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역사
현재의 인천광역시는 크게 인천, 부평, 강화 세 권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부평 권역인 계양구, 부평구, 서구 (검단 제외)의 1914년 이전 역사는 부평구/역사 문서와 계양구 문서의 역사 항목을, 1914년에서 1940년 사이의 역사는 부천시/역사 문서를, 서구 검단 지역의 1995년 이전 역사는 김포시/역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강화 권역인 강화군의 역사는 강화군 문서를 참조바랍니다.
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인천'이란 이름은 조선 태종 13년(1413)에 최초로 언급되었고, 삼국사기에는 '''미추홀'''(彌鄒忽)[2] 이라고 나와있다. 고대시대의 인천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로는 백제 건국설화에서 온조와 갈라진 비류가 인천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데 비류 설화에서는 바다의 짠물 탓에 식수를 구하기 어려웠고 땅이 거칠고 척박해 백성들이 속속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얼마 못가서 망했고 이를 비관한 비류는 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 온조 설화이다. 반면 비류 설화에는 미추홀이 사람이 살기 부적합했다는 내용이 없다. 비류 때 쌓아놓은 산성터는 현재 문학산[3] 에 있는데,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상당부분이 유실되어 현재는 일부 흔적만 남아있는 상태다. 그런데 지금은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모양.
이후 고구려와 신라가 인천 지역을 차지했는데 신라 초기에는 '''매소홀현(買召忽縣)'''으로 불렸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소성현(邵城縣)'''으로[4] 개칭된 후 인근 율진군(栗津郡. 지금의 경기도 과천시의 전신)의 영현이 되었다.
2. 고려시대
1018년에 수주(樹州. 지금의 부평, 부천시의 전신)의 속현이 되었고, 이자겸의 이모 인예태후가 숙종의 모후가 되면서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되었다.[5] 이후에 이자겸의 딸 문경태후가 인종을 낳아 '''인주'''(仁州)로 승격되었다.
공양왕 때는 고려 왕실의 추락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고려 왕실과 인연이 깊은 인주를 '''경원부'''(慶源府)로 다시 한번 승격하게 된다. 그러나...
참고로 사전적으로는 강화군 역시 인천에 포함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인천은 무신정권과 대몽항쟁 당시 38년간 고려의 수도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인천 본토의 역사와 강화도의 역사는 별개로 치는 지라 이런 표현을 거의 쓰지 않는다.
3. 조선시대, 구한말
고려 왕실과의 인연으로 현에서 군, 군에서 주, 주에서 부로 '''세 번이나''' 승격되었으니 이성계의 조선 건국 이후 당연하게도 강등되어 '''인주군'''(仁州郡)이 된다. 이후 행정구역 개편(1413년 10월 15일)[6] 으로 지금의 '''인천'''(仁川)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7] 1460년에 '''인천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참고로 인주에서 인천으로 명칭이 바뀐 일자가 10월 15일인데 인천시민의 날도 이 날짜로 지정되었다.[8] 현재 인천광역시 중구 지역에 해당하는 포구 이름인 제물포(濟物浦)라는 이름도 알려져 있었지만, 개항 이전까지는 널리 알려진 이름은 아니었다. 부산의 '동래'와 다르게 인천의 '제물포'란 지명은 정식 옛 지명이 아닌, 인천도호부 지역 중에서 조그만 어항 일대를 가리키던 명칭이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관교동이 동인천보다는 상대적으로 내륙에 있지만 1910년 이전의 옛 인천 지도를 보면 그렇다고 보기가 힘들다. 저때만 해도 용현동을 비롯한 상당한 지역은 바다였다.
조선시대에는 인천(당시 인천도호부)의 범위가 도호부관아 소재지인 '''관교동[9] /문학동 일대를 중심으로, 현 인천광역시 중구, 동구, 미추홀구, 연수구, 남동구를 비롯하여 '소래'(또는 '신천')라 부르는 시흥시 북부를 거쳐 현 부천시·광명시 옥길동'''까지 포함되었다.[10] 이 외에도 현재의 화성시 비봉면 일부에 해당되는 월경지인 '이포면'도 있었으나, 1906년 남양군에 편입되었다. 도호부 청사에 대한 내용은 인천도호부관아 문서 참조.
