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제의 난

 


1. 개요
2. 난의 원인
3. 전개 과정과 결말
4. 여담
5. 참고 문헌


1. 개요


조선시대 고종 시절인 1869년부터 1871년까지 이필제(李弼濟 1825~1871년)가 일으킨 반란.

2. 난의 원인


이필제(李弼濟 1825~1871년)는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洪城)인 홍주(洪州)에서 태어난 향반(鄕班 시골 양반)이었다. 그의 증조부는 태안군수(泰安郡守)를 지냈던 이완(李烷)이었는데, 이는 이필제가 어느 정도나마 조정에 영향이 있었던 집안 출신임을 뜻한다. 실제로 이필제는 군인을 뽑는 과거시험무과에 응시한 경험도 가졌으니, 나름대로 학문을 아는 지식인 계층이었던 셈이다.[1]
조선 시대의 지식인들이 그러했듯이 이필제도 과거 시험에 응시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필제는 무과에 합격을 했으나, 끝내 벼슬자리를 얻지 못한 선달(先達)에 그쳤다. 보통 조선 시대를 다룬 TV 사극 드라마들을 보면,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금방 벼슬자리를 얻어 조정에 나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벼슬자리들은 한정되어 있는데 반해, 과거 시험은 자주 치러지다보니 정작 과거에 합격하고도 벼슬자리가 오지 않아서 사실상의 실업자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2]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조선 시대에는 선달(先達)이라고 불렀는데, 이 선달들은 자신들을 써주지 않고 실업자 상태로 내버려 두는 조선 사회에 불만을 품고 때로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869년부터 1871년까지 ‘이필제의 난’이라 불린 반란을 저질렀던 이필제도 바로 그런 선달이었다.
1850년 5월 이필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었던 지역인 풍기군(豊基郡)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허관(許瓘)이라는 노인을 만났다. 훗날 이필제를 체포하여 심문한 내용을 기록한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3]에 따르면 허관은 이필제한테 “앞으로 조선을 침략해 올 서양 세력을 물리치고, 오랑캐 청나라에 맞서 싸우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허관의 가르침을 요약하자면 척양론(拓洋論)과 북벌론(北伐論)이 되겠다.
허관이 이필제한테 서양을 물리치라고 말한 것에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작용했다. 이필제가 허관을 만나기 11년 전인 1839년에는 서양의 나라인 영국이 중국 청나라를 침공한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헌데 전쟁의 결과는 불과 2만 명도 안 되는 영국군이 4억의 인구를 가진 세계 최강대국 청나라를 상대로 완전한 압승을 거두는 이변이었다. 또한 중국에 쳐들어간 영국군은 각지에서 학살과 약탈을 마음껏 벌였는데, 이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혹시 영국 등 서양의 나라들이 조선에도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심과 적개심이 퍼졌다. 허관이 이필제더러 “서양에 맞서 싸우라.”는 가르침을 준 것도 그러한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아울러 허관의 가르침 속에는 서양 뿐만 아니라 중국 청나라도 조선의 적대 세력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이는 1637년 조선이 청나라에 굴복한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북벌론(北伐論)이 조선의 민간에서 여전히 강하게 나돌았던 영향을 받은 흔적이다.
지금까지 이 북벌론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한테 굴복했던 조선 지배층들이 흔들리는 권력을 수습하기 위해 내세운 일종의 정치적 쇼.”라고 여기며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실현 여부는 둘째치고라도 조선의 북벌론은 결코 허구적인 쇼가 아니었다. 비록 조선의 국력이 청나라보다 워낙 약해서 북벌이 정말로 실행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으나, 북벌을 해야 한다는 의지만큼은 진실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북벌론을 내걸었던 효종 임금이 죽고 나서도 200년이 넘도록 조선의 민간 반란 세력들은 계속 북벌론을 들고 나왔다.
효종 이후에 북벌을 내세운 유명한 반란 사건들을 몇 가지 내세우자면, 먼저 1697년에 운부를 비롯한 1백여 명의 승려들이 집단으로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일을 들 수 있다. 당시 운부는 나이 70세의 승려였는데, 자신이 하늘과 땅의 이치를 깨우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알고 있어서 그 재주가 옛날 제갈공명이나 유기(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운 공신)와 같다고 선전하였다. 그리고 운부 자신이 가르친 옥여, 일여, 묘정, 대성, 법주 등 1백여 명의 승려들을 제자로 가르치고 그들을 통해 조선 전국의 승려들과 결탁을 했다.[4]
운부와 1백여 명의 승려들은 도적 장길산의 무리들과 결탁하고, 또 이른바 진인인 정씨와 최씨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나라를 평정하여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을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 청나라를 공격하여 최씨 성을 가진 사람을 왕으로 세우겠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비록 이 사건은 실패했지만, 조선 민간의 반란 세력들이 북벌을 명분으로 내세워 사람들을 끌어모으려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1801년에는 김건순이라는 천주교 신도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와 만난 자리에서 “서양의 큰 배에다가 총과 대포를 가진 군사들을 태워서, 청나라로 쳐들어가 병자호란 때 우리 조선이 당한 치욕을 씻겠다.”라고 말한 사건이 있었다.[5] 김건순은 조선 후기에 왕실을 능가하는 최고 권력을 휘둘렀던 명문가인 안동 김씨의 일원인데, 그런 상류층의 귀공자마저 북벌을 계획했던 것이다. 다만 이 사건은 주문모와의 개인적인 만남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주문모도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 치우고 천주교나 잘 믿으라고 질책했으며, 김건순도 조정에 체포되기 전까지 종교적인 활동만 했기에 큰 사건이 되지는 않았다. 김건순의 북벌 운운은 그의 처형에 대한 명분 중 하나가 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더라도 살아남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이렇게 거의 200년 동안 북벌을 명분으로 내세운 반란이 계속 일어났다는 사실은 조선 사회에 북벌이란 인식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허관(許瓘)이라는 노인을 이필제는 뒤에 가서는 ‘허최(許璀)’나 ‘허선(許璇)’으로 계속 다르게 불러서, 과연 실존 인물이었는지도 의심스럽다. 혹시 이필제가 허관이라는 신비한 가공인물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생각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아무튼 허관을 만나 가르침을 얻었다는 1850년부터 이필제는 단순히 집에서 빈둥거리는 실업자인 선달이 아니라, 자신이 앞으로 나라를 뒤흔들어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살아가게 된다.

