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

 



'''Лев Толстой
'''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
''' 본명 '''
Гра́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1] (러시아어)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
''' 국적 '''
러시아 제국 [image]
''' 출생 '''
1828년 9월 9일
러시아 제국 툴라현 크라피브나군[2] 야스나야 폴랴나
(現 러시아 툴라주 쇼키노구 야스나야 폴랴나)
''' 사망 '''
1910년 11월 20일 (향년 82년 70일)
러시아 제국 랴잔현 라넨부르크군 아스타포보역
(現 러시아 리페츠크주 레프톨스토이구 레프 톨스토이역)
''' 직업 '''
소설가, 시인, 극작가, 철학자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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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 '''
러시아 툴라주 야스나야 폴랴나
''' 학력 '''
카잔 황립 대학교 (법학 / 중퇴)
''' 사조 '''
리얼리즘
''' 활동 기간 '''
1847년 – 1910년
''' 신체 '''
181cm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부모 '''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1794-1837)
어머니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볼콘스카야 (1790-1830)
''' 배우자 '''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톨스타야[38] (1862년 결혼)

1. 개요
2. 생애
2.1. 초기의 삶
2.2. 창작 전기
2.3. 회심(回心)
2.4. 후기 작품과 최후
3. 작품의 특징
3.1. 초기
3.2. 중기
3.3. 종교적 신념
3.4. 후기
4. 톨스토이의 조상
5.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
6. 평가
7. 톨스토이에 대한 말
8. 여담
9. 감상
10. 작품
10.1. 장편
10.2. 중단편
10.3. 사상
11.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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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실적인 소설의 거장이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 한 명인 러시아 작가."'''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러시아와 서양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대문호이자, 도덕적, 종교적 사색가이며 기독교적 아나키스트이다.

2. 생애



2.1. 초기의 삶


톨스토이는 1828년 러시아 제국 툴라현 크라피브나군에 위치한 톨스토이 가문 영지인 야스나야 폴랴나(Ясная Поляна)에서 태어났다. 그가 2세 때 어머니 마리야 볼콘스카야 여공작(Княжна Мария Николаевна Волконская)은 막내 여동생 마리야을 낳고 사망하여 '숙모'라고 부른 먼 친척 아주머니 밑에서 자랐다. 숙모라 불린 친척 타티야나 예르골스카야(Татья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Ергольская)는 어머니와 다름없어 톨스토이의 훗날 성장과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3] 사실 '숙모'는 아버지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으나, 자신보다 부유한 여성을 만나기 바라는 대인배 마음으로 청혼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아는 톨스토이의 생모와 관계가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톨스토이의 생모가 사망하자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가 다시 청혼하지만 아이들과의 사이가 어색해질까봐 다시 거절하고 대신 평생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런 가정사는 1836년경 아버지의 유품인 편지를 정리하다 톨스토이가 발견했다고 한다.
참고로 톨스토이의 막내 여동생 마리야는 '숙모'라 불린 타티야나 예르골스카야의 조카 발레리안 톨스토이 백작(Граф Валериан Петрович Толстой)[4]과 결혼한다.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는 9세 때 급사하여 큰 고모가 후견인이 되었다가 14세 때 큰고모도 사망하여 작은 고모가 후견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톨스토이 가문 형제들은 부모없이 서로 의지하는 사이였고 형제들과의 사이는 전부 좋았다고 한다. 특히 맏형인 니콜라이를 좋아했는데 맏형도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1844년에 외교관이 되려고 카잔 대학 동양어학과[5]에 입학했다가 다시 농민을 위해 일하려고 법학부로 전과하였다. 하지만 학업에 열의가 없고 자기 관심분야의 책만 보던 터라 수업태도 불량으로 유급했고 결국 자퇴한다. 1847년에 야스나야폴랴나로 돌아온 톨스토이는 위의 형 셋과 달리 당시 귀족들의 진로인 문관이 되거나 군인이 되거나 중에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고 농촌에 틀어박힌다.
이때 잠시 농촌생활에 열의를 가지고 농노들에게 교육이라든가 의료를 제공하고 온정적인 지주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농민들의 차가운 반응과 불신으로 실망하고 다시 도시로 나오게 된다. 이후 젊은 톨스토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학사 검정고시로 학사 학위는 따지만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상류사회의 사교계에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다. 어머니가 2살 때 죽어 일종의 컴플렉스를 가진 톨스토이는 성장하면서 여자에 집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거액의 도박 빚을 지는 등, 계속 무분별하게 살아가던 톨스토이는 그러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여 맏형 니콜라이가 복무하던 캅카스 전선으로 여행을 간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농노 제도 없이 사는 카자크들의 삶에 큰 관심을 가지고[6] 그들의 언어와 문화 풍속에 깊은 감명을 받는데, 여기서 쓴 글을 잡지에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러시아는 캅카스 지역을 병탄하기 위해 그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톨스토이는 호전적인 소수민족인 체첸인을 상대하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입대하여 당시 귀족들처럼 유년 군사학교나 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포병 하사관부터 시작하여 공을 세워 현지 임관한다. 복무 중 틈틈이 그의 성장기가 반영된 반자전적인 소설을 썼는데 《유년 시대(''Детство'')》(1852), 《소년 시대(''Отрочество'')》(1854), 《청년 시대(''Юность'')》(1857)[7]가 그것이다. 이때쯤부터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서려고 전역 신청을 했는데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전역이 거부당하고 크림 전쟁에도 참전한 톨스토이는 세바스토폴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공을 인정받아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고, 중위로도 진급한다. 이때부터 문필 생활을 시작하여, 1855년에는 세바스토폴 전투에 관한 짧은 글들을 잡지에 실었다. 이것이 《세바스토폴 이야기(''Севастопольские рассказы'')》이다. 이런 군 경험은 여러 작품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잔혹한 체험 때문에 톨스토이는 평화주의로 기울게 된다. 톨스토이는 1856년 군에서 제대하고 1857년부터 1861년까지 서유럽을 두 차례 여행했다. 그곳에서 교육 방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톨스토이는 영지로 돌아와 농민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열고 신문 《야스나야 폴랴나》를 발간해서 자신의 교육관을 설명했다.

2.2. 창작 전기


톨스토이는 30살이 넘어 겨우 아내를 맞이했는데, 아내로 고른 여자가 하필이면 18살밖에 안 된 친구의 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였다(당시 톨스토이는 34살). 어쨌든 나이차에 관계없이 톨스토이는 소피아와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 소피아의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은 톨스토이를 매료시켰고 그의 걸작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에 소피아를 모델로 한 주요 인물을 등장시키게 했다.
톨스토이는 1869년의 필생의 역작 <전쟁과 평화>를 완성시켰다. 나폴레옹 전쟁러시아 원정을 소재로 한 이 역사 소설에서 톨스토이는 실제로 특출난 사람이나 영웅(소설에서는 나폴레옹)은 역사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역사관을 내세우며 '위대한 사람'을 중요시하는 역사관을 강력히 부정해 뭇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7번이나 격전지를 답사하고 생존자들을 직접 찾아 인터뷰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전쟁과 평화>는 소련 시절에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공산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인원동원이 간편했기에[8] 보조출연자로 연인원 총 75만을 동원해 거대한 전투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이는 기네스북에도 오른 기록이다.[9]
톨스토이는 1875년부터 1877년까지 그의 두 번째 걸작 <안나 카레니나>를 연속물로 출간했다. 겉보기에는 단순히 불륜을 다룬 것 같아 보이는 이 소설은 1870년대의 귀족계급과 러시아의 사회, 도덕, 철학에 대한 문제,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들, 특히 간통에 대한 상류계급의 위선적인 태도와 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종교적 신념의 역할 등을 강하게 고찰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은 2007년 노턴출판사에서 조사한 영어권(!) 작가 125명이 선정한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뽑혔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보다는 안나 카레니나를 좋아했다고 한다.

