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1. 사육신
1.1. 개요
조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당한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를 일컫는다.'''상왕이 계시거늘 나리가 어찌 저를 신하라고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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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서 사육신처럼 세조를 몰아내려고 하진 않았으나, 평생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이들로 생육신이 있다. 사육신에는 김문기가 포함되기도 하여 논란이 있다.
1.2. 상세
이들은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신임을 받은 사람들[2] 가운데 단종 복위를 주장하다가 실패하여 처형을 당한 사람들이다.
원래는 생육신 중 한 사람인 남효온의 소설 육신전(六臣轉)에서 비롯된 것으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 당한 이들을 모두 포함하면 '''70여 명'''이다. 일가까지 포함하면 수백 명 중에서 주요 인물 6인을 가리킨다.
본래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를 일컫는 말이었다. 정조 때인 1791년,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을 선정한 '장릉배식록'을 편정할 때, 아래와 같은 인물을 수록하였다.
- 사육신: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 육종영: 6명의 종친. 즉, 세조의 동생인 안평대군,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과 태조의 이복 동생인 의화 대군의 손자로 계유정난 당시 피살당한 판중추원사 이양 등을 가리킨다.
- 사의척: 4명의 의로운 외척. 단종의 장인인 여량 부원군 송현수, 현덕 왕후의 남동생으로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 경혜공주의 남편으로 단종의 매부인 영양위 정종, 단종의 후궁인 숙의 권씨의 아버지 권완 (권자신과 같은 안동 권씨)을 가리킨다.[3]
- 삼대신(삼상신): 세 명의 재상. 계유정난 때 제거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
- 양운검: 복위 계획 당시 세조의 좌우에서 운검을 맡을 예정이었던 성승, 박쟁. (사실 유응부도 포함되므로 사실은 삼운검이 맞다.)
1.3. 단종 복위 모의와 실패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3년의 계유정난을 통하여 그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 3공 을 숙청하여 권력을 독차지한 끝에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동조자를 규합하여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 6월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별운검(別雲劍)이란 것을 하게 됨을 기회로 세조 일파를 처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계획은 좌절되었다.[4] 소설 육신전에는 한명회가 이를 막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세조가 친히 운검을 취소시켰고, 성삼문이 이에 없앨 수 없다고 반대하나 신숙주가 찬성하여 취소되었다고 한다. 이 때 윤영손이 노하여 신숙주를 죽이려 했으나 성삼문 등이 말리고 거사를 연기하였다. 이들의 계획이 일단 좌절되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 등은 뒷일이 두려워 장인 정창손을 통해 세조에게 단종 복위 계획의 전모를 밀고하여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스스로 이들을 문초하였다.
일단 문초 과정에서의 연루자의 언급 순서는 김질의 입에서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가 언급되고, 먼저 끌려온 성삼문에 의해서 박팽년과 유성원, 박쟁이 추가된다(음력 6월 2일). 여기에 공조참의 이휘가 스스로 관련되었으나 미리 말을 하지 못했다고 자백하러 오면서 박중림과 권자신이 추가된다. 이후 박팽년을 문초하면서 '''김문기''', 성승, 송석동, 윤영손, 박팽년의 아버지가 추가된다.[5] 그리고 국문 이후 발언을 보면 최득지, 최치지, 박기년, 박득년이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며칠 후(음력 6월 7일) 성삼문과 권자신의 입에서 단종의 연루 사실[6] 이 나온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망한 인물로 허조[7] 가 추가된다. 그리고 이후에도 사육신과 연결되었다는 이유로 머릿수가 늘어나서 결국 70여 명이 된다.
실록에는 국문 때의 기록을 보면, 그저 심문과 답변 위주로 기록되어 있으나 육신전에는 국문장에서 사육신이 세조를 디스하는 장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애초에 배경이 되는 기록이 남효온의 전기 소설 육신전이므로 실제 사실일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하다. 이와 관련된 부분은 전부 세조실록을 비롯한 내용에는 전혀 없다. 그나마도 왕이 직접 국문한 건 첫 국문 정도로 이후로는 구치관이 국문한다.
실록은 기록 자체가 짧고 별 게 없다. 기사 자체가 두어 편 있는데다가, 사육신의 반항이 묵비권 정도에 그치기에 의외로 순순히 다 부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나마도 곤장을 치게 하면 다 분다. 거꾸로 말하면 그닥 불 것도 없었기도 했다.
아래는 심문 과정을 설명한 것으로, '''현대의 사육신의 이미지는 아래 소설 속 이미지가 거의 전부'''다. 역사 인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에 대한 기록이나 연구가 거의 없어서 소설 속 등장 인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실질적으로 대체하고 있는 모양새다.
1.4. 심문 과정
1.4.1. 성삼문
- 세조실록: 처음엔 숨기려고 하다가 세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며 “너는 나를 안 지가 가장 오래 되었고, 나도 또한 너를 대접함이 극히 후하였다.[8] 지금 네가 비록 그 같은 일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내 이미 친히 묻는 것이니, 네가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네 죄의 경중(輕重)도 역시 나에게 달려 있다.”라고 묻자 가담자들을 줄줄이 말하기 시작한다. 세조가 한 번 더 윽박지르자, 박쟁을 추가한다.
- 육신전[9] :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불로 입을 지져버려도,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러 왕으로 대하지 않았다. 세조가 "네놈이 나를 나리라고 부르는데 그럼 내가 준 녹 #s-2(봉록)은 왜 처먹었냐?"며 묻자 성삼문은 "우리 집 창고에 가 보면 나리가 준 녹 따위, 하나도 안 썼으니까 못 믿겠으면 가서 확인해보시오."라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패기있게 말했고, 이에 확인을 해 보니 정말로 녹이 그대로 있었다.
