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서진)

 


李胤
(? ~ 282)
서진의 인물. 자는 선백(宣伯). 이민의 손자.
요동군(遼東郡) 양평(襄平)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렸을 때 아버지 이신이 공손도를 피해 달아났다가 근심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부모를 알지 못했지만 견식을 갖춘 나이가 되자 채소 반찬만 먹고 슬퍼하면서 3년 상을 치뤘으며, 할아버지 이민(李敏)와 아버지 이신의 생사를 알지 못했으므로 신주를 세우고 이를 받들었다. 이로 인해 효성있는 인물이라고 세상에 알려졌고 용모는 검소하고 가난한 사람처럼 쓰러질 듯 했지만 마음이 침착하고 사리에 밝아 말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처음에는 군에서 상계연을 지냈고 이어서 주로부터 벽소를 받아 부종사가 되었다가 효렴을 통해 진북군사가 되었으며, 낙평후상으로 옮겼다가 낙양에 들어가 상서랑, 중호군사마, 이부랑 등을 지냈고 청렴하고 공평하게 인재를 선발했다. 이윤은 관중후의 작위를 받고 지방에 나아가 안풍태수를 역임했다가 사마소(司馬昭)가 대장군의 종사중랑으로 삼았으며, 어사중승으로 옮겨 공평하고 삼가는 태도를 보이면서 곧게 바로잡아 백관들이 이윤을 꺼렸다.
263년에 촉나라를 정벌하자, 서중랑장에 임명되어 관중의 군사를 감독했다가 하남윤에 임명되어 광육백(廣陸伯)의 작위를 받았으며, 265년에 상서에 임명되면서 후작의 작위를 받았고 정치를 제대로 하면서 문제가 있으면 시정해야 한다는 상소를 해서 사마염(司馬炎)이 이를 따랐다.
이윤이 충성스럽고 진실되면서 굽히지 않는 절도가 있다고 해서 사례교위에 임명되었지만 태자소부를 지내면서 낙양에 관청에 있으면서 감사의 직위를 겸임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해 사양했는데, 사마염은 태자소부(太子少傅)와 사례교위(司隸校尉)가 충성스럽고 현명한 사람이 해야 한다면서 이윤이 사례교위도 겸임하게 했다.
275년에 황태자가 동궁으로 옮겼고, 이윤은 아침, 밤으로 황태자와 교류하면서 바르게 인도해야 했으며, 이윤은 지치고 여위게 되어 장시간으로 일하는 것이 맞지 않았다. 이윤은 소부에서 물러나 시중에 임명되었고 특진이 되었으며, 상서령에 임명되어 시중, 특진을 그대로 유지하게 했고 이윤은 여러 관직을 역임했지만 아이가 아파도 약을 구할 정도의 돈이 없었지만 사마염이 이를 듣고 1만 전을 하사했다.
광록대부를 지내고 있을 때 양호가 거기장군이 더해지자 사양하고 이희, 노지 등과 함께 천거하면서 청렴하고 간소해 조정에 한 몸을 세웠다는 칭찬을 했으며, 이후 시중, 상서령을 지내다가 278년 9월 15일에 사도가 되었다. 280년에 오나라를 평정하고 사마염이 관직을 승진시키려 하자 이를 사양했지만 사마염이 허락하지 않아 승진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광육후(廣陸侯)의 작위에 봉해졌다가 282년 4월 1일에 죽었으며, 시호는 성후(成候)로 사마염은 사람을 보내 그를 기리는 사당을 만들게 하고 황태자는 사인을 시켜 조문하게 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