인천도호부의 진산(鎭山)은 소래산[11] , 안산(案山)은 문학산이었고, 부평도호부의 진산은 계양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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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인천부와 부평군의 영역.
숙종 시기에 반역향이라 해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도로 도호부로 재승격된 적이 있다.
인천의 중심이 관교-문학 지역에서 지금의 '''제물포, 동인천으로 옮겨진 것은 구한말 개항 이후'''. 개항 직후에는 개항장인 제물포에 감리서[12] 가 설치되었는데, 관교동 소재의 인천관아 본청과 제물포 소재의 감리서 간 갈등이 심했다고 하며, 극심한 갈등 끝에 인천부사(오늘날의 인천광역시장에 해당되는 직책)가 자살하는 흑역사까지 일어난 적이 있다. 참고기사 오늘날로 치면 시청 본청과 출장소 간의 싸움이 나서 시장이 자살한 셈(...).
이후에 인천부 청사도 이전되어 1906년 관교동을 중심으로 한 부내면이 '구읍면'으로 개칭되었고, 지금의 중구 일대(본토지역 한정)인 다소면 일부가 부내면으로 개칭되었다.[13] 제물포로 이전한 인천부 청사의 터가 지금의 인천 중구청 청사자리다. 같은 시기에 지금의 연수구 일대인 먼우금면(원우이면)도 서면으로 개칭되었다.[14]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부평을 인천과 별개의 지역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부평도호부에 대한 자세한 역사는 부평구/역사 참조.
1895년 23부제 개편으로 부평, 강화, 교동, 김포, 통진, 양천, 시흥(지금의 영등포, 금천, 광명 일대), 과천, 안산, 수원, 남양과 같은 경기 서남권 군현들을 인천부 산하로 두었고, 원 인천도호부 지역은 인천부 산하 인천군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1896년 13도 개편으로 인천부 산하 군현들이 경기도 산하 군으로 분리되었다.
3.1. 구한말 당시 인천부 산하 행정구역[15]
- 부내면 (개항 이전 다소면 지역) : 인천광역시 중구(본토 지역)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지금의 동구 지역을 흡수하여 인천부에 잔류하였다.
- 다소면 : 인천광역시 동구(작약도 제외), 미추홀구(용현동, 도화동, 숭의동, 주안동 대부분)
- 주안면 : 인천광역시 남동구(구월동, 간석동), 부평구(십정동)
이상 두 면이 1914년 통합되어 부천군 다주면이 되었다. 다만 지금의 동구 지역은 인천부에 남았다.
- 구읍면 (개항 이전에는 부내면)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학익동, 주안동 남부 일부, 관교동, 문학동), 연수구(선학동)
- 서면 (개칭 이전에는 먼우금면) : 인천광역시 연수구(선학동 제외)
이상 두 면이 1914년 통합되어 부천군 문학면이 되었다.
- 남촌면 : 인천광역시 남동구(남촌동, 논현동, 고잔동, 도림동, 만수동 일부, 수산동)
- 조동면 : 인천광역시 남동구(만수동 일부, 장수동, 서창동, 운연동)
이상 두 면이 1914년 통합되어 부천군 남동면이 되었다.
- 신현면 : 경기도 시흥시(신현동, 은행동, 신천동, 대야동, 포동, 방산동, 미산동)
- 전반면 : 경기도 시흥시(매화동, 안현동, 금이동, 도창동)
- 황등천면[16] : 경기도 시흥시(계수동, 과림동, 무지내동), 부천시(계수동, 옥길동), 광명시(옥길동)
이상 세 면이 1914년 통합되어 부천군 소래면이 되었다.
- 기타 도서지역 : 영종면(현 중구 영종도 등), 용유면(현 중구 용유도, 무의도, 실미도 등), 덕적면(현 옹진군 덕적면 및 자월면 일부)
해당 도서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천군에 편제되었다.
