, 사마염도 '엄마 눈치'를 보았을 것이다.
태후가 직접 베를 짜고 진수성찬을 멀리하며 몸소 검소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니, 아무리 황제라도 아들이 돼서 치두구 같은 사치품을 가까이 하기에는 눈치보일 만도 하다. 하지만 문명황후 왕씨는 진나라가 건국되고 3년 만에 52세 나이로 죽었으니 사마염은 곧 '엄마 눈치'를 안 보고 황제답게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되었으리라.
3.5. 연이은 실정
특히 '''당시 서진의 호구상 파악 인구가 1,600만 명 정도인데 10,000여 명의 처녀를 잡아와서'''는 몽땅 후궁으로 만들고, 누구를 골라잡아 밤을 즐길지가 애매하니 양이 끄는 수레에 타고 '니들 맘대로 가라'라고 한 뒤 멈추는 데를 골라잡아 지낸 것이 유명. 일부 후궁은 자기 방 앞에 양이 좋아하는 소금물을 뿌리거나 잎사귀를 꽂아놔서 자기 방만 찾아가게 만들었다고 한다.
3.6. 각종 일화
사마염의 사치와 관련된 일화가 몇 있는데 신하를 지방관에 임명할 때 한 사람은 사치벽이 심한 사람(당빈)이고 한 사람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양종)이었다. 이에 사마염은 '사치가 심하면 '''좋지만''' 술병은 평생 못 고친다.'라며 사치벽이 심한 신하를 임명했다.
3.6.1. 태자 책봉 문제
한번은 노신이었던 사도 위관이 술자리에서 옥좌를 어루만지며 '이 자리가 너무 과분합니다'라고 했을 때도 술에 취해서 헛소리를 한다고 했지만 그의 뜻을 알아챘다. 한마디로 사마충의 자질이 개판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돌려 말한 것으로 '황제 자리가 사마충에게 너무 과분하다'는 것으로 황태자를 바꿔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문제를 만들어 사마충에게 문제를 던져 주었는데 그걸 가남풍이 가로채서 학자를 매수하여 답변을 쓰게 했다. 가남풍은 그 답변을 받아내어 너무 잘 쓰면 사마염이 오해할까봐 잘 쓴 것도 아니고 못쓴 것도 아닌 중간 수준으로 사마충에게 받아쓰게 했다. 사마염은 이것만 믿고 사마충을 인정하고 말았다.
3.6.2. 환령
심지어 이런 일화도 있는데, 태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오면서 '나는 어떤 군주인가?'라고 묻자 사예 교위로 있던 유의가 '폐하는 후한의 환제와 영제와 같사옵니다.'라고 '''폭풍디스'''를 했다. 이에 사마염이 '아니, 환제와 영제는 매관매직으로 부를 축적한 황제들이 아니오? 짐이 그들과 동급이란 말인가?!'라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에 유의는 '환제와 영제는 매관매직을 해서 국고라도 충당했지 폐하께서는 매관매직을 하여 폐하의 살림만 채우시니 환제와 영제보다도 못하옵니다!'라며 대놓고 그에 대한 비판을 하였다.
이에 사마염은 대노했지만 모가지를 날려버리는 대신 '환제와 영제는 이런 말을 듣지 못했는데 짐에게는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니 내가 그들보다 낫다.'라고 웃어 넘겼다고 한다.
더구나 서진 시대보다 후한 말기 시대가 더 개념 있는 신하들이 많았다. 영가의 난 당시에 숙청당한 청류파 인사들만 봐도 그렇다. 그래도 사마염이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환제나 영제는 이런 직언을 훨씬 더 많이 들었는데 그 직언을 나오는 족족 씹어버리면 다행이지 직언을 한 신하들의 목을 날리거나 유배를 보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욕을 먹은 통일군주가 사마염이 유일한 건 아니고 그 한고제도 주창이라는 신하에게 '''이 걸주 같은 양반아''' 라는 소릴 듣기도 했다. 다만 이는 본래 유협집단 출신인 한 고제와 측근들의 특수성에 기인한 면이 있고, 개인적인 인간성이야 어쨌든 통일 과정에서의 역할과 군주로서 보여준 수완으로는 진세조보다 훨씬 높게 평가받는다.
