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홍(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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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정치가이자 외척.
성종 대에 대간들과 여러 문제[1] 로 갈등을 겪다가 유배를 당하고 아들인 임숭재의 도움으로 연산군 대에 다시 복권된 인물이다. 이후 연산군의 측근으로 정계에서 활동하다 중종반정으로 처형된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임원준의 아들로 1449년 태어났다. 1465년(세조 11년) 알성문과, 1466년(세조 12년) 사재감사정으로서 춘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2.2. 관직 생활
임사홍은 시문과 서예 솜씨로 당대에 이름을 날렸고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관압사, 선위사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쳤다. 임사홍의 능력을 높게 산 성종은 임사홍을 문관으로 등용했고 홍문관교리, 승지, 도승지, 이조판서, 대사간, 예조참의 등의 요직을 역임시켰다.
2.2.1. 몰락과 유배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사림의 눈엣가시가 되었는데 장인인 보성군의 손자이고 조카가 되는 이심원이 임사홍을 시시콜콜 탄핵했다. 이심원은 임사홍과 나이차가 5세 밖에 안 되었지만 엄연히 고모부와 조카였다. 이심원은 작정하고 고모부인 임사홍과 사돈어르신인 임원준을 말도 안되는 사소한 일을 가지고 성종에게 탄핵을 요청했는데 성종도 기가 막혀 사소한 것을 이야기한 이심원에게 짜증을 냈다. 이에 보성군 이합과 이위가 성종에게 와서 이심원의 행동을 성종에게 사죄드리며 손자의 행동에 벌을 주라 청하였다. 이심원의 탄핵을 요약하자면 왕에게 고모부가 소인배이고 사돈어르신이 똑같은 부류이니 처벌해달라하자 화가 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자기 사위이면서 처남과 사돈 양반을 탄핵한 손자에게 고모부와 사돈어르신께 무슨 무례한 짓이냐?하고 꾸짖었는데도 손자가 듣지 않자 임금한테 고발한 것이다.[2]
1478년(성종 9년) 4월 전국에 '흙비(황사비)'가 심하게 내렸는데 사람들은 하늘의 변괴로 여기고 두려워했다. 이에 3사(사간원ㆍ사헌부ㆍ홍문관)에서는 성종에게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근신해야 하며 당분간 전국에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그런데 도승지 임사홍은 흙비는 재이(災異)가 아니며 국가의 제사가 연이어 있는 시점에서 술을 일절 금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간언하였다.
3사는 임사홍의 발언을 비판하였고 대간들 역시 임사홍을 탄핵하라는 상소를 줄줄이 올렸다. 성종은 처음에 임사홍의 편을 들면서 대간들의 탄핵을 저지했으나 대간들의 탄핵은 점점 심해졌고 결국 성종도 뜻을 거두고 대간들의 의견에 따르게 된다.[3]
결국 임사홍은 위의 사건과 더불어 유자광 등과 파당을 만들고 현석규를 음해했다는 죄목을 받고 의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4] 임사홍이 유배를 간 이후 성종은 임사홍을 정식으로 복권시키려 여러번 시도했지만 대간들의 반대로 인해 불발되었다. 결국 임사홍은 12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성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사홍을 다시 등용한다. 성종은 1490년(성종 21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관압사에 임사홍을 임명하였다. 또한 1491년 9월 승정원 도승지에 임사홍을 제수하면서 같은 해에 임사홍은 선위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5]
2.2.2. 복권
성종이 죽고 그의 아들인 연산군이 즉위하였다. 연산군은 많은 이복 여동생 중 휘숙옹주를 많이 아꼈는데, 이 휘숙옹주의 남편이 바로 임사홍의 아들인 임숭재였다. 때문에 연산군은 임숭재를 각별하게 생각하였다.
1500년(연산군 6년), 임숭재는 연산군에게 자신의 아버지 임사홍에 대한 탄핵이 부당함을 탄원하였고[6] , 연산군은 임사홍을 정식으로 복권시킨다.[7]
그 뒤 갑자사화때 이극균과의 친분 때문에 참수 당할 뻔하나, 과거 성종 시절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폐비를 반대한 일로 모면한다. 이후 1505년(연산군 11년)에 조선 팔도의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채홍사로 임명된다.[8]
2.2.3. 최후
연산군의 폭군 행위에 반발한 대신들은 1506년(연산군 12년 / 중종 1년) 9월 2일에 중종반정을 일으켰고, 임사홍은 이 날 자택에서 반정군에 의해 처형된다.[9] 이후 20일 뒤에 의금부가 중종에게 "임사홍을 부관참시하고 적몰가산 해야 한다"고 하였고, 중종이 이를 윤허하여 임사홍은 부관참시 된다.