1.4.2. 박팽년
- 세조실록: 곤장을 치자 아버지를 포함해 가장 많은 인원을 말한다. 더 대지 않냐고 하니 아버지까지 대었는데 더 댈게 있느냐면서 운검을 통해 거사하려고 했다는 것까지 다 고백한다.
- 육신전: 친국 중에 세조가 "너 전번에 관찰사로 나가 있을 때, 나에게 올리는 공문에 분명히 '신(臣)'이라고 써 놓고 이제 와서 반역질이냐? 게다가 너도 내가 주는 녹 #s-2을 처먹었잖아?"고 화를 내며 따졌다. 그러자 박팽년 왈, "신(臣)이라고 쓴 적 없으니까 잘 찾아봐라. 그리고 나도 우리 집 창고에 보면 녹 하나도 안 먹고 다 쌓아놨다. 네 녀석은 어찌 하는 말이 뭐 하나도 제대로 맞는 게 없는가?" 세조는 분개하여 그의 공문을 찾아봤는데 모두 신(臣)자가 아니라 거(巨)자였다. 성삼문과 같이 창고에 녹이 쌓여있던 건 덤. 결국 세조는 이런 박팽년을 시뻘겋게 불에 달군 인두로 몸을 지져버렸다.
1.4.3. 이개
- 세조실록: 이개는 세조의 옛 친구였기에 실록에서 세조가 "너는 나의 옛 친구였으니, 참으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네가 모조리 말하라."라고 말하기도 했으나 불지 않았으며, 이후 박팽년이 모든 것을 말하자 이개에게 곤장을 치니 박팽년이 분 말과 같은 말을 했다.
- 육신전: 국문 중에 자신의 몸을 인두로 지지자 세조에게 "나리, 법전 어디에 인두로 사람을 지지는 형벌이 있소?"[10] 라고 되묻는다. 이는 다른 멤버들의 노골적인 디스에 비하면 별 거 아닌 발언 같지만 이 짧은 한마디는 사육신의 성격과 특성을 잘 보여주는 발언이다. 자신의 몸이 고문당하는 중에도 법전을 찾는 것은 그만큼 이들이 원칙과 명분을 중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질문에 세조는 어버버거리면서 대답을 못 했다. 그 당시 조선 법에는 인두로 사람 지지는 법이 진짜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개는 왕이라는 자가 법에도 없는 짓을 한다고 세조를 돌려 깐 셈. 더군다나 세조 스스로가 조선조 법제의 완비를 의미하는 법전 "경국대전" 제작을 시작했던 인물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1.4.4. 하위지
- 세조실록: 실록에서도 승정원에 가서야 성변(혜성)을 알게 되었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초는 다음 사람에게 넘어간다. 사실 실록에서도 하위지는 세조를 유난히 경계하여 세조를 견제하는 발언을 많이 했으며, 세조가 6조 직계제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할 때 이를 물러서지 않고 간언하다가 빡친 세조가 "저 망할 새끼 관을 당장 벗겨버려!"라고 명하는 바람에 상투 머리채가 잡혀 끌려나가는 수모와 굴욕을 당하며 의금부에 갇히기도 했다. 세조 역시 예전부터 자신을 노골적으로 견제했던 것에 대한 감정이 폭발했던 모양. 야사나 정사나 시종일관 시크하면서도 가장 당당했던 인물이다.
- 육신전: 국문을 가하면서 관련 사항들을 세조가 취조하자 아무 말도 안 하고 "내가 반역죄라면 그 죄가 응당 죽음일 것인데 네 놈이 물어볼것이 뭐가 있다고 묻는 것이냐!"라고 씹었다고 한다.
1.4.5. 유응부
- 세조실록: 등장하지 않는다.
- 육신전: 시종 국문장에서 당당한 태도를 견지하던 성삼문을 디스했다. "자고로 서생 놈들과는 대사를 같이 하지 말라더니 정말 그렇더군. 너희들이 말려서 이렇게 됐잖아! 책만 읽으면 뭐해? 꾀가 없으니 짐승하고 다를 바 없어!"라고 면박을 주었다고. 여기서 성삼문 등이 말린 것을 다른 야사에서 자세하게 다루는데, 별운검이 한명회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유응부는 성삼문에게 그래도 우격다짐으로 한명회부터 죽이고 들어가자고 말했지만 성삼문과 박팽년이 이를 말렸다.[11] 무인인 유응부 입장에서는 칼질도 못해보고 잡혔으니 속이 터질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 그래서 이 말을 들은 성삼문이 그 때만 입을 다물어서 자신의 미안함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세조에 대한 태도도 당당해서 아예 세조를 나리도 아니고 '족하 (足下)'라고 불렀다. 참고로 '족하'는 서로 대등한 사이의 호칭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왕의 옷을 입고 왕 행세를 하고 있지만 당신은 왕이 아닐 뿐더러 조카의 왕위를 빼앗아 인륜도 저버렸으니 왕족 취급 받을 자격도 없다는 것. 아예 어떤 책에서는 당당하게 세조에게 자네와 자네 아들 놈을 죽이려고 했건만 재수가 없어서 이렇게 됐구나! 라고 말하였다. 이에 열이 단단히 뻗친 세조는 유응부의 살갗을 모조리 벗겨버릴 것을 명했다.[12]
1.5. 사형과 후일담
성삼문·이개·하위지·김문기·박중림·성승·유응부·박쟁·권자신·윤영손·송석동·이휘·석을중·아기지[13] ·불덕[14] 은 작형[15] 을 당한 후 군기시 앞에서 백관들이 지켜보던 가운데 거열형을 당하였다. 박팽년은 고문 중에 사망했고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 사당에서 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박팽년과 유성원의 시신 또한 거열형을 당했다.
