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전
1. 개요
김종직의 제자이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 남효온(秋江南孝温,1454년 - 1492년)[2] 이 지은 사육신의 행적을 묘사한 전기'''소설'''. 생육신으로 1454년생인 남효온은 성삼문이 죽은 1456년에는 '''겨우 3살'''이었으니 이를 직접 봤을 리가 없고, 남효온이 듣고 읽은 것을 바탕으로 기록하였다 한다. 사실 전해들었다는 서술은 고전소설의 전형적인 레토릭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전개 과정에서 사실 여부가 차이가 꽤 많이 난다는 점에서 적어도 신빙성 있는 증언을 바탕으로 하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현대 한국인의 세조와 사육신에 대한 역사 인식은 이 육신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흥선 대원군은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허준은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이 만들어낸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그 원조격.
각 사육신의 전기 형식으로 사건을 묘사하는데, 단종에 대한 동정적인 묘사와 세조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 그리고 사육신의 단종 복위 기도와 실패, 그리고 사육신 항목을 읽어보면 나오는 국문 묘사 등이 모두 이 소설에 들어 있다.
2. 역사적 오류
사료적 가치는 비교적 낮은 것으로 평가되는데,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해 보면 여러 가지 세세한 오류가 존재한다. 이쪽을 자세히 언급한 것은 유영박의 '김문기 연구의 기초'이다. 이를 인용한다.
정3품 당상관인 부제학 이개를 정5품인 교리로, 3품인 성균관 사성 겸 사헌부 집의인 류성원을 4품인 성균관 사예로, 참판인 권자신을 판서로 하였다. 성승을 수양대군의 찬위 때 도총관이라 하였으나 도총관은 당시 생기기도 전이고 정2품의 벼슬이다. 당시 성승은 지중추원부사(종2품)였다. 유응부는 당시 동지중추원사(종2품)로 함길도 절제사를 한 바 없고 불복도 하지 않았는데 유응부를 함길도 절제사를 거친 재상(宰相)[3]
으로 불복하였다고 하였다. 김문기 선생과 혼동한 것이다.[4]수양대군이 찬위(簒位)하자 박팽년이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으려는 것을 성삼문이 후일을 기하고자 만류하였고, 얼마 후 충청 감사(관찰사)로 나가서 1년 동안 있으면서 장계(狀啓)에 신(臣)자를 쓰지 않았으며, 심문 시에 이것이 확인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박팽년은 단종 2년 10월 즉 수양 대군 찬위 전에 이미 충청 감사로 가 있어서 동(同) 찬위 때 박팽년은 서울에 없었다. 그리고 찬위 후 거의 2달 만에 예문관 제학으로 들어왔으니 찬위시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으려 할 수도 없었다. 수양대군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부인하면 살려준다"고 하였다고 썼다. 그러나 잡혀오자 고문을 당하고 즉시 자백하였으니 수양 대군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부인하라 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형장(刑場)에서 “충심(忠心)이 불평(不平)하니 운운(云云)”하고 금부랑 김명중과 문답하였고 형장에서 글을 읊었다고 썼으나, 박팽년은 사형 집행 전날에 이미 옥사(獄死)하였으므로 있을 수 없는 내용이다.
동 육신전에 기재된 성삼문의 수양 대군과의 문답은 성삼문의 자백 과정과 여러 사람을 불어댄 상황[5]
에 비추어 생각하기 어렵다. 성삼문이 강희안을 구해준 것 같이 썼으나 강희안 문제는 성삼문이 사형된 후에 야기됐다.하위지가 계유정난 후 관복을 다 팔고 시골로 갔다고 썼으나 하위지는 동 정변 전에 병으로 귀향하였다가 계유정난 후인 단종 2년 1월에 출사(出仕)했다.
상왕이 수강궁으로 이어(移御)하였다고 썼으나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성삼문이 처음부터 분 삼운검 중의 한 분인 박쟁에 대하여도 언급이 없다. 도시 그 내용이 정확한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
-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하는 장면에서 예방승지 성삼문이 옥새를 끌어안고 울었다고 기록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도 성삼문이 옥새를 전하는 장면은 나오지만, 끌어안고 울었다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최소한 확인불가능한 부분이다. 진짜 문제는 성삼문의 직책이 예방승지라는 별칭[6] 으로 불린 우승지가 아니라, 동부승지라는 것이다.[7] 현대의 대통령 비서실 격인 승정원의 당상관이 높은 순서대로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이다. 실제 역사에서 성삼문은 해당 시점에서 동부승지였고, 이후 우부승지를 거쳐서 좌부승지로 승진했다가 사육신 사건을 일으키기 때문에 우승지의 직책에는 오른 적 자체가 없다.
