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버고든 항명

 


'''Invergordon Mutiny'''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이후


1. 개요


인버고든 항명은 영국 해군의 대서양 함대에서 1931년 9월 15~16일에 발생했던 대규모 항명사태이다.

2. 배경


영국 정부는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공공부분의 지출을 삭감하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해군을 포함한 모든 공공기관의 임금을 10%씩 삭감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1925년 이전에 입대한 수병들의 봉급지급 기준액을 이후의 입대자와 동일하게 변경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실질적인 임금은 25% 가까이 감소하게 된다. 이 삭감을 결정한 것은 노동당이었고, 노동당을 지지했던 수병들은 이를 노동계급에 대한 배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3. 전개


임금이 삭감된다는 소식은 신문과 라디오를 통하여 9월 11일에 인버고든 항에 주둔해있던 수병들에게 전달되게 된다. 이러한 삭감 소식은 수병들을 동요시켰고 11일에 10척의 전함이 훈련을 위해 인버고든 항에 입항하면서 빠르게 전파되기 시작한다.
12일 밤에 순찰중이던 HMS 워스파이트당직사관은 수병들이 모여서 임금 삭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을 발견하고 해산할 것을 요구했지만 수병들은 이를 거부한다. 이에 당직사관이 지원을 요청하고 워스파이트의 함장이 지휘하는 지원병력이 도착하자 수병들은 해산하였다. 이후 이 일은 함대 사령관 윌프레드 톰킨슨 제독(당시 해군 소장)에게 보고되었으나 그는 이 사건을 해군성에 보고하였을 뿐 별다른 징계조치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4일에 HMS 넬슨을 포함하는 추가적인 군함들이 항구로 들어오고 상황은 더 악화된다. 이 시점에서 HMS 리펄스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HMS 넬슨, HMS 로드니, HMS 밸리언트의 경우 항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 사태를 진압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해병대마저 파업에 동참하였다. 결국 톰킨슨 제독은 15일에 예정되어있던 기동훈련을 연기시키고 이미 출항한 군함들을 복귀시킨다. 15일 오후에 톰킨슨 제독은 해군성에 다시 한번 상황을 알리며 수병들은 25%의 임금 삭감은 지나치다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항명 이외에 장교에 대한 적대감을 보이지는 않는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해군성은 이에 임금 삭감은 10%에 불과하고 수병들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으며 훈련을 재개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기존에 가담하지 않았던 순양함의 수병들과 부사관들까지 항명에 가담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수병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기준액의 변경 없이 기존 임금의 10%만 삭감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수병들은 즉각 임무에 복귀하였고 16일 아침에 모든 군함이 인버고든 항을 떠났다.

4. 이후


파업을 주도한 다수의 인원이 투옥되었고 200여명의 수병은 퇴역하게 된다. 이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 수병 200여명은 다른 곳으로 전출가게 되었다. 주도자중 한명인 렌 윈콧(Len Wincott)은 이후 1934년에 소련으로 탈출하고 레닌그라드 공방전에도 참전하였으나 영국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굴라그에 10년간 수감되었고 이후 1983년에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또 다른 주도자인 프레드 코프만(Fred Copeman)은 스페인 내전에서 영국 대대를 지휘하였다.
당시 함대 사령관이었던 윌프레드 톰킨슨 제독[1]은 수병들의 항명에 너무 관대하게 대처하였다고 비난받았다.
[1] Wilfred Tomkinson(1877.11.15 – 1971.10.07). 당시 해군 소장이며 1935년에 해군 중장으로 퇴역했다가 2차 대전이 발발하자 현역으로 복귀하였으며 1942년에 다시 퇴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