거열형을 당한 이들은 3일간 효수되었는데, 어두운 새벽을 틈타 생육신의 한 사람이던 김시습[16] 이 이들의 시신을 수습,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이들의 묘를 만들게 된다. 이 묘는 사육신묘의 시초가 된다.
또한 사육신의 가문들은 모두 개박살나서 친자식은 모조리 교형, 모친과 딸, 처첩, 조손, 형제 자매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의 노비, 이중에서 나이 16세 미만은 외부에 보수라고 하여 보증인이 신분을 보증하는 조건으로 방면하였다가 나이가 되면 위리안치하게 하였다. 나중에 연결된 이들의 친자로 15세 미만의 경우도 보수하였다가 관노가 되게된다. 이때 관련된 부녀들의 상당수는 대신들의 노비로 넘어갔고, 그들의 전지의 상당수 역시 대신들에게 넘어간다. 이외에도 이미 결혼한 부녀의 경우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아, 이미 시집가 있던 딸들은 화를 면했다.[17] 이 때문에 황보인이나 박팽년의 외손들은 성종대가 되면 고위관직에 올랐다는 식의 이야기가 돌기 시작한다. 직계 후손이 살아남은 것은 박팽년과 하위지 뿐으로 박팽년은 손자 박일산, 하위지는 살아 남은 조카 중 한 명인 하원이 하위지의 양자로 입적해 대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직계를 제외한 친족들은 10여 년을 노비로 살아가다가 세조가 승하하기 이틀 전에야 사면을 받아 원래 신분을 회복했다. 직계를 제외한다면 여기에 성삼문의 사촌들과 유성원의 조카 몇 명 정도가 더 살아남았지만 이들 중에서는 하위지 집안처럼 양자로 입적한 사람이 없었다.
박일산이 살아남은 것은 정말로 천운으로 이것에 대한 이야기로 그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진짜로 복중태아였다면 그 아이가 죽을 일은 없다. 위와 아래에서도 보이지만 유아는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래 노비 분배기에도 언급되지만 박순의 아내는 옥덕이라는 이름으로 '''구치관에게 노비로 주어진다'''. 해당 일화는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등장하는데, 이 기록은 한참 후대의 일로 말 그대로 전설일뿐이다. 하위지의 가문은 미성년자였던 조카 하분, 하포, 하원이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고 대신 변방으로 유배가게 되었다.[18] 성삼문의 경우를 보면 아들들은 물론 조카들과 종손들까지 모두 처형 당해 직계가 단절되었으니 그나마 나은 경우다.[19]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의 노비와 관청의 기생, 관비로 분배되었다. 공신의 한 사람인 권람은 자신의 5촌 조카 딸인 권영금을 분배받는 식으로 일부 친족에게 정속된 여성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공신가에 종과 노리개로 분배되었다. 사육신은 절개를 지키다 죽었지만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대부분 공신들에게 겁탈 당했거나, 공신의 첩이 되었다.
세조실록에는 절개를 지키지 않고 공신의 첩이 된 여성들을 비판한 기사가 수록되어 있었지만, 사육신 가문의 아내와 딸 중 공신들의 성 노리개로 겁탈 당한 여성들의 기록은 실리지 않았다.
그 중에서 박팽년의 형수로 봉석주의 첩이 된 윤씨는 윤연령의 딸이며, 후일 선조 때의 형제 정승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증대고모가 된다. 윤씨는 난신에 연좌된 부녀자들의 존재가 언급된 기사에는 나타나지 않던 여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봉석주의 첩이 되기를 자처한 것 등만 문제시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아래는 실록에 기록된 사육신 가족들의 거취다.
