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

 


'''丙寅洋擾
병인양요'''

[image]}}}{{{-2 병인양요를 묘사한 기록화[1]
'''명칭'''
한국어 : 병인양요(丙寅洋擾)[2]
프랑스어 : Expédition française en Corée[3]
'''날짜'''
1866년 10월 26일 ~ 1866년 12월 17일
'''장소'''
강화도 일대
'''결과'''
조선의 승리.
프랑스의 목적 달성 실패, 후퇴.
강화행궁장녕전 소실 및 외규장각 도서 피탈.
조선의 쇄국 강화.
'''교전국'''
[image] 조선
[image] 프랑스 제2제국
'''지휘관'''
[image] 이용희
[image] 양헌수
[image] 이경하
[image] 한성근
[image] 피에르 구스타프 로즈 제독
[image] 해군 대령 올리비에
[image] 해군 중령 보쉐
'''병력'''
실질 전투 인원 대략 몇 백명
대기 인원 대략 1만[4]여 명
600여 명
전함 1척
순양함 2척
포함 2척
통보함 2척
'''피해 규모'''
사망자 : 5명
실종자 : 7명
부상자 : 2명
문화재 피탈과 방화 및 약탈
사망자 : 3명
부상자 : 35명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한강 탐색
3.2. 영종진 공격
3.3. 강화도 공격
3.4. 결말
4. 의의
5. 프랑스 측 관점
5.1. 조선에 관심을 두지 않은 까닭
6. 영향
7. 미디어
8. 관련 항목
9. 관련 문서

'''병인양요'''
'''D57518'''
[clearfix]

1. 개요


조선 고종 3년(1866년), 천주교 신자 8,000여 명과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한 병인박해에 대항하여 프랑스가 조선을 침공한 전쟁을 말한다. 병인년에 서양 또는 양이(洋夷 : 서양 오랑캐)가 일으킨 소요(騷擾)라는 뜻이다.
한반도의 국가(당시에는 조선)와 프랑스 사이에 일어난 최초이자 마지막 군사 접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전쟁대한민국을 돕기 위해(=북한과 싸우기 위해) 파병한 일은 있지만 그건 프랑스로서가 아니라 UN군의 일원으로서고, 헌법상에서는 북한은 적성''''''이 아닌 반국가 단체일 뿐이므로 한국에서의 보편화된 인식에 따르면 한국 VS 프랑스가 싸운 전쟁은 이 사건이 유일하다.

2. 배경


프랑스 해군 극동 함대 사령관 피에르 구스타프 로즈 제독병인박해의 생존자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5]가 알린 병인박해 소식에 분노했고 프랑스 정부와 로즈 제독은 조선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1866년 7월 8일 프랑스 공사 벨로네는 청나라 섭정이자 총리 아문의 수석 대신인 공친왕에게 조선을 정복하고 고종을 폐위시킨 다음 조선의 미래와 장래의 왕위를 나폴레옹 3세의 의지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 통보했다. 하지만 이는 벨로네 공사의 일방적인 행동이었다. 한편 청나라는 매우 놀라서 조선을 변호하며 프랑스를 진정시키려는 한편 조선에 자문을 보내 이에 대해 경고했다.

“방금 북경(北京) 예부(禮部)에서 보내온 자문(咨文)을 보니, ‘전에 프랑스 공사(公使)가 여러 차례 전교사(傳敎士)들이 조선에 나갈 수 있도록 호조(護照)[6]

발급을 청하였는데, 총리아문(總理衙門)에서 습교(習敎)는 조선에서 원하는 바가 아니므로 호조를 발급하기가 곤란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다시 프랑스 공사가 보내온 조회(照會)에 의하면, 고려 국왕[7]

프랑스의 주교(主敎) 두 사람 및 전교사 아홉 사람과 본지(本地)의 습교인 남녀노소를 모두 살해하였기 때문에 장수에게 군사를 일으키도록 명하여 며칠 안으로 일제히 소집할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이 이미 이 일을 알았으니 중간에서 해명해 주지 않을 수 없는데, 과연 전교사(傳敎士)들을 살해한 사실이 있다고 하면 먼저 이치에 의거하여 조사할 것이요, 갑자기 병란의 단서를 만들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귀국에 알려 심사숙고하여 처리하게 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조선은 여기에 대해서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재미있는건 이 당시 조선에서 활동했던 최양업[8] 토마스 신부가 프랑스인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당시의 조선과 프랑스가 서로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편지 전문은 다음과 같다.[9]

조선 조정이 세실 함장의 편지에 대한 회답을 라피에르 함장에게 보낸 것을 신부님들에게 소개합니다. 이것이 원문과 똑같은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조정이 다음과 같이 발표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난해에 조선 왕국의 영토인 외연도에서 어떤 주민이 외국 함선에서 건네준 편지라고 말하면서 우리 조정에 전해왔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이 소식에 크게 놀라 편지를 펼쳐보니까 당신들 왕국의 세실 함장이 우리 대신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 왕국의 고귀한 인물인 앵베르[10]

주교, 샤스탕 신부, 모방 신부 등 어른 세 분이 불행하게도 당신들에 의해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이 무슨 이유로 그분들을 죽였는지를 묻고자 하여 온 것입니다.

당신들은 아마 당신 나라의 법률이 외국인의 무단 입국을 금하는데, 그 세 분이 이 법률을 어겼기 때문에 사형을 당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러나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이 조선에 입국하는 일이 있으면 당신들은 감히 그들을 죽이지 못하고 각기 그들을 자기 본국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 나라 사람 그 세 분에 대해서는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처럼 대우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분들이 살인이나 방화나 그와 비슷한 다른 죄악을 범했다면 그분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을 것이고, 이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묵인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죄가 없었는데 당신들이 부당하게 사형에 처하였으니 프랑스 국가에 대하여 중대한 모욕을 준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세실 함장이 보내왔는데, 이 편지에 대하여 우리 조선 조정은 다음과 같이 분명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기해년(1839년)에, 어떤 외국인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느 때에 조선에 몰래 잠입하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조선 사람과 같은 옷을 입고 조선 말을 하며, 밤에만 나다니고 낮에는 집 안에서 꼼짝 않고 지내며, 얼굴을 변장하고 흔적을 감추면서 국가 반역자들과 불충한 자들과 흉악무도한 불량배들과 사귀고 어울려 다니므로 우리가 체포하여 문초하였습니다. 그들이 관가에 끌려와서 심문을 받을 때 자기들의 이름이 한 사람은 나 베드로(모방 신부)이고 또 한 사람은 정 야고보(샤스탕 신부)라고 진술하였습니다.