3. 전개 과정과 결말


이필제는 1863년 새로운 종교 조직인 동학(東學)에 가입했다. 이는 그가 동학의 조직력과 신도들을 장차 자신이 추진하는 반란에 이용하려는 속셈에서 한 일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던 와중인 1866년 10월 26일, 프랑스 군대가 조선의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났다. 우수한 최신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 군대의 힘에 조선군은 너무나 형편없이 무너졌고, 강화도가 파죽지세로 프랑스 군대한테 점령당하자, 이 소식을 듣고 한양의 관리와 백성들이 겁에 질려 가족들을 데리고 한양을 떠나 앞다투어 산속으로 피난을 떠나는 등 조선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
비록 프랑스 군대는 2개월 후인 1866년 12월 17일에 떠났지만, 이 병인양요가 조선에 가한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6년 전인 1860년, 중국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함락당한 것처럼 이제 조선도 서양 군대한테 공격을 받아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급속히 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나라를 뒤엎으려는 야심을 품은 이필제한테는 병인양요가 오히려 좋은 기회로 작용했다. 프랑스 군대의 침공으로 조선 백성들 사이에 프랑스 등 서양에 대한 공포심과 적개심이 널리 퍼지자, 이를 이용하여 서양에 맞서자는 이필제 자신의 선동에 사람들이 손쉽게 넘어오리라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필제는 심홍택(沈弘澤)과 심상학(沈相學), 김낙균(金洛均)과 양주동(梁柱東) 같이 평소에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런 말을 늘어놓았다.