인천부 월경지인 이포면(지금의 화성시 남양읍 신외리/장전리, 비봉면 유포리/삼화리)은 1906년에 남양군에 편입되었다.4. 일제강점기
1883년 개항 이후 급속도로 도시가 커졌다. 이에 따라 관교-문학이었던 인천의 중심이 제물포 개항장으로 옮겨갔다.
그러다가 '''1914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대개편하면서 구 도심지역 중 핵심지역인 현 중구, 동구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옛 인천부 지역과 부평군 전역을 통합하여[17] '''부천군'''('''부'''평+인'''천''')으로 개편되었다. 일본어로는 진센(じんせん)이라고 독음되었다. 부군면 통폐합 초안에는 인천은 안산과, 부평은 양천과 통합되는 것으로 짜여져 있었지만, 최종시행안은 인천의 외곽지역이 부평과 통합하여 부천군이 출범하였다. 인천과 부평이 모두 경인선 연선에 위치한 고을이었기에, 이 둘을 경인선에 맞춰 통합시키려 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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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 인천부와 부천군의 행정구역 상황.
1940년에 부평에 일제의 조병창인 미쓰비시 공장이 들어섰고, '''1940년 인천부 부역 확장'''으로 부평이 인천에 편입되었다. 군사병참도시로서의 성장도 가속화되는[18]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의 외지에 있던 연합군 포로수용소 중 최대규모의 수용소 역시 인천에 있었다는 것. 또한 일본 육군은 인천에 조선소를 세워서 육군의 독자적인 잠수함(?!)인 '마루유' 중 일부를 인천에서 건조하기도 했다.
1940년 인천부 2차 확장 당시에, 부평역 인근을 제외한 편입지(부내면 북부-원부평 지역, 서곶면, 남동면 등)는 깡촌이었는데도 대규모 확장이 감행된 데는 사실은 일제가 부평, 부천 지역을 두고 경성부 추가 편입이냐 인천부 추가 확장이냐의 여부를 두고 갈팡질팡하다가 인천부 확장으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
4.1. 부평지역 경성부 편입 떡밥
일제가 1939년에 ''''경인일체화''''의 목적으로(병참기지화의 목적이 짙었음) 당시 시흥군 동면(현 서울 금천구, 구로구 동부, 영등포구 대림동, 동작구 신대방동, 관악구 대부분), 서면 일부(현 경기 광명시 일부), 부천군 소사면/부내면/오정면(현 경기 부천시, 서울 구로구 서부, 인천 부평구, 계양구 남부), 계양면(현 인천 계양구 북부), 서곶면(현 인천 서구), , 김포군 양서면/양동면(현 서울 강서구, 양천구), 고촌면(현 경기 김포시 고촌읍) 일대를 경성부에 편입시키는 방안(이른바 제2차 대경성계획)을 검토한 적은 있었다. # # [20] 하지만 이 떡밥은 사실상 백지화되어 이듬해인 1940년에 인천부 2차 확장을 시행하였다. 참고 논문 사실 거기에는 인천의 추가확장을 원하던 인천부와 경성의 추가확장을 추진하던 조선총독부 간의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떡밥은 일제가 시흥군 영등포읍을 영등포부로 승격하지 않고 경성부로 편입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서울특별시/역사 참조.
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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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15 광복 당시 인천부의 행정구역 상황.
1945년 10월 10일에서 27일까지 제물포시가 되었다가 다시 인천부로 환원되었다.
해방 이후 1949년 인천부에서 '''인천시'''로 개칭되었다.
