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기
金文起
1399년 ~ 14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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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8일"그대들은 안에서 일이 성공되도록 하라. 나는 밖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비록 거역하는 자가 있다 한들 그들을 제재하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1. 소개
조선 전기의 인물이다.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혹은 마암(馬巖)이다.
2. 생애
1399년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태어났다. 1426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치르는 3년 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관직에 나아가 예문관 검열, 병조 참의,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공조 판서 겸 삼군도진무로 있으면서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을 하려다가 김질, 정창손 등이 밀고하여 처형(능지처참)되었다. 후일 단종에 충절을 바친 세 명의 중신, 삼중신(三重臣)으로 인정받았다.
1731년(영조 7년) 복권되었다.1778년(정조 2년)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김녕김씨 충의공파와 경주김씨 백촌공파의 종통소송 판결문
3.1. 서울 고등법원 제2민사부 판결
사건;90나12788 손해배상[기]
원고,항소인겸,피항소인;김녕김씨 충의공파 대종회 대표자.김대환
피고,항소인겸,피항소인;경주김씨 백촌공파 대종회 대표자 김제현
환송판결; 대법원 1990.2.27.선고89다카 12275판결
주문;[1]원심판결 중 다음에서 이행을 명하는 부분에 해당하는 원고 패소판결을 취소한다 [가][나],,
[2]원고의 나머지 항소와 피고의 항소를 모두 기각한다
[3]소송비용,
[4]제1항 중
[가] 기초사실
[1]원고종증은 조선왕조 때의 사람인 김충립 김충지 김영시 김논학 등으로 순차 종통이 이어지는 사람들을 공동선조로한 혈족들로 이루어진 종증이고
피고종증은 역시 조선왕조 때의 사람인 김계훈 김자용 김희년 김양봉 등으로 순차 종통이 이어지는 사람들을 공동선조로 이루어진 종통이다
[2]그런데 원고종증은 조선왕조 제7대왕인 세조2년에 일어났던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하였던 백촌 김문기와 그 아들 김현석
이 원고종증의 선대인 위 김충립의 할아버지 및 그 아버지라고 주장하고 한편 피고종증은 위 김문기 김현석이 피고종증의 선대인 위 김계훈의 할아버
지및 그 아버지라고 주장하여 서로 자신이 위 김문기의 유일한 혈족들로 이루어진 종증이라고 다투어왔다
[3]위 대동보 중 수권에는 피고종증이 김문기의 유일한 혈족들로 이루어진 종증이고 원고종증은 위 김문기의 혈족이 아님을 전제로 하여 그 제14면에 우
리의 파조이신 백촌공의 종통을 어지럽히는 사이비[김녕김씨 충의공파]]며 그 제12면 내지 13면에는 사이비 백촌 후손이란 므리들이 나타났고 우리가
잃어버린 선조님 묘소를 그들의 묘소인냥 불법으로 입비하는가 하면 우리의종통까지 말살하려는 간계로 흑세무민하고 있읍니다 라고 기재하고 그제1
권지일 에는 위 김문기와 김현석의 손자 및 아들로 피고종증의 선대인 위 김계훈만을 기재하고 원고종증의 선대인 김충립은 기재하지 아니함으로써 위 김문기및 김현석의 후손은 피고종증의 주장과 같이 피고종증의 선대인 위 김계훈 김자용 김희년 김양봉 등으로 이어질뿐이고 원고종증의 선대인 위
김충지 김영시 김논학 등은 위 김문기및 김현석의 후손이 아니라는 취지의 계대를 표시하였으며 위 백촌공 종통고증론에서 역시 피고종증이