2.3. 회심(回心)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있던 해에 톨스토이는 갑자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톨스토이는 도덕적 자기 점검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고통스런 물음을 <고백>(1879)라는 에세이에서 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정신적 위기와 함께 급격하게 변화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교회 사상을 발전시켜 <신의 왕국은 그대 안에 있다>(1894)라는 에세이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톨스토이는 그 에세이에서 어떤 폭력이나 무력의 사용은 해로운 것이며 폭력에는 비폭력으로 맞서야 하고 정부로 대표되는 무력이나 종교, 사유재산, 맹세 등 모든 형태의 강제적인 힘에 반대하는 사상을 펼쳤다. 이는 후세에 '톨스토이주의'라는 사상 형태로 발전되었다.
종교와 일치하는 삶에 강한 열정을 느낀 톨스토이는 거름통 들면서, '''나도 농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할 정도로 농민들의 생활을 동경했던지라 <인생론>, <참회록>을 저술하고 스스로 재산과 영지를 포기하고 스스로 농부처럼 일하는 금욕적인 삶을 선택했다.
부인 소피아는 농민으로 돌아가겠다는 톨스토이의 폭탄선언을 듣자 톨스토이와 대판 다투고 만다. 물론 톨스토이 개인에게 있어서는 분명 고뇌에 찬 결단이겠지만 이제껏 귀족으로 살아 온 소피아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고매한 이상이라 하더라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소작농들도 톨스토이에 동조하지 않고 되려 그를 비웃었다(...). 톨스토이는 1881년 이전에 쓴 모든 소설의 저작권을 소피아에게 양도했지만 소피아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에세이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해 회심하기 전에 쓴 모든 작품을 부정했다(!). 이 글에서 톨스토이는 모든 예술은 사람들의 윤리적인 교화를 도와 사람들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또한 예술이 가진 사상은 어떤 무지한 사람에게라도 전파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기준에 따라 톨스토이는 이전에 쓴 자신의 모든 작품들이 보통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헛된 목적으로 쓴 '귀족의 예술'이라고 흑역사 취급했다. 이 에세이는 러시아 문학계에 엄청난 파장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4. 후기 작품과 최후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을 시작으로 다시 소설 쓰기로 돌아갔다. 이 작품을 읽고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톨스토이는 동서양 최대의 작가"로 극찬한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찬미자는 나보코프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가 있다.
이때부터 러시아 민담과 설화에 관심을 가진 톨스토이는 민담 형식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들려줄 수 있는 <바보 이반>, 조이스가 세계문학이 아는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극찬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10]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등의 단편 소설들을 썼으며 국내에는 <톨스토이 단편선>으로 다른 톨스토이의 걸작들보다 더 널리 알려졌다.
다만 후기 톨스토이 작품들은 과학교회[11] 악마의 발명이라고 조롱하는 등의 서술로 인해 전기 작품들에 비해서 홀대밭는 경우가 많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부터 성욕이 비정상적으로 강했는데, 그 영향으로 노년에는 성적인 욕망을 비판하는 작품들을 쓰기도 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은 <크로이체르 소나타(1890)> 와 <악마(1889)>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 톨스토이는 섹스를 비정상적이고 불결한 행위로 비판하고, 인간이 성욕에서 해방되지 않는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상 낙원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주장한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와 <악마>는 둘 다 자신의 성욕을 절제하지 못한 주인공의 파멸로 끝난다. 둘 다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톨스토이 역시 젊은 시절 아내 소피아와 결혼식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를 마차 안에서 강간한 적이 있었고 결혼 후에는 하녀들이나 농부들과의 관계를 즐겼다. 섹스에 대한 그의 비판은 과거의 방탕했던 생활에 대한 고해성사이다.
한편 톨스토이는 사회 운동가들의 구명을 위한 자금 모금을 위해 장편소설 연재도 시작했는데 이 소설이 바로 톨스토이의 마지막 걸작인 <부활>이다.
이 사회운동가들이란 러시아 정교회의 분파인 두호보르파(Духоборы)로, 기독교적 평화주의에 근거한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며, 여호와의 증인 비슷하게 세속 정부와 교회의 권위를 거부해서 이단으로 몰렸다. 톨스토이는 두호보르파의 캐나다 이주 비용을 <부활>의 인세로 지원했고, 같은 시기에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라는 수필을 써서 비폭력주의를 주장하여 교회에 찍히고 만다. 두호보르파는 캐나다와 러시아 남부에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캐나다로 이주한 두호보르파 관련글
이후, 작중에 등장하는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 때문에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했다. 대문호에게 너무한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톨스토이의 비판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도 매우 수위가 강했다. 단편 <지옥의 패망과 부흥>에서 교회를 악마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하였고, <부활>에서는 성체성사를 마술이라고 조롱하였다. 때문에 정교회에서 파문하지 않는게 더 이상했다. 이런 면에서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인 도스토옙스키와 대비된다.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나 전 작품들을 고려하지 않고 '부활' 그대로의 작품만 본다면 절대 졸작이라 평할 수 없다. '''대귀족인 신분으로서 하층민들의 삶을 이해해가며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내용'''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어지간한 내공 아니고선 쓸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하지무라트(Хаджи-Мурат)'는 자신의 군복무 시절에 만난 아바르계 무슬림 전사, 하지무라드 훈자카사(ХӀажимурад Хунзахъаса, 1818년 ~ 1852년 5월 5일)의 이야기로, 톨스토이 최상의 작품에 속하며 해럴드 블룸에 의하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말년이 되면서 톨스토이와 부인 소피아와의 갈등은 점점 격해져만 갔다. 소피아는 특히 톨스토이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와 사이가 나빴다. 그 갈등의 근원이 톨스토이는 모든 저작권과 판매료를 사회에 환원하고자 했고 소피아는 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판 부부싸움을 벌인 이후 나이 80이 넘어가는 늘그막에 농민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막내딸 알렉산드라를 데리고 가출을 시도하였으나, 기차역인 아스타포보역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 아스타포보역은 톨스토이를 기리기 위해 1918년 '레프 톨스토이'역으로 개칭되었다. 이 역은 2014년 폐쇄되었지만 역사는 여전히 남아 있고, 이 역사에는 톨스토이가 사망한 시간인 6시 5분으로 맞춰진 시계가 있다고 한다.
1980년대 위인전에선 비참하게 겨울 날씨 역에서 동사했다고 나온 바 있었는데, 그건 아니고 역장 숙직실로 옮겨져 눕혀진 상태에서 다음의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다.

«Но крестьяне… Как умирают крестьяне?»('하지만 농민들... 농민들은 어떻게 죽지?')

자신의 작품 속에서는 농민들을 찬양하지만 정작 본인 스스로는 귀족의 삶을 살았던 톨스토이가, 드디어 농민으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이렇게 죽게 되었으니, 이를 한탄했다는 것. ''''내가 지금이라도 농민이 되겠다고 나왔는데 이리 죽게 생겼으니, 죽는 순간이라도 농민이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죽어야 농민으로 죽은 거라고 할 수 있는 거냐?'''' 라는 뜻. 죽어서라도 농민이고 싶었던 톨스토이의 한맺힌 심정이 담겨 있다. #1#2#3
여담으로 농민이고 싶었기 때문인 영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톨스토이의 무덤은 그의 위상답지 않게 묘비도 없이 매우 단촐하기 그지없다.#
그는 아내 소피아와 끝내 화해하지 않았고,[12] 죽기 직전 유언에 아내는 절대로 장례식장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당부했다. 그리고 소피아는 장례식조차 참석할 수 없었고 죽어서도 남편과 합장되지 못한 채 톨스토이 묘지에서 3km 떨어진 작은 시골마을 묘지에 묻혀야 했다.
82세에 폐렴으로 사망한 것과는 별개로 엄청나게 건강했고, 70세에도 젊은이와 다름없는 근력을 지녔다고 한다. 막내딸인 알렉산드라를 56세의 나이에 얻었으며, 막내아들인 이반을 얻은 것도 나이 60살 때 일이다. 다만 이반은 7살 때 병으로 죽고 만다.

3. 작품의 특징


톨스토이는 현실주의 소설의 대가로서, 그의 두 가지 장편인, 전쟁과 평화 및 안나 카레니나로 유명하며, 이 작품들은 통상 이제까지 쓰여진 가장 훌륭한 소설들로서 여겨지고 있다. 전쟁과 평화는 특히 사실상 많은 독자들과 비평가들을 위해 이런 형식을 정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톨스토이의 단편작들 중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 Illyich)은 보통 중편 소설의 가장 훌륭한 예들로 분류된다. 특히 그의 만년의 삼십 년 동안 톨스토이는 또한 도덕 및 종교 선생으로서 세상의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신조인 악에 대한 비폭력 저항은 간디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비록 톨스토이의 종교적 사상들이 더 이상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관심을 끌지는 못하지만, 그의 삶과 성격에 대한 흥미는, 무엇보다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관심이 증가되었다.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튜 아놀드는 톨스토의의 작품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삶의 파편이다 라고 말했다. 20세기의 러시아 작가인 아이삭 바벨은 논평하기를, 만일 세상이 스스로 글을 쓸 수 있다면, 톨스토이처럼 쓸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의식에 대한 지극히 작은 변화들도 관찰하며 신체의 미미한 움직임들도 기록하는 그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다른 소설가들은 의식의 한 가지 단일한 행위로서 묘사하는 것을, 톨스토이는 일련의 무한히 작은 단계로 그럴듯하게 쪼개어 나간다. 영국의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에 의하면, 그는 당연히 톨스토이를 "모든 소설가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여겼는데, 이와 같은 관찰력들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끌어내었으며, 그들은 "톨스토이가 우리들 위에 고정하고 있는 시선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만년의 톨스토이를 방문한 사람들 역시 그가 자신들의 내뱉지 않은 사상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때의 무척 불편함 느낌들을 이야기 하였다.  톨스토이를 그의 능력들에서 신처럼 그리고 인간의 조건들의 제약들을 탈피하려는 그의 투쟁들에서 거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톨스토이를 자연과 순수한 활력의 현신으로 보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를 세상의 양심의 화신으로 보았으나, 그를 알고 있는 또는 그의 작품들을 읽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는 단지 이제까지 생존하였던 가장 위대한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살아있는 상징이었다. 