세조 실록 5권, 세조 2년 9월 7일 갑술 4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의금부에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 난신(亂臣)에 연좌(緣坐)된 부녀(婦女) 내에
이소동(李小童)의 아내 천비(千非), 이공회(李公澮)의 아내 동이(同伊), 심상좌(沈上佐)의 아내 미비을개(彌飛乙介)·딸 계금(繼今)은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에게 주고,
이담(李湛)의 아내 소사(召史), 박기년(朴耆年)의 아내 무작지(無作只), 이오(李午)의 딸 평동(平同), 이유기(李裕基)의 누이 효전(孝全)은 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에게 주고,
박팽년(朴彭年)의 아내 옥금(玉今), 김승규(金承珪)의 아내 내은비(內隱非)·딸 내은금(內隱今)·첩의 딸 한금(閑今)은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에게 주고,
조청로(趙淸老)의 어미 덕경(德敬)·아내 노비(老非), 최득지(崔得池)의 아내 막덕(莫德), 이현로(李賢老)의 첩의 딸 이생(李生)은 좌의정(左議政) 한확(韓確)에게 주고,
이현로(李賢老)의 아내 소사(召史), 민보창(閔甫昌)의 아내 두다비(豆多非), 김유덕(金有德)의 아내 금음이(今音伊)·딸 옥시(玉時)는 우의정(右議政) 이사철(李思哲)에게 주고,
성삼문(成三問)의 아내 차산(次山)·딸 효옥(孝玉), 이승로(李承老)의 누이 자근아지(者斤阿只)는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주고,
황보흠(皇甫欽)의 아내 석을금(石乙今), 박쟁(朴崝)의 아내 오덕(吳德)·딸 효비(孝非)는 좌찬성(左贊成) 윤사로(尹師路)에게 주고,
이유기(李裕基)의 아내 설비(雪非)·딸 가구지(加仇之)·말비(末非)·막금(莫今), 성삼고(成三顧)의 아내 사금(四今) 및 한살 된 딸은 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에게 주고,
이승윤(李承胤)의 아내 가은비(加隱非), 지화(池和)의 아내 막금(莫今)은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에게 주고,
이휘(李徽)의 아내 열비(列非), 허조(許慥)의 아내 안비(安非)·딸 의덕(義德)은 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에게 주고,
이자원(李滋源)의 아내 유나매(維那妹), 이개(李塏)의 아내 가지(加知)는 우참찬(右參贊) 강맹경(姜孟卿)에게 주고,
이윤원(李潤源)의 첩 분비(粉非), 이경유(李耕㽥)의 아내 효생(孝生)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징석(李澄石)에게 주고,
박인년(朴引年)의 아내 내은비(內隱非), 정효강(鄭孝康)의 아내 보배(寶背)는 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에게 주고,
원구(元矩)의 아내 소사(召史), 고덕칭(高德稱)의 아내 보금(甫今)·딸 신금(信今)은 우참찬(右參贊) 황수신(黃守身)에게 주고,
이해(李諧)의 아내 종금(終今)·딸 불덕(佛德)·불비(佛非), 김유덕(金有德)의 누이 막장(莫莊)은 예조판서(禮曹判書) 박중손(朴仲孫)에게 주고,
최면(崔沔)의 누이 선비(善非), 조완규(趙完圭)의 아내 소사(召史)·딸 요문(要文)은 병조판서(兵曹判書) 신숙주(申叔舟)에게 주고,
이석정(李石貞)의 아내 소사(召史), 권자신(權自愼)의 아내 어둔(於屯)·딸 구덕(仇德)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권준(權蹲)에게 주고,
우직(友直)의 아내 오대(五臺), 김현석(金玄錫)의 아내 영금(英今)은 이조판서(吏曹判書) 권람(權擥)에게 주고,
윤영손(尹令孫)의 아내 탑이(塔伊)·딸 효도(孝道), 이반경(李反敬)의 첩 막생(莫生)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박강(朴薑)에게 주고,
김문기(金文起)의 딸 종산(終山), 최득지(崔得池)의 첩 지장비(地莊非)는 대사헌(大司憲) 최항(崔恒)에게 주고,
성삼성(成三省)의 아내 명수(命守), 정효강(鄭孝康)의 아내 효도(孝道)·딸 산비(山非)는 병조참판(兵曹參判) 홍달손(洪達孫)에게 주고,
성맹첨(成孟瞻)의 아내 현비(現非), 최사우(崔斯友)의 첩 옥금(玉今)은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전균(田畇)에게 주고,
심신(沈愼)의 아내 석정(石貞)·딸 금정(金正)·은정(銀正), 성승(成勝)의 아내 미치(未致)는 계림군(雞林君) 이흥상(李興商)에게 주고,
이의영(李義英)의 아내 효생(孝生), 조극관(趙克寬)의 아내 현이(現伊)는 도절제사(都節制使) 양정(楊汀)에게 주고,
박순(朴詢)의 아내 옥덕(玉德), 박헌(朴憲)의 아내 경비(敬非)는 이조참판(吏曹參判) 구치관(具致寬)에게 주고,
송창(宋昌)의 아내 소앙지(召央知), 황보석(皇甫錫)의 아내 소사(召史)는 전 예문제학(藝文提學) 윤사윤(尹士昀)에게 주고,
이말생(李末生)의 아내 관저(關雎)·딸 경비(敬非), 김문기(金文起)의 아내 봉비(奉非)는 도절제사(都節制使) 유수(柳洙)에게 주고,