3. 평가와 논란
임사홍은 중종반정으로 처형된 후, 성종/연산군 시절의 행적을 말미암아 간신과 소인(小人)의 대명사가 된 인물이다. 특히 폐비 윤씨에 대한 사실을 연산군에게 알려서 갑자사화를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핍박했던 사대부들을 숙청[10] 하고 부관참시 했다는 점, 그리고 이렇게 경쟁자들을 제거한 후 연산군의 측근으로 큰 권세를 휘둘렀다는 점에서 큰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는 조선 시대[11] 는 물론이고 현대까지 이어져왔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임사홍을 재평가 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관련 사료들을 검토한 결과 임사홍이 갑자사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증거가 부족하고 그의 행실 또한 간신으로 보기에는 부족하다고 한다. 특히 임사홍이 갑자사화를 주도했다는 주장의 근거들이 대부분 야사거나 사관 개인의 의견이고, 오히려 임사홍은 이극균과 친분 때문에 참수당할뻔한 인물이었다. 실록에 기록된 내용도 반정을 일으킨 중종 대의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신빙성이 떨어지며, 갑자사화 당시의 연산군일기에는 임사홍이 갑자사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임사홍을 간신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다.[12]
4. 어록
정승이라도 법령을 어기면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비록 (술을) 금할지라도 조사(朝士)는 적발당함이 없고 오직 소민(小民)만 죄를 받을 뿐입니다.
성종실록 91권, 성종 9년 4월 21일 임자 4번째기사
5. 여담
- 중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성종이 그의 중국어 실력을 높이 보았기에 선위사로 명나라에 다녀올 수 있었다.
- 글씨도 잘 썼다고 한다.
- 조선왕조실록에 임사홍이 미복 차림으로 자신의 집에 찾아온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의 이야기를 알리는 이야기가 적혀있다.[14]
6. 가족 관계
좌리공신 임원준의 아들로 태어났고, 이후 효령대군의 아들 보성군 이갑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리고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도 기록된 임자송, 임군보 등의 직계 후손이다. 임군보는 특히 공민왕 대에 활동한 주요 인물이다. 아버지 임원준은 글을 잘 써서 세종의 신임을 받아 용비어천가 편찬에 참여했으나, 성품이 비루하고 탐욕스러웠으며, 성균관 유생 시절 과거시험에서 남을 대신해 대리시험을 보다가 처벌을 받기도 했다.
또한 예종의 딸 현숙공주를 맏며느리로, 성종의 딸 휘숙옹주를 넷째 며느리로 들였다. 두 임금과 사돈 관계를 맺은데다 본인은 조선의 차남 효령대군의 손녀 사위이니 그의 가문은 왕실과 세 번이나 사돈 관계가 된 셈이다
슬하에 4남을 두었다. 그런데 아들들이 다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참척의 아픔을 겪었다.
- 장남: 임광재 - 예종의 사위이자 현숙공주의 남편
- 차남: 임희재 - 김종직의 제자로, 사림파로 활동하다 연산군에 의해 처형된다.
- 삼남: 임문재
- 사남: 임숭재 - 간신[15] , 성종의 사위이며 휘숙옹주의 남편이다. 임사홍이 관직생활을 할 때 성종의 사위가 되고 성종 사후 연산군의 최측근이 되어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임사홍을 다시 정계에 복권시킨다.
7. 대중매체에서
재평가가 시도된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묘사된 매체는 사실상 없다고 보면 된다.
- 조선왕조오백년에서는 신충식이 연기했다.
- 한명회에서는 안병경이 연기했다.
- 왕과 비에서는 임혁이 연기했다. 유자광과 죽이 잘 맞는 인물로 등장. 그래도 배우가 강직한 이미지를 지녀서인지 연산군에 대한 기본적인 충성심은 있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이 드라마의 막바지 에피소드인 중종반정 때 죽는다(마지막 에피소드는 연산군의 죽음).
- 고우영의 연산군에선 눈치는 빠르지만 돈에 환장한 간신배로, 신동우의 한국사 만화에선 부정 축재 및 무고 고발로 승진을 거듭한 간신으로 그려졌다.
- 길창덕의 코미디 홍길동에서는 연산군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는 전형적인 간신이면서 종종 길창덕 특유의 웃음을 유발하는 개그 캐릭터로 그려졌다. 그런데 작품에서 임사홍이 홍길동에게 원한을 품게 된 이유가 자신의 아들(아마도 임숭재인듯)이 동네 씨름 대회에서 홍길동에게 지고 부상까지 입은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객을 보내 홍길동을 해코지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이 일을 계기로 홍길동은 집을 나와 조선 팔도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 돌아온 영웅 홍길동에서 중간 보스급 악역으로 등장한다. 흠많무. 아무래도 홍길동전의 원본이라 할 수 있던 실존 도적 홍길동이 연산군 시대의 인물이었기 때문인 듯 하다.