3.1. 초기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서, 톨스토이는 유년시절을,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가 편집장인 유명한 잡지인, 소브레메니크 ("현대인")에서 출판하기 위해 기고하였다. 네크라소프는 열광하였으며, 익명으로 출판된 작품은 두루 칭찬 받았다. 다음 몇 년 동안 톨스토이는 캅카스에서의 자신의 경험들을 토대로 한 많은 이야기들을 출판하였으며, "Nabeg"(1853, "습격") 및 크리미아 전쟁 중의 세바스토폴 포위에 대한 세가지 스케치들 - "Sevastopol v dekabre mesyatse " ("12월의 세바스토폴"), "Sevastopol v maye " ("5월의 세바스토폴"), 그리고  "Sevastopol v avguste 1855 goda"  ("8월의 세바스토폴"; 모두 1855-56년에 출판되었음) - 이 포함되었다. 처음의 스케치는, 무명의 병사들의 용기를 다루었는데, 황제에 의해 칭찬 받았다. 마치 여행 안내처럼 2인칭으로 쓰여졌으며, 이 이야기는 역시 톨스토이의 엄격한 실험에 대한 예리한 관심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관찰함에 있어서의 도덕성에 관한 그의 평생의 관심을 증거해준다. 두 번째의 스케치는 폭격에 죽기  직전의 병사의 (이런 장치의 초기의 사용들 중의 하나인) 의식의 흐름을 담은 긴 구절을 포함한다. 이야기의 유명한 말미에서, 작가는, 그의 어느 등장인물도 진정으로 역사적이 아님을 언급한 뒤에, "나의 이야기의 영웅 은 진리이다"라고 단언한다. 독자들은 그 이후로 톨스토이의 그와 같이 "절대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에 주목을 해왔으며, 이 언어는 흔히 미학적으로 효과적인 현실주의적 소설문학을 붕괴시킨다.  
크리미아 전쟁 후에 톨스토이는 군대에서 물러났으며 제일 먼저 성 페테스부르크의 문학세계에서 환영 받았다. 그러나 그의 가시 돋친 자만심, 어떤 지적 진영에도 가입할 것에 대한 거부, 그리고 자신의 완전한 독립의 고집은 곧 급진적인 지식인들의 반감을 불러왔다. 그는 자신의 평생을 통하여 "의고주의자(擬古主義者)"로 있으면서, 지배적인 지적 경향들과 반목하였다. 1857년에 톨스토이는 파리를 여행하였으며 자신의 돈을 도박으로 날린 뒤에 돌아왔다. 러시아에 돌아 온 후에, 그는 자신의 진정한 소명은 교육이라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유지에 농민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교육 이론 및 실제를 공부하기 위하여 서부 유럽을 여행한 뒤에, 그는 12호의 잡지, Yasnaya Polyana (1862-63)를 발행하였으며, 이것들에는 그의 도발적인 논문들인 "Progress i opredeleniye obrazovaniya" ("진보 및 교육의 정의") - 여기서 역사가 어떤 내재적인 법칙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 , 그리고  "Komu u kogu uchitsya pisat, krestyanskim rebyatam u nas ili nam u krestyanskikh rebyat?" ("누가 누구의 작품을 읽어야만 하는가: 우리의 자녀들인 농부 아니면 농부의 자녀들인 우리?") - 여기서 문제에 대한 통상적인 답변을 뒤집는다 - 를 포함하였다. 톨스토이는 1862년 저명한 모스크바의 내과 의사의 딸인 소피야 (소냐)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하였으며, 곧 그의 모든 힘들을 그의 결혼 및 전쟁과 평화의 집필에 쏟았다. 톨스토이와 그의 아내는 13명의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들 중 10명이 유아기를 넘겼다.
1850년대와 1960년대의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자신의 도덕적 및 철학적 관심들을 표현하려는 새로운 형식들을 가지고 실험하였다. 유년시절에 이어서 그는 곧 Otrochestvo (1854; 소년시절) 그리고 Yunost (1857; 청년)을 추가하였다. 많은 이야기들이 유일한 반자서전적인 주인공인, 드미트리 네클루도프에 집중되어있으며, 그는 후일 톨스토이의 소설인 부활의 영웅으로 재등장하였다. "Lyutsern"(1857; "루선")에서, 톨스토이는 한 사건을 언급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서 시간을 초월한 의미를 숙고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의 명상들의 과정에 대해 숙고한다.  "Tri smerti" (1859; "세 사람의 죽음들")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없는 귀부인의 죽음, 죽음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한 농부, 그리고 그 철저한 자연의 목적이 인간의 기만과 대비되는 한 그루의 나무의 죽음들을 묘사한다. 오직 작가의 초월적인 의식만이 이들 세 사건들을 묶어 줄 뿐이다. "Kholstomer" (1863년 작; 1886년 개정 출판; "Kholstomer"; "말의 이야기")는 인기 있는 톨스토이적인 장치인  "어색함"의 극적인 사용으로 유명해졌다--, 즉, "친숙한 사회적 관습들을 당연히 여기지 않는 한 관찰자의 "순박한" 관점에서 시작되는 묘사이다. 독자들은 "Kholstomer"의 주인공이자 주된 화자가 늙은 말인 것을 발견하고는 충격 받았다. 무척 많은 톨스토이의 초기 작품들처럼, 이 이야기는 인간 사회의 기만과 인습성을 풍자하고 있으며, 이는 또한 톨스토이의 소설 카자키( (1863; 코사크 사람들)를 지배하였던 주제이다. 이 작품의 영웅인, 방탕하며 자기 중심적인 귀족, 드미트리 올레닌이,  캅카스에서 복무하기 위하여 장교로 입대한다. 코사크 사람들 안에서 살면서, 그는 자연과 생체 리듬들에 더욱 가까운 삶을 감사히 여기게 된다. 소설의 중심 장면에서, 올레닌은, 숲속에서 사냥하던 중에,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들은, 심지어 한 마리 모기라도, "바로 나 자신과 같이 단지 그렇게 별개의 드미트리 올레닌"인 것을 지각한다. 자신이 과거 삶의 헛됨을 깨닫고서, 그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한다.

3.2. 중기


행복하게 결혼하여 야스나야 폴리야나에 자신의 아내 그리고 가족과 안착한 뒤에, 톨스토이는 자신의 창의력들의 절정에 도달했다. 톨스토이는 1860년대의 나머지 해들을 전쟁과 평화의 집필에 쏟았다. 그리고 나서, 피터 대제 1세에 관한 소설을 쓸 것을 생각하였으며 잠시 교육(널리 사용된 독서용 초급 독본을 만들어 내었다)으로 돌아갔던 막간의 기간 뒤에, 톨스토이는 그의 또 하나의 위대한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하였다. 이들 두 작품들은 일상생활과 지루한 미덕의 이해에 뿌리를 둔 인간의 경험에 대한 환상을 공유한다.
전쟁과 평화는 세가지 자료들 - 나폴레옹 시기의 전쟁들에 관한 역사적인 해설, 허구적 인물들의 전기들, 그리고 역사의 철학에 관한 일단의 수필들 - 을 담고 있다. 1860 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비평가들은 어째서 이들 세 부분들이 밀착할 수 있는지 놀라고 있으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톨스토이가 장문의 수필들을 포함한 것을 트집잡고 있으나, 독자들은 줄어들지 않는 열정으로서 계속해서 그것들에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작품의 역사 관련 부분은 아우스터리츠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승리로 이끌고간 1805년의 전투, 평화의 시기, 그리고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서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정된 시각들과는 반대로, 톨스토이는 나폴레옹을 무능하며, 자기중심광적인 어릿광대로, 황제인 알렉산더 1세를 역사가들이 그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에 집착하는 공언가로, 그리고 러시아인 장군인 미카일 카투조프(이전에는 비난 받았다)를 인간의 의지와 계획의 한계들을 깨닫고 있는 참을성 있는 노인으로 묘사한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소설의 전쟁 장면들로서, 전투는 혼란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장군들은 그들이 "모든 부수적 사건들을 예측"할 수 있다고 상상할지 모르지만, 전쟁은 정말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에 의하여 순간에 결정되는 "수백만 가지의 다양한 우연들"의 결과이다. 인생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쟁에서는, 어떤 제도 또는 모델도 인간 행동의 무한한 복잡성에 대한 설명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소설책의 허구적 인물들 중에서, 독자들의 관심은은 제일 먼저 안드레이 볼콘스티 공작에 초점이 주어지는데, 그는 모든 것을 가짜이며, 천박하거나, 단순히 진부한 것으로 경멸해 온 거만한 사람이다. 상류 사회의 위선을 인정하면서, 그는 영광을 얻기 위하여 군대에 들어가며, 이것을 그는 진정으로 의미있는 것으로 여긴다. 아우스터리츠에서 심하게 부상당하고 나서, 그는 영광과 나폴레옹을 성 페테스부르크의 사교모임들 만큼이나 시시한 것으로 보게 된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안드레이 공작은  자신이 헌신하였던 활동들에 대하여 되풀이하여 공허함을 발견한다. 1812년 그이 죽음에 대한 톨스토이의 묘사는 흔히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효과적인 장면들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소설의 또 하나의 주인공은, 실수를 연발하며 성실한 피에르 베주코프로서, 모든 의문들을 해결할 것을 약속해 주는 어떤 철학적 체계에 대한 믿음과 그를 무감각한 절망으로 밀어 부칠 만큼 절대적인 상대성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는 적어도, 지혜는 체계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나날의 삶의 평범한 진행과정들에서 발견되어지도록 되어 있다는, 톨스토이적인 진리를 발견하며, 특별히 소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주인공인, 나타샤와 그의 결혼에서 그러하다. 책이 멈출 때에 - 사실 그것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그칠 뿐이다 - 피에르는 새로운 유토피아적 계획에 대한 그의 흥분으로 이런 교훈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흥미 없고, 일상적인 활동들이 삶을 유익하거나 악하게 만든다는 톨스토이의 사상과 관련하여, 책 속의 진정한 지혜 있는 인물들은 지식인들이 아니라 단순하며 점잖은 병사인 나타샤의 형제인, 니콜라이, 그리고 관대하며 신앙심이 깊은 여자인, 안드레이의 누이 마리아이다. 그들의 결혼은 소설의 중심적인 진부한 가치들을 상징한다. 전쟁과 평화에 들어 있는 수필들은, 책의 두 번째 중반부에서 시작하는데, 역사에 관한 일반 법칙들을 세우려 하는 모든 시도들을 풍자하며, 모든 역사적 서술들을 지지하는 무분별한 억측들을 거부한다. 톨스토이의 관점에서, 역사는, 전쟁처럼, 근본적으로 우연성의 산물이고, 아무런 방향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아무런 틀에도 들어 맞지 않는다.역사적 사건들의 원인들은 무한히 변하며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역사에 관한 서술은, 과거를 설명한다고 주장하지만, 필연적으로 그것을 왜곡하는 것이다. 역사적 기술들의 형태는 사건들의 사실적 과정이 아니라 이전의 역사적 서술들에 의해서 확립된 근본적으로 문학적인 기준들을 반영한다. 톨스토이의 수필들에 의하면, 역사가들도 역시 수많은 다른 긴밀히 연결된 오류들을 범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역사가 위대한 사람들 -장군들이거나 정치 지도자들이거나 또는 그들과 같은 지식인들 -의 계획들과 사상들로서 모양을 가지며 그 방향은 주요 결정들에 이르는 극적인 순간들에서 결정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사실상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비록 그들의 행동들이 문서화 되기에는 너무나 평범하지만, 취해지는 무수히 많은 작은 결정들의 총계에 의하여 만들어 진다. 톨스토이가 설명하듯이, 거대한 사건들이 역사를 만든다는 것은 오직 나무의 꼭대기들 만이 보이는 먼 지역의 시각으로부터 그 지역이 오로지 나무들만 포함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톨스토이의 소설은 그 독자들에게 제각기 조그만 영향을 행사하는 조그만 사건들의 무수한 예들을 준다 -- 바로 그것이 전쟁과 평화가 너무 길다는 한가지 이유이다. 평범한 것의 효용성과 제도 구축의 무용성에 대한 톨스토이의 신념은 그의 시대의 사상가들과 그를 대치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의 철학의 가장 논란이 되는 측면들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안나 카레니나(1875-77)에서 톨스토이는 이와 같은 사상들을 가족의 삶에 적용하였다. 소설의 첫 번째 문장은, 가정적인 관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마도 톨스토이의 가장 유명한: "모든 행복한 가정들은 서로 닮아 있다; 제각기 불행한 가정은 그 나름대로 불행하다"일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세 가정 - 오블론스키, 카레닌 및 레빈 - 의 이야기들을 엮어 간다. 소설은 오블론스키의 가정에서 시작되는데, 그곳에선 참을성 많은 돌리가 그녀의 다정하며 방탕한 남편 스티바의 부정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의 친절함, 그녀의 가족에 대한 애정 그리고 일상 생활에 대한 관심 안에서, 돌리는 소설 속의 도덕적 나침반으로 서게 된다. 대조적으로, 스티바는, 비록 결코 악을 바라진 않지만, 재산을 낭비하고, 자신의 가족을 등한시하며, 그리고 쾌락을 삶의 목적으로 여긴다. 스티바가 상징하는 것은 아마도 악은, 선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들이 매 순간마다 내리는 조그만 도덕적 선택들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암시하도록 구상된 것이다. 스티바의 누이인 안나는 뻣뻣하고, 현실적이지만, 다른 면에선 정부 각료인 알렉세이 카레닌의 아내로 그리고 어린 소년, 세리오자의 어머니로 소설을 시작한다. 그러나 안나는, 자신을 낭만적 소설의 주인공으로 상상하여서, 스스로 장교인 알렉세이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도록 한다. 그녀의 남편에게서 오직 최악 만을 보도록 훈련하고서, 그녀는 결국 브론스키와 살기 위해 그와 그녀의 아들을 떠난다. 소설 전체를 통하여, 톨스토이는 사랑에 대한 낭만적 생각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사랑 그 자체인 것으로 동일시하는데, 우월한 종류의 사랑, 즉, 훌륭한 가정들의 편안한 사랑과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음을 가리키고 있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안나는, 그녀의 남편과 자식을 버린 데 대한 양심의 고통을 겪으며, 거의 미친 상태에 그리고 현실과의 완전한 격리에 이를 때까지 스스로를 속이는 습관을 발전시킨다. 그녀는 마침내 기차 밑으로 뛰어들면서 자살을 하고 만다. 그녀가 삶에 대해 틀리게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자각은 오직 그녀가 철길 위에 누워 있을 때 그녀에게 다가오고,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다. 세 번째의 이야기는 돌리의 누이인 키티와 관련한 것으로, 그녀는 처음에 자신이 브론스키를 사랑한다고 상상하지만 그때 진정한 사랑은 그녀의 가정의 오랜 친구인, 콘스탄틴 레빈에 대해 가진 편안한 느낌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구애, 결혼, 그리고 가정의 삶의 평범한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며, 그들은, 많은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행복과 의미 있는 존재를 다듬어 나간다. 소설 전체를 통하여, 레빈은 죽음에 직면하는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의문들에 의해서 고통 받는다. 비록 이런 의문들은 결코 답을 엊지 못하지만, 그것들은, 레빈이 자신의 가정과 일상의 일에 전념하면서 올바르게 살기 시작할 때, 사라진다. 그를 창조한 톨스토이처럼, 레빈은 지식인들의 체계들을 위선이며 삶의 복잡함을 껴안을 수 없다고 여긴다.
전쟁과 평화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는 공히 윤리학은 특정한 상황들에 적용되는 시간을 초월한 원칙들의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사상을 전개한다. 오히려, 윤리학은 감수성에 의존하며, 평생을 통하여, 특정한 사람들에게로 그리고 특정한 상황들로 발전된다. 톨스토이의 추상성들에 대한 특수성의 선호는 종종 그의 사상의 특성으로 묘사한다.

