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재
任熙載
1472년 ~ 1504년
조선의 문신. 임사홍의 아들로 김종직의 제자이다.
어릴 때부터 엄청난 천재였다. 1486년 9월 15일에 15살의 나이로 소과에서 진사시의 1등을 하고, 2년 뒤에는 대과 초시에도 합격한다. 이를 두고 신하들은 임사홍의 권력을 이용한 부정 시험이라고 비난했지만, 임사홍은 임희재가 초시 합격할 때 귀양을 가있다가 직첩도 반년 전(1486년 3월)쯤에 돌려받은 상황이었고 전방위로 까이던 사람이었는데 부정시험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훗날 무오사화 때 이목에게 쓴 편지로 아버지와 같이 국문을 받고 훗날 갑자사화 때는 무오사화 때 일 때문에 다시 국문을 받다가 대나무에 연산군을 비판하는 시를 쓴 게 들통나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임희재가 죽었을 때 중종실록의 사관의 평에 의하면 연산군이 이 일로 자신에 대하여 원한을 가지는 거 아닌가하여 임사홍을 감시했더니 되려 잔치를 벌이고 있었기에 마음을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만화가 고우영은 자신의 만화에서는 임희재 사망 사건을 이를 각색해서 임사홍이 죽은 아들을 호적에서 파내 모른 척하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덧붙여 그리기도 했다.
1472년 ~ 1504년
1. 개요
조선의 문신. 임사홍의 아들로 김종직의 제자이다.
2. 생애
어릴 때부터 엄청난 천재였다. 1486년 9월 15일에 15살의 나이로 소과에서 진사시의 1등을 하고, 2년 뒤에는 대과 초시에도 합격한다. 이를 두고 신하들은 임사홍의 권력을 이용한 부정 시험이라고 비난했지만, 임사홍은 임희재가 초시 합격할 때 귀양을 가있다가 직첩도 반년 전(1486년 3월)쯤에 돌려받은 상황이었고 전방위로 까이던 사람이었는데 부정시험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훗날 무오사화 때 이목에게 쓴 편지로 아버지와 같이 국문을 받고 훗날 갑자사화 때는 무오사화 때 일 때문에 다시 국문을 받다가 대나무에 연산군을 비판하는 시를 쓴 게 들통나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임희재가 죽었을 때 중종실록의 사관의 평에 의하면 연산군이 이 일로 자신에 대하여 원한을 가지는 거 아닌가하여 임사홍을 감시했더니 되려 잔치를 벌이고 있었기에 마음을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3. 대중매체에서
만화가 고우영은 자신의 만화에서는 임희재 사망 사건을 이를 각색해서 임사홍이 죽은 아들을 호적에서 파내 모른 척하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덧붙여 그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