6.25 전쟁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 하에 인천 상륙작전이 개시되어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되어 유명해졌다. 이 때문에 인천의 자유공원에는 맥아더 동상이 세워져 있다. 또한 전두환 대통령 당시 세운 인천상륙작전 기념관도 연수구 송도유원지 옆에 있다. 게다가 인천의 무당들 중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를 모시는 무당들도 있다고 한다.[21]
일제가 1940년에 인천의 행정구역을 대폭 확장했기 때문에 말만 동이지 실제로는 깡촌과 다름없는 지역이 많았다. 1980년대 이전에는 시가지라고 할만한 데가 '''제물포, 동인천, 주안, 부평역 인근, 계산동 일부''' 정도였다. 지금의 '''연수구 본토, 구월동 일대 등지는 시골이었다.''' 이는 1963년 서울 편입 이후 1970년대 말 압구정 개발 이전까지의 강남과 비슷한 셈. 1956년에는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 옛 인천부 잔류(개항장) 지역 : 인천시 중부, 남부, 북부, 동부출장소
- 옛 부천군 문학면 : 인천시 문학출장소 (사무소: 인천도호부관아)
- 옛 부천군 다주면 : 인천시 주안출장소[22]
- 옛 부천군 남동면 : 인천시 남동출장소
- 옛 부천군 부내면 : 인천시 부평출장소
- 옛 부천군 서곶면 : 인천시 서곶출장소
경기도청을 서울특별시에서 경기도로 빼오는 과정에서 인천과 수원이 치열하게 나선 적이 있었지만 결국은 수원이 가져가게 되었다.
1968년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중구(←중부출장소+남부출장소), 동구(←동부출장소+북부출장소), 남구(←주안출장소+문학출장소+남동출장소), 북구(←부평출장소+서곶출장소)의 4개 구를 설치하였다. 이후 1979년 인구 100만 명을 돌파하고, 1981년 7월 1일에 대구시와 함께 각각 경상북도와 경기도에서 승격분리되어 '''인천직할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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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직할시 시절 휘장 및 상징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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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인천직할시 승격 당시 행정구역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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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88년 북구에서 서구가, 남구에서 남동구가 분구되고, 이듬해인 1989년 옹진군 영종면, 용유면 및 김포군 계양면을 편입하였다.
1989년 확장 이전에 인천시는 김포군 검단면·계양면, 옹진군 영종면·용유면, 시흥군 소래읍의 인천 편입을 주장했지만 경기도의 어그로를 끌었고, 시흥군 소래읍의 시흥시 승격을 앞두고 있던 상황이라 김포군 검단면(이쪽은 1995년에 인천 편입이 성사됨)과 시흥군 소래읍의 인천 편입은 관철되지 못했다.기사
1995년 '''인천광역시'''로 개칭되고 북구에서 계양구가, 남구에서 연수구가 분구되었으며, 계양구와 분구된 기존의 북구는 부평구로 개칭 되었다. 이와 동시에 강화군, 옹진군 전역과 김포군 검단면을 편입하면서 현재의 행정 구역이 완성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부천시와 굴포천 일대의 미세한 경계 조정(계양구 서운동의 극히 일부 지역이 부천시에 편입)이 이루어졌다. 1995년 인천 시역 확장을 앞두고 내무부에서 김포군(현 김포시), 옹진군, 강화군, 시흥시의 전역의 인천 편입을 추진하였지만, 그 중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 검단면만이 인천으로 편입되었다.참고 기사 인천 확장안에 대한 시흥시 의회의 반발 역사적으로 인천으로부터 도농분리된 지역인 부천시와 시흥시는 인천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강화군과 검단 정도가 편입된 것을 보면 1995년의 인천 확장은 역사적 도농통합 의미보다는 다분히 인천 시세를 키우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짙었다고 볼 수 있다.
1947년 이후 인천 시가지의 변천과정을 항공사진으로 보려면 이곳을 방문하면 된다.
2015년 인천광역시청은 일부 자치구의 명칭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기사 중구는 제물포구, 동구는 화도진구[24] , 남구는 문학구[25] , 서구는 서곶구[26] , 남동구는 구월구로 변경될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동구와 남구가 구 명칭 변경을 추진했고 그 결과 동구는 화도진구, 남구는 미추홀구라는 새 명칭을 확정했다. 그러나 동구의 경우 동구의회에서 명칭 변경안 동의를 거부하면서 구명 변경 작업이 중단됐다. 결국 남구만이 구 명칭 변경에 성공해 2018년 7월 1일부터 미추홀구로 구 명칭이 바뀌었다.