3.3. 종교적 신념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하자마자, 톨스토이는 깊은 존재적 절망감에 빠지며,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Ispoved (1884; 나의 고백)에서 묘사하고 있다. 죽음을 맞이할 때에 모든 활동은 철저히 의미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보통 사람들의 신앙에 감명을 받고서, 종교에 귀의하였다. 처음엔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러시아 정교에 몰두하였으나, 그는 신속히, 그것과 모든 다른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교를 속속들이 왜곡한 부패한 단체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믿은 것이 그리스도의 메시지임을 발견하고서 그리고 죽음에 대한 무기력한 두려움을 극복한 뒤에, 톨스토이는 자신의 삶의 나머지를 그의 새로운 신앙을 발전시키며 전파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1880년대 초기에 그는 세편의 긴밀히 연관된 작품들, Issledovaniye dogmaticheskogo bogosloviya (1880년에 집필; 교리적 신학의 연구), Soyedineniye i perevod chetyrokh yevangeliy (1881년에 집필; 4 복음서의 합일과 해석), 및 V chyom moya vera? ( 1884년에 집필; 나는 무엇을 믿는가)을 집필하였다; 그는 후일 Tsarstvo bozhiye vnutri vas (1893;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및 많은 다른 논문들 및 소 논문들을 집필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톨스토이는 모든 성례들, 모든 기적들, 삼위 일체, 영혼 불멸 및 많은 다른 전통적 종교의 강령들을 거부하였으며, 그는 그 모든 것들을, 특별히, 산상 설교에 담겨있는 그리스도의 참된 메시지를 흐리게 하는 것들이라고 여겼다. 그는 구약성서 및 많은 부분의 신약성서를 거부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그리스어를 연구한 뒤에 자기 자신의 "교정된" 복음서 버전을 창작한 이유이다. 톨스토이에게 있어서 그가 일컫는 바, "예수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오직 삶에 대한 진실한 설명에 도달한 현명한 사람이었다. 톨스토이의 종교적 의례의 거부는 안나 카레니나에서의 자신의 경향과 두드러지게 대조되는데, 그곳에서 종교는 교리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일상적 삶의 전통적인 형태들로서 보여지고 있다. 1901년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 당하였다.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톨스토이의 과거 수십년 간의 그리스도교는 다섯 가지 신조를 강조하였다: 화를 내지 말라, 정욕을 갖지 말라, 맹세를 하지 말라, 악에 저항하지 말라, 그리고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악에 대한 무저항은, 간디에게 영감 준 교리로서, 악이 반드시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한 방법, 특히 폭력으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톨스토이는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정부가 그들의 법률을 집행하기 위하여 폭력의 위협에 의존하기 때문에, 톨스토이는 일종의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병역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투표나 법정에 호소함을 삼가라고 권고했다. 그는 그러므로 자신의 유언을 작성하거나 심지어 유익한 사업들에도 저작권에 의하여 확보된 로열티들을 사용할 때에 상당한 내적인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톨스토이는 자신의 가르침에 따라서 사는 것에 성공하지 못하였음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톨스토이는 (약속들을 포함하여) 맹세들에 반대하는 명령을 자신의 초기 작품으로부터 각색한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미래를 아는 것의 불가능성 그러므로 사전에 스스로를 구속하는 위험이 그것이었다. 정욕에 반대하는 계명은 결국 그로 하여금 완전한 금욕을 이상으로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는 남자에 관한 어두운 중편소설인 그의 Kreytserova sonata [1891; 크로이체 소나타]에 대한 후기에서 )제안하도록 이끌었다. 그의 아내는, 이미 그들의 억지스런 관계들에 걱정하면서, 거부하였다. 그의 가장 극단적인 사상들을 수호하기 위하여, 톨스토이는 그리스도교를 정지해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지니게 되는 등불과 비유하였다; 그것은 인류가 영적으로 진보함에 따라서 언제나 새로운 도덕적 영역들을 밝히며 언제나 더 높은 이상들을 드러낸다.  