박대년(朴大年)의 아내 정수(貞守), 송석동(宋石同)의 아내 소사(召史)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봉석주(奉石柱)에게 주고,
김승규(金承珪)의 딸 숙희(叔熙), 권저(權著)의 어미 보음미(甫音未)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강곤(康袞)에게 주고,
박계우(朴季愚)의 아내 소비(小非), 김승벽(金承壁)의 아내 효의(孝義)는 예조참판(禮曹參判) 홍윤성(洪允成)에게 주고,
류성원(柳誠源)의 아내 미치(未致)·딸 백대(百代), 이명민(李命敏)의 아내 맹비(孟非)는 좌승지(左承旨) 한명회(韓明澮)에게 주고,
황선보(黃善寶)의 아내 복중(福中)·딸 덕비(德非)는 우승지(右承旨) 조석문(曹錫文)에게 주고,
이호(李昊)의 아내 개질지(介叱知)·딸 목금(木今)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유하(柳河)에게 주고,
윤처공(尹處恭)의 딸 숙비(叔非), 정원석(鄭元碩)의 아내 만금(萬今)은 이조참의(吏曹參議) 원효연(元孝然)에게 주고,
최치지(崔致池)의 아내 미치(未致), 최윤석(崔閏石)의 아내 봉비(奉非)는 단천군수(端川郡守) 최유(崔濡)에게 주고,
황선보(黃善寶)의 누이 소사(召史), 이유기(李裕基)의 딸 소근소사(小斤召史)는 형조참의(刑曹參議) 황효원(黃孝源)에게 주고,
조번(趙蕃)의 아내 소사(召史)·딸 의정(義貞), 황의헌(黃義軒)의 아내 복비(卜非)는 병조참의(兵曹參議) 한종손(韓終孫)에게 주고,
원구(元矩)의 누이 심이(心伊), 조완규(趙完圭)의 딸 가이(加伊)는 좌부승지(左副承旨) 윤자운(尹子雲)에게 주고,
윤위(尹渭)의 아내 소사(召史), 정관(鄭冠)의 아내 신경(信敬)은 우부승지(右副承旨) 한계미(韓繼美)에게 주고,
이의산(李義山)의 딸 소사(召史)·막금(莫今)은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조효문(曺孝門)에게 주고,
이정상(李禎祥)의 아내 삼비(三非)·딸 현비(現非)·정비(貞非), 최득지(崔得池)의 아내 마배(磨杯)는 겸 판통례문사(兼判通禮門事) 이극배(李克培)에게 주고,
윤경(尹涇)의 아내 소사(召史), 성삼빙(成三聘)의 아내 의정(義貞)은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권개(權愷)에게 주고,
봉여해(奉汝諧)의 어미 소비(小非)·아내 정순(丁順)은 상호군(上護軍) 유서(柳溆)에게 주고,
민보흥(閔甫興)의 아내 석비(石非), 이윤원(李潤源)의 아내 대비(大非)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김질(金礩)에게 주고,
대정(大丁)의 아내 자근(者斤), 하위지(河緯地)의 아내 귀금(貴今)·딸 목금(木今)은 지병조사(知兵曹事) 권언(權躽)에게 주고,
이보인(李保仁)의 아내 물재(勿才)·딸 옥석(玉石)은 성균 사성(成均司成) 정수충(鄭守忠)에게 주고,
조완규(趙完圭)의 누이 정정(精正), 최사우(崔斯友)의 어미 소사(召史)는 상호군(上護軍) 유사(柳泗)에게 주고,
식배(植培)의 딸 귀비(貴非)·귀장(貴莊)·귀금(貴今)·소근비(小斤非), 유응부(兪應孚)의 아내 약비(若非)는 예빈시 윤(禮賓寺尹) 권반(權攀)에게 주고,
민신(閔伸)의 아내 우비(禹非)·딸 산비(山非)는 대호군(大護軍) 안경손(安慶孫)에게 주고,
이지영(李智英)의 어미 석을금(石乙今)·아내 종비(終非)·딸 은비(銀非)는 대호군(大護軍) 홍순로(洪純老)에게 주고,
송녕(宋寧)의 아내 소사(召史), 권저(權著)의 첩 복가이(卜加伊)는 대호군(大護軍) 조득림(趙得琳)에게 주고,
김감(金堪)의 첩 귀덕(貴德)·딸 소비(小非), 이양(李穰)의 아내 월비(月非)는 대호군(大護軍) 이극감(李克堪)에게 주고,
중은(仲銀)의 누이 귀덕(貴德)·딸 귀비(貴非), 장귀남(張貴男)의 누이 말비(末非)는 직예문관(直藝文館) 유자황(柳子滉)에게 주고,
정분(鄭笨)의 아내 순비(順非), 이석정(李石貞)의 첩 말생(末生)·딸 감물(甘勿)은 대호군(大護軍) 임자번(林自蕃)에게 주고,
대정(大丁)의 어미 내은이(內隱伊), 김감(金堪)의 아내 소사(召史)·딸 복금(卜今)·말금(末今)·아지(阿只)는 전 호군(護軍) 김처의(金處義)에게 주고,
최면(崔沔)의 어미 소사(召史)·아내 점물아지(占勿阿只)·딸 부허비(夫虛非)는 사복 소윤(司僕少尹) 한서귀(韓瑞龜)에게 주고,
최치지(崔致池)의 아내 덕비(德非)·딸 백이(白伊)는 전농 소윤(典農少尹) 송익손(宋益孫)에게 주고,
이승로(李承老)의 아내 효정(孝貞)·딸 숙화(叔和), 이오(李午)의 아내 소질지(少叱知)는 군기 부정(軍器副正) 설계조(薛繼祖)에게 주고,
이의산(李義山)의 아내 참군(參軍)·딸 아을금(阿乙今)은 사재 부정(司宰副正) 권경(權擎)에게 주고,
정관(鄭冠)의 어미 소사(召史), 장귀남(張貴男)의 누이 학비(鶴非)는 군기부정(軍器副正) 홍순손(洪順孫)에게 주고,
허조(許慥)의 어미 화산(花山)·누이 소근소사(小斤召史)는 겸 군기부정(兼軍器副正) 곽연성(郭連城)에게 주고,
권저(權著)의 아내 계비(季非)·딸 순비(順非)는 호군(護軍) 최윤(崔閏)에게 주고,
조순생(趙順生)의 아내 가질비(加叱非), 김선지(金善之)의 아내 내은이(內隱伊)·딸 가야지(加也之)는 전 부사직(副司直) 이몽가(李蒙哥)에게 주고,
이석정(李石貞)의 딸 감상(甘尙), 최면(崔沔)의 누이 막비(莫非)는 도승지(都承旨) 박원형(朴元亨)에게 주라.
하였다.