위 김문기의 유일한 혈족들로 이루어진 종통이고 원고종증은 위 김문기의 혈족이 아님을 전제로하여 그 제2면에서 김녕김씨 충의공파 계통은 충립이
후 사이비 날조손이므로 백촌공 손이 아니다 라고 기재하고있다
[나]위 김문기,김현석이 원.피고종증 중 어느 종증의 선대인지
[1]원,피고의 주장및 쟁점
원고종증은 위 김충립 이하 원고종증의 선대들이 위 김문기 및 김현석의 유일한 후손인데도 피고종증이 이를 부인하고 자신의 선대인 김계훈이하
피고종증의 선대들만이 그 유일한 후손이라는 위 대동보를 발행하고 심지어 원고종증을 왜곡 비방함으로써 위 김문기 및 김현석의 후손임을 표방하는 원고종증으로서는 그 기반이 부인됨은 물론 혈연관계없는 남의 조상을 자신의 조상으로삼는 종증이라는 받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피고종증에 대하여
피고종증은 위 김계훈 이하 피고종증의 선대들만이 위 김문기 및 김현석의 유일한 후손이고 위 김충립 이하 원고종증의 선대들은 위 김문기 및 김현석의 후손이 아니므로 피고종증의 대동보를 편찬함에 있어 그러한 객관적인 사실 그대로 기재한것일뿐이고 또한 그러한 객관적인 사실에 반하여
원고종증이 위 김문기 및 김현석의 후손이라고 사칭하므로 그 잘못을 지적하고 이를 경계하여 피고종증의 정당한종통을 수호하기 위하여 위와같이 기재한 것이니 이는 피고종증의 정당한 권리행사이므로 원고의 청구는 이유없다고 다투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서의 쟁점은 위 김문기 김현석의 후손이 위 김충립 이하 원고종증의 선대들인가 아니면 위 김계훈이하 피고종증의 선대들인가 하는 점에 모아진다고 할 것이므로 이하 그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2]인정사실
앞에서 채용한 각종 증거 ...을제106호증의 각 기재는 위 인정에 방해되지 아니하며 달리 반증이 없다
[가]위 백촌 김문기가 단종복위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세조2년[1456년 병자년] 5월에 그 아들인 김현석과 함께 극형으로 처형된 후 그 손자들은 고을 관노로 정속되고[16세 미만자는 외방에 보수 하였다가 16세가 되면 고을 관노로 정속케함] 재산은 몰수 당하였다 [이른바 단종사화]
그런데 위 김충립 이하 원고종증의 선대들은 위 단종사화 이후 나중에 위 김문기가 신원될 무렵까지 주로 관노로서 살아온 반면 위 김계훈 이하 피고종증의 선대들은 위 단종사화 이후에도 사대부로서 벼슬을 계속하여 왔고[위 김계훈은 통덕랑 위 김자용은 생원 위 김희년은 정언]위 김양봉은 통덕랑 성균진사의 벼슬을 각 하였음 양반가문과 통혼하여 왔다
[나]피고종증의 족보인 경주김씨세보[갑제38호중의 1 내지 11에는 김현석의 아들로 김계훈만이 등재되어 있고 안동권씨세보[을제6 내지 10호중의 각1내지 3]에는 권담의 사위로 김현석이 등재되고 김현석의 아들로 김계훈만이 등재되어 있다 한편 위 권담의 딸 권영금은 세종1년[己亥]인 1419년 이후에
출생한 자인 반면 피고종증의 족보인 위 경주김씨세보에 의하더라도 김계훈의 생년은 모두 세종 갑진년[甲辰年]생 즉 1424년으로 기재되어 있어 단종사화
당시[1456년]32세였던바 그 당시 14세로 모인 위 권영금과 함께 권담의 집에 보수 되었다는 피고종증의 주장과 어긋날 뿐만 아니라 위 권영금과의 연령차이는 5세 이상이 될수 없어 그들 사이에 친모자관계가 성립될수 없다 한편 안동권씨 족보 증 위에서 본 세보보다 앞선 성종 병신년[1476년]에 작성된 성화병신보 에는 권담의 사위인 김현석의 아들이 두명 있는 것으로 되어있고 그 이름은 등재되어 있지 않는반면 위 성화보 보다 훨씬뒤인 1700년대 이후에 작성된 위 안동권씨세보에는 권담의 사위인 김현석의 아들로 위와같이 오직 김계훈의 이름만이 등재되어 있어 후에 작성되는 족보는 그전에 작성되어 있는 족보를 토대로 하는 일반적인 경향과는 다르게 되어 있다[특히 위 선행족보의 기재에 오류가 있었다고 보여지지 아니한다]
[다]위 김문기 및 김현석의 후손이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200여년 전부터 원고종증의 선대들 피고종증의 선대들 및 기타 관계자들 사이에 시비와 분쟁이 계속되어 왔다 위 백촌 김문기가 위와같이 단종사화로 세조2년인1456년에 그 아들인 김현석과 함께 극형으로 처형된 후 그 손자들은 고을의 관노로 정속되고 재산은 몰수당하였는데 1717년[정유] 숙종 때 원고종증의 선대인 김이휘가 격고로 조상인 김문기의 원통함을 임금께 호소하고 그 신원을 탄원하고