3.4. 후기


안나 카레니나 이후의 톨스토이의 소설문학은 두 가지 그룹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을 위해 많은 도덕적 이야기들을 썼는데,  "Gde lyubov, tam i bog" (1885년 기록;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다"), "Chem lyudi zhivy" (1882년 기록;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리고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가 "세계의 문학이 아는 한 가장 훌륭한 이야기"라고 다소 지나치게 칭찬하였던,  "Mnogo li cheloveku zemli nuzhno" (1885년 기록; "사람은 얼마나 많은 토지가 필요한가") 등이다. 교육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톨스토이는 현실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교훈적인 소설을 썼다. 이들 작품들 중 일부는 멋지게 성공하였으며, 특히 Smert Ivana Ilicha (1886년 기록; 이반 일리치의 죽음)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으며 자신의 삶이 사소한 것들에 낭비되었음을 점차 깨닫는 어떤 사람을 묘사하는 중편소설이다. Otets Sergy (1898에 작성; 신부 세르지오스)는, 톨스토이의 자아 비판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으로, 성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성자는 의식적으로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오만한 사람의 이야기를 말해 준다. 거대한 성인으로 여겨지지만, 세르지오스는 자신의 명성이 근거 없음을 깨닫게 된다; 꿈으로 경고를 받고서, 그가 어릴 때부터 알아 왔던 소박하며 기품 있는 여자를 찾기 위해 몰래 탈출한다. 마침내 그는 그가 아니라 그녀가 성자이며, 참된 성자는 자기 자신의 일상적인 선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임을 깨닫게 된다. 이 이야기는 그러므로 톨스토이가 그의 초기의 위대한 소설들의 시각으로부터 자신의 개종 후에 옹호하던 사상들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1899년 톨스토이는 그의 세 번째로 긴 소설인, Voskreseniye (부활)을 출판하였다; 그는 로열티를 박해 받던 종교적 분파인, 두호보르의 캐나다로의 이주를 지불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소설의 주인공,  나태한 귀족인 드미트리 네클루도프로는, 배심원으로 나갔다가 피고를 알아보는데, 창녀인 카추사 마슬로바를 한 여성으로서 그가 과거에 유혹한 적이 있었으며, 그리하여 그녀를 범죄적 삶으로 내몬 것이었다. 그녀가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 받은 후에, 그는 그녀를 따라가기로 그리고, 만일 그녀가 동의한다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소설의 가장 주목할 만한 대화에서, 그녀는 그의 위선에 대해 비난한다: 과거에 당신은 나로부터 쾌락을 찾았으며, 이제 당신은 나로부터 구원을 얻으려 하는군요, 그녀는 그에게 말한다. 그녀는 그와 결혼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소설이 끝나가면서, 네클루도프는, 마침내 그가 톨스토이적인 진리들을, 특히 다른 사람들을 판단함에 대한 어리석음을, 이해하면서 영적인 각성을 성취한다. 소설의 가장 유명한 장들이 교회와 법률 제도를 풍자하고 있다. 톨스토이의 개종은 그에게 예술에 관한 한 권의 책과 여러 편의 논문들을 쓰도록 하였다. 때때로 그는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그가 언제나 주장하던 사상들을 표현하였지만, 또한 때때로 그는 자기 자신의 초기 소설들과 양립하지 않는 사상들을 지지하였으며, 초기의 것들을 거부하였다.  Chto takoye iskusstvo? (1898; 예술은 무엇인가?)에서 그는 참된 예술은 특정한 경험에, 즉 명제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염"에 의해서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매우 구체적인 느낌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요구한다고 주장하였다. 톨스토이의 시각에서, 높은 예술성을 가진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실제적 경험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기존 예술의 영리한 모방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들은 그러므로 사실상 전혀 예술이 아닌 "위조된" 작품들이다. 톨스토이는 더욱이 참된 예술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며, 이는 주어진 작품들이 청중을 물들이는 도덕적 감각력에 달려있다. 대부분의 인정된 대작들을, 쉐익스피어의 희곡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위대한 소설들을 포함하여, 모조이거나 악하다고 비난하면서, 톨스토이는 칭송의 목적으로 성서의 요셉 이야기 그리고, 러시아인의 작품들 중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은 자의 집] 그리고 그의 젊은 친구인 안톤 체호프의 일부 이야기들을 선별하였다. 그러나 그는 체호프의 드라마에는 냉담하였으며, 어느 유명한 재담에서 한번은 체호프에게 그의 희곡이 셰익스피어의 것들 보다 훨씬 조잡하다고 말했다.
톨스토이의 만년의 작품들에는 또한 풍자극 Zhivoy trup (1900년 작; 살아있는 시체), 그리고 농부의 삶에 대한 비참한 희곡, Vlast tmy (1886년 작; 어둠의 힘)을 포함한다. 그의 사후에, 수많은 출판되지 않았던 작품들이 빛을 보게 되었으며, 가장 주목받는 것은 중편 소설 Khadji-Murat (1904; 하지무라트)로서, 톨스토이의 초기 소설을 연상케 하는 캅카스에 대한 훌륭한 작품이다.

4. 톨스토이의 조상



앞서 전쟁과 평화 떡밥과 관련하여 쿠투조프가 톨스토이 가문 조상설(?)까지 돌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쿠투조프는 딸만 5명을 남기고 외손자 마트베이 표도로비치 톨스토이(П. М. Толстой,Matvei Fyodorovich Tolstoi)가 물려받았다 해서 레프 톨스토이는 쿠투조프의 외증손이고(?) 전쟁과 평화에서 조상빨로 실제이상 후빨 했다는 음모론(?)까지 있는데, '''결론부터 쓰자면 쿠투조프는 레프 톨스토이의 조상이 아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할머니는 고르차코바 공작 가문 출신 펠레게야 니콜라예브나 톨스토야 백작부인이지 쿠투조프의 딸 파라스코비아가 아니다...
톨스토이 가문은 14세기 발트지역 리투아니아에서 발원한 귀족가문으로 꽤 후손이 많은 편이고#[13]쿠투조프의 진짜(?) 외증손은 이반 이바노비치 톨스토이 백작(Ivan Ivanovich Tolstoy: 1858~1916)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14]
레프 톨스토이 직계 조상의 간략한 가문 역사를 쓰자면 17세기 러시아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시절부터 톨스토이 가문은 궁내관, 궁정고관 군인 등을 지냈고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시절 레프 톨스토이의 현조부 표트르 안드레예비치 톨스토이가 여러 활약[15]으로 백작 작위를 획득하고, 가문의 중시조급 조상이 되었다. 이후 예카테리나 1세를 옹립하는데 공신이 되었고 2년 만에 사망하자 이반 5세의 후손 안나 이바노브나가 등극해서 고조부 이반 페트로비치와 나란히 체포되어 작위와 재산이 박탈되고 이반 페트로비치는 현조부보다 빨리 병사하여 가문의 위기였지만, 증조부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시절 엘리자베타 여제가 즉위하며 작위와 재산이 복구되었고, 조부 일리야 안드레비치는 해군장교와 근위병으로 활약하고 준장으로 퇴역했다.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는 조부의 외아들이며 두 여동생이 있는데 1812년 전쟁에 참여했고 파리까지 전투에 참여하여 훈장을 얻었고 중령 퇴직 후 카잔 주지사를 지냈다.
톨스토이의 외가 볼콘스키 공작가문[16]은 톨스토이의 친가보다 더 명문가이다. 가문의 기원은 7~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류리크비치 가문과 체르니고프스키 가문의 후손으로 러시아 전통 귀족 중에서도 성골급으로 치는 초명문가이다. 볼콘스키 가문의 성은 과거 영지의 볼콘카 강에서 유래하여 13세기부터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톨스토이가 물려받는 야스나야 폴라냐는 외증조부 육군소장을 지낸 '세르게이 표트르비치 볼콘스키 공작'이 구입하였으며, 외조부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는 예카테리나 2세 시절 고관을 지냈다가 좌천되어[17] 영지에 정착했고 외동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볼콘스카야를 낳았다. 딸이 2세때 아내가 사망하였지만 평생 재혼하지 않고 딸 하나만을 열심히 길렀다고 한다. 톨스토이의 외조부는 당시 러시아 귀족과 달리 상당한 지식인이라서 프랑스 문화와 볼테르에 관심이 많았고, 어머니 마리야에게 불어, 독어, 이탈리아어, 영어에 수학, 물리학, 경제학까지 가르치고 자신은 식물과 원예 연구를 하면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어머니 마리야는 외조부가 죽고 얼마 후에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를 만나 결혼하고 톨스토이 가문은 외가 재산을 몽땅 물려받아서 떼부자가 되었다.

5.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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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도 명문 귀족이었던 톨스토이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영지는 야스나야 폴랴나(Ясная Поляна - 밝은 숲의 빈터)라고 불린다. 모스크바에서 남방 200km 떨어져 있는 툴라 시의 근교에 있다. 외조부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볼콘스키 공작의 영지로 외동딸인 그의 어머니 마리야 니콜라예브나가 물려받고 아버지와 결혼한 후 이곳에 정착했다. 백작 작위를 가졌던[18] 톨스토이는 장년기 이후 이곳에 정주하며 작품 활동을 했고, 자신의 자택을 이용하여 학교를 만들어 소작농들의 자식을 가르쳤다. 이 저택은 작은 도서관도 딸려 있는데, 장서수는 2만 권을 넘는다고. 톨옹이 사망한 후에는 이 영지 내의 묘지에 묻혔다.
톨스토이가 사망한 후, 미망인 소피아는 정부에 이곳을 국가가 관리해 줄 것을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 1917년 집권한 공산 정부는 집권한 후 바로 이곳을 사적지로 지정하고 국가가 관리했다. 1919년 소피아가 75세로 세상을 떠나자 이곳의 관리를 톨스토이의 막내딸 알렉산드라에게 맡겼는데, 그녀는 공산 정부가 싫어서 이후 해외로 망명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모두 9남 4녀(다만 이 중 4남 1녀는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다)를 얻었을 만큼 자손이 많았으므로 다른 자손들 중 한 명씩을 골라서 관리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후 큰아들 세르게이를 제외한 톨스토이의 자식들은 모두 소련을 떠나 타국으로 망명했다.
큰 아들인 세르게이는 작곡가, 둘째 아들인 일리야 르보비치는 작가, 셋째 아들인 레브 르보비치도 작가, 조각가가 되었다. 알렉산드라는 미국으로 귀화하여 미국에서 톨스토이 재단을 세우고 톨스토이 책자를 냈는데 1979년 95세라는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이 영지는 독일군에게 접수되고 자택은 독일군의 야전병원으로, 그가 남긴 원고들은 독일군의 땔감이 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 더구나 독일군의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톨스토이 묘지 옆에 줄줄히 전사한 자군 병사들의 무덤을 썼으니...
그 당시 톨스토이의 자택을 접수했던 부대를 지휘한 독일군 지휘관 하인츠 구데리안은 자서전 "기계화부대장"에서 자기는 대문호의 저택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땔감설은 소련의 모략선전이라고 주장했다. 근데 소련의 선전선동 못지 않게 구데리안의 자서전도 자기 변명이 꽤 많아서 진실은 저 너머에.
어쨌든 독소전쟁이 끝나고 나서 독일군이 톨스토이의 저택에 저지른 여러 만행들은 모두 원상복귀되었고, 현재는 2차 대전 이전의 상태로 보존되어 공개되고 있다.

