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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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 | 燕山君

[image]
연산군이 안치된 연산군묘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없음
존호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
(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
시호
없음
군호
즉위 전 - 없음, 폐위 후 - 연산군(燕山君)[1]
출생
1476년 11월 23일 (음력 11월 7일) 0시 36분[2]
조선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3]
즉위
1495년 1월 25일 (음력 12월 29일) 신시
조선 한성부 창덕궁 인정전
사망
1506년 11월 20일 (음력 11월 8일)
(29년 11개월 28일, 1만 955일)
조선 경기도 강화군 교동현 화개산 주변 또는 그 외 2곳
능묘
연산군묘[4]
재위
조선 왕세자
1483년 3월 14일 ~ 1495년 1월 25일
(음력 1483년 2월 6일 ~ 1494년 12월 29일)
조선 국왕
1495년 1월 25일 ~ 1506년 9월 18일
(음력 1494년 12월 29일 ~ 1506년 9월 2일)
(11년 7개월 24일, 4,25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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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全州)

융(㦕)
부모
부왕 성종, 모후 폐비 윤씨
형제
이복동생 중종 이역
부인
폐비 신씨

1. 개요
2. 상세 내용
4. 가족사
4.1. 아내 신씨와의 관계
4.2. 자녀
5. 가계
6. 이야깃거리
8. 사극 및 출판물 포함 매체에서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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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서(史書)뿐이다.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위하는 자는 은휘(隱諱)한다.’ 하였으니, 사관(史官)은 시정(時政)만 기록해야지 임금의 일을 기록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근래 사관(史官)들은 임금의 일이라면 남김없이 기록하려 하면서 아랫사람의 일은 은휘하여 쓰지 않으니 죄가 또한 크다. 이제 이미 사관에게 임금의 일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나 아예 역사가 없는 것이 더욱 낫다. 임금의 행사는 역사에 구애될 수 없다.

연산군일기 63권, 연산 12년 8월 14일 辛酉 5번째기사

조선 제10대 국왕이다. 조선에서 광해군과 함께 폐위된 후 복위되지 못한 왕이다.[5]
휘는 융(㦕)이다. 폐위되었기에 묘호시호가 없다. 생전에 받은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라는 존호가 남아있다. 성종폐비 윤씨의 적장자로 태어나 원자로 책봉되었고,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연산군보다는 폐왕(廢王)이라고 많이 불린다.[6]
한국에서 폭군의 대명사이다. 고려 충혜왕 같은 더 심한 폭군도 있지만 연산군의 인지도가 월등히 높다. 재위 초반의 치세는 괜찮았지만 무오사화갑자사화 두 차례 사화를 벌이며 갑자사화 이후 죄없는 사람을들을 잔혹하게 처벌하거나 또는 죽였다. 사치향락에 빠져 국정을 태만히 했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되어 교동도유배를 간 뒤 31세 나이로 사망했다. 연산군은 이후 조선에서 걸왕주왕에 비유되었다. 공포정치로 엄청나게 강력한 왕권을 누렸으나 결국 견디지 못한 신하들에 의해 반정이 일어났다.

2. 상세 내용


조선에서 세상을 떠난 직후 조(祖)나 종(宗)으로 끝나는 묘호를 받지 못한 네 명 왕 중 한 명이다. 본인에게 별다른 권력이 없던 공정왕[7], 아무런 잘못 없이 세조에게 내몰린 노산군[8], 임진왜란 때 공이 있는 광해군과 달리 반론의 여지없이 폭군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연산군일기광해군일기와 차원이 다르게 잔인한 내용이 많다. 본인의 실정으로 인해 반정으로 쫓겨났다는 점은 같지만, 그럼에도 이 둘은 그럭저럭 비슷한 동급이 아니라 명백히 연산군 쪽이 한 술 더 뜨는 악명을 떨치고 있다.
연산군이 폭군으로 흑화한 이후, 그가 한 패악질은 '임금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임금 입장에서는 그냥 취미생활인데 신하들이 득달같이 "전하도 연산군이 되려고 그러십니까."하고 반발하였다. 나중에는 왕권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여 왕이 무언가 해보려고 하면 신하들이 연산군을 사례로 들어 반대했다.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지만 않았어도 폭군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동정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다짜고짜 부관참시 능지형 등등 잔혹한 고문으로 죽이고, 어떤 일을 할 때 사관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손녀를 입궁시키라는 명령에 신하가 불경하게 대답했다는 이유로 죽이고 하는 모습을 보면 동정론이 쉽지 않다.

3. 생애




4. 가족사



4.1. 아내 신씨와의 관계


아내 폐비 신씨신수근의 여동생으로 성격이 후덕하고 엄정하기로 유명하였고, 남편의 폭주를 막아보려고 여러 번 간언하지만 실패했다. 그래도 조강지처인지 연산군은 그녀를 내치지도 않았고, 그녀의 후덕함을 황금에 새겨 치하하기도 했다. 또한 신하들에게 왕인 자신을 높일 때는 반드시 중전 또한 같이 높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고 한다. #
게다가 신씨는 서슬 퍼런 갑자사화 때 연산군을 거스르고도 뒤탈이 없었던 거의 유일무이한 인물이기도 했다. 연산군이 손에 검을 들고 자순대비에게로 찾아가 얼른 밖으로 나오라며 협박을 하자 신씨가 울면서 연산군을 막아섰는데, 놀랍게도 그 연산군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검을 칼집에 꽂고 자순대비의 거처를 떠나버려 자순대비가 화를 면했다고 한다.
중종반정 후 연산군과 신씨는 유배될 때 각각 다른 곳에서 보내져 지내게 되었고 끝내 두 번 다시 살아서 만나지 못했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연산군이 역질[9]로 죽자 교동수직장[10] 김양필, 군관 구세장은 이 사실을 중종에게 보고하면서, "죽을 때 다른 특별한 말은 없었고, 그냥 중전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만 남겼습니다"라고 말했다. * 어떻게 보면 나름대로 인간적인 유언이다. 그런데 신씨 또한 폐출되면서 연산군과 함께 가게 해달라면서 울며 매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연산군의 무덤은 처음에는 강화도에 있었지만, 부인 신씨가 간청하여 몇 년 뒤 오늘의 위치로 이장했고, 신씨 역시 사망한 후 연산군의 옆에 묻히게 되었으니, 결국 유언은 이루어진 셈이다. 장례는 왕의 지위가 취소되었으므로 왕자(대군)의 예로 치러졌다. 이러한 신씨의 정성이 정말로 연산군을 아내로서 사랑해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단지 신씨가 답답할 정도로 착했던 것인지는 본인에게 물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실록을 보면 연산군이 신씨를 아낀 대목이 부분부분 등장한다. 신씨가 왕대비와 선릉에 친제[11]하러 갔다고 연산군이 교외나 제천정에 나가 직접 맞이하였다는 기록도 있고 * * 신씨가 친잠례를 했다는 이유로 교서를 반포한 적도 있다.*
다른 기록에는 자기가 보기에 신씨는 너무 어질고 덕이 많은 사람인데 자기가 말하지 않으면 남들이 모른다고 안타까워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신씨의 어진 덕을 알리기 위해 옥책을 내리겠다며 옥책문에 들어갈 어질고 아름다운 내용을 조목조목 밝히며 명하는가 하면 *, 그 다음 날에 바로 옥책을 내린다는 전교를 내렸다. *
며칠 뒤에는 옥책을 직접 내리고 싶은데 이미 즉위한 중전에게 내리는 예법이 없어 절차를 신하와 의논했었다. 그러면서 내외명부를 모조리 불러 보게 하려다가 장소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까였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 아예 중전의 덕을 황금에 새겨 치하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국고가 텅텅 비었을 때인데다, 옥책 내린지 한 달 정도밖에 안 지났을 때라고 *