당신들의 함장의 편지에서 언급된 사람들이 혹시 이 사람들입니까?

심문을 받을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프랑스인들이라고 밝히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들 왕국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자백했더라도 우리는 지금에서야 당신들 나라에 대해서 듣게 되었으니 우리가 당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즉 우리가 어찌 비밀 입국을 금하는 우리 법을 적용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그들이 옷도 갈아입고 이름도 바꾸는 등 변장하면서 흉악한 무리와 어울려 다닌 행동은 그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이 악의에 의한 것이었음을 넉넉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연히 파선을 당하여 우리 왕국에 상륙하게 된 자들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왕국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가끔 외국인들이 풍랑에 파선하여 우리 해안에 표류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들이 낯선 사람이라도 죄가 없고 긴급한 사정이 있으면 우리는 그들을 구조해주고 입히고 먹이고 보호하며, 또 할 수 있으면 각각 자기 나라로 돌려보냅니다. 이것이 우리 왕국의 법률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말하는 저 세 사람들도 파선을 당해서 우리 왕국에 상륙했다면 왜 우리가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과 달리 대우하였겠습니까?

또 당신들 편지에 보면 왜 우리가 그들을 정당한 이유 없이 죽였는지 문책하고 또 당신들 나라에 중대한 모욕을 끼쳤다고 항의하는데, 그러한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의외이고 듣기에 놀랍습니다.

서양과 조선이 수만 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모르고, 편지로나 차편으로나 내왕과 상종이 없습니다. 그런즉 무슨 이유로 서로 원수가 될 짓을 할 것이며 또 무슨 까닭으로 당신들에게 모욕을 끼치겠습니까!

헤아려 보십시오. 만일 우리 나라 사람이 당신들의 나라에 몰래 들어가서 변장을 하고 악행을 하면 당신들은 그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겠습니까? 만일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이 당신들 나라 사람들처럼 우리 법을 거슬러 범행하였다면 그들도 우리 법에 따라 처벌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전에 어떤 중국인(주문모 야고보 신부)[11]

이 변복하고 몰래 우리 왕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 법대로 잡아서 사형에 처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항의도 없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우리 국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형에 처한 사람들이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은 살인자나 방화자들의 행동보다도 더 큰 죄가 되는 것이므로 그들을 용서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국적을 모르므로 우리 나라의 형법에 따라서 극형에 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정은 극히 분명하여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년에 보낸 당신들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받으러 당신들이 오리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편지는 필요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요식 절차 없이 전달된 것이므로 우리는 거기에 대한 답장을 할 의무는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개 도의 관찰사가 관여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왕국은 중국 황제에게 종속하여 있으므로 외국인들에 관한 문제는 중국 천자께 품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국 정부의 동의 없이 당신들이 어찌 회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신들이 당신들에게 대답하더라도 그 내용은 이상에 말한 것과 다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당신 나라 상관에게 보고하십시오. 그리고 사태의 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의외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상이 조선 조정에서 세실 함장에게 보낸 회답의 요지입니다.

#

한편 프랑스청나라의 중재 시도에 사실 병인박해는 조선만의 책임이 아니라 조선과 청나라의 공동 책임이라고 청나라까지 비난했다. 프랑스는 조선과 청나라의 사신 왕래가 활발한 점, 조선이 이미 선교사 처형 계획을 청나라에 통보한 상태였다는 점, 청나라가 조선의 입장을 비호하고 있다는 점, 청나라가 조선을 돕기 위한 원병을 만리장성에 대기시켰다는 점을 들며 청나라를 비난했다. 이에 청나라는 영국을 비롯한 여러 열강들의 중재를 청하는 한편 자신들의 입장에 대해 해명했지만 프랑스는 이 모든 행위가 기만 행위이자 원정을 지연시키려는 술책이라고 비난하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벨로네 공사는 로즈 제독에게 극동 함대를 출발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천주교 만주 교구장인 베롤 주교도 조선을 정벌하라고 부추겼다. 어쨌거나 로즈 제독은 벨로네 공사가 본국의 상의도 없이 일방적인 선전포고를 한 점에 대해서 기밀 누설이자 이적 행위라고 비난하며 조선은 프랑스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았으니 이번 일은 전적으로 군인인 자신의 소관이라고 주도권을 분명히 했다.
프랑스 외무성은 벨로네의 본국의 인가를 받지 않은 일방적 발언을 크게 질책했고 그의 모든 조치를 무효화했으며 그에게 앞으로 조선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명령함으로 그를 조선 원정에서 완전히 배제시켰고 9월 7일 프랑스 해군성이 나폴레옹 3세의 공식 명령서를 전달함으로 병인양요가 시작되었다. 프랑스 해군성은 로즈 제독에게 이번 원정이 국가적인 모험이니 매우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주문했다. 프랑스 해군성은 절대로 내륙을 치지 말고 안전한 정박지를 확보해서 그 주변을 위압함으로 조선에게 프랑스의 힘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고 만약 상륙 이후 극동 함대만으로 조선 정벌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내륙으로 진공해도 좋다고 했다. 9월 18일 프랑스 극동 함대가 측량을 위해 산둥 반도의 즈푸 항을 출발하여 조선으로 향했다.
한편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음력) 8월 13일 부평으로 이양선이 들어섰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이에 온 나라가 전쟁 분위기에 휩싸였다. 부호군 기정진이 이런 분위기에 부응하여 매우 단호한 척사를 주장하는 소를 올린다.

3. 전개




3.1. 한강 탐색


[image]
프랑스 해군 지휘관 로즈 제독
'''※ 이 문서는 조선 왕조 실록의 기록에 따라 서술했기 때문에 음력이 기본이나, 프랑스의 기록은 양력이다.'''