6. 평가



전세계 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소설가로 평가받는다.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26명의 서양 문학 정전(Western Canon)’[19]의 그를 포함시켰다.# 작가들의 작가라는 위상을 지녔는데 2007년 126명이 유명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책을 뽑았는데 그의 작품인 안나 카레니나는 1위, 전쟁과 평화는 3위에 뽑혔다. 가장 많은 포인트를 얻은 작가에서도 1위를 기록했다. 2위 윌리엄 셰익스피어, 3위 제임스 조이스, 4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5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6위 윌리엄 포크너, 7위 찰스 디킨스, 8위 안톤 체호프, 9위 귀스타브 플로베르[20], 10위 제인 오스틴이다.#
제정 러시아붕괴되고 소련이 건국된 이후에도 톨스토이는 제국시대의 귀족 출신 문호였음에도 오히려 더 높이 평가받는 기묘한 현상이 생겼다. 톨스토이가 특히 소련 체제에서 높이 평가받은 이유에는 농민의 현실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이 공산 세력의 '프롤레타리아 정신'과 연결된다는 점도 있었다. 한 예로 블라디미르 레닌은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다만 톨스토이만 이런 높은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고 러시아의 문학 애호 경향은 소련에서도 유유히 이어져서 알렉산드르 푸시킨, 니콜라이 고골, 안톤 체호프 등의 대부분의 문호들은 소련에서도 존경을 받았다.
소련에서는 (적어도 문학에서 만큼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같은 대대적인 문화탄압이나 과거부정은 벌어지지 않았고, 그저 구체제적 경향이 농후한 작가들이 개별적으로 비판받은 정도였다.[21] 평가 절하된 인물은 혁명 운동을 악령으로 디스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정도이고 평가절하되었지만 천하의 소련도 차마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성은 부정하지는 않았다. 죄와 벌을 비롯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금지되지 않았고 스탈린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개인적으로 좋아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근거로 독소전쟁에서 소련군의 보복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도 흐루쇼프 시절에 복권되었다. 오히려 러시아 문학의 전통은, 막심 고리키, 알렉산드르 헤르첸, 투르게네프 등의 작품을 유년 시절부터 읽고 열광하며 혁명과 인민 해방의 꿈을 꾸며 자라 결국 나라를 얻게 된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볼셰비키의 지도자들을 통해 소련 체제의 성립과 연결되었다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이다.
2차 대전 이후 동독에서도 보인 특성이지만, 제정 러시아의 문필가들은 정치성만으로 목숨이나 경력, 명성을 날려 버리기에는 볼셰비키 혁명가-지도자들에게 당장 감정적인 차원에서부터 너무 큰 존재였다. 후에도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저자 미하일 불가코프,[22] 돈 강은 흐른다의 미하일 숄로호프 등 적지 않은 작가들이 소련의 공포 정치가 극에 달했던 시점에서 반체제 작품을 기고했음에도 목숨을 연명했을 정도다.
제정시대 리얼리즘과 소비에트 시절의 문학이 단절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지나치게 단순한 주장이다. 이는 마치 일제시대임화의 이식문학론과 유사한, 문화변동에 대한 극단론이다. 아무리 정치체제가 바뀌었어도 살아있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문학이라는 것이 금세 단절되고 새로 사조를 만드는건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에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제정시대의 문학에 매우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굳이 단절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예를 들어, 막심 고리키가 제정시대에 쓴 작품들은 소비에트 리얼리즘의 원형이 되었고, 소련시절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하일 숄로호프의 작품들조차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현대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재창조했다고 극찬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소련 성립 후 문맹이 퇴치되고, 의무교육이 실시되면서 19세기 대가들의 작품이 지식층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폭넓게 읽혔으며, 제정말기에 정점에 이른 19세기 문학은 소련시절 이념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문학이나 비평에 영향을 끼쳤다.
문학에 있어서만큼은 직접적으로 솔제니친과 같이 체제를 '''명시적으로''' 디스하지 않는 이상 작가가 탄압받은 적은 거의 없다.[23] 소비에트 시절은 이념적 압박은 있었지만 오히려 제정시절에 비하면, 물질적으로는 작가들이 훨씬 우대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문학성을 인정받아 작가동맹의 회원이 되면, 사회주의 경제하에서 배급에 우선권을 얻거나 집필을 위한 유급휴가를 얻는 등, 여러가지로 우대를 받았다. 또한 소비에트 시절을 잘 모르는 서방의 평론가들은 소련에는 질낮은 프로파간다 소설이 판쳤을 것이라고 으례 짐작하곤 하지만, 제정문학의 적자를 자처하는 작가동맹에 가입하려면 당이 아니라 이런 동업자들의 엄격한 평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말하자면 예전에 한국에서 등단하려면 중앙일간지의 신춘문예를 통과하고 기존 작가의 추천을 받아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된다), 이념의 압박을 강하게 받던 소비에트 문학에도 미학적 고려는 빠질 수가 없었다. 작가동맹에서 축출된 반체제 작가들이 이런 혜택을 못받고 번역 등의 잡일을 하며 입에 풀칠을 한건 사실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극소수의 베스트셀러 작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가도 사실 마찬가지 처지 아닌가?
물론 솔제니친과 같은 반체제적 작가들은 작가동맹에서 파문당하고 의사 지바고처럼 체제 자체를 비판하는 소설은 출간이 철저히 금지된 건 사실이고, 일반 출판물에서도 반체제적인 요소들은 검열 때문에 걸러진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 전부가 탄압받은 것도 아니며, 반체제 작가들이 숨어서 작품활동을 아주 못한 것도 아니다. 사미즈닷(самиздат)이라는 지하출판물은 익명으로 계속 돌고 있었으며, 작가동맹에서 배제된 반체제작가들이 지하로 숨은 건 맞지만 아주 박멸된 건 아니다. 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경우도 다른 방면에서 활약했던 반체제 인사들에 비하면 훨씬 더 온건하게 처벌받은 편에 속한다.[24] 게다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소련에서는 SF 소설과 역사소설 장르가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SF의 경우 주로 흥미 위주의 싸구려 양판소물이었던 동시대 미국의 SF보다는 훨씬 문학성이 뛰어나고 SF의 선구로 평가받고 있다.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바로 톨스토이의 친척인 알렉세이 톨스토이.
오히려 소련체제가 붕괴되고 나서 정말로 러시아에서의 순수문학은 씨가 말랐으며, 출판계는 붕괴되었고, 서적은 출판부수나 출판종류 모두 줄어들었다. 예전에 작가들은 문학교사 등의 일자리를 쉽게 얻을 수 있었으나, 현재는 일자리 자체가 줄어든데다가 출판이 막혀있기 때문에 입에 풀칠하기도 급급한 실정이다. 예전에는 반체제작가만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다면,[25] 현재는 대부분의 작가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러시아 공화국의 블라디미르 푸틴 집권 후에는 정책적으로 "푸"대접을 받는 듯. 톨스토이 사망 100주년인 2010년에도 아무 행사도 없었다고 한다. 되려 해외에서 더 화제였고 한국에서도 사망 100주기 기념이라고 행사를 가지고 그에 대한 책자나 완역판이 홍보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2010년은 공교롭게도 체호프의 탄생 150주년 기념해였는데, 체호프에 대한 행사는 성대히 열린 반면 톨스토이에 대한 행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체첸과 같은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책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가 톨스토이의 평화주의를 부담스럽게 느꼈다는 설이 유력하다.[26] 게다가 톨스토이는 현재 국교의 레벨로 재등극한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한 인물이다.
하지만 여전히 교과목에 그의 작품이 여전히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그의 후손들 중 잘나가는 인사도 있기에 정책적으로 그렇다쳐도, 여전히 러시아인들에게 거장 작가로 존경받는 그를 마냥 푸대접받는다고 보기엔 좀 그렇다. 그의 후손 중 한명인 볼리마디르 톨스토이는 박물관을 운영하고 동시에 푸틴 정부하에서 문화 고문직을 맡는 등 제법 잘나가고 있고, 표트르 톨스토이는 아예 러시아 채널1의 메인뉴스 프로그램인 브레먀를 7년 정도 진행한 유명 방송인이다. 톨스토이 직계 후손만 약 400명...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약 중
그리고 무엇보다도, 2016년 러시아 여론 조사 결과에선 도스토옙스키나 푸시킨, 고리키, 체호프, 고골리같은 역시 걸작 작가들로 부족함없는 다른 러시아 작가들을 제치고 역대 러시아 최고 작가로 톨스토이가 꼽혔다. 톨스토이는 여전히 러시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한명이라는 증거다.

7. 톨스토이에 대한 말


우리는 톨스토이에 관한 책들만으로도 도서관 하나를 꽉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볼테르와 괴테 이래로 그토록 오랜 기간에 걸쳐 그런 명성을 누린 작가가 없었던 것이다.

― 얀코 라브린


톨스토이는 하나의 세계이자 인간이며, 톨스토이를 읽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문화인이라고 할 수 없고, 러시아를 아는 인간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

막심 고리키


그는 러시아의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용감했으나 야성적이었고 완고했으며 어린아이 같았다.

막심 고리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19세기 전소설계에 군림하는 거대한 기념탑이자 근대의 <일리아스>이며, 그 구성으로 보아 아마 오늘날까지 쓰인 작품 가운데서 최대의 군중소설이며 서사시일 것이다.

― 로맹 롤랑


모든 소설가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톨스토이는 가장 위대한 소설가이다. <전쟁과 평화>의 작가를 그 외에 뭐라 부를 수 있겠는가?

버지니아 울프


톨스토이의 <사람은 얼마나 많은 토지가 필요한가?>는 세계의 문학이 아는 한 가장 훌륭한 이야기이다.

제임스 조이스


나는 서슴없이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문학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회 소설이라고 단정하고 싶다.

토마스 만


만일 세상이 스스로 글을 쓸 수 있다면, 톨스토이처럼 쓸 것이다.

― 이사크 바벨


이 세상에서 단 한 권의 책만 가지라 하면 나는 주저없이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선택하리라.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톨스토이의 <하지무라트>는 개인적으로 내게는 최고의 산문 소설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시금석 같은 작품이다.

― 헤롤드 블룸


나는 톨스토이와 한 링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 직설적이고, 정직하고, 객관적이고, 극명하게 전쟁을 그린다. 나는 전쟁에 대해 톨스토이보다 더 잘 쓴 작가를 알지 못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톨스토이는 예술가이자 심리학자다! 강력하다, 정말 너무나 강력하다!

― 귀스타브 플로베르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해) 나의 작품 100편이 모두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 작품을 보고서 알았다.

기 드 모파상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연애소설의 하나이지만, 단순한 ‘사랑의 모험 소설’은 아니다. 톨스토이의 예술은 남달리 강렬하고 맹렬한 빛을 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는 창조적 원숙의 정점에 이르렀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안나 카레니나는 역대 최고의 작품이다.

윌리엄 포크너


안나 카레니나는 예술작품으로서 완전무결하다. 인간 영혼의 넓고 깊은 심리 분석, 그리고 러시아에서 전례 없는 예술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인간의 죄와 악행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구현한다. 현시대의 유럽문학 가운데 이 작품에 비견될 만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27]

[28] #


톨스토이는 예술의 신이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안나 카레니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이자 19세기 문학의 최고작이다. 이에 근접하는 톨스토이의 작품으로는 이반일리치의 죽음뿐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하지무라트를 읽고서야 깨달았다. 내가 대중의 영광 앞에서 얼마나 오만했는지.

