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도라 덩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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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a Isadora Duncan, (1878년 5월 26일 ~ 1927년 9월 14일)
1. 생애
미국의 무용수. 1878년 5월 2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했다. 집안이 가난해 독학으로 무용을 시작하여, 뒤에 ‘자유 무용’이라는 독특한 무용을 창시했다. [1] 1895년 오거스터 데일리 극단에 들어갔고, 1898년 카네기 홀에서 에설버트 네빈의 음악인 『수선화』를 공연해 성공한 후 이듬해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이사도라는 박물관을 드나들며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스 석상들을 보며 영감을 얻은 그녀는 그리스 의상과 같이 줄 몇 개로 고정된 넝마를 입고 맨발로 춤을 췄다.
키 168cm로 당대 여성으로서는 상당히 키가 컸다.
1902년 유럽에서 선보인 공연이 큰 성공을 거둔 후 그녀는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1904년에는 러시아에서 공연을 했고 독일에 무용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1914년 프랑스에 무용학교를 세웠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무용학교를 야전병원으로 쓰게 하는 한편 1915년에는 『라 마르세예즈』에 맞춰 춤을 춰 반향을 얻었다.
1922년에는 소련 정부의 초청을 받고 소련에서 무용학교를 운영했는데, 이 때 25살의 젊은 천재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당시 덩컨은 44세여서 예세닌과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났고, 예세닌은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을 앓았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곧바로 구입하는 기벽이 있어 결혼 전부터 자주 다퉜다.[2] 결혼 후 덩컨이 미국에서 순회공연을 했을 때 예세닌도 따라갔는데, 예세닌의 기행 및 덩컨의 공연 복장 문제, 코멘트 문제 때문에 공산주의자라고 비난받았고[3]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는 프랑스를 거쳐 소련으로 돌아갔다. 그 동안 부부싸움이 심해진 끝에 결국 덩컨과 예세닌은 별거했다. [4]
예세닌과 사별한 후 덩컨은 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냈고, 자서전을 구술했으며 1927년에 니스 바닷가에서 자동차를 타고 달리다가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5] 가 뒷바퀴에 걸리는 바람에 향년 49세로 질식사로 숨졌다.
2. 영향
이사도라가 춤을 출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춤이라고 하면 발레를 연상했으나 이사도라는 틀에 박힌 발레 동작으로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녀는 토슈즈와 튀튀를 벗어던지고 좀 더 편한 옷차림과 맨발로 자유로운 몸짓을 보여줬다. 단 이사도라가 준비없이 무대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되려 음악에 걸맞는 몸짓과 옷 , 무대장치 같은 세세한 부분을 미리 꼼꼼하게 준비했고, 몸짓을 종이에 그려가며 춤에 대해 연구했다.
그 결과 그녀는 단순히 우아하게 팔을 들어올리는 것만으로도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모습을 연출할 수 있었다. 이사도라에서 시작한 현대무용은 무용 세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오늘날까지 자리잡을 수 있었다.
3. 기타
가정사가 대단히 불행했다. 전술한 남편 예세닌은 물론이고, 은행장인 그녀의 아버지는 덩컨이 어렸을 때 파산해 어머니와 이혼했다.[6] 덩컨은 1906년 독일에서 무대 감독 고든 크레이그와의 사이에 딸 데어도르를 얻고, 1910년 미국의 재력가 패리스 싱어와의 사이에 아들 패트릭을 얻었다.[7] 1913년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무대연습이 있던 덩컨은 먼저 자식들을 차를 태워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하필 차가 세느 강 근처에서 고장이 나 강으로 곤두박질치고, 1시간 반이 지난 뒤에 인양된 차에서 보모와 두 아이들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사도라는 세느 강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 뒤로 친자식은 없고, 대신 양녀가 있다고 한다.
4. 참고자료
- <나의 삶 My Life>: 덩컨이 1927년에 구술한 자서전. 2003년에 국내에서 '이사도라 던컨'으로 출간했으며 덩컨이 소련으로 떠나기 전 분량에서 끝난다. 소련행 이후 죽음까지의 분량은 부록으로 실렸다.
- <불멸의 여인들>: 김후. 청아출판사(2009) 중에서 두드려라, 열릴 것이니 - 혁명가 장의 덩컨 편.
- <불멸의 무용가들>: 이덕희. 작가정신(2000) 중에서 덩컨 관련 내용.[8]
- <무용의 역사>: 임인선. 스포츠북스(2010) 중에서 덩컨 관련 내용.
[1] 잠시 개인교습으로 발레를 배운 적은 있었지만 발레의 지나친 형식미를 싫어해 그만뒀다.[2] 평소에 결혼에 부정적이던 덩컨이 연하인 예세닌에게 반한 걸 두고 호사가들이 푼 썰이 많았는데, 그 중 하나는 예세닌의 외모가 프랑스 파리 세느 강에서 자동차 추락사고로 죽은 아들 패트릭이 큰 모습 같다고 생각한 덩컨이 반했다는 거였다.[3] 자서전 한국판 481~483페이지.[4] 예세닌은 1925년 12월 28일에 레닌그라드에서 손목을 긋고 자살했다. 예세닌은 말년에 레프 톨스토이의 손녀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톨스타야(1900~1955. 9번째 자녀 안드레이 르보비치의 딸.)와 결혼했으나, 법적으로 덩컨과 이혼하진 않은 상태였기에 소련 정부에서는 예세닌 사후에 덩컨을 상속인으로 지명했다(출처는 한국판 자서전 494~496페이지).[5] 그녀가 그날 맸던 스카프는 생전의 남편인 예세닌이 가장 좋아했던 스카프였다고 한다.[6] 사실 파산 외에도 아버지의 바람기가 심했다고 한다.[7] 그러나 두 남자 중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다.[8] 326~338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