로즈 제독은 1839년의 기해박해프랑스인 사제 3명이 조선에서 순교한 것을 항의하기 위해 출병했던 함대가 좌초당했던 전력을 참고하여, 조선으로 진입하는 안전한 해로를 확보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기함 프리모게 함, 포함 타르디프 함, 통보함 데루레드 함 등 3척이 양력 9월 18일(음력 8월 10일)에 즈푸 항구를 출발하여 한강 수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데루레드 함이 21일에 한강으로 진입하는 수로를 발견했고 프랑스 해군 함대는 영종 첨사의 항의를 모두 무시한 채 한강을 거슬러 한성으로 진공했다. 이에 조선이 발칵 뒤집혔다. 김포 군수 정기화가 허겁지겁 이들 함대의 목적에 대해 질의하자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가 조선을 구경하러 왔다고 대답하며 식량 구입 의사를 전했고 이에 정기화는 돼지, 을 전달했다. 이 와중에 프리모게 함이 또 좌초되면서 청나라로 회항했고 남은 두 배 타르디프 함과 데루레드 함은 여유롭게 북상했다. 이들은 행주를 지나 양천에 이르렀고 양천 현령 윤수연도 이들 함대의 목적에 대해 질의했다. 프랑스 함대는 김포에서와 같은 대답을 전달한 다음에 소, 닭, 달걀, 청태, 백채를 구입했으며 부평에서도 조선이 전달한 생필품들을 전달받았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가 프랑스 함대가 도착하기만 하면 전국의 천주교도들이 몰려올 것이라 허풍을 떤 탓에 프랑스 함대는 많은 천주교도들이 몰려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한강 양안에는 수많은 구경꾼만 나타나서 함대를 구경했을 뿐 아무런 일도 없어 프랑스인들은 당황했다. 한편 회항한 프리모게 함은 영종 첨사 심영규가 파견한 병방 이우식에게 프랑스 무기들을 구경시켜 주었지만, 이우식이 질의한 프랑스 함대의 목적과 남은 함정#s-3들의 행선지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 프랑스 해군 장병들은 한양을 향해 계속 전진했고 조선 측이 제공한 신선한 식료품과 질좋은 생사, 호의적인 구경꾼들로 인해서 조선에 대한 호감을 품게 되었다. 로즈 제독은 조선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 틀림없었다고 장담했지만 조선의 호의적인 태도에 놀라게 되었다.
도성까지 10여 리를 앞둔 지점이었다. 하지만 타르디프함이 좌초되면서 프랑스 함대의 전진은 중지되었다. 프랑스 함대는 9월 27일 한강 하류로 퇴각했다. 조선은 이용희 지휘 하의 병력 1천 명을 급파한 상태였으나 프랑스 함대의 철수로 더 이상의 교전은 없었다. 프랑스 함대는 퇴각하면서 대동강에서 제너럴 셔먼 호가 행패를 부리다 불타버렸다는 소식과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강화되었단 소식을 들었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 군함 1척을 남겨 조선의 박해를 저지하자고 제안했지만 로즈 제독은 이를 거부했다. 9월 30일 프랑스 함대는 정박지인 작약도를 떠났고 10월 3일에 즈푸항에 돌아왔다.
한편 조선은 프랑스 함대의 진입을 수수방관한 지방관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들끓다가 프랑스 함대가 한양의 코앞까지 왔단 소식에 발칵 뒤집혔다. 백성들은 물론 관리들까지 혼비백산하여 식솔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즉시 포도청에서 치안 유지를 위해 순찰을 강화했고 의병 궐기를 촉구했다. 프랑스 함대가 철수한 것이 확인된 이후 고종은 3만 냥의 내탕금을 하사하며 전국의 수군 전력을 강화할 것을 명령했고 이 자금으로 노후화된 전선들을 수리했다.

3.2. 영종진 공격


영종진 공격 당시 '''1시간 동안 지휘를 하였던 지휘본부이자 장대인 태평루의 모습'''
로즈제독은 강화도를 가는길에 영종도월미도,제물포조선군의 주둔지임을 확인하고 강화도를 향한 출입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당시 강화도 방어진 중에서 하나였던 '''영종진''' 을 점령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2차레 탐색을 한 이후 영종진의 성곽과 관아,영종행궁을 1시간동안 포격한 뒤에 무력화 시킨후 영종도와 성곽을 점령하기 위해 무장한 선원 200여명[12]을 영종도에 상륙시켰다. 이에 영종진 성곽의 포대에서 1차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이후 2차전투에서 영종진성에서 포격백병전과 방어전이 이루어졌다. 당시 전투에는 영종진 소속 조선군의 최상위 지휘본부였던 '''태평루'''에서 지휘가 이루어졌으며 2시간 정도를 버티다가 결국 함략되었다. 전투로 인하여 영종도 일대가 무력화되었고 이 전투로 프랑스군을 막아내지 못함으로서 강화도로 가는길이 뚫리게 되었다.[13]