토마스 만


톨스토이는 거룩한 신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톨스토이는 거대한 바위덩이이자 엄청난 거인이다. 톨스토이가 등장하기 전까지 문학에 진정한 농민의 모습은 없었다. 유럽에 그와 비견될 수 있는 예술가는 없다.

블라디미르 레닌


난 톨스토이가 지상에 존재했던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이런 나의 판단에 애국심은 그 어떤 역할도 하고 있지 않다.

표트르 차이콥스키


내가 봤을 때 안나 카레니나보다 위대한 걸작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 모두는 죽겠지만 그 작품은 영원불멸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우리 시대에 톨스토이보다 중요한 예언자는 없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문학이 톨스토이를 소유하고 있는 한 작가들에게 문학은 즐겁고 쉬운 것이다. 작가로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거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 인정하는 것도 비통한 일이 아니다. 톨스토이가 모두 해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사람들이 문학에 요구하는 모든 기대와 소망을 정당화해준다.

안톤 체호프[29]


이반일리치의 죽음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내가 작가로써 이루고 싶은 것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쓰는 일이다.

알베르 카뮈


세르반테스는 첫번째 소설가이며 그 마지막은 조이스와 프루스트다 이들의 초월적 형태가 톨스토이에게 집결된다. 톨스토이는 성경 호메로스 셰익스피어처럼 비평을 무력화시킨다.

- 해럴드 블룸


안나 카레니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설을 통틀어 가장 위대하다.

- 오르한 파묵


전쟁과 평화는 시대를 초월한 가장 위대한 소설이다.

- 서머싯 몸


영화 만들기란 놀이동산 범퍼카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새겨넣는 일이다.

- 스탠리 큐브릭


8. 여담



  • 아내 소피아와의 사이에서 13명의 아이들을 두었고 그 중 다섯은 어린 시절에 죽었다. 하지만 사실 톨스토이에겐 또 다른 아이가 있었다. 자신의 하녀였던 아크시니야 바지키나가 낳은 사생아 아들이었지만, 어쨌든 자식은 자식이었다. 티모페란 이름의 이 아이는 마구간 지기, 산지기로 평생을 살았다. 이 사실은 톨스토이가 부부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한다며 자신의 옛 여자관계를 비롯한 자신의 15년 간의 과거를 적은 일기를 아내에게 보여줘서 아내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도박으로 수많은 재산을 날렸고 온갖 여자들; 집시, 창녀, 어머니 친구들의 농노들과 관계한 사실은 물론 사생아까지 있다는 사실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톨스토이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안나 카레니나 속 레빈이란 인물에 투영한다. 레빈이란 인물 역시 자신의 더럽고 방탕한 과거와 무신앙을 고백한 일기장을 키티에게 건네고 용서받는다. 그외에 톨스토이는 자신의 젊은 시절의 방탕과 무신앙에 대해 처절하게 회개한 참회록을 남겼고 그의 참회록은 성 어거스틴, 루소의 참회록과 더불어 세계 3대 참회록으로 꼽힌다.
  • 이런 독특한 남편 때문에 소피아는 대단히 힘든 삶을 이어가야 했다. 유모도 없이[30] 혼자서 13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물론 톨스토이의 글을 일일이 읽고 필체를 교정하는 작업을 맡아야 했다. 게다가 노년에 겨우 대문호의 아내로서 편안하게 사는가 했더니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갑자기 남편이 모든 재산을 버리고 뛰쳐나가려 하니 분통이 터질 만도 하다. 또한 톨스토이가 지나치게 대문호로 추앙받은 나머지 소피아는 소크라테스의 아내인 크산티페처럼 '위대한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 악처' 취급을 받기도 했다. 소피아는 남편의 더럽고 무책임한 온갖 작태를 견디며 지옥 같은 결혼생활을 했는데, 그나마 작품 교정과 정서 작업을 할 때만이 몸은 고되나마 역겨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었고 회고했다.
  • 그의 목가적 정신이 담긴 소설 작품들이나 소설책 표지나 속표지에서 볼 수 있는 수염이 성성한 푸근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31] 할아버지와도 같은 인상과는 달리, 청장년기는 매우 이기적이며 성적으로 난잡하기로 유명했다. 그의 부인은 결혼 초기 10여 년간 임신 상태가 아닌 기간이 거의 없었다. 이와 같은 그의 정신적 사상과 행동간의 괴리는 톨스토이를 연구할 때 관심있게 보는 주제 중 하나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성경의 돌아온 탕자. 그러나 노년기에 처절한 참회를 거쳐 올바르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도 위선적이라는 이야기와[32] 그의 극단적인 기독교적 아나키즘 사상 때문에 인격파탄자라는 비난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철저한 여성비하[33]도 아울러 비판받고 있다. 하지만 그가 위선자였다거나, 극단적인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인한 인격파탄자이기만 했다면 마하트마 간디가 그의 사상에 깊이 감화돼 평생 그를 본받아 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목가적 정신이나 크리스트교에 대한 경건한 신앙심이 드러나 있는 작품 세계로 유명하며 어둠의 힘이라는 희곡에서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기를 생매장하는 묘사가 있다.
  • 톨스토이의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로 그가 여인숙에 머물고 있을 때 소녀가 톨스토이의 가방을 보고 그 가방을 갖고 싶다고 하자 그는 일이 있어서 나중에 가방을 주겠다고 약속한 다음 그 여인숙을 나왔다. 나중에 그 여인숙을 찾아왔더니 그 소녀는 병으로 이 세상에 없었으며, 그는 여인숙 딸의 무덤에 가서 그 가방을 걸어 주었고 그 뒤 어느 사람이 그 무덤에 돌가방을 조각해 돌십지가에 건 다음 프라우다(pravda - 사랑을 다음으로 미루지 마라)라는 글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동시대를 살았던 대문호이자, 살아왔던 길이나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바가 정반대였던 도스토예프스키와는 서로 의식하는 사이였는데, 서로의 작품에서 서로의 이름이 꽤 자주 언급된다. 예를 들면, 톨스토이의 대작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와 카츄샤가 젊은 시절 즐겨읽었던 작품의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이며,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주인공 이반 표도로비치가 악마와의 대담하는 도중[34] 악마가 이반 표도로비치를 자극하며 '인간의 예술적 섬세함은 그 대단한 레프 톨스토이도 따라가지 못한다 ' 라고 말한다. 두 대문호는 사적으로 친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이처럼 서로의 작품에서 상대작가에 대한 존경심을 내비쳤다.

9. 감상


보통 톨스토이의 작품을 감상하는 독서가들의 케이스는 세 가지로 갈린다.[35] 하나는 기존에 다른 고전 문학들을 감상하며 또다른 영감을 받기 위해서, 또다른 하나는 고전 문학과는 거리가 있는 글을 읽어왔으나 고전 문학을 새로이 접하는 이들, 마지막으로 아예 처음 글 읽기를 톨스토이로 시작하는 이들이다.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읽기에 어려운 난이도는 아니다.[36] 다만 기본적으로 장편소설로 갈수록 작품 자체의 커다란 스케일과 그 스케일들을 완벽하게 채우는 인물과 배경의 묘사에 적응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글의 묘사 방식이나 전달하는 기법 자체도 현 시대의 글쓰기와는 다른 문체를 사용하기에 난이도는 높지 않지만 이해가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때문에 보통 기존의 다른 고전 문학을 감상해본 케이스라면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를 바로 시작해도 무난한 감상을 할수있다. 고전 문학을 접해본 이들에게는 톨스토이의 문체 자체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고전 문학을 새로이 접하거나 글읽기가 처음이라면 글의 묘사 방식이나 전달하는 기법의 문제로 인하여 장편은 비추천. 물론 작품이 명작이기에 오랜 시간을 들이며 천천히 감상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으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나 하지무라트 등 중단편도 굉장히 높은 성취의 문학 작품인만큼 부담없이 시작하는 편이 좋다.

10. 작품



10.1. 장편



10.2. 중단편


  • 세바스토폴 이야기
  • 캅카스의 포로
  • 바보 이반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 짧고 설득력 있는 플롯과 그 속에 녹아드는 날카로운 교훈적 메세지로 인해 톨스토이의 단편 중에서도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작품 중 하나. 한 때 필요한 만큼만 원하는 검소함을 자랑으로 여기던 러시아인 농부가 악마도 두렵지 않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을 집 뒤에 숨어 있던 악마가 엿듣고 나서 그를 점점 타락시키는 내용이다. 농부는 근면하게 일하여 원하는 만큼의 땅을 손에 넣는데 성공하지만 여러 물리적 한계로 계속되는 이웃과의 트러블로 골머리를 앓고, 그렇다고 땅을 빌리자니 불만족스러운 자신의 처신에 대해 고민하는 도중에 굉장히 넓은 땅을 거저나 다름없이 판다는 바시키르인 유목민들의 소문을 듣고 그들을 찾아간다. 유목민들의 거래 조건은 지극히 간단했는데, 해가 뜨고 나서부터 하루 종일 걸어서 범위를 표시한다면 그 넓이가 얼마든간에 1000루블이라는 거저나 다름없을 가격으로 표시한 만큼의 땅을 받을 수 있지만, 해가 지기 전 까지 시작 지점에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한다면 1000루블을 그대로 잃고 계약은 파기된다는 내용이었다. 조건을 승낙한 농부는 아침에 바로 출발하였지만 놓치기 아까운 기름진 토지를 더 차지하려고 조금씩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해가 지기 직전에 도착하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거추장스러운 신발이나 옷도 전부 벗어던지고 젖먹던 힘까지 내어 달렸지만 지나치게 혹사한 나머지 도착한 뒤 그대로 넘어져서 심장이 터진 채로 즉사했으며, 죽기 직전에 엄청난 땅을 얻었다고 손을 잡으며 축하해주던 지주를 옆에 둔 채로 그의 하인은 죽은 주인을 묻을 땅을 파기 시작한다. 농부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은 그가 묻힌 3아르신(2m) 만큼의 크기만큼이었다라는 작품 내 해설과 함께 이야기는 끝난다.[37]
  • 하느님은 아시지만 기다리신다
  • 세 현자들
  • 하지무라트
  • 크로이체르 소나타
  • 가정의 행복
  • 이반 일리치의 죽음
  • 악마
  • 위조 쿠폰 - 사후 발간. 로베르 브레송이 〈(L'Argent)〉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브레송에게도 마지막 영화다.
  • 예르마크 - 이반 4세시비르 칸국을 원정하여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을 시작한 카자크 족장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Ермак Тимофеевич, 1532년 ~ 1585년 8월 6일)의 이야기.