4.2. 자녀


또, 연산군은 기록으로만 살펴보면 적지 않은 후궁을 두었던데다 섹스 중독 기질로 인해 다산으로 유명한 태종 이방원이나 친아버지인 성종 이혈에 맞먹을 정도로 많은 자식을 보았을 거 같은데 이 두 사람에 비하면 연산군의 자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연산군은 유일한 정실 부인이었던 신씨와의 사이에서 (요절한 자식을 포함하여) 9명 정도의 자식을 얻었다고 하며, 연산군의 후궁 숫자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역사 책마다 다른 편이라 단언을 내릴 순 없지만, 가장 많은 경우를 가정하면 약 20명 가량인데 그 20명의 후궁들이 낳은 자식들을 모두 합친다 해도 연산군이 신씨 한 명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보다 겨우 1~2명 많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연산군의 후궁들 중 연산군의 아이를 가진 후궁은 별로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이 38년 동안 살면서 총 28명의 자식을 보았는데, 이 중 3명만 정실 부인인 폐비 윤씨정현왕후에게서 얻은 자식이었고, 나머지 25명은 모두 후궁들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는 점과 대조적인 대목이기도 한데, 장녹수에게 빠져 조강지처인 신씨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거 같은 기존의 이미지와 비교하면 의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검열삭제를 안 하기로 유명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의 종이었던 장녹수는 당시 30대였고 유부녀였으나, 엄청난 동안과 애교로 연산군을 녹여서 가지고 놀았다고 전해진다. 연산군의 후궁 노릇을 하면서 권세를 누리다가 중종반정 이후 처형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총애를 받았다면서도 의외로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아이는 영수옹주 한 명있었다고는 하는데 단명했던 걸로 전해진다.
연산군의 아들은 태어나자 마자 세상을 뜬 장남과 순서로는 둘째이지만 형이 태어나자 마자 죽은 바람에 한때 세자 자리에 올랐던 폐세자 이황, 창녕대군, 양평군 이인, 이영수, 이인수가 있고, 딸은 휘신공주와 요절한 적녀, 정식책봉되지 않은 옹주가 3명 있었다고 한다.
연산군과 중전 신씨의 아들인 이인수가 한자 표기는 다른 두 명으로 나타나는데, 이에 관하여 의견이 갈린다. 이 둘사이의 자식은 한글 이름이 같은 6남 2녀, 한자 표기가 다른 두 명으로 보면 7남 2녀다.
폐세자 이황을 포함한 연산군의 아들 3명은 연산군이 폐위된 이후 반정 공신들에 의해 사약을 받았다. 반정 당시 세자 이황은 10살이었는데, 학구열이 높아서, 마치 할아버지 성종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야사에 따르면 중전 신씨의 오빠인 신수근[12]박원종으로부터 반정에 참여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임금은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까 기대를 걸어보자”며 참여하지 않아 결국 역적으로 몰려 제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0세 장남 이황과 창녕대군양평군은 각각 겨우 5살과 9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연산군 폐위 이후 몇 달 만에 사사되었다. 연산군의 막장 포스에 묻히는 감이 있지만, 반정 공신들의 조치 역시 당시에는 엄연한 불법이다. 조선의 법도는 설령 역적의 자손이라 해도 16세 미만의 경우는 사형을 금하고, 노비로 만드는 것이 최고형이었다.
그래서 중종도 어린 조카들을 죽이라는 반정 공신들의 요구에, 처음에는 "어린 애들이 무슨 죽일 죄를 지었으며 장차 위협이 될 가능성도 낮고 인정상으로도 못할 짓이다"라는 이유로 거부했지만, 요구가 계속되자[13] 결국 이기지못하고 모두 죽이고 말았다. 그나마 중종은 폐세자 이황의 장례나 제대로 치러주라고 명령했지만, 이 또한 묵살당했다.[14]
그런데 양평군 이인의 이름은 중종 8년에 다시 등장하는데 '만손'이라는 이름의 10대 소년이 스스로 양평군을 자처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남학동에서 성장하다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자신의 종인 '보동'이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아이를 대신 내어 놓고 자신을 보자기로 덮어 다른 곳으로 빼돌린 후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양평군을 어릴 적부터 키웠던 '이손'이라는 인물이 증인으로 나타나면서 만손의 사건은 자작극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손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양평군의 신체적인 특징과 만손의 특징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만손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만손은 처형되었다.
시집간 딸들은 출가외인으로 간주, 손대지 않았다. 서인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어차피 공주는 출가외인인지라 신분에 큰 변화는 없었고, 게다가 삼불거(三不去)중 하나로 부인을 내쫓아도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 내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15]
큰 딸 휘신공주는 구문경에게 시집가서 아들 구엄을 낳았는데, 구엄이 연산군을 시봉(侍奉)했고, 지금도 구엄의 후손들이 연산군의 묘를 돌보고 있다. 구엄은 연산군의 외손 봉사를 하면서 왕실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오래도록 왕실의 외척으로 예우를 받았고, 범죄를 저질러도 연산군의 제사를 끊어지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감형의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구엄에게도 아들이 없었고, 구엄이 사망한 후 외손인 이안눌이 연산군의 제사를 계승했다. 이안눌은 구엄의 친외손자는 아니었는데, 이동의 아들로 태어나 아저씨뻘 되는 이필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이필의 부인이 바로 구엄의 딸이었다. 연산군의 제사는 부인 신씨가 시작하여 외손자인 구엄에게 이어졌고, 다시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과 그의 후예들에게로 이어졌다.
생모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둘째 딸 옹주는 신거흥에게 시집가서 4남 4녀를 낳았다.
다른 딸 2명 역시 역시 생모가 알려지지 않은 후궁 소생들이었는데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전에 일찍 죽었다.
한편 연산군의 후궁들은 처형된 장녹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신들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5. 가계


  • 왕비: 폐비 신씨
    • 딸: 폐휘신공주 이수억(李壽億)[태지]
    • 딸: 왕녀 [16]
    • 아들: 원손(元孫)[17][18]
    • 아들: 폐세자 이황(廢世子 李𩔇)[태지2]
    • 아들: 폐창녕대군 이성(李誠)[태지3]
    • 아들: 왕자 이인수(李仁壽)[태지4]
    • 아들: 왕자 이총수(李聰壽)[19][20]
    • 아들: 왕자 이영수(李榮壽)

  • 후궁: 폐숙의 이정이(李貞伊)
    • 아들: 폐양평군 이인(李仁)[태지5]
  • 후궁: 폐숙의 윤씨
  • 후궁: 폐숙의 곽씨
  • 후궁: 폐숙의 권씨
  • 후궁: 폐숙의 민씨
  • 후궁: 폐숙용 장녹수(張綠水)
    • 딸 : 왕녀 이영수(李靈壽)[태지6][21] - 권한(權鷴)의 처[22]
  • 후궁: 폐숙용 전전비(田田非)
    • 딸: 왕녀[23]
  • 후궁: 폐숙용 조씨
  • 후궁: 폐숙원 최보비(崔寶非)
  • 후궁: 폐숙원 김귀비(金貴非)
  • 후궁: 폐숙원 장씨
  • 후궁: 폐숙원 이씨
  • 후궁: 폐숙원 정씨
  • 후궁: 궁인 정금(鄭今)
    • 딸 : 왕녀 이함금(李咸今)[24]
  • 후궁: 궁인 최전향(崔田香)
  • 후궁: 궁인 수근비(水斤非)
  • 후궁: 궁인 김숙화(金淑華)
  • 후궁: 여완 월화매(月下梅)
  • 후궁: 여완 안씨
  • 후궁: 장씨
  • 생모미상의 왕자녀
    • 왕녀 이복억(李福億)[태지7]
    • 왕자 이돈수(李敦壽)[태지8]
    • 왕녀 이복합(李福合)[태지9]
    • 왕녀 이정수(李貞壽)[태지10]
    • 왕자 이태수(李泰壽)[태지11][25]
    • 왕녀 - 신거홍(愼居弘)의 처[26]