“본래 거지였던 주원장도 사람들을 모아서 명나라를 세우고 중국의 황제가 되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만약 나에게 1천 명의 강한 군사만 있다면, 우선 이 나라 조선부터 장악한 다음 곧장 중국으로 쳐들어가 한 달 안에 청나라를 손에 넣고서, 동쪽의 일본까지 공격하여 점령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자연히 천하는 우리의 손에 들어오게 되고, 저 서양마저 몰아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심홍택 등은 처음에 이필제의 말이 다소 허무맹랑하다고 여겨서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필제가 계속 진지한 태도로 “우리라고 천하를 손에 넣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지금이야말로 서양의 침공으로 세상이 어지러운 판국이니,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한다면 우리가 나라를 바로잡고 천하를 쥘 수도 있다.”라고 열성적인 구호를 외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움직여서 그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반란 계획이 새어나가 관아에 알려졌고, 곧바로 관아에서는 그들이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대역죄인이라고 판단하여 체포에 들어갔다. 이필제의 일행 대부분은 관아에 잡혀 들어갔으나(1869년 4월 21일), 이필제와 김낙균은 그들이 살고 있던 충청북도 진천(鎭川)에서 경상남도 진주(晋州)로 도망쳤다.
진주로 도망친 이필제 일당은 우선 관아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손에 넣고서 사람들을 모아 반란군을 늘린 다음,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군자금을 얻기 위해 인근 마을의 부자들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으려 했다(1870년 2월 24일). 하지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겁을 먹고 달아나는 바람에 이필제는 진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중도에 포기했다.
나흘 후인 1870년 2월 28일, 이필제는 세 번째 반란 계획을 세우고 나무꾼들을 불러 모았다. 일단 진주의 군사가 주둔한 병영으로 쳐들어가 무기를 빼앗은 다음, 남해안의 섬들을 점령하고 거기서 식량을 모으고 군사들을 불린 다음, 한양으로 진격하여 궁궐을 점령하고 곧이어 청나라를 공격한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였다. 그러나 이 계획도 도중에 새어나가 관아의 포졸들이 체포하려 몰려오는 바람에 이필제는 달아나야만 했다.
그 후 이필제는 1871년 2월 동학의 2대 교주최시형(崔時亨 1827~1898년)에게 접근하여 “나는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의 환생이오. 이제 내가 조선과 중국을 지배할 제왕이 될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나를 도와 일단 이 나라를 장악하는 일부터 도와주시오. 그러면 내가 그대와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중국까지 쳐들어가 천하를 손에 넣을 것이오. 그대가 현명하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오.”라고 허풍을 떨어서, 최시형으로부터 동학교도들을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6]
그리하여 동학교도가 포함된 180여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이필제는 1871년 3월 10일 경상북도 영해(寧海)의 관아를 공격하여 부사 이정(李政)을 죽이고 관아를 점령했다. 하지만 이틀 후인 3월 12일, 관아의 습격 소식을 듣고 수많은 관군들이 진압하기 위해 몰려오자, 이필제 일당은 겁을 먹고 대부분 달아나 버렸고 이필제도 충청북도 단양(丹陽)으로 도망쳐 숨었다.
4개월 후인 1871년 7월 5일, 이필제는 다섯 번째 반란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는 경상북도 문경(聞慶)의 요새인 조령관(鳥嶺關)을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서원 철폐로 인해 조정에 불만을 품은 유생들을 모아 반란군을 조직하여 한양으로 진격해 궁궐을 장악한 다음, 곧바로 중국으로 쳐들어간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도 주막에 머물며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이필제 일당을 보고 “수상한 자들이 나타났는데, 아무래도 역모를 꾸미는 듯하다.”라고 여긴 마을 사람들이 관아에 신고를 하는 바람에 관아의 포졸들에 의해 체포당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1871년 8월 2일). 그리고 체포된 이필제는 4개월 후인 1871년 12월 23일 반역죄인으로 분류되어 처형당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과 중국과 일본을 지배하고 동양의 황제가 되겠다던 이필제의 야심은 완전히 끝을 맺었다.