10.3. 사상


  • 예술이란 무엇인가
  • 참회록(고백록)
  • 교회와 국가
  • 인생론
  • 인생독본

11. 바깥 고리


[1] 실제 러시아어 발음은 [lʲef nʲɪkɐˈlaɪvʲɪtɕ tɐlˈstoj\](례프 니칼라이비치 탈스토이)에 가깝다. 톨스토이 스스로는 '료프(Лёв, [lʲɵf\])'라는 발음을 사용하였으며, 레프(Лев)라는 이름의 영어식 표기인 리오 톨스토이(Leo Tolstoy)로도 불린다. 레프는 러시아어로 사자라는 의미이다.[2] 크라피브나(Крапивна)의 형용사형인 크라피벤스키군(Крапивенский уезд)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톨스토이의 《부활》에 등장하는 지명이기도 하다.[3] 훗날 전쟁과 평화에서 '소냐' 캐릭터로도 등장한다.[4] 후술하겠지만 톨스토이 가문은 레프 톨스토이 직계만 있는 게 아니다.[5] 현조부가 오스만 제국 대사를 지냈다. 동양어학과는 터키어를 배우는 과정이다.[6] 톨스토이는 농노제도 극혐이라서 러시아 귀족들이 대제라 칭한 예카테리나 2세도 암군으로 취급했다.[7] 후일 1872년에도 캅카스 참전 경험을 다룬 단편 《캅카스의 포로(''Кавказский пленник'')》를 썼다.[8] 물론 단순히 인력동원이 간편해서라기보다는 소련 영화판이 엄청나게 컸기 때문인것도 있다. 통제가 있었다지만 국가에서 영화관을 거하게 지원해주어서 당시 세계 영화관의 반 이상이 소련에 있었고 표값도 싸서 연간 영화관객수가 40억 명을 넘나들던 시절이었으니...[9] 물론 75만을 한 번에 동원한 건 아닌 여러 장면에 걸쳐 따로 동원했다. 사실 소련 시절, 이런 경우가 꽤 있었다. 러시아 신화를 영화로 만든 작품에선 거대한 드래곤과 싸울 때 10만이 넘는 군인들을 동원하기도 했으며 《고요한 돈 강》(1957)이라든지 여러 영화에서도 엄청나게 동원했다. 한편 당시 중국은 제작규모 열악과 같이 문화대혁명 와중으로 영화 인력까지 숙청하던 터라 이런 대규모 인력 동원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참고로 한 장면에 엑스트라 최다 동원 영화는 1982년작 《간디》에서 장례식을 보러온 인도 30만 엑스트라들. 비슷한 예로, 북한의 《불가사리》에도 몇 만 명 동원되었다.[10] 이 작품은 애먼 대천사 미카엘을 끌어들였다. '천사=미카엘'이라는 인지도 때문이었지만...[11] 성당이나 개신교 예배당이 아니라,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뜻한다.[12] 톨스토이가 사망한 해에 소피아와 같이 찍은 사진이 있는데, 그야말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지 단적으로 드러난다.#[13] 톨스토이 가문의 여러 인물들 참조.[14] 톨스토이 가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여기도 참조하길. #[15] 원래 표트르 대제의 반대파인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섭정공주 편이었으나 전향해서 표트르 대제의 신임을 얻었고 이후 여러 군공과 초대 오스만 제국 대사로 10년간 재직하면서(전쟁시엔 2년간 감금도 되었다) 공을 쌓았는데 표트르 1세에 반기를 들고 도망간 황태자를 설득하여 납치(?)한 공로도 유명하다.[16] 전쟁과 평화에서 주인공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의 이름이 외가에서 유래하며 V에서 B로 바꿨을 뿐이다.[17] 당시 권력자였던 피촘킨이 정부와 결혼하길 권유했는데 거부하고 외조모 예카테리나 드미트리예브나 트루베츠카야와 결혼해서 찍혀서 관운이 막히고 아르헹겔스크 주지사를 하다가 짤렸다.[18] 러시아 귀족은 작위라기보단 신분인데 적자는 장남은 물론 막내아들까지 다 백작으로 칭할 수 있다. 다만 딸들은 시집을 가면 남편 작위를 따른다. 톨스토이 소설에서 '공작의 영애'로 불리는 경우가 이 경우인데 백작에게 시집가면 백작부인이 된다.[19] 서구 최고 작가들중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 하는 작가들을 일컫는 용어다.[20] 보바리 부인의 작가.[21] 그러나 소련 정부는 문학 장르를 소비에트 리얼리즘에 한정지어버렸기 때문에 대대적인 탄압이 없었다는 건 무리가 있다. 문화대혁명 수준으로 과거에 나온 문학을 제거하는 우는 저지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인 점이다. 이 시기에 지하문학이 괜히 등장한 것이 아니다.[22] 볼가코프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팬이었다. 스탈린은 불가코프가 희곡 <백위군>이 당국의 검열을 받자 수정해 발표한 <투르빈가의 나날들>을 좋아해서 홀로 극장에 가서 보곤 했다. 1930년 반체제 작가로 찍혀 곤란한 처지였던 불가코프는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 소련을 떠날 기회를 주거나 극장에서 생계를 위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호소했고 한 달 후 스탈린은 불가코프에게 전화를 걸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조감독으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직장을 얻은 불가코프는 지속적으로 반체제 작품을 투고하다가 극장관리자와 충돌해 조감독 자리를 잃고 출판도 금지당해 곤궁한 처지에 놓였지만 그래도 숙청당하지는 않고 창작활동을 이어가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완성한다.[23] 물론 대숙청 때는 여러 작가가 처형되기는 했지만, 이는 문학작품의 문제라기보다는 반스탈린파(트로츠키파)로 간주된 작가들의 문제였다.[24] 솔제니친은 서방으로 추방형을 받았는데, 소련 체제가 굳이 가혹하게 다루려고 했다면 솔제니친을 시베리아북극권의 굴라그나 감방으로 보내버릴 수도 있었다. 다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경우 서방세계에서도 워낙 유명한 작가들이었기에 소련도 함부로 건들기 어려웠다고 생각해야 한다. 거기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경우 서방 세계의 정치적 이해에 이용된 측면이 있는 작가였기도 하고.[25] 소련체제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어렵게 살았다고 해도 굶어 죽을 정도로 내몰리지는 않았다.[26] 그의 대표 중편작 하지무라트를 보면 러시아군이 캅카스의 마을을 하나 초토화시키고, 어린 소년까지 학살당한 현장 묘사를 주민 시점에서 적나라하게 그렸다.[27] 다만 도스토옙스키는 안나 카레니나를 제외한 톨스토이의 작품 대부분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28]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전쟁과 평화도 러시아 문학의 걸작이라고 선언한 기록이 있다.[29] 그러나 체호프는 서른 살에 사할린 기행을 마치고 온 후로 그의 작품을 멀리하게 된다. 작품성에 대한 부정은 아니고 비참함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유배지와 그곳에 갇힌 죄인들의 생활을 직접 보고난 뒤 비폭력, 무저항을 추구하는 톨스토이의 이상론적 사상에 대해 염증을 느끼게 된 것. 출판사의 편집장이던 스보린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사할린에 가기 전까지 내게 있어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하나의 경전이었지만, 돌아온 지금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우스꽝스러운 내용으로 보인다"고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거와 달리 체호프는 톨스토이 개인에 대해선 여전히 존경해왔고 친하게 지냈으며 그냥 작품에 대한 이런 마음을 솔직하게 톨스토이 앞에서 털어놓기까지 했다! 톨스토이는 그래? 이러면서 별로 기분 나뻐하지도 않고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 1902년 둘이 정겹게 사진을 찍기도 했으며, 톨스토이는 자기 작품을 이렇게 평했다고 해도 여전히 후배인 체호프 작품들을 높이 평가했다.[30] 톨스토이는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을 받아 당시 귀족 여성들이 애들을 팽겨치고 유모에게만 맡기는 것에 반대했다.[31] 그의 노년의 모습들을 보면, 소위 카리스마가 쩐다는 식으로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서양의 위인들중에서는 베토벤과 더불어 대표적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듣는다.[32] 예를 들어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 부자가 인정있는 척 하는 것보다 가증스럽고 역겨운 일은 없다. 부자가 정말로 정말로 인정이 있다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넉넉하게 먹고 살만한 재산을 제외한 나머지 재산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지만, 다른 경우들은 몰라도 이 경우는 그가 아내의 거센 반발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고, 결국 아내와 이 문제로 크게 다퉈 자신의 소신을 실현하려 가출했다가 도중에 죽은 것을 볼 때 부당하고 가혹한 비난이다.[33] 톨스토이 소설에서 미녀 캐릭터는 안나처럼 마지막에 죽거나, 나타샤처럼 고생해서 미모가 바랜다. 미남 캐릭터는 죽진 않아도 브론스키처럼 고생하는 일이 많다.[34] 이는 이반 표도로비치의 환각에 의한 것이다.[35] 사실 이렇게 안갈릴 수가 없다.[36] 의외로 톨스토이의 수준의 문학 작품 중에서 그만큼 평이한 서사 전달을 하는 작가는 드물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면 닥터 지바고 같은 작품 한번 읽고 오면 이해가 간다.[37] 작품 외적으로 따지면 땅은 '죽은' 농부의 소유가 되었고 유족들이 물려받게 될 것이다. 또한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게 된다면 다 잃게 될 땅이기도 한데, 이는 톨스토이 사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