3.3. 강화도 공격


로즈 제독은 강화해협 봉쇄령(The Blockade of the Salèe River[14])을 중국 정부 및 각국 공사관에 발송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프랑스군은 먼저 조선으로 떠나기 전인 양력 10월 10일에는 주청 영국 해군 사령관 킹 제독이 직접 참관하여 그들의 훈련을 지켜보는 가운데 쿵둥다오(崆峒岛) 일대에서 해상 기동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 다음날인 10월 11일(음력 9월 3일) 프랑스 해군은 차푸항에서 군함 7척(전함 게리에르(Guerriere), 순양함 프리모게(primauguet)와 라플라스(Laplace), 포함 타르디프(Tardif), 르 브레통(Le brethon), 통보함 캉샹(Ken-Chan), 데룰레드(Deroulede)), 해군 육전대 800여명, 장교 약간과 부사관수병 725명의 병력이 참전한 총 1,525명[15]의 군세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이 밖에 중국에서 영업하던 민간 증기선들을 보급선으로 고용했던 듯하다.
음력 9월 6일(= 양력 10월 14일)프랑스 군함들이 팔미도에 나타났단 보고가 느닷없이 떨어졌고 이후 9월 7일 영종진이 프랑스군의 1시간에 걸친 포격으로 4시간만에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이후 9월 8일 강화산성이 프랑스 해군의 함포 사격에 유린당했다. 강화 유수 이인기와 선봉중군 이용희는 맥없이 강화도를 내주고 달아났고 이에 조정은 그 둘을 처벌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흥선대원군이 의정부에 글을 보내 독려하고 조정은 훈련대장 이경하를 순무사로 삼고 이용희를 선봉장으로 보내 응전하게 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9월 11일에 이경하와 로즈 제독은 매우 살벌한 내용의 편지를 교환했다.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면 반드시 망하고, 국법(國法)을 어기면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 하늘이 백성들을 세상에 내려 보냄에 이치로써 순(順)하게 하고, 나라의 봉강(封疆)을 나눔에 다스리어 지키게 하는 것이다. 순(順)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질면서 해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수(守)라는 것은 무엇인가? 침범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거스르면 반드시 망하고 어기면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며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너그럽게 대해주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도(道)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너그럽게 대하여 '''이름도 알 수 없고, 도리(道里)도 알 수 없는 나라 사람들이 매번 우리 나라 경내에 표류해오면, 수토지신(守土之臣)에게 명하여 영접하고 사정을 물어보면서 마치 오랜 우호 관계를 수행하듯이 하였다. 굶주렸다고 하면 먹을 것을 주고, 춥다고 하면 옷을 주었고, 병들었다고 말하면 약을 지어서 치료해 주기도 하였으며, 돌아가겠다고 하면 식량까지 싸서 보내주었다.''' 이것은 우리 나라가 대대로 지켜오는 법으로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온 천하가 우리를 일컬어 ‘예의지국(禮儀之國)’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약 우리 사람들을 인연(夤緣)하여 몰래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우리의 옷으로 바꿔입고 우리 말을 배워가지고 우리 백성과 나라를 속인다든지 우리의 예의와 풍속을 어지럽힌다면, 나라에 상법(常法)이 있는 만큼 발각되는 대로 반드시 죽인다. 이는 세상 모든 나라들의 한결같은 법인데 우리가 상법(常法)을 실행하는 것에 대해서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성내는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 우리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지금 너희들이 이것을 트집 잡아 말하는 것은 이미 도리에 몹시 어긋나는 것이다.'''

일전에 '''너희 배가 우리 경강(京江)에 들어왔을 때는 배는 불과 2척이었고 사람도 1,000명이 못되었으니 만약 도륙(屠戮)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방법이 없었겠는가?[16]

하지만 몰래 침입한 자들과는 구별되었으므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사람들을 대해주는 의리에서 차마 병력을 가하여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경내를 지나며 같은 것을 요구하면 그때마다 주었다. 작은 배가 왕래할 때에 말로써 물으면 먹을 것은 받으면서 돌아가라는 말은 따르지 않았으니 너희들이 우리를 배반한 것이지 우리가 어찌 너희를 배반한 것인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고 갈수록 행패를 부려서 지금 우리 성부(城府)를 침범하고, 우리 백성들을 살해하고 재물과 가축을 약탈하는 행위가 한이 없으니 실로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고 나라 법을 어기는 자들로서 이보다 더 심한 자들은 없었다. 그러니 하늘이 이미 그들을 미워하고 사람들도 그들을 죽이려 하였다.'''

너희들이 우리 나라에 전교(傳敎)를 행하려고 한다는데 이는 더욱 안 될 일이다. 수레와 서책이 같지 않으며 각기 숭상하는 것이 있으니 정사곡직(正邪曲直)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학문을 숭상하고 너희는 너희의 학문을 행하는 것은 사람마다 각기 자기 조상을 조상으로 섬기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남에게 자기 조상을 버리고 남의 조상을 조상으로 섬기라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만약 죽음을 면할 수 있다면 하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너희를 은(殷) 탕(湯) 임금이 갈백(葛伯)에게 하듯이 대해 주었는데, 너희는 우리를 험윤(玁狁)이 주(周) 나라 선왕(宣王)를 배반하듯이 포악하게 대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지인지덕(至仁至德)하더라도 제멋대로 난동을 부리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천만(千萬)의 대병(大兵)을 거느리고 지금 바닷가에 나와 하늘의 이치를 받들어 토벌의 뜻을 펴려고 한다. '''우선 내일 이른 아침에 서로 대면하자는 약속을 급히 보내니 군사의 곡직(曲直)과 승패(勝敗)가 결정되리라. 너희들은 퇴각하여 달아나지 말고 머리를 숙이고 우리의 명령을 들어라.'''

병인년(1866년) 9월 11일【술시(戌時)】 조선국 순무영(巡撫營)(양력 1866년 10월 19일)

프랑스 황제의 명을 받드는 전권대신(全權大臣)이 각초(各哨)의 용맹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준절히 효유(曉諭)한다. 당신들 순무사(巡撫使)는 다 잘 알아라.

나는 본 조정 황제의 명을 받고 우리나라 군사들과 백성들을 보호하려고 이곳에 있는 것이다. 올해에 이 나라에서 무고(無辜)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은 우리나라의 전교사(傳敎士)로 추중(推重)되던 사람이다. 너희는 어질지 못하게 불의(不義)로 그를 죽였으니 공벌(攻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전교사는 매우 어질고 의로운 사람이라 털끝만치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17]

그를 죽였으니 천리를 어긴 것이다. 그러니 죄악은 세상 법에서 온전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에서 지난 몇 해 전에 일어난 일을 듣지 못했는가? 그들이 불인(不仁)을 행하고 이런 흉악한 행위를 저질렀다가 우리 대국에서 토벌하니 머리를 숙이고 우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번 프랑스 전권 대신은 불인불의(不仁不義)한 나라인 조선을 징벌하기로 정하였으니 만약 귀를 기울여 명을 따르지 않으면 전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1. 세 사람이 관청을 부추겨 우리 나라 전교사를 살해한 것에 대해 엄정히 분별할 것이다.