어쨌든 신하들에게 군주로서의 능력에 대해 독설을 먹는 모습이 수 차례 보이는 꽤나 드문 케이스. 좀 좋게 보자면 저렇게 극딜을 당하고도 피 보는 일은 또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도 좀 특이한 인물이다. 누울자리 보고 발 뻗는다고 사마염의 그런 성품을 알기에 더 저런 일들이 잦았겠지만서도 욕은 먹었어도 최소한 그렇게 말하는 신하들을 존중은 해 줬었다. 자기가 하기 싫은건 걍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으니 문제였지만... 그래도 진시황제나 후한, 위의 조조, 조비 등 권력자들의 집단 학살, 암투의 꼴을 본다면 사마염이 그래도 훨씬 초대황제의 치세에 가깝다고 할수 있다
3.6.3. 번건
다른 예를 하나 들자면 망국인 촉한의 신하였던 번건에게 "왜 짐의 주변에는 제갈량과 같은 신하가 없는가?" 라고 묻자 "폐하께서는 등애도 똑바로 못 보시면서 어찌 제갈량을 찾으십니까.''라고 까이기도 했다. 왜 등애가 나왔는고 하니 종회의 난 당시 억울하게 일족이 주륙당한 등애의 신원도 못 하는데 제갈량 같은 신하가 있어 제대로 쓰여지겠느냔 뜻이다. 이에 사마염이 등애의 신원을 해주었고 자손들도 억울함을 풀 수 있었다. 어찌보면 선제(자기 아버지인 사마소)의 실책을 인정하는 셈이니 굉장히 위험할 수 있는 발언이었는데, 어쨌던 들어주긴 했다.
사마염이 자신에 대한 독설이나 강경한 비판에도 아주 관대했던 것이 단지 사마염의 성격에만 기인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진나라 황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황실의 권위 없음' 이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7] . 예를 들어 왕개와 석숭의 산호수 일화를 보더라도 값의 높고 낮음을 떠나 무려 '황제의 하사품' 을 고작 돈지랄 한번 하겠다고 고의로 때려부수고도 별 탈 없이 그냥 지나갔을 정도이다. 다른 왕조 같으면 황제의 하사품을 실수나 부주의로 잃어버리거나 파손해도 큰 죄이고, 하물며 일부러 때려부술 정도면 황제에 대한 불경, 불충이라고 당사자는 목이 날아가고 온 집안이 패가망신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이 정도까지 대놓고 황제의 권위를 무시해도 별 탈 없을 정도로 황제의 권위가 바닥을 친 상황에서 직언이라는 명분까지 가진 신하를 황제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처벌한다면? 일단 사마염에게 그정도까지 강력한 권력과 권위가 없었을 가능성도 높고, 설령 할 수 있어서 한다고 하더라도 '대놓고 자기를 무시하는 놈은 무서워서 가만 놔두고 나름 자기를 위해서 충언하는 놈은 만만하니까 귀에 거슬린다고 처벌하냐?' 고 병신 취급이나 받기 딱 좋은 일이다.
3.6.4. 기타
다만 사마염이 통일 과정을 주도해 실적을 쌓은 것 자체는 사실이다. 오를 병탄해서 삼국통일을 완수한 건 어디까지나 사마염이다. 보기에 따라선 '''중국 역대 통일 왕조 초대 황제 중 가장 천하를 거저먹은 케이스'''로 보이겠지만, 후세 남북조 시대가 진행된 경과를 보면 강동 지역 병탄이 그렇게까지 마냥 쉬운 일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그렇게 놀고먹는 순간에 있어서도 사마염은 병탄한 강동 지역의 행정,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 꽤나 신경을 쓰고 있었고, 이때 행한 행정경제적인 배려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후세들이 북조에게 대항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사마염이 이 부분까지 내팽개쳐두고 신경쓰지 않았다면 남조는 그렇게까지 오래 버틸 수가 없었을 개연성이 높다.[8]
다만 몇 가지 해프닝을 보면 사마염이 나름대로 리더십과 행정력, 위엄이 있었어도 책임감은 꽤 부족했다고밖엔 볼 수 없다. 동오의 대도독인 육손의 아들 육항이 죽자 그 틈을 노리자고 한 진나라의 충신 양호의 상소대로 일찍이 손오를 정벌했다면 280년이 아닌 몇 년 전에 달성을 했을 것이고, 양호의 상소대로 따르지 않았다면 천하 통일은 커녕 천하 통일 직후처럼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 밖에도 오나라 국경을 지키던 대사마 석포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의심해 전 군에 동원령을 내려서 석포를 잡아들이려 했다. 그러기 전 마지막으로 석포를 소환했는데, 이때 석포가 뜻 밖에 순순히 오자 석포의 관직을 사도로 올려버렸다는 미담도 있다.