이처럼 육신전 일화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드라마틱한 부분은 최소한 확인이 불가능한 일화들 위주이고, 확인이 가능한 직책이나 관직 변동 같은 부분은 오류가 속출한다.
3. 평가
3.1. 조선 전기
육신전의 내용은 현대에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세조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은" 친숙한 사육신 이야기이지만, 내용상 조선 전기에는 (당연히) '''충격과 공포의 작품'''이었다. 그야말로 대놓고 계유정난을 비난하며 세조를 까고 노산군(단종)을 옹호하며 당시에는 '''역적'''이 확실한 사육신을 의기가 높다며 칭송했던 책이니...
그러므로 조선 전기 세조의 후손인 왕실의 입장에서는 육신전은 곧 '''역적을 옹호하는 기록'''이었다. 사실 왕실의 입장에서는 이런 책을 쓴 것은 물론이고, 가지고 있다는 것 만으로 역적죄를 각오해야 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조선 전기의 육신전은 공공연하게 언급되지는 않고, 인쇄도 잘 되지 않으면서 사림 선비들 사이에서 몰래 몰래 필사해 가면서 보는 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슨 군사 독재 시절에 운동권 학생들이 "불온 서적"들을 돌려다 보던 것처럼.(…)
실제로 선조 실록에는 경원관 박계현[8] 이 성삼문이 충신이라며 육신전을 추천하자(...) [9] 선조가 읽어보고 분노를 터트리는 장면이 나오며, '''책을 모두 거둬서 불태워 없애고 이야기 하는 자도 처벌해야겠다'''는 발언을 했다으나 신하들이 말려서 그만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의 반응은 더도 덜도 아니고 '역적을 두둔하고 왕실을 모욕하는 불온 서적'으로 보는 것이었다.
요약하면 1. 팩트에서부터 어긋나는 게 한두 개가 아니다. 2. 그럼에도 실상을 모르는 후세인들이 속기에는 딱 좋게 되어 있다. 3. 거기다 나중에 공을 세우려고 세조를 섬기는 척하며 속마음을 숨겼다고는 하는데 그냥 자결하거나 사직하고 은거했어야지 그게 무슨 충신인가?[12]“이제 이른바 《육신전》을 보니 매우 놀랍다. 내가 처음에는 이와 같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아랫 사람이 잘못한 것이려니 여겼었는데, 직접 그 글을 보니 '''춥지 않은데도 떨린다.'''
지난날 우리 광묘(光廟, 세조)께서 천명을 받아 중흥하신 것은 진실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저 남효온이란 자는 어떤 자이길래 감히 먹으로 글을 희롱하여 국가의 일을 드러내어 기록하였단 말인가? 이는 바로 아조(我朝)의 죄인이다. 옛날에 최호(崔浩)[10]
는 나라의 일을 드러내어 기록했다는 것으로 주형(誅刑)을 당하였으니, '''이 사람이 살아 있다면 내가 끝까지 추국하여 죄를 다스릴 것이다.'''
기록된 내용 가운데 노산군(魯山君)에 대해 언급하면서 (노산군(=단종)이) 신유년에 출생하여 (계유정난이 일어난) 계유년까지 그의 나이가 13세인데도 16세로 기록하였으며, 광묘께서 임신년에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갔었는데 여기에는 부음(訃音)을 가지고 중국에 갔다고 기록하였다. 또 하위지(河緯地)가 계유년에 조복(朝服)을 벗고 선산(善山)으로 물러가 있었는데 광묘께서 즉위하여 교서(敎書)로 불렀기 때문에 왔다고 하였다. 하위지가 갑술년에 집현전에서 글을 올린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 왜곡되고 허탄함은 진실로 믿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가슴아픈 것은 뒷사람들이 어떻게 그 일의 전말을 자세히 알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한번 그 글을 보고 곧 구실(口實)로 삼는다면, 이 글은 사람의 심술(心術)을 해치기에 적당한 것이 될 것이다.