6. 이야깃거리


  • 사림들은 연산군이 몰래 임사홍의 집을 찾아가 임사홍으로부터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형당해 죽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고 믿었는데 증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 반정 공신들이 반정 명분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연산군에 관한 이야기 중 일부를 날조하거나 과장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를 다루는 도서로 《연산군을 위한 변명》,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 등의 책이 있다. 반정 공신 대부분이 연산군 체제에서 근무하던 관료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박원종이 있다. 태종실록에서 1차 왕자의 난정도전의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인 것처럼 서술했듯 연산군의 악행 또한 과장되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 연산군은 밤중에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 후원을 달려다니고, 본인이 무당이 되어 노래하고 춤 추며 폐비 윤씨의 영혼이 빙의된 듯 행동했다.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은 대신 세력을 숙청하고 싶었던 것이고 폐비 윤씨는 단지 구실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연산군의 이상한 성격에 폐비 윤씨의 죽음이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일 확률이 높다

왕이 두어 해 전부터 광질(狂疾)을 얻어 때로 한밤에 부르짖으며 일어나 후원(後苑)을 달렸다. 또 무당 굿을 좋아하여, 스스로 무당이 되어 주악(奏樂)하고 노래하고 춤추어 폐비(廢妃)가 와 붙은 형상을 하였으며, 백악사(白岳祠)에 자주 올라가 굿을 하였으므로, 궁중에서는 폐비가 빌미가 되었다고 하였다.

연산군일기 63권, 연산 12년 8월 23일

  • 비슷하게 정치적 다툼으로 아버지를 잃었지만 성군이 된 정조가 있다. 따지고 보면 둘의 상황은 다르다. 사도세자가 죽을 때 정조는 연산군보다 나이가 많았고, 영조사도세자를 추모하는 것처럼 하며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정조에게 사도세자를 죽인 정당성을 여러 차례 훈계했다.
  • 성종실록을 보면 연산군 즉위 전 성안에 요귀(妖鬼)들이 나타났다. 호조 좌랑 이두(李杜)의 집에서 여귀(女鬼)가 말을 하며 음식을 먹고, 영의정 정창손의 집에서는 귀신이 집안의 물건을 옮겼다는 폴터가이스트 기록이 있다
  • 어린이용 위인전이나 역사 만화에서는 사치스러운 폭군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살이 뒤룩뒤룩 찐 돼지같은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었다. 인조 때 이덕형[27]이 쓴 《죽창한화(竹窓閑話)》를 보면 이덕형이 97세 노인을 만났는데, 이 노인이 13세 때 도성에서 연산군이 행차하는 것을 보았다. 연산군은 얼굴이 희고, 마른 체형에 키가 컸으며, 눈에서는 붉은 빛이 돌았다고 한다. 실록에 전라도 부안의 한 백성이, "우리 왕은 허리가 가늘어서 저 모양이다"라는 식의 말을 한 게 들통나 잡혀간 이야기가 있다.
  • 귀하고 비싼 음식을 많이 먹었다. 전국 팔도를 쥐어짜서 귀한 식재료를 공수하는 걸로 모자라 중국에서 수입해 먹었다. 실록을 보면 중국에 가는 사신에게 중국의 귀한 과일인 여지용안을 구해오게 한 기록이 있다.# 중국 수박을 먹고 싶어할 때 반대한 신하를 사형시켰다. 연산군 때문에 후대 왕들은 비싸고 맛있는 것 좀 먹으려 하면 신하들에게 '연산군이 했던 짓입니다!' 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 어리고 똘망한 노비들을 모아 귀뚜라미·베짱이·메뚜기·잠자리 따위를 잡아 바치게 하였는데 정력을 보양하기 것이었다.
>상이 전교하기를 "각사(各司)의 노복(奴僕) 가운데 연소하고 총명한 자를 골라 궐문(闕門) 밖에서 번을 나누어 교대로 근무시키되, 이름은 ‘회동습역소(會童習役所)’라 하고 이전(吏典)으로 통솔하게 하되 이름은 ‘훈동관(訓童官)’이라 하여 귀뚜라미·베짱이·잠자리 등 곤충을 잡아 바치게 하라." 하였다.
>
>연산군일기, 연산군 12년 5월 23일 임인 3번째 기사>
  • 야사에 의하면 외모가 어머니 폐비 윤씨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전 조선 국왕들은 대체로 무인 가문이라는 점 때문인지 몸이 두껍고 건장한 편이었다고 한다. 요절한 단종은 제외하고라도, 이성계이방원, 심지어 재위 기간이 짧았기에 병약한 이미지로 생각되곤 하는 문종도 실제로는 풍채가 컸다고 한다. 이성계 어진만 봐도 전장을 누비던 장군 출신이라 그런지 체형이 두꺼운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연산군은 당시 신하들에게 "왕이 풍채가 없고 외모가 여자 같다"는 뒷말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키는 아버지인 성종을 닮아 컸다고 하며[28] 성격은 선조들을 닮아서 무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 즉위 초에 치통을 앓았다고 한다. 근데 성종과 중종도 치통을 앓았다. 중종은 무려 재위 25년동안 죽을 때까지 치통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연산군이 즉위 초에 치통으로 고생해 치통을 계기로 최초로 칫솔을 사용했는데 나무로 만든 양치목이었다.
  • 면창이라는 피부병을 세자시절부터 즉위하고 난 후에도 앓았다. 이 면창을 치료하기 위해 의관들이 명나라의 동의를 얻어 웅황해독산과 선응고라는 치료제를 구해왔다. 명나라에 치료제를 구하기 전까지 연산군의 피부질환은 아무리 치료해도 계속 재발되고 병의 차도가 없었다. 명나라에서 치료제들을 구해온 다음에도 함부로 임금의 용안에 먼저 발라볼 수 없기에, 연산군과 같은 피부질환을 앓은 노비에게 우선 먼저 치료제들을 발라보기 시작했다. 치료제를 바른 후 시간이 지나면서 노비의 면창이 조금씩 나아지는 효과를 보이자, 의관들은 명나라에 가서 치료제들을 많이 구해오고 제조법을 물어본 다음 연산군에게도 면창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또한 면창과 더불어 종기가 떠나지 않았다는 기록도 세자시절의 실록에 기록되어 연산군이 면창을 앓았던 시기는 세자 때부터 즉위 초반이다. 연산군의 외모에 대한 묘사는 이덕형의 수필집인 죽창한화에서 이덕형이 한 노인을 만나 연산군의 외모를 들으면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노인은 이덕형에게 자신이 어릴 때 연산군을 목격했는데 그는 키가 크며 수염이 적고 빛이 희고 눈에 붉은 빛이 돌았다고 언급했다. 또한 이 노인은 어릴 때 본 연산군을 그의 재위 끝무렵에도 다시 한번 봤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연산군이 면창 치료가 제대로 안됐다면 노인은 다시 본 연산군에 대해 빛은 희나 용안이 얽었다, 종기(부스럼)나 흉터 자국이 있었을 거라고 언급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언급은 없기에 연산군의 면창은 완벽하게 치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9] 이를 투영했는지 영화 간신에서 연산군은 얼굴에 붉은 반점이 있는 설정으로 나오는데 이에 대해 가끔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영화에 나왔던 것처럼 실제로 연산군이 얼굴에 붉은 반점이 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 언론 인터뷰에서 연산군역을 맡은 배우 김강우가 이에 대해 한 언론 인터뷰를 했다. 김강우는 연산군은 선천적, 정신적 결함이 있고 태생적으로 결핍이 있는 설정으로 나와 그런 열등감이나 결핍이 외모적으로 드러나면 좋을 것같아서 얼굴에 붉은 반점을 그리는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고 한다.
  • 위에서도 말했듯, 예술에 재능이 있었기에 직접 지은 시도 많이 남아 있으며[30], 춤도 잘 췄는데 특히 처용무가 주특기였다. 궁중에서 처용의 분장까지 하고 춤을 추었을 정도였으며, 말을 타고 마상에서 처용무를 추는 묘기를 부린 기록도 남아 있다.[31] 또한 연기력도 뛰어나서 직접 죽은 사람이 통곡하는 모습을 연기하면, 주변의 흥청들이 모두 따라 울어 연회장이 순식간에 눈물 바다가 될 정도였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군주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취미 활동을 잘하기 전에 정치를 잘해야 했다는 것이다. 취미를 갖고 있는 것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본업에 충실하면서 틈틈히 짬을 내 취미 생활을 했어야 옳았다.
  • 연산군 대에 연은분리법이 개발되었다. 이는 훗날 동아시아 생산량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치며 훗날 세계사조차 바꾼다(!) 조선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지 않고(이시기 세계관은 우리예상보다 훨씬 넓다. 순조 때 나폴레옹을 알 정도) 그냥 조선에 은이 없었다.
  • 임해군이 왕이 되면 이런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가 있다. 실제로 임해군의 성격이나 행적을 보면 이렇게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32]
  • 연산군 집권 초중반기는 실존 인물인 홍길동이 한창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후 홍길동전 등 홍길동이 '의적'이란 이미지를 얻게 된 것에는 연산군의 이러한 폭정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도 작용했다는 추측이 있다. 다만, 홍길동이 활동하다가 잡혔을 때까지 연산군은 아직 그럭저럭 정치를 잘 하고 있을 시기였다.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0년 5월 12일자 기사를 보면 코끼리 발을 사들이라고 연산군이 지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미식가 기질을 볼 때 정말 먹으려고 했는지, 아니면 약재로 사용하려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 연산군일기의 연산군 11년 12월 29일의 기사에서는 광대 공길이 늙은 신하 흉내를 내며,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수 있으랴.'라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연산군은 불경죄를 물어 공길을 곤장을 쳐서 멀리 유배보냈다는 사실이 나온다. 이 일화를 바탕으로 연극 이(爾)[33]와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과 공길의 동성애 코드가 이용된 창작물이 나왔다.
  • 한편 위의 왕의 남자를 감상한 가수 안예은은 연산군과 공길의 감정변화를 공길의 시점에서 풀어나간 노래 '홍연'이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했다. 이 노래로 K팝 스타 시즌5 예선에 참가한 안예은은 유희열에 의해 슈퍼패스로 합격한 것이 화제가 되었고, 후일 안예은이 데뷔한 이후, 이 노래는 연산군 시대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6화와 7화의 엔딩곡으로도 사용되었다.