3.6.5. 말년
그래도 사마염에게 가장 빛나는 군사적 승리가 없었던 것은 아닌데 그것은 독발수기능의 난이었다. 호열과 견홍이 서량 통치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진건의 간언을 씹어서 1차적인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으나 당시 무명에 불과했던 마륭의 호기로운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 후에도 신하들의 온갖 모함을 무시하며 끝까지 지지해서 독발수기능의 난을 동오 정벌 이전에 종결시킬 수 있었다. 진서 <마륭전>만 참조한다면 사마염은 아예 성군으로 보인다. 양호와 두예를 기용한 점도 그렇고 사마염은 적어도 능력과 재능은 있었다. 이 순간의 사마염이 꾸준히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심정이 들긴 한다.
통일 뒤에는 강동 지역에 대해 한 배려 외엔 완전히 마음을 놓아버려 후대가 고생하게 만든 경우다. 사마염은 그래도 능력이 있어서 황제 노릇은 제대로 하고 살았으며, 그 생전에는 서진이 막장 부패를 달렸어도 큰 문제는 없이 나라를 유지했다
4. 후세 학자의 평가
홍대용 평가의 마지막 줄은 제대로 핵심을 찌른 건데, 당시 서진의 상황으로 볼 때 이런저런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냥 사마염 수준정도는 되는 황제가 후대에 왕위에 올랐거나, 혹은 양준이 제대로 깡과 능력이 있는 권신이 되어서 반대자들을 적당히 찍어누르고 포섭해 가면서 혜제를 바지 황제로 만들고 전횡을 할 만한 정치력이 있었거나[9] , 아니면 사마염 유언에 맞도록 사마염 자신이 애시당초 위관과 사마량에게 힘을 좀 실어줬거나, 혹은 가남풍 대신 위관의 딸이 혜제의 황후가 되었거나 해서 가남풍이 설치지 못하게 했거나, 이도저도 아니었으면 가남풍이 사마휼을 죽인다는 선택지만 아니었어도 팔왕의 난이 영가의 난으로 이어질 정도로 서진이 개막장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점에서 사마충과 가남풍, 그리고 양준을 막지 못한 사마염의 처신은 서진 왕조의 아킬레스건이었던 것....진(晉) 나라 무제(武帝)가 주군(州郡)의 군병 제도를 없앤 것은 ‘무(武)는 억누르고 문(文)을 닦는다.’라는 뜻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왕(武王)의 덕이 없으면서 무왕의 사업을 본받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덕과 인(仁)을 쌓은 공이 없을뿐더러 음탕하고 시기하는 정사(政事)를 가지고 나라에 임했던 것이니, 그의 몸이 죽자 나라도 따라서 혼란해지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진 무제(晉武帝)는 혜제(惠帝)의 혼약(昏弱)함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교체시키지 않았고, 가후(賈后)의 악함에 대해서는 몰라서 폐위시키지 못했으며, 양준(楊駿)이 제 마음대로 정권을 뒤흔들었어도 물리치지 아니하였으니, 스스로 난을 끼친 것이라고 하겠다.
당장 팔왕의 난에서의 왕들 행보만 봐도 사마염의 아들인 장사왕 사마애나 성도왕 사마영, 혹은 회제 사마치 정도만 해도 대단한 능력자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국가가 어느정도 안정적일 때 사마염 수준의 통치력을 발휘할 수준의 인물은 되었으니[10] 황태자를 바꾸고자 하면 인물이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위관 정도면 보신주의자 기질이 있기는 해도 나라를 안정적으로 굴려가면서 혜제를 적당히 보필해 갈 수준은 되는 인물이었으니 가충이나 양준과는 비교할 수 없었고 사마량도 사마염의 아들로 황실에서 촌수도 꽤 높은 축에 들어갔던 데다, 성인군자는 아니어도[11] 다른 원로인 사마륜이나 사마융 수준의 찌질이나 병신은 아니었기 때문에 황족들을 어느 정도 컨트롤 할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장화나 배외, 하다못해 가남풍의 사촌오빠 가모 정도만 되어도 나라를 다스려 갈 능력과 사직을 보존할 수 있는 충성심 정도는 충분히 있는 인물들이어서 가남풍이 나대던 시절에도 나라가 그런대로 평온하게 굴러갈 수준은 만들어 놓은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하다못해 사마휼만 안 죽었어도 자기가 혜제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개싸움을 벌이는 일까진 없었을 테니 뭐...... 그냥 나라가 굴러는 가는 수준인 중기 이후의 후한같이[12] 통일 왕조가 그럭저럭 이어져 나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 한 일이었다. 저 IF가 죄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터지면서 영가의 난이란 비극이 생긴 것은 운이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저 중 몇가지는 충분히 사전에 예측 가능한 일이었던 데다가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이 사마염에게 충분히 있었으나 사마염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 결국 영가의 난은 사마염이 불러 온 인재라는 건 틀린 말이 아니다.