또 한가지 논할 것이 있다. 저 육신(六臣)이 충신인가? 충신이라면 어째서 수선(受禪)하는 날 쾌히 죽지 않았으며, 또 어째서 신발을 신고 떠나가서 서산(西山)에서 (백이, 숙제처럼) 고사리를 캐먹지 않았단 말인가? 이미 몸을 맡겨 임금으로 섬기고서 또 시해(弑害)하려 했으니 이는 (전국시대의) 예양(豫讓)이 매우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그런데도 저 육신은 무릎을 꿇고 아조(조정)를 섬기다가 필부의 꾀를 도모하여 자객의 술책을 부림으로써 만에 하나 요행을 바랐고, 그 일이 실패한 뒤에는 이에 의사로 자처하였으니, 마음과 행동이 어긋난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열장부(烈丈夫)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는 ‘헛되이 죽는 것이 공을 세우는 것만 못하고 목숨을 끊는 것이 덕을 갚는 것만 못하다. 성삼문(成三問) 등은 그 마음에 잠시도 옛 임금을 잊지 않고 있었으므로 아조를 섬긴 것은 뒷날의 공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라고도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진실로 공을 이루는 것만을 귀히 여기고 몸을 맡긴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백이(伯夷)·숙제(叔齊)와 삼인(三仁[11]
) 도 반드시 서로 모의하여 머리를 굽히고 주(周)나라를 섬기면서 흥복(興復)을 도모했을 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이들은 자기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후세에도 모범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제 드러내서 아울러 논하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은 각기 군주를 위하는 것인데 이들은 아조의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역적이니 이들은 오늘날 신하로서는 차마 볼 것이 아니다. 내가 이 글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고 누구든 이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자가 있으면 그도 중하게 죄를 다스리려 하는데 어떠한가?”
이에 삼공이 들어서서 반대하는데, 이 때 논리가 선조 실록과 수정 실록에 차이가 있다. 선조 실록은 이에 대한 선조의 자세한 논박을 모두 기록하고 있는데, 삼공의 대답 역시
즉 1. '''애초에 경연 자리에서 언급된 것 자체로 불안하게 여겼고''', 2. 이미 상식 있는 이들은 이에 대해서 신뢰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3. 여염에 드문드문 있는 정도이므로 가만히 두어도 세월이 오래되어 없어질 책인데 언급하는 사람마다 치죄하면 오히려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다는 논리로 선조를 말렸다. 즉 경연 자리에서 언급된 것 자체가 선조 시대가 처음이고, 애초에 언급될 책도 아니었다.“신들이 삼가 비망기(備忘記)를 보니 놀라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들이 일찍이 《육신전》에 대해서 경연 석상에서 아뢴 자가 있다는 것을 듣고 마음이 매우 불안하였습니다. 지금 상의 분부가 애통하고 간측한 것은 진실로 천리(天理)에 합당한 일입니다. 다만 이 글의 잘못된 점과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 진실로 성유(聖諭)와 같더라도 여염(閭閻) 사이에 드물게 있는 책이며 또 세월이 오래되어 점차 없어져 가는 끝인데 만약 수색하는 일을 시행한다면 반드시 큰 소란이 일어나서 끝내는 이익됨이 없게 될 것입니다. 또 이 요망스러운 책을 진실로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감히 서로 이야기하겠습니까?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금한다는 법이 일단 내리게 되면 풍속이 각박한 이런 때에 고알(告訐)하는 길이 이로부터 열리게 되고 무고(誣告)하는 폐단도 또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외의 사람들이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보고 들으면 마땅히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금령(禁令)을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중지될 것입니다.”
반면 선조 수정 실록의 경우는 영의정 홍섬 등이 육신의 충성을 간절하게 말하였으므로 이를 측은하게 여겨서 일단 화를 거뒀다고 짤막하게 언급된다. 수정 실록에서 내용이 바뀐 것은 그만큼 사림의 힘이 강해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인데, 이는 이이의 경연일기를 따른 것이다.
비록 수정 실록에서 내용이 변경되었기에 완전히 믿기는 좀 그렇지만 다른 서적에서 관련 기록이 남아있고 실제로 이러한 논란이 있고나서 4년후인 1580년에 선조는 노산묘에 망주석과 상석, 표석 등을 세우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던 기록을 볼 때, 선조 자신도 정통성 문제를 떠나서 사육신의 충절에는 어느 정도 공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야사에는 유성룡이 "국가가 불행히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신들이 '''신숙주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성삼문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하고 묻자 선조가 노여움을 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김시양의 부계기문)[13] ."영의정 홍섬이 입시했다가 육신의 충성을 강하게 말했는데 말이 매우 간절해 시종하는 신하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아 상이 이에 감동해 깨닫고 분을 그쳤다. "
명종 시기에도 윤해평이 육신전을 간행하자고 했다가 명종의 분노를 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다만 실록에는 없는 듯.