7. 《연산군일기


조선 왕조 건국 이래 최초로 반정으로 축출되어 왕권을 상실했던 임금이었기 때문에, 광해군과 함께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행적 기록을 담은 실록호칭도 실록이 아닌 일기로 격하되었다. 그래서 연산군과 광해군의 행적 기록은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실록이 아닌 일기로 부른다.[34]

8. 사극 및 출판물 포함 매체에서


희빈 장씨, 이순신, 사도세자 등과 더불어 잊을만하면 재탕, 삼탕해주는 사극주인공.
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으로 잘 알려져있는데다가 개인사 뿐만이 아니라 가족사를 비롯해 워낙 인생이 드라마틱해서 매체에서 유난히 많이 다뤄지는 것 같아보인다.
진짜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최종보스급으로 비중이 높은 경우도 많다. 1980년대 이전에도 미디어 믹스가 자주 이루어진 인물이었는데, 연산군의 유난한 막장 행보가 군사 독재 정권의 잔혹한 행위를 좀 더 나아보이게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는 다소 견강부회적인 분석도 존재한다.
[image]
(위는 《왕과 나》의 정태우, 아랫줄 왼쪽은 《왕의 남자》의 정진영, 오른쪽은 《왕과 비》의 안재모)
역대 연산군 배우들. 출연 당시 나이는 만나이.
  • 당시 28세 이강조 : 영화(공포) 이조괴담 (1970년)[35]
  • 당시 34세 신영균 : 영화 《금삼의 피》 (정확히는 2부작 영화)
  • 당시 28세 임영규 : MBC 《조선왕조 500년 - 설중매》 (1985년)
  • 당시 44세 이대근 : 영화 《연산군》
  • 당시 18세[36] 이민우 : KBS 《한명회》 (1994년)
  • 당시 39세 유동근 : KBS 《장녹수》 (1995년)
  • 당시 37세 유인촌 : 영화 《연산일기》 (1988년),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
SBS의 《임꺽정》에도 나오는데, 《임꺽정》에서는 3화까지만 나오는 조연이다.
보다시피 이대근과 정진영 등을 빼고는 2, 30대 배우가 대부분 담당하였으나[37] 이상하게 연산군은 40대 배우가 많이 담당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이는 한국영화 역대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인 왕의 남자의 정진영의 잔상인 듯하다. 실제로 2010년대 이후로 주로 30대 중후반 배우들이 연산군을 많이 연기하게 된다. 그만큼 대사량이 많고 감정선도 오락가락하는 인물이라 연기력이 왠만큼 절륜하지 않는 이상 연기하기 굉장히 힘든 배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연기경력이 비교적 적고 20대 배우들보다는 더 절륜하고 풍부한 30, 40대 배우들이 더 많이 맡게 되는 듯 하다. 단 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10대 후반에서 20대에 연산군 역할을 한 배우들은 젊은 나이에도 사극계의 본좌들이라 부르는 자들이라 호평들을 받았다.
신상옥이 감독한 《연산군》과 그 속편 《폭군연산》은 당대에 보기 힘든 해석으로 유명하다. 포인트는 연산군이 모든 잘못을 깨닫고 정치를 원상태로 돌리려고 하는데… 다음 날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한국 영화로서는 정말 이례적으로 상영 시간이 3시간을 넘긴다.
그러나 신상옥 본인은 《연산군》과 《폭군연산》을 흑역사로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연산군》은 신정 프로에 맞춰서 서둘러 제작 하느라 제작 기간이 불과 2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고, 《폭군연산》 역시 흥행업자들의 독촉으로 서둘러 만드느라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지어 북한에 있을 때 신상옥 감독은 서울에 있던 조카에게 편지를 보내 《연산군》과 《폭군연산》의 오리지널 네가를 소각하라고 지시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오리지널 네가를 어떻게 할 수 없었는데, 후에 신상옥 감독은 귀국한 후에 한국영상 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연산군》과 《폭군연산》의 오리지널 네가를 반출해 가서는 각각 14분, 54분씩 삭제 재편집을 해서 가져다 놓았다. 심지어 《폭군연산》은 반출해간 네가가 유일본 이었던지라, 《폭군연산》의 사라진 54분은 이제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조선왕조 오백년》의 신봉승이 자주 다루는 시대가 세조 ~ 연산군까지이다.
인수대비의 일생의 마침표를 찍는 비극으로 그리고 있는데, 실제로 《조선왕조 5백년》 최고의 인기작인 《설중매》의 후반부가 바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임영규 – 연산군, 이미숙장녹수, 고두심인수대비인데, 원작 소설은 대단히 잔인하고 검열삭제가 난무하는 작품이다. 이를테면 검열삭제 묘사가 제대로 나오고, 귀인 엄씨귀인 정씨를 처단하고 시체를 훼손하는 이야기 역시, 아들들에게 직접 때려 죽이게 하고, 완전히 나체로 만들어 현장에서 찢어버리게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에 비해 드라마판은 가급적 수위를 낮추었다.
드라마적으로 해석하면, 출생의 비밀과 성격적 결함, 예술가적 기질과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과거사, 그리고 최후의 파멸 등을 겸비한 그리스 고전 비극의 주인공 같은 인물이다.
많은 사극에서 당대 유명 남자 배우들이 연산군을 연기했는데, 그 중 유인촌, 유동근, 이민우의 포스가 절륜하다. 특히 유인촌은 연극인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햄릿 연기[38]칼리굴라의 연기를 그대로 보여준다.[39] 그 외에 대부분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 연기했는데, 현재까지 대중적인 연산군 연기의 최고봉은 《왕의 남자》의 정진영으로, 광기와 애정 갈구가 혼재된 연산군의 심리를 가장 잘 묘사해 냈다. 임영규의 경우에는 현실에서도 약간 그런 성격이란 말이 있다. 아래는 정진영의 씨네21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나는 이성이 발달한 사람이라 영화를 찍으면서 눈치를 본다.