5. 번외: 부여와 재조지은
이리저리 까이는 사마염이지만 의외의 면모가 존재하는데, 바로 한국사에 재조지은을 행했다는 점이다. 부여가 모용외에게 털리자 호동이교위 선우영이 부여를 구하지 않았다고 파면하고, 모용외로부터 부여를 구하여 나라를 회복시켰으며, 사주(司州)·기주(冀州)의 2주에 명을 내려, 중국으로 인신매매 당한 부여인들을 속환시켰다. 자국에서의 암군이 한국에 재조지은을 행했다는 점에서 만력제와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夫餘國 在玄菟北千餘里, 南接鮮卑,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戶八萬, 有城邑宮室, 地宜五穀.
부여국은 현도 북쪽 1천여 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약수가 있으며, 땅의 둘레가 2천 리인데, 호(戶)는 8만이고, 성읍(城邑)과 궁실(宮室)이 있으며, 땅은 5곡에 마땅하다.
(중략)
武帝時, 頻來朝貢, 至太康六年, 爲慕容廆所襲破, 其王依慮自殺, 子弟走保沃沮. 帝爲下詔曰:「夫餘王世守忠孝, 爲惡虜所滅, 甚愍念之. 若其遺類足以復國者, 當爲之方計, 使得存立.」 有司奏護東夷校尉鮮于嬰不救夫餘, 失於機略. 詔免嬰, 以何龕代之.
무제(武帝) 때에 자주 와서 조공하였는데, 태강(太康) 6년(285) 때에 모용외(慕容廆)에게 습파(襲破)당한 바가 되어, 그 왕 의려(依慮)가 자살하였고, (의려의)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나 지켰다. 황제가 조를 내리기를, "부여왕은 세세로 충효를 지켜 왔는데, 못된 오랑캐들에게 멸망당한 바가 되었으니 심히 가엾게 생각한다. 만일 그 남은 무리 중에 족히 나라를 회복할 자라면, 마땅히 이를 위해 방계를 세우고, (나라를) 존립(存立)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부여를 구하지 않아 빠르게 대처함을 잃었다 하였다. (이에) 조를 내려 영을 파면하고, 하감(何龕)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明年, 夫餘後王依羅遣詣龕, 求率見人還復舊國, 仍請援. 龕上列, 遣督郵賈沈以兵送之. 廆又要之於路, 沈與戰, 大敗之, 廆衆退, 羅得復國. 爾後每爲廆掠其種人, 賣於中國. 帝愍之, 又發詔以官物贖還, 下司·冀二州, 禁市夫餘之口.
이듬해(286), 부여의 후왕(後王) 의라(依羅)가 감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금 남은 사람[見人]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옛 나라를 회복할 것을 구하며, 이에 (지원을) 청원하였다. 하감은 상열(上列)하고, 독우(督郵) 가심(賈沈)을 보내 군사로서 (부여 사람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모용외[廆] 또한 길에서 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하감과 더불어 싸웠다가 크게 패하였다. 모용외의 무리가 물러나자 의라는 다시 나라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에 늘 모영외가 그 종인(種人)들을 노략질하고는, 중국에 팔았다. 황제가 이를 가엾게 여기니, 또 조를 내려 관청의 재물로써 (팔려온 부여 사람들을) 속환하게 하였고, 사주(司州)·기주(冀州)의 2주에 명을 내려 부여의 인구의 거래를 금하였다.
진서 동이전 부여조[13]
6. 가족 관계
- 18남 7녀로 총 25인. 그러나 이 많은 자식들은 지들끼리 죽고 죽이면서 사마치와 사마안 둘만 남는다. 그리고 이마저도 영가의 난으로 몰살당했다.
- 이들 빼고도 역사에 기록한 첩은 10여 명이 더 있다. 또 못 기록한 수천여 명의 첩들도 있으며 이들은 모두 자녀가 없었다.
- 또한, 진나라에서 정상적인 권력을 누린 마지막 황제다(초대 겸 유일). 사마충은 가남풍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했고 팔왕의 난에 휩싸여 죽고 만다. 진 회제, 진 민제는 전조의 포로 신세가 되어 비참하게 죽는다. 진나라가 남쪽으로 이동한 후에 즉위한 진 원제는 왕돈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였다. 진 명제 때 황제권을 되찾는 것 같았지만 요절하고 이후 황제들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환온, 환현 같은 신하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효무제 때 잠시 황제권을 되찾는 듯 싶었으나 효무제가 어이없이 죽고 난 후 진 안제와 진 공제는 유유의 꼭두각시 신세가 되어 유유에 의해 살해당하고 결국 진나라는 멸망당한다. 그리고 진나라 황족들은 유유에 의해 거의 몰살당한다.
7. 미디어 믹스
- 사마염/기타 창작물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