1.6. 육신사(六臣祠)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4(묘리 640)에 있는 사당으로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초기에는 박팽년의 후손에 의해 박팽년만 배향되었으나, 그의 현손 박계창이 박팽년의 기일에 사육신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육신사의 전신인 낙빈사(洛濱祠)를 지어 제향하여 오다가 1691년 낙빈서원[20] 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186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페령로 낙빈사가 낙빈서원과 함께 철거되었다가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1974년 충효위인 유적 정화 사업에 따라 현재 위치에 육신사로 이름을 붙여 사당을 재건하였다. 사우 건물인 숭정사에는 사육신과 더불어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의 위패도 함께 봉안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되어 있다. 경내에는 이외에도 숭절당, 외삼문, 삼층각 등이 있고 사당 앞에는 1979년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건립한 육각 기념비가 있다.
대구 도시철도 2호선 대실역에서[21] 성서2번을 타면 갈 수 있다. 하루 9회 운행하지만 성서 2번이 모두 육신사를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전면 LED에 '''하빈 육신사 방면'''이라고 적혀 있거나 행선판에 '''묘리 or 묘골 or 육신사'''라고 적혀 있는 것을 잘 보고 타야 된다. 아니면 대구 시내버스 홈페이지나 성서 2번 항목에 있는 시간표를 참조하고 가는 것도 좋다.
낙빈서원의 경우 달성삼가헌고택[22] 뒷편에 있는데 마을 입구 묘1리파회 정류장에 버스가 하루에 2번 다닌다. 하지만 대구 시내버스가 아니라 왜관 북부 정류장 ~ 문양역 구간을 운행하는 칠곡 20번 버스이고 그나마 대구 시내버스와 환승도 안 되는 버스다. 성서 2번을 타고 묘1리 정거장에서 내려 1.5km 정도 걸어와도 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자가용을 타고 육신사, 달성삼가헌고택, 낙빈서원을 패키지로 이용하는게 가장 현실적이다.
1.7. 평가와 논란
1.7.1. 역사성 논란
많은 이들이 사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사실 역사적 인물인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등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이들이 많지도 않고 연구도 많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설 육신전의 영향이다.
그런데 이 육신전 문제는 조선 전체를 통틀어서 굉장히 복합적을 진행되었다. 사림의 일파인 김종직, 김굉필, 남효온 등으로 이어지는 학파적 정당성 문제[23] , 왕권과 신권의 대립 관계[24] , 성리학적 명분론과 정통성의 문제[25] , 관련된 인사들이 소속된 가문의 지위 문제[26] 등이 무척이나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리고 육신전은 성리학적 명분론 관점에서 긍정되어서 조선 후기를 풍미하였고 이 이데올로기는 민간까지 퍼져서 특정 인물이 지은 소설이 야사처럼 전해지면서 이미지를 완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볼 때는 굉장히 조심해서 봐야 한다. 배경이 소설이고 이게 이미지화 된 경우에는 이들에 대한 미화를 걷어내는 작업이 굉장히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실제 생애는 '당에서 인정받은 천재가 국가적 한계에 의해서 좌절하게 되는' 최고운전의 이미지와 다르다. 소설 임경업전 속의 조선 후기 최대의 명장은 역사 인물 임경업과는 유사성이 그리 크지 않다. 소설 동의보감에 묘사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심의는 실제 역사 기록 속의 허준의 생애와 차이가 크다. 임진록에 등장하는 소설 속 인물 사명당이 실제 조선 승려 유정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육신전과 비슷한 시대를 그린 고전 소설 운영전에서 묘사된 안평대군은 역사적 인물 안평대군은 물론이고 육신전 속 안평대군과도 다르다.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육신전 속 사육신은 어떨까? 고민할 대목이다.
단적으로 학계에서 계유정난을 연구하는 이들의 연구 속에서 사육신의 상당수는 계유정난에 협조, 동조, 적어도 방관 했던 인물들로 평가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27] 문제는 당시 시대상을 고려해야 하는데다[28] 사자명예훼손죄라는 법이 존재하고 사육신 관련 문중의 영향력이 아직도 막강한[29] 한국 현실에서 이런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들이 양지로 나오기는 쉽지 않다는 점이다. 당장 아래의 사칠신 논쟁에서 엿볼수 있듯이 조상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문중의 호전성은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다.[30]
여담으로 하나 더 언급하자면, 사육신들이 죽기 전에 썼다는 일종의 절명시들이 구전되는데, 일단 죽기 전에 시나 읊고 있을만큼 여유로웠던 상황이 아닌만큼[31] 절명시가 아니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고, 시의 저자가 해당 인물인지도 의심을 받고 있다. 죽음과 연관이 조금 적은 시들로 저자가 시에 조예가 있는 인물이라면 그나마 연결 고리를 찾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후대에 저자 불명인 시들을 해당 인물과 엮은 결과물일 뿐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1.7.2. 조선 전기의 미복권
사육신은 단종과 마찬가지로 사육신의 난 이래 수백년간 신원이 되지 못하고 역적으로 여겨졌다. 아니, 단종보다도 더욱 나쁜 대접을 받았다.
남효온의 '''육신전'''은 위에 언급된 심문 과정 등이 모두 실려 있어서 사육신의 행장에 연결될 정도이나, 생육신으로 1454년생인 남효온은 성삼문이 죽은 1456년에는 '''겨우 3살'''이었으니 이를 직접 봤을 리가 없기 때문에 '''전기 문학'''으로 분류된다.
