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릉배식록

 

莊陵配食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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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항된 인물들
3. 논란


1. 개요


1791년, 계유정난사육신 사건 관련으로 사망하였다가 복권된 인물들을 단종의 능인 장릉에 단을 세워서 배향하면서, 그 명단을 기록한 책. 정조의 명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2. 배항된 인물들



각 항목별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육종영 : 여섯 명의 꽃다운 종친
  • 사의척 : 네 명의 의로운 외척
  • 삼상신 : 세 명의 정승
  • 삼중신 : 세 명의 중신
  • 양운검 : 두 명의 호위무사
  • 육신 : 사육신 참조.

3. 논란


김문기사육신에 포함되는가 마는가를 두고 논란을 일으킨 이기도 하다. 정조년대에 정단 배식 32인을 작성할 때 주요 근거자료로 장릉지를 삼았는데 이 장릉지가 남효온[1]육신전을 그대로 옮겨적은 책이기 때문. 이렇게 소설인 육신전의 내용만을 맹신하는 바람에 그 오류까지 그대로 이 책에도 수록되어 있다. 유응부가 함길도 관찰사를 역임했던 것과 김문기의 국문 불복 사건이 뒤바뀐 채 수록되어 있고, 송석동, 윤영손 등 세조실록에 나오는 사육신 급의 복위운동 주동자들(사지가 찢겨 죽은 이들)이 아예 빠져있거나, 생육신이나 하박보다 아래에 기록되어 있다. 또 운검은 세 사람인데 두명이라 하였고, 육신전에 쓰인대로 성승의 벼슬을 그의 사후 10년에 생긴 도총관이라 쓰고 있고, 좌부승지인 성삼문을 우승지라 쓰고 있고, 당상관인 부제학 이개를 당하관의 직제학이라 하고 있고, 성균관 사성이었던 유성원을 사예라고 하였으며, 유응부의 직책도 훗날에 만들어진 다른 직책으로 쓰고 있는 등 수많은 오류가 있어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정식 역사자료로는 쓰지 않고 있다. 특히 1456년 6월 기사 등 몇몇 부분에선 소설인 육신전보다도 오류가 더 많다.[2] 다만 조선 후기에 사림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역사 바로알기 운동을 연구하는 사료로는 중요하게 여겨진다.
[1] 조선 전기의 유학자로 육신전 외에도 추강냉화, 사우명행록 등을 지었던 인물[2] 예를 들어 6월 2일에 실록에 따르면 유성원이 자살하고 유응부가 국문을 당했는데 이책에는 박팽년, 김문기에 대해서만 나오고, 6월 8일 기사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의 군사 동원 내용이 나오는데 이튿날의 사면령 교서에는 김문기, 유응부만 군사활동한 것처럼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