4. 여담


불과 2년 사이에 5번이나 전국 각지를 도망다니면서 끊임없이 반란을 선동했던 이필제와 그가 일으키려고 했던 난은 조선 후기의 국가 통제력이 그만큼 약해져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실제로 조선 후기로 오면 이필제처럼 아예 직업적인 반란 선동가들이 전국에 들끓었는데, 잦은 민란들의 배후에도 이들이 있었다.
이필제와 같은 선동가들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이른바 원국지사(怨國志士), 즉 '나라를 원망하는 선비들'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이필제처럼 재능은 있으나 출세를 하지 못해 사회에 불만을 품었고, 그런 만큼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뒤엎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려는 목적에서 잦은 민란을 주동하였다.
2020년 국가직 공무원 시험 7급 한국사 문제에서 임술농민봉기 관련 지문인 임술록이 나온 다음, 오답 중 하나인 '이필제가 난을 주도하였다'라는 보기로 출제됐다. 참고로 정답은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이다.

5. 참고 문헌


  •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62~175쪽
  • 조선의 예언사상 하/ 김탁 지음/ 북코리아

[1] 이필제를 문초한 기록을 담은 추안급국안 등의 사료에는 이필제를 외모가 흉악하며 평소 성정도 포악하다 이런식으로 쓰여있다. 그러나 정여립의 예를 보듯이 일종의 증오를 담은 과장된 표현이 옳다. 당대 증언에는 이필제가 신수가 훤칠한 미남에 언변이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이필제가 역당으로 찍혔음에도 끊임없이 무리를 모은 비결에는 바로 뛰어난 외모와 말재주가 있었다. 정부의 공초기록보다 주변의 증언이 더 신빙성이 가는게 예나 지금이나 외모나 말재주가 뛰어나지 못하면 그만큼 무리를 모으기가 쉽지 않다. [2]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공무원 시험에 합격은 했는데 보직 임명이 되지 않는 무기한 대기 발령 상태가 계속되는 사실상의 실업자 상태라고 보면 되는데 특히, 무과의 경우에는 뽑는 인원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리를 보장받기 힘들었다.[3] 조선시대 범죄자들을 체포하여 관아에서 심문한 내용들을 정리한 기록.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 내용들이 더 자세하게 실려있어 조선 시대 역사를 아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자료다. 한 예로 조선왕조실록에 간략하게 나와있는 유명한 도적 장길산의 활동 내역이 포도청등록에는 굉장히 상세하게 언급된다.[4] 이 사건이 소설가 황석영의 장편 소설인 장길산의 모티브가 되었고, 이 소설을 바탕으로 2004년 5월 17일부터 2004년 11월 16일까지 SBS대하드라마 장길산을 만들었다.[5] 정확히 말하자면 영성체를 받기 전, 그러니까 정식 신자가 되기 전 주문모와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후 영성체를 받고 정식 신자가 된 뒤에는 이런 언동을 했다는 기록이 없고 천주교 전도와 저술에 전념하다 순교했는데, 주문모에게 한소리 듣고 헛꿈에서 깨어난 듯.[6] 사실 이후 동학의 공식입장은 최시형이 이필제의 청을 끝까지 거절했다는 것이었지만, 여러 1차 사료가 새로 밝혀지면서 최시형과 동학교도들이 이필제의 난에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현재는 자그마치 동학 관련 학회지인 동학학보에도 이 사실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오히려 이필제가 동학농민운동에 23년 앞서는 선구자 혁명가로까지 재평가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