1. 너희 관청에서는 조속히 전권(全權)을 지닌 관원이 조속히 이곳에 와서 직접 면대하여 영구적인 장정(章程)을 확정하라.

재해(災害)와 흉환(凶患)이 지금 가까이 닥쳤으니 너희가 재난을 피하려고 한다면 조속히 회답하고 명령을 받드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본 대신이 기일을 앞당겨 너희들에게 환난(患難)을 줄 것이니, 너희 백성들이 재난을 당하는 근원이 될 것이다. 그 때 가서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마라.'''

기원 1866년 양력 10월 18일”

이에 흥선 대원군도 의정부에 군사들을 독려하는 격문을 내린다.

“사람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천지(天地)의 상경(常經)이다. 양이(洋夷)들이 여러 나라들을 침략한 것은 본래 있었지만 지금까지 몇백 년간 이적들은 감히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몇 해 전 중국이 화친을 허락한 다음부터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곱절이나 더해져서 도처에서 포악한 행동을 감행하여 모두 그들의 해를 입게 되었다.

오직 우리 나라에 대해서만 감행하지 못한 것은 실로 옛 성인이 하늘에서 음덕으로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알게 된 것은 우리의 예의(禮義)이고 우리가 의지할 바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굳게 뭉치는 것이다.

지금 상하(上下)의 사람들이 만약 의심하거나 겁을 먹는다면 모든 일은 와해(瓦解)되고 국사(國事)는 그르치게 된다. 나에게 마음 속으로 굳게 정한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이 굳은 맹세를 알고 나의 뒤를 따르라.

첫째, 고통을 참지 못하고서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이다.

둘째, 그들의 해악을 참지 못하고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행위이다.

셋째, 적들이 도성에 쳐들어왔다고 해서 만약 도성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이다.”


3.4. 결말


9월 18일엔 프랑스 측이 2척의 함정과 해군 육전대원들로 한성근과 지홍관이 150명의 병사로 지키던 문수산성을 공격했다. 프랑스 해군의 빠른 사격에 조선군은 3명의 전사[18]와 2명의 부상자를 냈는데 이에 조선 군대는 전술적 후퇴를 감행, 프랑스 해군은 문수산성을 불살라버렸다. 조선군은 프랑스 해군에게 사격을 퍼부어 50명 ~ 60명의 피해를 주었다고 주장[19]했으나, 본인들 스스로도 그들이 자신들이 총을 쏘자 그냥 엄폐한 것인지 부상당한 것인지 죽은 것인지도 가늠 못하는 처지였다. 이 패배로 사실상 강화도는 프랑스 해군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분노한 이시원과 이지원 형제가 음독 자살하기도 했다.
이어 9월 22일에 광성진과 갑곶진을 점령해 불태웠고 조선 를 보이는 대로 포격해 격침시켰다. 조정은 급히 4천명의 지원군을 급파했지만 조선군은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만 사수하며 강화도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고 조정은 강화도를 무력하게 내준 장수들을 처벌하며 분풀이를 했다. 기고만장해진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강화도 곳곳의 민가를 비롯한 주요 방어진지를 무너트리고 방화로 무력화 시켰다. 또한 용진진, 갑곳진,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철곳보, 월곳진을 비롯한 성곽과 요새, 돈대, 관청, 창고, 장대. 심지어 왕이 머무는 강화행궁에도 불사르고 왕실 도서관인 외규장각의 약탈을 자행했다.
그런데 10월 3일 프랑스 해군은 60명의 장병을 보내 정족산성을 정찰한 다음에 점거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는데 매복하고 있던 양헌수가 기습을 가해 동문에서 2명, 남문에서 4명의 수병을 사살했다고 기록했다[20]. 조선군 전사자는 1명이었고 촌민들이 40명 가량의 전사자를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양헌수의 병인일기에 따르면 진시(8시)에서 미시(14시)까지 계속된 전투에 조선군의 탄약이 바닥났을 무렵 때마침 프랑스 해군이 물러났다고 한다. 계속된 승리에 방심한 프랑스 해군은 당나귀음식을 잔뜩 싣고 거의 나들이를 가듯이[21] 정족산성에 진입했는데 이것이 패착이 되어 패하고 말았다. 결국 조선이 협상할 의사가 없음만 확인한 로즈 제독의 원정군은 10월 9일부터 축차적으로 퇴각했고, 10월 13일에 완전히 조선에서 철수한다.
이 때 프랑스 해군의 사기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대국 프랑스의 군대가 아시아 깡촌의 소국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참전했던 프랑스 해군 장병들은 격분해서 로즈 제독에게 복수전을 하자고 주장했지만, 제독은 퇴각을 고집했다. 특히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식민지에서 여러 차례 쌓은 실전 경험으로 정예 부대로 꼽히는 편이었기에 프랑스 해군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복수에 적극적이었다. 이후 로즈 제독은 프랑스의 위신을 실추시켰다며 가루가 되도록 욕을 먹었다. 하지만 말단 수병들이나 하급 장교들이 그랬다는 것이지, 프랑스 정부가 이후로 조선에 대한 보복에 관심이 없었기에 로즈 제독은 전쟁 이후 잘만 승진했다.

4. 의의


결과적으로 침략군을 몰아냈으니 전략적으로 따지면 조선의 승리가 맞긴 하다. 그렇기에 교과서에선 단순히 프랑스를 물리쳤다 정도로 서술하고 있다. 허나 병인양요는 군사적으로 보면 결코 승리라고 하기 어려우며, 쇄국으로 일관하던 조선에게 근대화된 서양 국가의 무력을 실감하게 해 준 사건이었다.