-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언급만으로 등장.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임사홍을 때려잡자고 그의 집으로 몰려가는데, 강덕구가 임사홍의 집에 배달한 술값을 아직 안 받았다는 것을 떠올리고 "임사홍이는 내 술값을 다오!"라고 절규하며 같이 몰려가서 돈 될 만한 가재도구를 챙겨 나온다.
-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원조 사망전대 이영후가 임사홍 역을 맡아 훌륭한 천하의 개쌍놈 간신배의 모습을 보여준다.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놀러와서 술을 마시다가 임희재가 연산군을 진시황에 비유한 시를 연산군이 보고 격분하여 임희재를 죽인 것으로 그려진게 대표적. 압권은 모든 신료들이 임희재의 목숨만은 살릴 것을 간하였고, 연산군 조차 살려주려고 하였는데 오히려 아버지인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아첨하기 위해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연산군이 "그래? 그럼 죽여주지 뭐." 해서 임희재는 참수형을 당하고 만다. 연산군이 사냥하다가 백성들의 민가가 보이자 돌아가려 하였으나 금표를 세워 백성들을 쫓아내고 백성들의 땅을 뺏어서 사냥을 계속하라고 아첨하는 장면과 위에 언급한 대로 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장면이 압권.
- 2015년 영화 간신(영화)에서는 배우 천호진이 해당 캐릭터를 연기하였다. 그야말로 권력에 미친 간신. 그러면서도 연산군에게는 벌벌 기어야 하는 안습한 모습을 보인다. 자신 때문에 죽은 아내의 피묻은 적삼을 폐비 윤씨의 것으로 속여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권력을 잡는다.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연산군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부지런히 연산군을 찾는다. 물론 연산군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잡아 공신이 되려고... 거짓 초패를 받고 부랴부랴 입궐하다가 박원종 일당 장사패-이심 이라는 역사(力士)가 지휘하는 장사패들에게 살해당한다.[16]
- 7일의 왕비에서는 강신일이 연기했다.
8. 둘러보기
[1] 폐비 윤씨의 폐비를 반대하였고 사헌부와 사간원이 왕의 사생활과 취미에 간섭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런 문제에서 여러 대간들과 갈등을 빚었다.[2] 이심원은 이 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미움을 사서 집에서 쫓겨난다. 훗날 갑자사화 때 두 아들과 화를 입는다.[3] 임사홍이 이렇게까지 심하게 탄핵을 받은 것은 임사홍이 종친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국정을 농단할 것을 대간들이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파악된다. 또한 임사홍이 대간들에 대해 쓴소리를 하고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도 탄핵을 받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4] 유배를 간 것도 대간들이 사형시키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던 것을 성종이 임사홍을 최대한 배려해 감형한 것이었다.[5] 다만 이렇게 성종이 등용을 했다고는 해도 정식으로 정계에 복귀한 것은 아니였다. 전술했듯이 임사홍에 대한 대간들의 엄청난 탄핵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종실록을 살펴보면 거의 2페이지 분량이 임사홍에 대한 대간들의 탄핵 상소문으로 가득찬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반대가 심했으니 왕이라 하더라도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복권을 강행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6] 연산군일기 38권, 연산 6년 8월 19일 신축 3번째기사[7] 연산군일기 48권, 연산 9년 1월 21일 기축 3번째기사[8] 다만 일을 제대로 못 한 것인지 연산군이 임사홍을 질책하는 기록이 남아있다.[9]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2일 무인 1번째기사[10] 대관들의 견제 때문에 무려 12년 동안 유배를 갔었고, 유배에서 해방되고 관직에 복귀한 후에도 대관들의 탄핵에 시달려야 했다. 때문에 이 시절에 사대부들에게 맺힌 원한 때문에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키도록 부추겼다고 판단된다.[11] 명종실록, 선조수정실록, 숙종실록, 영조실록, 고종실록.[12] 채홍사 일을 할 때 연산군에게 일을 제대로 못 한다고 크게 지적을 당한 일이 있다. 심지어 이때 임사홍을 평생동안 괴롬히던 소인배 소리까지 연산군에게 들어야 했다.# 때문에 재평가를 하려는 측에서는 이러한 사료를 근거로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크게 신뢰를 받은 관료는 아니라고 주장한다.[13] 임사홍의 이 말로 인해 폐비 윤씨의 폐비가 늦춰졌다. 하지만 결국 폐비가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14] 다만 해당 기록은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는 편이다.[15] 아버지는 간신인지 논란이 있지만 이놈은 확실한 간신이다.[16] 실제 역사에서는 자택에 들이닥친 반정군에 의해 처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