달마야 놀자를 찍을 때는 스님들 눈치를 봤고

와일드 카드를 찍을 때는 형사들 눈치를 봤다.

황산벌김해 김씨 문중 눈치를 봤다.

그런데 연산군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더라. 그렇게 외로운 사람이었던 거다."

ㅡ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으로 열연한 배우 정진영, 《씨네21》 인터뷰 중에서

왕의 남자》의 원작인 연극 《이》에서는 공길에 의해 남색사디즘에 눈을 뜨는 것으로 그려진다. 폭정보다는 장녹수와 공길 사이에서의 삼각 관계가 부각되는 게 특징.
한편 《왕과 비》에서 연산군을 맡았던 안재모의 연기도 이들에 못지않게 뛰어났다.
당시 연산군에 캐스팅 될 때만 하더라도, 전작 《용의 눈물》의 반듯하고 어진 세종대왕 (충녕) 이미지가 남아있던 터라, 미스 캐스팅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폭군 역을 절륜하게 소화하여 큰 호평을 얻었다.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과 최악의 폭군을, 그것도 20대 초반의 나이에 모두 연기한 셈. 특히 폐비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할머니 인수대비의 지독한 냉대로 인해 점차 사이코패스 반항아가 되어 항상 할머니한테 엿 날릴 궁리를 주로 하며[40], 나중에 갑자사화 이후로는 서로 나 죽고 너 죽자 식으로 달려들며 대립한다. 마지막에 폐위되면서까지도 "할머니 소원대로 폐주가 되었습니다!"라고 광기를 부리면서 외쳐대는 것은 덤. 극 중 인수대비와 연산군의 치열한 대립은 워낙 살벌했던지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등골을 서늘게 만들 정도다. 덕분에 중반까지 부진하던 《왕과 비》가 연산군의 등장으로 시청률이 크게 상승하는 뒷심을 발휘하여 유종의 미를 거뒀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안재모가 연기한 연산군의 경우, 자기복제가 심한[41] 정하연 작가 특성상 전작이었던 장녹수의 유동근이 연기했던 연산군과 겹치는 대사와 장면이 많았다. 자칫 어설프게 연기했다가는 유동근 복제판이 되었을 수도 있었지만, 안재모의 절륜한 연기덕분에 이 둘의 연산군은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고, 덕분에 전혀 복제판으로 보이지 않는다.
참고로 대하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출연했던 4명이 연산군 출신이다.
  • 태종(유동근) = 《장녹수》의 연산군 역
  • 양녕대군(이민우) = 《한명회》의 연산군 역
  • 충녕대군(세종, 안재모) = 《왕과 비》의 연산군 역
  • 방번(무안대군, 정태우) = 《왕과 나》의 연산군 역
과거에 단종을 3번이나 맡았던 정태우는 처음으로 연산군 역에 도전하여, 당시 막장가도를 달리던 《왕과 나》를 연기력으로 살려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왕과 나》 후반부는 '왕과 나'가 아니고 '연산군'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덧붙여 신상옥판 《연산군》과 같은 결말을 맞는다. 김처선이 죽은 후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다음날부터 바른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42]하는데, 그날 밤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반정군이 들이닥치자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며 몇몇 중신에게 "네가 왕좌에 앉으려 하느냐?"고 패기 넘치게 따진다. 그러나 반정군이 진성대군을 옹립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는 표정이 순식간에 누그러진다. 진성대군이라면 양위 받을 자격이 있다며, 순순히 왕의 자리에서 물러난다.[43] 또한 정현왕후 및 인수대비와의 관계도 다른 사극에서의 평면적인 적대관계가 아니라 상당히 입체적으로 나온다. 작중 연산군의 반발감도 단순한 증오가 아니라 왜 자신을 좀 더 아껴주지 않았냐는 애정 갈구에 더 가깝다. 친아들이 아닌데도 따뜻하게 대해주는 정현왕후에 대한 연산군의 심정은 복잡미묘하다. 연산군이 인수대왕대비전에 난입하여 패륜을 저질렀을 때만은 정현왕후가 참다 못해 대왕대비에게 사죄하라며 이를 듣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회초리를 들겠다고 단호히 충고했는데 이때 연산군이 심경을 털어놓는다. 술을 퍼마시며 반항적이던 눈빛이 갑자기 울먹이는 눈빛으로 변하고 "대비마마, 어찌 진즉 소자에게 이리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어찌 소자가 잘못하였을 때 질책하고 회초리를 쳐주지 않으셨사옵니까? 소자, 대비마마께오서 귀하게 키워주셨사오나, 친자식이 아니어서 회초리 한 번 맞아보지 못한 것이 더 한스러웠다는 것을 어찌 모르셨사옵니까? 소자는 진성대군이 참으로 부럽사옵니다." 이에 정현왕후도 차마 더 뭐라 하지는 못하고 연산군을 안쓰럽게 본다. 그리고 이 쪽은 실록의 기록과는 다르게 특이하게도 꼬꼬마 원자 시절부터 자신의 생모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또한 자신의 생모가 사사되었다는 사실까지도 이미 인지하고 있다는 것.[44]
훗날 정태우MBC 공감토크쇼 놀러와에 출연해서 본래 사극 속 왕은 말 수가 없고 근엄해서 대사가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인데, 연산군은 자신이 맡았던 배역 중 가장 말 수가 많았던 왕이라 그 만큼 대사량이 많아 연기하기 많이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본인은 이 연산군 연기를 통해 그동안 남아있던 단종 이미지를 벗을 수 있게 되어 연산군 배역에 애착이 많이 가는 듯.
이민우는 《한명회》 끝 부분에 잠깐 나와 비중은 적었지만, 한명회가 죽은 후 갑자사화를 벌여 부관참시를 하는 장면이 아주 강렬했다. 특히 을 두들기며 ‘닥치시오!’ 하고 외치는 장면은 인터넷이 발달한 현재라면 플짤감이다. 이때가 이민우가 막 성년이 된 무렵인데, 연산군 연기로 그는 아역배우에서 성인배우로 성공적으로 전환했다. 참고로, 링크된 영상에서 노사신이 앉아 있는 건 노사신이 이미 무오사화가 끝난 뒤 얼마 안되어 죽었기 때문에 이는 고증오류다. 또한 극중에서 홍귀달이 폐비 윤씨의 신원에 반대하다 유배간 걸로 묘사되었지만, 홍귀달은 갑자사화 당시 경기도 관찰사 자리에 있었으며, 손녀를 입궐 시키라는 명을 거역한 죄로 장형을 받고, 유배되던 도중 교살되었기 때문에, 이 역시 고증 오류다.