'''저들의 화포는 사거리가 20리나 되었고 포의 앙각에 따라 장단을 조절했다. (중략) 적의 총은 사거리가 500보에 화승 없이 쏘는데, 쏘는 속도도 귀신처럼 빨랐다.''' - 양헌수, 병인일기

당시 프랑스군의 소총은 전장식 강선총인 미니에 라이플이었는데, 연사력 자체는 화승총보다 조금 나은 정도지만 사거리는 4배에 달했고 명중률 및 살상력도 훨씬 높았다. 또한 조준사격이 가능하고 위력도 강력한 서양식 대포는 조선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때문에 병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서양 군대에 맞서기 위해 군사력 증강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된다.
간혹 사극에서는 프랑스군이 큰 피해를 입고 무너진 것처럼 묘사하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대파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며, 오히려 불과 수백명의 프랑스군에게 '''문수산성이 함락되고 성 내 누각과 관아의 건물들과 강화행궁이 모조리 불타버리는 등 피해가 심했다.''' 다만 수백 명의 병력이 섬멸되고 지휘관 어재연까지 전사한 신미양요와는 달리 병인양요에서는 지휘관 급의 피해는 없었고 사상자도 수십 단위를 넘지 않은 걸로 보고됐다.[22]
조선군은 확실한 피해 집계는 전해지지 않으나 실제 피해는 상당했을 것으로 보이며 대략적으로 '''조선군 100명당 프랑스군 6명'''의 싸움이었다. 프랑스 해군의 피해도 정확하지 않은데 양헌수는 최소 수병 6명을 죽였고 퇴각하는 프랑스 해군을 구경한 촌민들이 죽은 프랑스 군인들을 40명은 족히 보았다고 증언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로즈 제독은 전사자는 없고 부상자가 30여명이라 보고 했다. 영미권과 일본, 중국 등의 다른 나라 저서들에서도 프랑스 측과 비슷한 기록을 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의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조선 측이 사기고양을 위해 전과를 과장했거나 아니면 프랑스군이 단순히 엄폐한 것을 사살했다고 혼동한 결과로 보인다.

5. 프랑스 측 관점


국뽕에 대한 반감과 자국혐오적인 사상 때문에 병인양요를 조선의 승리라고 서술하는 것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작 전투를 치른 프랑스 측이 이를 자신들의 패배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유명한 쥐베르의 글에서는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당시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관 의사였던 마르탱이 1883년에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병인양요를 명백히 "패배"로 규정하고 있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신부는 프랑스 함대의 철수를 '''야반 도주'''라고 불렀으며, 원정 함대의 장병들이 원통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승전이 가졌던 의의나 가치의 정도에 대해서는 논할 수 있겠으나, 조선이 승전했다는 것 자체는 양국이 인정한 사실이므로 부정할 수 없다.
영국의 잡지인 이코노미스트에서도 1870년 9월 24일 기사에서, 프랑스가 조선에서 겪은 패배는 서구 열강들의 약화의 증거이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로즈 제독이 철수를 계획한 이유도 정족산성을 점령하려면 최소한 500명의 보병과 1개 포대가 필요한데, 원정 함대에서 이들을 더 조달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공세종말점에 도달해서 더 이상의 작전도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거기에 프랑스가 조선의 개항을 관철시키지 못했고 약탈품 외엔 얻은 것이 없으니 결국은 전략적인 패배. 실제 접전에서는 조선을 정복할 수 있지만, 그런다고 해서 본인들이 이루려는 목적을 이룰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전반적인 서양에 대한 반감이 커졌으며 1870년에 일어난 중국의 텐진 교안도 이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H.쥐베르라는 프랑스 군인의 종군일기에 나오는데, 당시 프랑스군의 실패가 '''프랑스인들이 고려인들에게 패배하여 도망갔다, 프랑스인들은 이제 무적이 아니다!'''라는 소문으로 청나라 전국에 급속도로 퍼져나갔으며, 청국의 고관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까지 이를 통쾌해하며 조선에게 당한 프랑스의 패배를 과장해서 소문을 퍼뜨렸고, 이런 분위기에 큰 자극을 받아 일어난 것이 1870년의 폭동의 시발점이라 해석한다.

5.1. 조선에 관심을 두지 않은 까닭


그러나 프랑스가 병력의 운용 실패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역사적 맥락을 잘 모르는 주장이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군대영제국, 러시아 제국과 함께 제국주의 열강 중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세 나라 중 하나였다. 프랑스는 이 당시 전 세계의 바다와 접한 땅을 영국과 다 갈라 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전성기였다.[23] 무장이나 훈련도 면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특히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여러 식민지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 때문에 실전 경험도 무척 많았다. 프랑스가 조선에서 비교적 빨리 물러난 이유는 군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세적인 것으로, 당시 식민지화에 힘을 쓰던 인도차이나 방면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원정대의 주력은 베트남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방면 등의 인도차이나에서 원정 중이었고, 당시 베트남을 지배하던 응우옌 왕조의 산발적인 저항에 부딪혔기 때문에, 더이상 극동에 신경쓰기 힘들었다. 거기다 당시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통일전쟁에도 개입하고 멕시코 제2제국을 건설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여러 사업을 벌여놓은데 그 결과가 신통치 않은 상황이라 조선에 개입하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화는 1880년대야 마무리되며,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저항 세력 뿐만 아니라 베트남에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나라와도 전쟁(청불전쟁)을 치러야 했을 정도였다.[24] 마찬가지로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의 미국도 전후 복구와 서부 개발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신미양요 이후로 딱히 조선에 진출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편전쟁으로 중국으로부터 홍콩을 할양받은 영국조차도 해외 식민지들을 거느리는 영향 때문에 그와 조금 가까운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틈을 타서 조선에 무력 도발하여 강제 개항에 성공한 것이 일본이며, 이는 '''일본의 국력이나 군사력이 프랑스나 미국을 앞섰기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6. 영향


