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제
李弼濟
(1825~1871)
조선 말기의 인물. 이필제의 난의 주도자.
충청남도 홍성(洪城)인 홍주(洪州) 출신으로 향반(鄕班 시골 양반)이며, 생애 초기부터 여러 차례 이름을 바꿨다.
처음에 홍주에 살 때는 이름이 근수(根洙)였다가 필제로 바꿨고 과거 시험을 치러 무과에 급제하기도 했지만, 벼슬자리가 부족해 선달로 지냈다. 공주에 머물다가 진천으로 옮겨 살면서 이홍(李弘)으로 바꿨으며, 1863년에는 동학에 입교했고 주지(朱趾)로 바꿨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서양인들에게 나라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조선인들의 두려움이 커지자[1] , 1천의 군사를 내어 나라를 삼킨 뒤 청나라와 일본 영토를 전부 조선 땅으로 만든 다음 유럽도 박살 내겠다는 허무맹랑한 천하 정복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당연히 주변인들도 이런 주장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았으나, 망국에 치달은 혼란스러운 나라 상황이다 보니 결국 그의 사상에 동조한 세력이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1869년 4월에 진천에서 북으로 중원을 정벌한다는 뜻을 내세워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가 친척의 밀고로 발각되었고, 이 당시에는 김창정(金滄艇) 또는 창석(滄石)으로 바꿨다고 한다. 진주, 거창 등지에서 봉기를 준비하면서 주성칠(朱成七), 주성필(朱性必) 등으로 바꿨으며, 12월에 남해 죽도로 가서 군기를 탈취하고 섬의 백성들을 동원해 통영, 고성, 김해를 거쳐 육지로 가서 한양으로 향할 계획을 시도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870년 7월에는 남해현으로 가서 관청의 재물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워 하동 나루에서 남해도 죽도로 건너가려다가 의심받자 계획을 중단시켰다.
1871년 2월에는 최시형과 접촉해 동학을 지원해주겠다고 했으며, 이 시기에는 이제발(李濟潑)로 바꿨고 3월 10일에 영해의 관아를 공격해 점령했다가 12일에 관군이 온다는 소식으로 인해 단양으로 도망쳤다. 진명숙(秦明叔)으로 바꾸고 봉기를 시도해 7월 5일에 문경의 조령관을 빼앗아 조정에 불만을 품은 유생들을 통해 한양을 공격하려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수상한 모의를 한다고 신고하면서 8월 2일에 체포되었다가 12월 23일에 처형되었다.
[1] 왜냐하면 불과 6년 전인 1860년 조선의 바로 이웃 나라인 청나라의 수도 북경에 서구 열강인 영국과 프랑스가 쳐들어와 한바탕 약탈과 파괴를 저지른 아편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에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와 강화도를 점령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이 소식을 듣고 겁에 질린 한양의 백성들이 프랑스 군대가 혹시 한양까지 쳐들어올까 봐 앞다투어 산골로 피난을 떠나는 바람에 한동안 한강의 나루터가 피난민들로 꽉 막히고 강을 건너는 배를 구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