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익선

 

尹益善
1872년 2월 13일 ~ 1946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


일제강점기의 교육인. 본관은 파평(坡平). 창씨명은 히라누마 에이치(平沼榮一).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냈고, 3.1 운동 이후 만주 등지에서 교육활동을 했다.

2. 생애


1872년 2월 13일,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온면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했고, 1896년에 농상공부 기사로 관계에 입문하여, 1903년 내부 광제원에서 판임관 6등의 주사를 지내는 등 관리로 근무했다.
1905년에는 보성전문학교 법률과에 1기로 입학하여 1907년 졸업하였으며, 졸업 후 보성전문학교 학감으로 있으면서, 육군법원 이사와 육군감옥장, 군부 군무국 군법과 이사를 역임하는 등 법률가로 잠시 활동하였다가, 보성전문학교장을 지냈다.
천도교의 신자로서 1919년 3.1 운동에도 적극 가담했다. 지하 신문인 '조선독립신문' 사장을 맡아, 이를 천도교 인쇄사인 보성소에서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3·1 운동 이후 발족한 임시정부 중 하나인 조선민국임시정부의 법무경으로 지명되기도 했다. 그러다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1920년 9월 출옥 후 1920년 11월에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인 경성도서관을 창립하였다. 그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간도 용정촌에서 간도동흥중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한인 자녀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청년들에게 혁명정신을 심어줌으로써 많은 혁명전사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1936년 이후로는 변절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히라누마 에이치(平沼榮一)로 창씨개명 한 것이야 으레 하던 일이지만 대동일진회에 교장으로 부임한 것은 빼박. 이로 인해 1962년 서훈되었던 건국훈장 국민장이 2010년 취소되었고, 묘역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소에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