3.2. 조선 후기
계유정난과 세조 찬탈에 비판적인 사림의 여론 때문에 육신전은 거의 공공연하게 널리 읽혀졌고, 왕실에서도 여론이 퍼지는 것을 제지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조선의 정치사에서 끝없이 잔잔하지만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던 문제 서적이었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은 육신전은 계유정난을 전후로 하여 하나의 주제로서 일관된 문학성을 가진 작품이기 때문에 사림들 사이에 퍼져나가서 "사육신 이야기"의 핵심이 되었으며, 사육신을 옹호하는 여론이 끊이지 않게 되는 역할을 하였다.
다만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동정여론은 육신전에 의해서 보전되었다고 볼 것이 아니다. 단종의 경우는 민중들 사이에서 수백년간 그 제사를 지낼 정도로 뿌리깊은 동정 여론이 있었고 사림층 및 관리들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단종 복위 운동은 조선 역사상 가장 많은 현직 관리가 참여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후에도 생육신같이 재야에서 그 절의를 지키는 이들이 적지않았다.육신전의 저자 남효온 또한 그러한 사람 중 하나이며 엄밀히 말해서는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동정 여론이 만들어낸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육신전이라 할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에도 고려해야 한다.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장수 중 하나인 남이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장수 중 한명인 임경업 역시 고전 소설로 쓰여졌고 민중들에 의해서 높은 추앙을 받았다. 오히려 필자의 목적 의식이 다분한 육신전과 달리 이쪽은 가감없이 민중들의 의견이 반영된 소설들일 것이다. 다만 이 사실은 민중들의 생각이란 것이 사실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느냐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며, 소설과 민담이 어디서 어디까지 혼용되어 왔는가에 대해서도 논란을 일으키는 소재가 된다. 실제 민담이나 야사의 상당수는 아래에서 자생한 것이 아닌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결국 숙종 때 단종이 복권되면서 사육신에 대한 평가는 육신전을 기준으로 하여 재정립된다. 육신전이 드디어 필사본이 아닌 인쇄본으로 나온 것도 이때. 심지어 훗날 정조 14년으로 가면 이런 기사도 있다.
이후에도 정조 15년에도 육신전을 인용한 기사가 있는 듯, 단종 복위인사들의 추증과 복권에서 육신전은 사료급 가치로 거론된다. # 육신전을 바탕으로 복권을 진행하기도 한 것이다. 단적으로 장릉배식록의 내용은 육신전을 그대로 옮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삼가 윤순거(尹舜擧)가 편집한 《장릉지(莊陵誌)》를 살펴보건대, 수찬 허조는 이개(李愷)의 매부(妹夫)로서 모의(謀議)에 참여하였다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으므로 법률에 따라 처단을 하였다고 하였으며, '''남효온(南孝溫)이 편찬한 《육신전(六臣傳)》에 의하면,''' 허후(許詡)의 아들인 수찬 허조가 병자년의 화란(禍亂)에 죽었고 그의 아비인 정간공(貞簡公)은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아비에게 관작을 회복시키고 시호를 준 뒤에도 그의 아들만은 은전(恩典)을 입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조정이 미처 시행할 겨를이 없었던 은전입니다. 허조의 관작을 회복시킬 데 대한 청원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당연한 것이 기록이 하나도 없으면 소설도 막 들어가기 때문이다. 멀쩡한 역사적 기록이 있던 문익점이 어떻게 미화되고, 단 2명 밖에 없던 두문동 은거 인물들이 얼마나 불어나는지를 보면 비록 가능성은 희박할지라도 사림의 선배인 남효온이 쓴 소설 육신전은 실제적 사실의 유무와는 별개로 가장 중요한 근거로 쓰일 수 밖에 없다. 삼국사기에서 김유신 열전이 후손이 쓴 행장을 기반을 한 덕분에 한 편의 무협지가 된 것처럼 말이다. 이러면 조선 왕조 실록의 명백한 기록은 어쩌고 소설만 보느냐고 할 수도 있는데, 현대에 조선 왕조 실록 인용이 늘어난 것은 디지털화가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이 분량을 누군가가 다 찾아서 사실 관계를 검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14] 무엇보다 이걸 밀었던 사림이나 후손들의 이득이 걸려있는 상황에서, 조선 왕조 실록 뒤져서 육신전 내용이 사실인지 검증해보자고 할 사람이 나올 리가 없다.
4. 기타
남효온이 계유정난 이후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생육신의 일원으로 거론되는 것 역시 이 "육신"이란 이름이 정립되었기 때문. 그자체로는 사료 가치가 낮지만 분명 단종과 사육신의 복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삼국지연의처럼 역사적 이미지를 만들어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