6. 관련 문서
[1] 이른바 넓은 의미의 '원인천'이라 부르는 지역[2] 미추홀구(舊 남구)가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3] 조선시대 인천의 중심지인 문학동과 관교동도 여기 근방에 있다.[4] 야구 명문으로 잘 알려진 동산중학교와 동산고등학교의 교가 첫 소절인 "소성 옛 터에 자리를 잡고"에 나오는 소성이 바로 소성현이다.[5] 이자겸으로 유명한 그 '경원' 이씨의 경원이 맞다.[6] 2013년 인천광역시에서 '인천 정명(定名) 600주년'이라고 한 것도 이 때를 기준으로 했다.[7] 지금의 인천(시흥시 북부 포함. 단, 부평구, 계양구, 서구 및 부천시, 서울 구로구 안양천 이서지역 제외)과 서울 영등포 권역(+광명시)은 고려 시대에는 각각 인주(仁州)와 금주(衿州)였으나, 조선 개국 이후 전국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끝이 -주(州)로 끝나는 일부 지명을 州자에서 세 개의 점을 빼내어 모조리 -천(川)으로 바꾸어, 각각 인천(仁川)과 금천(衿川)이 되었다. 과천의 경우도 마찬가지(과주→과천).[8] 원래는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된 7월 1일이 인천시민의 날이었다.[9] 관교(官校)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인천도호부 '관'청과 인천향'교'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인천관아와 인천향교 자리는 현재 행정구역 상 관교동이 아닌 문학동 소속이다(...). 이게 1995년 12월 행정구역 경계조정 탓.[10] 참고로 지금의 부평, 부천 지역 중 인천도호부 지역이었던 동네는 부평구 십정동, 부천시 계수동/옥길동이다.[11] 지금은 인천광역시와 시흥시의 경계에 있지만, 당시에는 산 전체가 인천도호부에 속했다.[12]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인천광역시 직속 제물포출장소와 비슷한 개념.[13] 그런데 현재 인천의 중심은 구월동인데, 구월동이 관교동의 옆동네이니, 조선시대 옛 중심지 인근으로 컴백했다고 할 수 있으려나.[14] 동춘동에 있는 서면초등학교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오게 된 것이다.[15] 이른바 넓은 의미의 '원인천'이라 부르는 지역[16] 옛 인천도호부 지역 중 현재 유일하게 직접적인 서울생활권인 지역이다. 그 예로 부천시·광명시 옥길동, 시흥시 과림동·무지내동 지역은 시외전화 지역번호로 경기도의 031도, 인천권의 032도 아닌 서울의 02를 사용한다. 나머지 인천부 지역은 그저 서울광역생활권일 뿐. 또한 황등천면은 구 인천도호부 지역 중 유일하게 서해안 수계가 아닌 한강 수계지역에 속한다.[17] 덤으로 강화군 북도면(현 옹진군 북도면)과 남양군 영흥면(현 옹진군 영흥면 및 자월면 일부), 대부면(현 안산시 대부도, 풍도)도 부천군으로 넘어왔다.[18] 이때 '''현 부평구의 절반''' 정도가 일본의 군산업지구로 구획되었다고 한다.[19] 이와 함께 다주면의 잔여지역인 현 남동구 간석동, 구월동 및 부평구 십정동 일대는 문학면으로 이관되었다.[20] 이것이 정말 실현되었다면 지금의 인천과는 모습이 많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21] 이 인천상륙작전을 배경으로 통일교에서 오! 인천이라는 영화를 만든 흑역사가 있다.[22] 현재는 남동구 소속인 구월동, 간석동도 당시 주안출장소 관할이었다. 인천부 시절에 이들 지역이 주안면이었다는 것을 떠올려보자.[23] 1973년 부천군 폐군으로 계양면이 김포군으로 이관. 이때 오정면도 김포군으로 이관되었으나, 1975년에 부천시로 환원되었다.[24] 화도진에서 유래[25] 문학산에서 유래[26] 구 부천군 서곶면에서 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