프랑스 측 지휘관 피에르 - 귀스타브 로즈 제독은, 이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해군소장(contre-admiral : 영미의 rear-admiral에 해당)에서 중장으로 승진하여 보불전쟁에도 참가했으며, 1875년에는 지중해 분함대(Escadre de la Méditerranée) 사령관을 맡았다. 로즈가 중장으로 승진한 것이나 지중해 분함대의 위상을 따져본다면, 일각에서 주장하는 좌천설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서양 함대에 비하면 좀 한직이지만, 그래도 프랑스 해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나쁜 자리까진 아니다.
흥선 대원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쇄국 정책에 더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조선의 개국과 근대화는 더욱 더 멀어졌다. 그리고 약탈해 간 각종 문화재 및 서적들은 서양의 동양 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1993년 방한했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도서관 사서들의 반대[25]를 누르고[26] 반환을 약속하기도 했다.
딱 한 권 정상 회담 자리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반환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외규장각 도서의 영구 대여 방식[27]으로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한국으로의 반환이 양국 정상 간에 합의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외규장각 도서 전체의 반환에 대한 세부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프랑스 측이 외규장각과 한국의 다른 문화재를 맞교환하자는 요구를 했고, 당연히 한국 측에선 들어줄 수 없는 요구인지라 김대중 정부 당시 비준 거부 및 협상 중단 선언으로 외규장각 도서는 돌아오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 프랑스 측에 협상 재개를 요청해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고, 후임인 이명박 대통령은 프랑스와 교섭에 성공해 G20 회의 기간 중 외규장각 서적들을 프랑스로부터 돌려받았다. 프랑스 국내법상 '반환'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못했으며, '영구 임대' 표현은 프랑스 도서관의 반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대신 '5년마다 자동 갱신 임대' 형식으로 사실상 영구히 돌려받았다. 이에 '실리를 택한 것이다', '소유권을 명확하게 우리 쪽으로 돌리지 못했다'라는 논쟁이 일었다. 어찌되었든 외규장각 서적들은 10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편 병인양요로 인해 조선에서는 서양의 침략에 대한 공포심이 크게 확산되었다. 강화도가 프랑스 군대에게 함락당하자, 이 소식을 듣고 아편전쟁 때처럼 프랑스 군대가 도성에까지 쳐들어올까봐 겁에 질린 한양의 백성들이 앞다투어 산속으로 피난을 떠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공포와 불안이 크게 번진 사회 분위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세상을 뒤엎으려는 엉뚱한 야심가도 나타났으니, 바로 이필제(李弼濟 1825~1871년)였다.[28] 이필제는 병인양요가 터지고 조선 사회에 서양에 대한 공포심이 퍼지자, 이를 악용하여 "앞으로 조선이 서양에 망하지 않으려면, 먼저 나를 따라 이 나라 조선을 뒤엎고 새로운 조정을 만든 다음, 청나라와 일본을 정복하여 힘을 키우고, 그 다음 서양 나라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라는 주장을 퍼뜨리며 사람들을 선동하여 '이필제의 난(1869~1871)'을 일으켰다. 이 이필제의 난은 1869년부터 1871년까지 2년 동안 5번이나 계속 발생할 만큼, 조선 조정의 골칫거리가 되었다.[29]

7. 미디어


  • 여러 번 드라마에서 다룬 신미양요와 달리, 1980년대 MBC 사극드라마조선왕조 500년 대원군에서 다룬 게 그나마 상세하게 다룬 정도다. 여기서도 프랑스 에게 조선군이 마구 털렸다. 그런데, 드라마에선 청나라 을 입긴 해도 상투를 쓴 조선인이 나와 프랑스 군 장교와 같이 와 항복하라는 말을 하는 게 나왔다. 조선군 장수가 조선인이면서도 이 배신자!라고 사격을 명하지만 그 조선인과 프랑스 군 장교는 얼른 피하고 프랑스군 포격이 이어진다. 이후 조선군이 반격하네 뭐네 영상도 없이 내레이션으로 프랑스군이 알아서 철군했다는 게 정설이라고 나온다.
  • 찬란한 여명은 그나마 프랑스 해군의 당시 복제를 최대한 따라해보려고 시도한 흔적이 있는 등 고증 개념이 희박하던 시절임을 고려할 때 그럭저럭 노력한 편이다. 다만 함 승조원들 외 육전대원들은 육군의 복식을 흉내낸 피복[30]을 착용한 점이 아쉬우며,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조선 군민도, 프랑스군도 수십 명씩 마구 죽어나가는 걸로 나오는 고증 오류가 있다.
  • 크리스 마르케의 북한 사진집인 북녘 사람들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측 기록을 언급하면서 서문을 열고 있다. 다만 프랑스와 조선 간의 관계 때문에 언급했을 뿐이지 전반적인 스탠스는 비판적이다. 마르케가 알아주는 사회주의자이자 좌파이기 때문. 그리고 북녘 사람들 책에서는 작가 이름을 크리스 마르케가 아니라 크리스 마커라 적고 있다.
  • 한제국 건국사에서는 원 역사의 조선의 승리에는 변함이 없지만 민국인들의 개입으로 역사가 바뀌어 프랑스의 피해가 더 커져 판저파우스트3와 조선의 화약 수송선에 기선 두척이 격침, 문수산 공략하던 프랑스 병력들은 크레모아와 C4에 피떡이 되버리고 총사령관 로즈 제독 이하 지휘부 전원이 포로로 잡히며 조선군 해안포대 사격에 손상된 기선을 예인할 능력이 없어 자침시키는 유래없는 대패전으로 바뀐다. 이후 프랑스의 권위는 이후 벌어진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이후 처리 과정에서의 벨로네의 망발로 땅바닥으로 떨어져 버렸고 이후 프랑스의 신미양요 참전에도 영향을 끼친다.[31]