당연히 이런 책은 임금이 유학자들과 토론하는 경연에서 강의가 될 수가 없다. 헌데 선조 수정 실록에서는 경연관, 판서 박계현이[32] 성삼문이 충신이라며 선조에게 남효온의 육신전을 찾아서 읽어보라고 권하는 장면이 있다. 호기심이 동한 선조는 찾아서 읽어보았는데, 그 반응은 매우 격렬했다. '''성삼문 등의 행적이 말도 안 된다고 깠다.''' # 주 내용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가 된 것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면 바로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거나 자결을 하거나 했어야지 세조 밑에서 녹봉은 받아먹으며 섬기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말도 안된다는 논리였다. 성리학적 입장에서만 보면 틀린 논리가 아니다. 나으리니 신하 신 대신 클 거를 썼느니 하면서 육신전에서 실드를 중점적으로 치고 있는 부분도 이 대목으로, 세조의 정통성이 없다면 '''그 자리에서 튀어나가야 한다.'''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뭔가를 해볼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원래 성리학의 명분론은 그렇게 융통성이 있는 체제가 아니다.[33] 선조는 이런 논리로 '''책을 찾아서 모조리 불사르고 책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까지 치죄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선조 자신은 노산군(단종) 묘에 망주석과 상석, 표석 등을 세우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는 등 무조건 세조만을 옹호했던 것은 아니지만 사육신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삼공이 들어서서 반대하는데, 이때 논리가 선조 실록과 수정 실록에 차이가 있다. 자세한 건 육신전 문서 참조.
1.7.3. 사육신의 신원
하지만 조선 중후반이 되면 상황이 180도 바뀐다.
당연한건데 이후 계유정난 공신들과 공신들의 후손들이 판을 치며 처놀던 조선 전기와 달리 후반에는 이들과 전혀 성격이 다른 집단들이 조선의 지식인과 지배층을 이루고 정국을 주도한다. 바로 사림들.
사림들에게 있어 사육신과 이들이 당한 숱한 고초들은 어디까지나 훈구 세력들의 추악한 만행들이고, 성리학적 명분론에 충실하고자 한 이들의 입장에서 볼때 사육신들이야 말로 신하로서 단종(조선)에 대한 충의를 지킨, 지조있는 선비들로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는 양반 사대부들에게 있어 존경을 받아야 할 대상들이였다.
결국 사림에서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서인, 노론에서 사육신의 신원을 복귀에 나서게 된다.
효종 대에 노론의 핵심 인사인 송준길이나 송시열, 은퇴하는 판사 조경 등이 사육신의 충성을 기리려 했다. 효종은 이에 대해서 대신들과 의논하는 등의 절차를 거치긴 하였으나 결국 실제로 배향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추증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현종의 적자로 세자가 되어 순탄하게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 면에서는 탄탄하며 무엇보다 기반이 약한 후계자(경종)를 둔 숙종에겐 어리고 힘없는 단종의 충신으로 이미 여론이 조성된 사육신이 굉장히 매력적인 소재였다.[34] 1691년 숙종 주도로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이라는 사액이 내려짐에 따라 노량진 동산의 사육신묘 아래 민절 서원을 세워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숙종조가 되면 육신전이 사실상 정식 사서처럼 다뤄진다.) 김문기의 문중인 김녕 김씨는 이들보다 40년 뒤인 1731년에 복관되었다.
숙종 이전까지 노산군으로 불리던 단종도 숙종 년간에 노산대군을 거쳐 단종으로 신원되고 묘가 정비되었다.
1.7.4. 또 하나의 충신, 박심문(朴審問)
1804년, 순조 대에 사육신이 사형당한 당시 질정관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던 박심문이 본래 사육신과 동지로서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귀국 당시 사육신이 이미 사망한 사실을 알고 음독자살한 사실이 새로이 발견되어,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추서하고 1828년에는 영월 창절사(현 창절서원)에 사육신과 함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이후에도 철종 때인 1856년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1871년 고종이 '충정' 시호를 내리는 등 조선 시대에는 사육신의 동지로 인정받았다. 후손으로는 박지원(1942)이 있다. https://www.facebook.com/jwp615/posts/647303728706288 이 게시글에 따르면 전라남도와 경상북도로 후손이 흩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공주 숙모전, 진안 이산묘, 대전 숭절사, 진주 충정사, 해남 죽음사(竹陰祠), 장흥 세덕사, 영주 영모정 등에 배향되어 있다.
1.7.5. 김문기 포함 논란
1977년에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관련 문중의 탄원으로 제기되어, 이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심도있게 진행되었다. 결국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공조판서이자 삼군도진무 김문기가 새롭게 헌창되었다.
이에 대하여 사육신 묘를 관리하는 서울시와 그리고 교육부, 문화공보부, 관련 학계가 심도있게 논의하였고, 최종적으로 국사 편찬 위원회의 의견을 참조하여, '기존의 사육신을 변경하지 않고, 김문기 선생을 헌창'하고, 사육신 묘에도 김문기의 자리를 추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문제가 된 것은 이 김문기를 사육신에 넣으려고 시도한 사람이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로 '''김문기의 후손'''인 김재규는 자신의 선조를 높이려는 생각에 학계에 압력을 넣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웃긴 것은 금녕김씨 문중에서조차 구한 말인 19세기 말까지 조상 어르신인 김문기를 그저 사육신에 연좌되어 화를 입은 이들 중 한 사람으로만 간주하고 있었다는 점인데, 이러한 인식은 김문기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생가 터에 세워진 서원 경내 추모비의 내용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정조 실록에서 보듯 권자신, 송현수 등과 함께 김문기가 있었으므로 단종복위운동에 대한 공로가 무시당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육신의 인지도가 워낙 높은 탓에 이런 해프닝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김문기의 경우 조선 정부에서도 인정할 만큼 사료 자체는 충분히 뒷받침되니, 근거가 없는 것만도 아니지만 사육신에 들어가기에는 논란이 있다. 그래서 헌창이라는 방식으로 추가한 것이다.