2015년 영화 간신에서는 김강우가 연산군 역을 맡았는데, 작정하고 19금 영화로 나온 만큼 예술가적이거나 깊은 효심이 있었다는 미화는 싹 걷어내고, 연산군 영상물 중에서 가장 포악하고 광기어린 연산군을 구현해냈다. 잔혹한 살육행각과 섹스 중독적 엽색행각[45], 격한 감수성과 합쳐진 광기, 한편으론 치세 초반에는 왕으로서 제법 제대로 통치했었다는 것이 납득될 통찰력도 보여준다. 덕분에 폭군으로서는 가장 실제 역사기록에 가까운 연산군 묘사로 꼽힌다. 이런 모습을 열연했던 덕분인지, 극장가에선 잔혹성과 선정성에 호불호가 갈려서 큰 재미는 못봤지만 2차 판권에서 대박을 쳤으며, 김강우의 연산군 연기 자체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2017년에는 연산군을 다룬 드라마가 2개나 방영되었는데 그중 MBC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는 김지석이 연산군 역을 맡아 "양반이든 천민이든 여자든 남자든 다 똑같은 인간이다. 유일하게 다른 이가 있다면, 하늘님의 자식인 왕 하나 뿐이다. 왕 외의 모든 이들은 왕의 종일 뿐이다." 라며 전제 왕권이라는 미망을 좆아 광기에 휩싸이는 연산군 역을 잘 연기했다. 해당 문서 참조. 김지석은 이 연기로 2017년 제10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와 MBC 연기대상에서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KBS 2TV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선 이동건이 연산군 역을 맡아 호연을 펼쳤다. 그런데 팬층 사이에서는 '이 드라마는 중종단경왕후 신씨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가 아니라 연산군을 미화하려고 만든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진 주인공은 연산군이다'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연산군의 비중이 크고, 가장 서사가 탄탄한 캐릭터로 그려져 있다.
잘못된 성격을 타고난 건 아니었지만, 어머니 폐비 윤씨 때문에 연산군을 왕위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아버지 성종이 죽기 직전 자신에게 '진성대군이 성인이 되거든 왕위를 양보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걸로도 모자라 자신의 유언을 적은 비밀 유언장까지 만들어 어딘가에 감춰뒀다는 사실을 알게된 뒤 '어머니가 폐비란 이유로 모든 걸 진성에게 빼앗기고 살았는데,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왕위까지 진성에게 양보하란 말이냐!'는 이유로 진성대군을 호시탐탐 의심하고 괴롭히다 끝내 진성대군과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는 설정이 붙었다. 그리고 연산군이 광기 어릴 정도로 권력을 추구했던 이유도 아버지의 그 비밀 유언장 때문에 왕위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하여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왕권을 갖고자 했기 때문으로 나온다.
게다가 나중에는 주인공인 신채경을 두고 진성대군과 연적 관계로까지 얽히게 되는데, 드라마를 보면 어째 채경이가 진성대군보다 연산군과 함께 있는 장면이 더 많이 나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고
유배를 가던 도중 박원종 일파가 보낸 자객들의 습격을 받고 그 상처를 치료하지 못해 끝내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임종 직전 자신을 보러 온 진성대군에게 사죄하면서 눈을 감으려던 찰나,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아버지의 환상을 보며 "드디어 아바 마마께서 내게 손을 내미셨다"는 유언을 남기고 절명한다.
한국 사극의 연산군 하면, 드라마 작가 정하연을 빼놓을 수가 없다. 정하연 작가는 《장녹수》, 《왕과 비》, 《인수대비》 등의 집필을 맡아서, 연산군 시대를 다룬 드라마만 3개를 집필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신동준 著, 지식산업사)에서 그에 대한 재조명을 추구했다지만, 실은 극단적인 옹호로 일관하고 역사학계의 연구는 거의 무시했다.(그래서 불쏘시개 목록에도 올랐다.)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김범 著, 글항아리)이 연산군의 면모를 아는 데에는 훨씬 낫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얼굴에 거의 항상 반창고를 붙이고 다닌다. 위에도 언급한바 있지만, 연산군은 세자시절부터 재위 중반까지 피부병을 앓아 얼굴에 종기 났었는데 이걸 표현한 것이다. 나중에 8권(중종), 15권(경종, 영조), 18권(헌종, 철종), 20권(망국)에서 엑스트라로 나왔을 때도 빼먹지 않고 붙이고 나왔다. 이 책에서는 이 문서에 적혀있는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는데, 즉위 4년까지 군주로서 견실하게 나라 일을 한 모습을 재조명했지만, 후에 왕권 강화 한답시고 연이은 사화를 일으켜 엄청나게 비대해진 대간과 훈구 대신들을 찍어 누르고, 그 강해진 왕권으로 국가 업무에 대한 비전 없이, 그저 자기 맘대로 흥청망청 놀고먹고 백성들까지 괴롭힌 것을 비판하면서, 그저 폭군에 지나지 않았음을 피력하며, "그 후 조선에서 연산 같은 왕은 더 이상 나오지도, 나올 수도 없었다."는 총평을 내리고 있다. 그야말로 반면교사가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준 인물. 또 조선왕조에서 유일하게 중국 황제급의 권력을 휘둘렀던 국왕이었다고 언급된다. 선조, 인조, 고종 등과 함께 가장 통렬한 비판을 받은 군주들 중 한 명이다.
대체역사물로는 봉황의 비상, 이순신의 나라를 쓴 슈타인호프#s-4 작가가 주인공이 연산군에 빙의한 명군이 되어보세!를 연재했다.[46] 해당 문서 참고.
그 외에도 대군으로 살어리랏다에서도 모습을 비췄다. 여기서는 주인공의 도움으로 폭군이 되지 않고 명군이 되었으며 후대에는 엽기적인 행각을 보일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명군이라며 평가받는다.
중종이 여성으로 치환되어 나오는 가상의 역사물 조선공주실록에서는 성종의 외사촌 형제인 한건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호적상) 이복여동생인 진성공주를 여자로서 사랑하고 있다.

