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도호부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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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촬영
1. 개요
2. 역사
3. 복원
4. 행사
5. 교통
6. 문학초등학교에 있는 원래 건물 두 채

홈페이지

1. 개요


仁川都護府官衙
Incheon Dohobu[1] Office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있는 유형문화재. 단, 문학초 교정에 있는 원래 건물 두 채만 유형문화재이며, 문학경기장 바로 건너편에 있는 건물들은 유형문화재가 아닌 재현물(복원물)에 불과하다. 도호부관아 복원물 바로 옆에 인천향교(문학동 349-2. 舊 관교동 117)가 있으며, 길 바로 건너편에 문학 야구장이 있다.
2019년 10월부로 인천광역시 고시 2019-303호에 의거하여 공식명칭이 인천도호부관아로 변경되었다. 이는 '부평도호부청사'로 불리던 부평도호부관아도 마찬가지다.

2. 역사


1413년 인주군이 인천군으로 개칭되었고 1460년에 인천도호부 관아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인천도호부의 관할구역에 대해서는 인천광역시/역사 문서를 참조하면 된다.
근대(개항) 이전까지의 '원인천'은 제물포 일대가 아니라 도호부관아가 위치한 문학동(관교동)이다.[2]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인 문학산에 비류 때 쌓아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문학산성이 있으니, 관교동 일대는 미추홀 시절부터 인천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셈.
조선당시 행정구역 체계는 도 밑에 대도호부, 목, 도호부, 군, 현이 있었고, 도호부는 중앙에서 파견된 도호부사 아래에 이, 호, 예, 병, 형, 공방의 6방을 두어 사무을 분담케하였다. 건물 구성으로는 객사, 아문, 동헌, 중문, 공수, 삼문, 사주문이 있다.
'''원래는 행정구역 상 관교동 소속이었으나''' 1995년 12월 행정구역 조정으로 북망산(승학산) 동쪽 산줄기를 기준으로 이서 지역이 법정동 문학동으로 편입되면서 관교동의 지명 유래인 인천도호부관아와 인천향교가 법정동 문학동으로 편입되었다.

3. 복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89
현재 문학구장 건너편에 있는 것은 원래의 건물이 아닌,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사료를 토대로 2001년에 복원한 건물이다.[3] 원래 위치인 문학초등학교 자리로 복원할 수 없는 문제가 있어 별도의 부지를 복원 부지로 마련하였다. 원래의 건물 두 채는 문학초등학교에 있다.

4. 행사


문화체험 등 여러가지 행사가 펼치고 있고, 특히 인천지역 초중고생의 소풍(체험학습) 장소가 되기도 한다.[4]

5. 교통


문학구장 바로 건너편에 있으니 문학구장 교통편을 따르면 된다. 아니면 다리품을 팔아야하겠지만 남인천여중 앞 정류장에 내려서 관교중 앞을 거쳐서 가는 방법도 있다. 참고로 인천향교 아래 쪽에 주차장이 있다.
111-2 버스를 타면 수인선 인하대역으로 나가는 것도 가능하다.

6. 문학초등학교에 있는 원래 건물 두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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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343-2 (1995년 12월 이전: 관교동 146-1)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
원래 건물 두 채는 인천문학초등학교에 있는데, 객사의 일부는 1460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동헌은 19세기 초반에 지어졌다.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건물들이 헐리게 되었고 1950년에 도호부 관아 자리에 문학초등학교가 세워지면서 지금 남아있는 동헌, 객사 건물의 위치가 이전되었다.
이 건물은 1914년 부군현 통폐합 이후로 '''부천군청''', 인천시 문학출장소 청사로 쓰이기도 했다.
아동성범죄 예방 차원에서 일반인의 초등학교 출입이 제한되는 추세라 학교 운동장 시민 개방시간에만 탐방이 가능하다.

[1] 이 도호부라는 단어를 영어로 번역하기가 상당히 난감하다. 일단 대강 metropolitan county나 metropolitan prefecture 등으로 의역할 수 있겠지만 영문자료에서도 이런식의 표현은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의역하기에는 사실 인구가 많고 행정구역이 큰 군현만 도호부로 지정된 게 아니라 인구가 적고 면적이 좁은데도 군사적 요충지라는 이유때문에 도호부로 지정된 곳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 걸린다. 원래 그런 목적으로 도호부를 만든 것이기도 하고.(대표적으로 지금의 김포 지역인 통진군).[2] 다만 근대(개항) 이후부터는 제물포 일대가 시가지로 발전되면서 원인천이 되었다.[3] 단순한 복원차원이 아니라 없어졌던 것을 아예 새로 만드는 식의 복원이다 (숭례문 복원의 경우처럼 기존의 자재의 일부라도 재활용하는 수준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문학초에 있는 건물 2채와 달리 문학구장 건너편에 있는 건물들은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있지 않다.[4] 부평, 계양지역에서는 학생들이 부평도호부관아에 탐방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