그러자 새로운 문제가 벌어졌는데, 사단 법인 한국학 연구회가 아래의 합작 드라마 사육신#s-2의 상영회에서 김문기가 군 동원을 맡았고, 또 문초에 불복했음을 집어넣지 않은 왜곡 드라마라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아무튼 문중이 개입한 이상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거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분명히 김문기가 사육신이 아닌 '''삼중신(三重臣)'''에 따로 있었는데도 사육신에 넣으라는 압력을 넣는 것은 문중이 사육신만 알고 삼중신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허나 이 사실에 대해서는 문중의 반론도 있다. 금녕 김씨 문중이 이 사실에 개입하려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던 건 사실이나, 김재규 본인은 중앙정보부장이 된 이후 본인은 이 문제에 관여하지 않겠다며 손을 놓았는데, '정치 권력이 역사에 개입한다'는 프레임을 짜서 대중에게 호소하기 위해 김재규의 이름을 빌어 대립각을 세웠다는 것.# 즉 본인들이 사육신 문제로 촌극을 빚은 것은 인정하나 그 과정에서 공직자 불개입 원칙을 지킨 김재규가 김씨 문중의 상징적 대표자로 찍혀 공박의 대상이 되어 부당하게 명예를 훼손당했다는 주장이다.
아래 링크와 같이 사육신 문중과 금녕 김씨 문중 간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김문기 포함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유응부·김문기…사육신 제사 불발, 금녕 김씨와 격돌
‘사육신’ 시사회장서 고함·욕설 오간 까닭은?
사육신 제사상 엎은 후손에 '벌금형' 확정
1.8. 관련 문서
2. 남한과 북한의 합작 사극
사육신(문화어 : 사'륙'신).
2007년 8월 8일부터 동년 11월 1일까지 총 24부작으로 KBS 2TV에서 방영되었던 최초의 남북 합작 사극.
KBS의 자본과 장비 등의 하드웨어와 조선중앙방송의 배우, 극본 등의 소프트웨어로 제작된 작품. 제작 의도는 사육신의 충절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남한에서는 KBS 2TV에서 방영되었고 북한에선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방영되었다.[35]
기획부터 3년, 이후 총 제작 기간 2년에 제작비 20억여원(210만 달러)이 소요되었다. 제작비의 3분의 2 가량은 발전차나 조명차 등의 현물로 지급되었다. 즉위식 묘사 등을 위해 1만여 명이 동원됐으며, 전투 장면에서는 300여필의 말이 등장했다. 북한으로서는 엄청난 스케일의 드라마인 셈이다.[36]
제작사가 북한 측이며 연출, 각본, 배우 등의 제작자들이 전부 북측 인물이다. 그러다보니 껍데기만 남북합작이지 내용물은 실질적으로 북한 작품이나 다름없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는 발연기가 없다고 하여 훌륭한 평가를 받지만, 엑스트라 배우들의 연기는 그와는 반대로 극악을 달린다(…). 북한 드라마라 그런지 화면이 KBS의 일반적인 느낌과는 매우 다르며, 특히 한국에서는 이미 10년도 더 전에 사라진 후시녹음을 했기 때문에 실제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이질감이 꽤 컸다는 반응.
[image]
세조를 시종일관 "수양"이란 이름으로 표현한 게 특징. 세조로 분한 최봉식이 세조의 어진을 배낀 이미지와 잘 맞는다는 평도 있었다.
이런 때문에 시청률이 매우 부진하였다. 첫 화 시청률은 7.3%로 시작했지만 2화 시청률은 4.7%로 떨어졌다. 이후 시청률은 더 떨어져 애국가(3%)만도 못한 1.9%[37] 를 기록하여 '''역대 최저 시청률 드라마 3위'''에 올랐다.[38][39]#
오프닝. 북한 특유의 성악으로 구성된 주제가와 함께 타이틀에 사용된 북한 서체들이 압권이다.
참고로 방송 80주년 드라마다.
여하간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에 KBS 연기대상 특별상을 받았다.
북한에서는 이게 북한 최초로 조선 시대의 (림꺽정이나 민란 등을 다룬게 아닌) '''정사를 다룬 TV 드라마'''이자 조선중앙TV가 만든 첫 사극이란 의미가 있다.# 제작비 문제로 유일한 사극이 될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 "아기씨" 등 그 전에는 북한 사극에서 나오지 않았던 남한 말투가 등장했다는 평가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선 극단적으로 재미없는 사극이 북한에선 컬쳐 쇼크가 되는 셈.
[image]
이효리와 애니콜 광고를 찍기도 했던 무용수 조명애는 KBS의 요청으로 야사의 인물인 히로인 "솔매"로 캐스팅 되었다.# 첫 연기 캐스팅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뭐가 돌아오는 건 아니라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새터민들에게는 "저기 조맹원[40] 이다. 저 배우는 정말 명배우야.”, “막봉[41] 이도 나오더라, 여전히 막봉이 답다.”, “붉은 흙의 도위원장도 나왔어.[42] ”, “배우들은 배급을 주는 모양이지, 전에 보다 얼굴이 보기 좋은 걸 보니.” 등의 평가가 있었다고 한다.
3. 온라인게임
홈페이지
깜놀닷컴이라는 곳에서 2013년 12월 26일부터 클로즈 베타 테스트에 돌입한 온라인 액션 RPG 게임. 2014년 2월 12일에 신규 서버 오픈 때문에 갑작스레 검색어 순위권에 올랐다. 이후 2016년 12월 28일에 서비스를 종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