9. 관련 문서


[1] 실제로 연산군은 원자 - 왕세자였기 때문에 즉위 이전에 받은 군호는 없다. 폐위 이후에 받은 군호다.[2] 성종실록에는 11월 6일 밤 3경 5점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고, 연산군일기 총서에는 11월 7일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밤 7시부터 익일 5시까지를 각(刻)이 아니라 경(更)으로 표시했다. 그러므로 성종실록에 써져있는 11월 6일 밤 3경 5점은 11월 6일 익일 3경 5점으로 표기한 것이므로 11월 7일 오전 0시 36분경이 맞다.[3] 조선 역사상 최초로 중궁인 교태전에서 태어난 왕이다. 연산군 이전에도 궁궐에서 태어난 왕이 둘(단종, 성종) 있으나 이들은 세자빈의 거처인 자선당에서 태어났다.[4] 중종반정으로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폐위되었기 때문에 '능'이 아니라 '묘'로 불린다.[5] 단종숙종 때 복위되었다.[6] 출처.[7] 정종은 동생인 태종과 술내기 장난을 하는 등 사이가 좋았다. 이 장난이란 첫 눈을 담은 상자를 누가 먼저 하인으로 보내느냐로 한 턱 쏘기 내기를 한 것이다. 상자를 전하러 오는 상대방의 하인을 도착하기 전에 사로잡으면 오히려 잡힌 쪽이 한 턱을 내야 했다. 권력이 없었다는 것도 어폐가 있는 것이, 정종은 이성계 휘하에서 군세를 통솔하는 2인자였다.[8] 정종과 단종은 그래도 300여 년 뒤 숙종 대에 가서 묘호를 받았다.[9] 천연두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는 급성 전염병.[10] 喬桐守直將. '수직'(直將)이라는 말은 건물이나 물건 등을 맡아서 지킨다는 뜻이고 교동은 연산군이 유배된 곳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將'은 우두머리란 뜻인 걸 보면 교동으로 유배된 연산군을 감시하고 유배지를 지키는 사람들의 지휘관이었던 것 같다.[11] 친히 제사를 지낸다는 뜻.[12] 연산군의 측근이자 처남인 신수근 역시, 갈수록 막장이 되어가는 연산군에게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물론 야사지만, 측근이 이렇게 진절머리를 낼 정도라면, 쫓겨나기 전의 연산군이 얼마나 답이 없는 막장이었나를 짐작할 수 있다.[13] 삼정승을 비롯하여 반정 공신이자 당시 조정의 1품 고관들이 모두 중종 앞으로 몰려가, 사실상 강제로 연산군의 아들들을 죽이라는 전교를 받아냈다.[14] 중종이 "결국 니들 말대로 폐세자 이황을 사사시켰는데, 장례나 제대로 치러주지?" 라고 하자, 신하들의 대답이 "서인(庶人)으로 죽은 죄인에게 장례는 무슨. 관곽이나 갖춰서 묻어 주는 것만으로도 후한 조치거든요?" 라는 식이었다. 신하들이 왕의 의견을 대놓고 쌩깐 셈이다.[15] 사실 조선시대 아내가 실질적으로 쫓겨날 수 있는 사유는 직접적인 간통, 시부모에 대한 악질적인 불효, 치료 불가능한 전염병 등으로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다만 여성 인권이 조선 후기 시궁창으로 변하면서, 적당한 돈만 쥐어 주고 합의(라고 쓰고 강제라고 읽는) 이혼당하는 일이 급증하게 된다.[태지] 명 홍치 4년(1491년) 9월 2일 해시에 태어난(皇明弘治肆年玖月貳日亥時生)/세자빈의 딸 수억아기씨의 태를(世子嬪女壽億阿只氏胎)/홍치 6년(1493년) 7월 5일 유시에 묻음(弘治陸年柒月伍日酉時藏)[16] (중력) 금상 전하(今上殿下)가 우의정(右議政) 신승선(愼承善)의 따님을 맞이하여 비(妃)로 삼아서 2녀를 탄생하였는데, 모두 어리다." - 《성종대왕 묘지문》[17] 왕세자빈(王世子嬪)이 원손(元孫)을 탄생(誕生)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25년 2월 23일 임오 5번째기사》[18] 국기일(國忌日)이었는데, 원손(元孫)이 졸(卒)하였다. (후략) - 《성종실록, 성종 25년 3월 29일 무오 1번째기사》[태지2] 명 홍치 10년(1497년) 12월 19일 자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年十二月十九日子時生)/원자 금돌이 아기씨의 태를(元子金石乙伊阿只氏胎)/홍치 14년(1501년) 7월 초2일 미시에 묻음(弘治十四年七月初二日未時藏)[태지3] 명 홍치 13년(1500년) 5월 20일 미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三年五月二十日未時生)/대군 인수아기씨의 태를(大君麟壽阿只氏胎)/홍치 17년(1504년) 정월 29일 인시에 묻음(弘治十七年正月二十九日寅時藏)[태지4] 명 홍치 14년(1501년) 5월 14일 오시에 태어난 대군 인수(仁壽) 아기씨의 태를 홍치 14년(1501년) 9월 12일 축시에 묻다. - 《대군인수(仁壽)아기씨태지》[19]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중략) 1. 왕비(王妃)의 해산(解産)이 임박했는데, 만약 해산한다면 상사(喪事)와 소선(素膳)에 관한 일을 예관(禮官)을 불러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후략) - 《연산군일기, 연산 8년 5월 29일 경자 3번째기사》[20] 전교하기를, "둘째 대군이 졸하였으니, 임사홍을 불러 지리관(地理官)들을 데리고 산소 자리를 가보게 하라. 또 이총수(李聰壽) 아기의 산소 자리 본 관원을 가두고 국문하라. 대저 산소 자리를 보는 것은 동생에게도 모두 길하게 하려는 것인데, 지금 이영수(李榮壽)·총수 두 아이가 잇따라 죽으니, 이는 지리 보는데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 《연산군일기, 연산 9년 10월 18일 신해 6번째기사》[태지5] 명 홍치11년(1498년) 11월 27일 진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一年十一月二十七日辰時生)/왕자 강수아기씨의 태를(王子康壽阿只氏胎)/홍치 12년(1499년) 3월 17일 자시에 묻음(弘治十二年三月十七日子時藏)[태지6] 왕녀 영수의 태를(王女靈壽胎)/홍치 15년(1502년) 11월 12일 양주군 봉접면에 묻고(弘治十五年十一月十二日藏于楊州郡棒接面)/소화 4년에 옮겨 묻음(昭和四年月日移藏)[21] (전략) 왕이 녹수(綠水)를 총애해서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을 영수(靈壽)라고 했다. 왕이 이를 매우 사랑했는데, (후략) - 《연산군일기》, 연산 8년 12월 8일 병오 1번째기사[22] (전략) "권한은 서자(庶子)로서 분수를 모르고 장 숙원(張淑媛)의 딸 【폐주(廢主)의 숙원 녹주(綠珠)가 폐주에게 굄을 받아 낳은 딸이다.】 에게 은밀히 장가들었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로, 본사(本司)가 추문하다가 형장 추문하기를 청하였습니다. (후략)- 《중종 24년(1529년) 6월 1일 갑자 2번째기사》[23] (전략) 이것은 전 숙원(田淑媛)의 딸이 몽선의 집에 피접해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대내에 아뢰게 되어 이런 명이 있었다. (후략) -《연산군일기, 연산 11년 10월 12일 계해 1번째기사》[24] "폐주(廢主) 가 괴던 장녹수(張綠水)에게서 태어난 이영수(李靈壽)와 정금(鄭今)에게서 태어난 이함금(李咸今)에게 가사(家舍) 1좌(坐)와 노비(奴婢) 각각 15구(口)와 전(田) 각각 5결(結)을 내리고, 모두 선원록(璿源錄)에 올리소서." -《중종실록, 중종 12년 9월 1일 갑술 2번째기사》[태지7] 홍치 12년(1499년) 기미에 태어난(弘治十二年己未生)/옹주 복억의 태를(翁主福億胎)/홍치 12년 기미 5월 9일 삼천군 삼척면에 묻고(弘治十二年己未五月九日藏于三陟郡三陟面)/소화 4년에 옮겨 묻음(昭和四年月日移藏)[태지8] 명 홍치 14년(1501년) 2월 초 4일 미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四年二月初四日未時生)/왕자 돈수아기씨의 태를(王子敦壽阿己氏)/홍치 18년(1505년) 2월 19일 해시에 묻음(弘治十八年二月十九日亥時藏)[태지9] ‘홍치(弘治) 14년(1501, 신유) 출생. 왕녀 복합의 태를 홍치 14년(1501, 신유) 6월 17일에 황주군 인교면에 묻음. 소화 4년(1929)에 옮겨 묻음(弘治十四年辛酉生 王女福合胎 弘治十四年辛酉六月十七日 藏于黃州郡仁橋面 昭和四年 月 日移藏).’ - 《연산군의 딸 왕녀 복합(王女 福合, 1501~?)