8. 관련 항목



9. 관련 문서




[1] 종군 화가였던 프랑스군 장교 주베르가 기록한 것이다.[2] "병인년에 일어난 양이(洋夷, 서양 오랑캐)의 소요".[3] "프랑스의 한국 원정".[4] 실제 전투에 투입된 건 수백 명. 나머지는 프랑스군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걸 막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5]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6] 오늘날의 여권에 해당.[7] 이때까지 서양은 조선을 고려, 즉 코리아라고 불렀다. 지금도 마찬가지고.[8] 2번째 한국인 가톨릭 사제.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사제 서품 1년 만에 순교해 '피의 순교자'라 불리는 반면, 사제가 된 후 약 12년간 박해의 칼날 아래 활동하다 병사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땀의 순교자'라 불린다.[9] 다만 이때는 병인양요 직전은 아니고, 1851년의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언급하는 박해는 병인박해가 아닌 기해박해 등 그 이전의 박해를 말한다.[10]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11] 한국 천주교에서 활동한 최초의 성직자.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으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되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중 하나.[12] 현재는 100~200명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13] 이후 신미양요운요호 사건 당시에도 영종진은 {강화도 - 월미도}방어선의 중심이었고, 3차레의 전투로 영종진은 폐진이 되어버렸다.[14] 'salèe'는 '염분을 함유한, 짭짤한'이라는 뜻을 지닌 불어 형용사 'salè'의 여성형이며 영어의 'salty'에 해당한다. 프랑스인들이 측량 당시 이곳을 소금기가 많은 강으로 여겼는지 이런 이름을 붙였고, 이것이 일본을 거쳐 '염하(鹽河)'라는 그럴듯한(?) 한자어로 옮겨진 적도 있으나, 이름이 붙은 경위가 별로 좋지 않으니 만큼, 우리말로는 강화해협이라고 하면 충분하다고. #, #[15] 이에 대해서는 자료가 확실치 않으나 보통 1,500여 명이라고 하므로 여기에 기재한다.[16] 경강(京江)은 한강 일대를 지칭하는 말로 앞서 한강 수로 탐색을 위해 파견된 프랑스 극동 함대 별동대가 한강 상류로 항진하다 타르디프함이 좌초되어 철수한 사건을 말한다.[17] 문면만 보자면 논리적으로 다소 오류가 있다. 가톨릭을 금지하는 조선에서 가톨릭을 전도한 자체가 조선의 실정법을 어긴 것이었으니... [18] 최장근(崔長根)ㆍ김달성(金達城)ㆍ오준성(吳俊成)[19] 프랑스 측 기록엔 이 전투에서 사망자가 3명 발생했다고 쓰여있다. 한 가지 웃기는 점은, 여기서 조선군이 쓴 전술은 뒤에 있는 정족산성 전투와 마찬가지로 성벽 뒤에 매복해 있다가 적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착각하고 들어왔을 때 일제히 사격을 퍼붓는 것이었다. 똑같은 전술에 2번이나 당할 정도로 당시 프랑스 해군은 조선군을 만만히 봤다.[20]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외 여러 서양 열강들의 기록인 프랑스 측 부상자만 35명에 맞지 않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다.[21] 그 때문에 야포를 갖고 가지 않았다.(...) 이 링크로 가서 정족산성 전투도를 보면 알겠지만, 공격 측이 성문을 공격하기 몹시 불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야사에 따르면 프랑스 해군이 버리고 간 와인과 음식은 조선군이 챙겨서 먹었다고 한다.[22] 이는 프랑스군이 조선군을 만만히 보고 야포도 없이 진입했기 때문이다. 이들과 달리 제대로 화력을 퍼부은 미국은 광성보를 글자 그대로 초토화해 버렸다.[23] 물론 이때쯤이면 미국이 경제적으로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을 죄다 추월했고, 프랑스는 남북전쟁을 틈타 멕시코에 기웃거리다 내전 끝낸 미국이 아메리카에서 꺼지라 하니 부들거리며 꺼지긴 했다. 불과 5년 뒤에 북독일 연방에게 제대로 털리고 결국 독일에 밀려서 열강으로서 상대적인 위상은 차츰 내려갔지만, 그럼에도 세계 5대 강국에 들어가는 강대국에다 제국주의 열강으로써 식민지 점령에서는 영국과 함께 단연 압도적이었다. 사실상 두 국가가 입맛대로 선을 그어놓고 식민지를 죄다 챙기고 독일이나 이탈리아, 벨기에와 네덜란드 등이 남은 부스러기들을 가져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 프랑스가 제대로 챙긴 식민지는 손해를 본 인도차이나를 빼도 프랑스 본토의 '수십 배' 면적의 광대한 아프리카다. 아프리카는 21세기에도 프랑스어 사용자가 많고, 프랑스는 자원채굴 등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24] 프랑스군은 보불 전쟁 직후라서 사정이 말이 아니었지만, 조선보다 군사력이 월등했던 청나라군을 격파하고 베트남의 종주권을 탈취했다.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에서 물러난 것은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25] 골때리는 건 이 당시 사서들 중에는 고문서를 복제해서 원본을 밀반출한 사례도 있었다는 것. 나중에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면서 알려졌는데, 복제하는 과정에서 훼손된 고문서도 많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들이 반대한 이유가 단순히 문화재 보호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범죄 행각을 감추려는 목적이 아닌가 의심받기도 했다.[26] 우리는 일반적으로, '외규장각 도서 반환 약속 이후에 사서들의 반대가 불거졌고 프랑스 정부가 그것을 빌미로 약속을 엎었다'고 알고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름이 한국 측 협상 단장 등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사서들의 반대는 미테랑 대통령의 반환 약속 전에 있었던 일이다.[27] 대여라는 명칭에 피약탈국으로서 아니꼬움이 폭발하지만, 현실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국 / 일본 등의 다른 국가들과 성사되었던 약탈 문화재 환수 사례들과 비교해 보면 프랑스 정부가 제시한 '영구 대여'는 압도적으로 좋은 조건이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전쟁을 통해 빼앗은 문화재 등은 별도의 조약으로 국가간 약속을 하지 않으면 반환 의무가 없다.[28] 본래는 무과급제생인 선달의 칭호를 갖고 있었는데, 무과에 급제를 했어도 벼슬 자리가 오지 않고 무기한 대기발령상태라 사실상 실업자였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고학력 백수였던 셈. 그래서 이필제는 평소부터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불만이 많았고, 이런 세상을 뒤엎어야 한다는 말을 1850년 무렵부터 계속 하고 다녔다. 그런 이필제한테 병인양요와 그로 인한 공포와 혼란은 적절한 기회였던 셈.[29]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017년 11월 25일 발행/ 167~173쪽[30] 그나마 프랑스 본토가 아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주둔 육군 복제를 참고해 만들었으니, 방향은 잘못 잡았을지언정 스태프들이 꽤 고증을 지켜 보려고 노력은 했다고 볼 수 있다.[31] 물론 타이밍 맞게 보불전쟁이 터지며 본국의 정규군 대신 인도차이나 식민지군을 파병하는 선에 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