의 태지석》[태지10] 명 홍치 18년(1505년) 3월 11일 유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八年三月十一日酉時生)/왕녀 정수 아기씨의 태를(王女貞壽阿只氏胎)/홍치 18년 5월(弘治十八年五月十)/7일 묘시에 묻음(七日卯時藏)[태지11] 명 정덕원년(1506년) 3월 17일 인시에 태어난(皇明正德元年三月十七日寅時生)/왕자 태수아기씨 태를(王子泰壽阿只氏胎)/정덕원년 6월 18일 자시에 묻음(正德元年六月十八日子時藏)[25] 1506년 연산군의 아들들이 모두 사사 당했을 당시, 이태수는 포함되어있지 않았는데 이를 보아 중종반정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26] 서녀는 신거홍(愼居弘)에게 시집갔다. 벼슬은 판관이다. 후취로 시집갔다.-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27] 한음 이덕형이 아닌 동명이인이다.[28] 폐비 윤씨성종에게 "전하께서는 어찌 그리 키가 크십니까?"라고 묻자, 성종이 "나보다 더 큰 사람도 있소"라며, 당시 조정 대신 중 장신 축에 들었던 허종이라는 신하를 불러 비교해보았다고 한다. 실록을 포함한 기록에는 허종이 기골이 장대하다라는 표현만 있고 구체적인 키는 묘사되지 않는데, 조선 후기 인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11척 5촌(十一尺五寸)으로 나온다. 당시 척으로 환산해도 2m가 족히 넘는다. 현재도 농구 선수로 입신하기에 딱 좋을 법한 큰 키인데 평균 키가 더 작은 당시 조선의 기준으로는 아마 거인 수준이었을 것이다.[29] 사실 많은 조선왕들이 피부병으로 고생했는데 증상만 악화되고 차도가 없어 사망한 경우도 빈번히 발생하였다. 그중에서도 종기나 천연두를 많이 앓은 것으로 보인다. 역대 조선왕들 중 문종, 세조, 성종, 연산군, 중종, 광해군, 효종, 현종, 영조, 숙종, 경종, 정조, 헌종 등이 피부병을 앓았다 [30] 인생여초로 회합불다시(人生如草露 會合不多時) - 인생은 풀잎 위에 맺힌 이슬과도 같아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 연산군이 폐위 직전에 쓴 시라고 하는데 상당한 수준의 시조다.[31] 하지만 집권후반기로 가면서 연산군의 춤에 대한 실록의 서술은 매우 비판적인 논조로 변한다. '연산군의 춤은 정도를 넘어섰다. 즉위 8∼9년 정도부터 연산군의 정신적인 병증이 심해졌다. 광질(狂疾)을 얻어 때로 한밤에 부르짖으며 일어나 후원(後苑)을 달렸다. 또 무당굿을 좋아하여, 스스로 무당이 되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어 폐비가 와 붙은 형상 을 하였다.' 연산군의 파행적인 춤 (우리역사넷)[32] 하지문 추측상 연산군보다 한 술 더 떳을지도 모른다. 연산군은 그래도 자제력을 발휘할 때는 발휘할 줄 알았기에 세자 시절이나 재위 초중반기에는 사고를 치지 않았지만 이 인간은 왕자 시절부터 사고를 치고 다녔다. 애당초 이 인간이 정상인이기라도 했다면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뺏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깔끔하게 왕위를 승계하고 나서 몇년 지나고 까지는 멀쩡했다가 포악해진 인간이랑 원래부터 포악했던 인간의 차이라서 근본적으로 임해군이 더 나쁘다고 볼수 있다.[33] 현대 중국어의 니(你). '너'.[34] 폭군은 아니지만, 계유정난으로 축출된 단종 역시 이전에는 실록이 아닌 《노산군일기》로 격하되어 불렸다가, 숙종이 추존(追尊)을 승인하게 되면서 《노산군일기》에서 《단종실록》으로 승격되었다. 사실상 실록이 아닌 일기라는 호칭을 가진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 뿐이다.[35] 당시 영화《이조괴담》은 신상옥(감독)이 만든 공포 호러영화로서 전형적인 우리가 알고 있는 전설의 고향을 모티브의 원조격으로 내용은 발정난 연산군이 선비의 아내를 취하려고 하자 속이려 몸종을 들여보냈는데 이를 뒤늦게 알아챈 연산군이 화내어 몸종을 죽인다. 또한, 연산군은 선비가족을 붙잡아 죽이려 군졸을 보냈는데 선비는 도피 안하는 대신 아내만 도피를 시킨다. 도와준 선비는 연산군에 의해 붙잡아 죽임을 당한다. 선비의 아내는 같이 키우고 있는 고양이와 도피했지만 같이 키우고 있는 고양이가 없어지자 아내는 고양이를 찾아 헤매지만 결국 고양이가 있는 자기가 살고있는 집으로 오게된다. 이때 남편이 죽었다는걸 알아채고 아내는 자결을 하게된다. 고양이는 죽은 주인의 피를 먹고 자신의 부탁으로 다른 여인인《장녹수》의 몸을 빌려 처절하게 복수한다는 내용. 유치하지만 당시 파격적인 고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EBS에서 방영하기도 했다.[36] 역대 최연소 성인 연산군이었지만 고증에 가장 부합하는 나이었으며 연기력도 손색없이 해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출연해 성인 역을 수행해 그해 연기대상에서 아역상을 수상한다. [37] 본래 연산군은 19살에 즉위해서 3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인물인 만큼, 20대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연령고증에 부합하는 편이다.[38] 연극에서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비밀을 안 이후에, 햄릿의 아버지 유령과 같은 폐비의 유령 때문에 고뇌한다. 완전히 햄릿 짝퉁 연산군...[39] 이 작품을 그대로 영화화한 것이 김진아와 공연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연산일기》다. 유인촌 최고의 걸작이다.[40] 오죽하면 최측근인 임사홍김자원마저도 인수대비는 오래 살지 못할테니 조금만 기다리자고 말릴 정도. 하지만 연산군 본인은 할머니가 죽기 전에 모든 복수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인수대비는 죽기 전에 못볼 꼴을 다보면서 죽게된다. 심지어 죽고나서도 빈전에 올리는 술에다가 침까지 내뱉는 건 덤.[41] 정하연 작가는 훗날 2011년 JTBC에서 방영했던 인수대비를 집필할 때도 왕과 비 대사를 그대로 복붙해버린다. 극 중 연산군은 진태현이 연기했는데, 안타깝게도 진태현이 연기했던 연산군은 안재모가 연기했던 연산군의 어설픈 복제판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시청자들로부터 안재모의 연기와 비교당하면서 혹평을 얻기도 했다.[42] 장녹수는 그 결심이 오래 가지는 못할 거라고 봤다.[43] 작중에서 연산군의 폭정을 부추기는 사이코패스 간신배 김자원의 협잡으로 '폭군을 몰아내고 안양군을 옹립하자'는 벽보가 나돌자 "진성대군도 아니고, 안양군 따위를 옹립한다고?"라며 연산군이 분노했던 장면이 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진성대군을 내심 인정하는 모습이 보이긴 했다. 사실 "아래가 위를 능멸하는 짓거리"를 누구보다 혐오했던 군주권 지상론자 연산군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엄연히 왕의 정실인 중전 소생의 '적자'인 진성대군과 후궁 소생의 '서출'인 안양군은 애초부터 신분상의 차이가 넘사벽일 수밖에 없다. "진성대군도 아니고 안양군 따위를"이라는 발언은 다르게 생각하면 "고작해야 천한 후궁 소생의 서자를 엄연한 정실 소생에 적통인 나와 비교해? 그것도 모자라서 그따위 천한 서출을 만인지상의 군주에 앉히겠다고? 이것들이 임금 알기를 뭘로 아는 거야?"라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마디로 진성대군을 인정한 게 아니라 그냥 윗전은 윗전, 아랫것은 아랫것 이런 뿌리박힌 신분주의에서 기원한 오만.[44] 실제로 폐비 윤씨가 사사당하고 나서 성종은 폐비의 폐자도 꺼내지 말도록 함구령을 내리며 그 때문에 연산군은 한동안 계모인 정현왕후를 자신의 친모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갓 태어났을 때도 오랫동안 피접을 나가 봉보부인에 의해 길러졌기 때문에 아예 생모의 얼굴조차 모르고 있었다.[45] 영화 결말부에서 중종반정 때 도망가던 중 임숭재의 함정으로 돼지우리에 빠졌는데, 임숭재마저 자신을 배신했다는 절망과 광기가 뒤섞인채로 기어코 암퇘지와 수간을 해버린다(...). 이 모습을 본 유지광은 "마지막 성은은 돼지가 입었구만?"하고 질색한다.[46] 연산군의 시대는 1부 한정, 2부는 선조의 제위기였던 16세기 후반, 3부는 17세기 후반의 시대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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