원고종증의 선대인 김정구가 다시 승원한 계기가 되어 결국 신설의 전을 입어 신원 되었고 1731년[신해]영조때 왕명으로 위 김문기의 관작을 회복시킨후 1778년[무술] 정조때 그에게 시호교지를 내려 충의공의 시호를 추증하는 등 조정에서 위 김문기 등을 단종을 위하여 순절한 충신으로 예우하고 그 종손에게 적몰된 옛재산을 환급해 주고 그 후손으로 인정되면 정속에서 풀리고 군역 기타의 천역이 면제된다고 하니 위 김문기의 종손임을 자칭하는 자가 경상도
황해도 전라도 등지에서 여러명이 나타나 종통시비가 생긴 끝에 마침내 소송으로까지 번졌다 그리하여 원고종증의 선대인 김종옥 등은 김명규 등이 충의공의 후손임을 가칭하여 속임수로 위 시호교지를 찾아다가 연시하고 보관하고 있다면서 그들을 상대로 제소한결과 1799년[기미]8.21.임금이 복관작 교지
있는곳에 시호교지도 함께 모셔라 는 전교를 내리고 그대로 시행되어 시호교지도 원고종증측에 넘겨져 그후로는 위 두개의 교지를 원고종증측
종손들이 함께 보관해 왔다
[라]피고종증의 선대인 김성언이 원고종증의 선대인 김치신을 상대로 종통관계의 소송을 제기하자 상부의 지시를 받은 옥천군수와 영동현감이 1824년[갑신]윤 7,28.자로 위 김성언의 장적에는 그의 선조로 충의공 부자가 기재되어 있지 아니한 반면 안동부장적에는 충의공에서부터 그의 증손인 충지에 이르기까지 밝게 내력이 기재되어 있고 또 한성부장적에는 충립에서부터 그의 6대손인 정구까지의 내력이 명백히 기재되어있다 치신은 정구의 증손이다 모두 증거가 되는 인적이있다 이는 믿을수 있는 문적이다 선조에서 내린 성명이 정증한 즉 종통의 문제는 이미 귀정되었고 계파는 다시 문제삼을 여지가 없게 되었거늘 성언이 근거없이 무심한 말을 날조하여 송사를 일삼고 있다 는 요지의 조사결과를 보고받은바 있다 그리고 원고종증의 선대인 김치수가 위 김성언의 자인 김진황을 상대로 한 분묘굴이 및 계파문제 등의 소송에 광하여 충청도 순찰사는 1844[갑진].10.18.자 회제로서 계파문제에 대해서는 일찌기 갑신년에 도사의 계로서 김치수는 가승과 관청에 비치된 장적이 명백하고 차이가 없음에 반하여 김진황의 부자 성언은 소목[계보]이 연속되지 않고 의문점이 많다고 하였으니 다시 조사할 필요가 없다 지난 계사년[1833년]에 예조에서 대질할때 김성언이 가짜 김치욱을 소송당사자로 내세워 속여서 승소한 증거가
있고 파비한 죄는 죽은 김성언에게 있고 그 벌을 자식에게 미치지 할것까지는 없으며 김성언의 묘 [김관의 묘역에 몰래 설치한 묘]는 파내라는 취지의 최종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그에앞서 위 김성언은 원고종증의 종사를 맡아오던 위 김치욱과 원고종증의 종손인 김치신이 모두 사앙한 틈을타서 위 계사년에 예조에 사망한 김치욱을 상대로 쟁사[소송]를 제기하고 가짜 김치욱을 내세워 대질케 하는등 사위의 방법으로 일시 승소하여 위 김문기의 사당과 그 생가 옛터에 세운 유허비와 김관 묘의 묘비등을 철거해 버리자 위 김치수가 격쟁을 벌여 이에 적극 항쟁한 결과 마침내 위 김성언의 비행이 탄로되어 그는 정배를 당하여 배소에서 죽는등 처벌을 받았다
[마]원고종증의 선대인 김도형이 1804년[갑지]에 충북 영동군 심천면 마곡리 산18임야 내에있는 김순의 묘에 묘비를 세워 관리해 오다가 1976년.9.경 역시 원고종증측에서 위 낡은묘비 등을 철거하고 위 김순의 묘에 묘비 상석을 새로이 설치하였고 원고종증과 소외 김녕김씨 대사성공파종증에서 위 김순의 묘를 공동으로 수호 관리해 오고 있으며 그 분묘기지인 임야는 양대문중에서 그 문중원 4명에게 명의신탁하여 관리해 오고 있다 그런데 피고종증과 그 종증원인 소외 김재문은 위 김재문이 위 김순의 23대 종손이므로 위 김재문 과 피고종증에게 위 김순의 21대 종손이라고 잠칭하면서 그 묘소의 수호에는 하등의 권리가 없음에도 원고종회를 불법으로 결성하고 그들이 임의로 위 김순의 묘비 상석등을 설치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원고종증 및 위 김진대를 위 묘비등의 시설물의 철거와 위자료의 지급을 구하는 소를 청주지방 법원 82가합35호로 제기 하였고 그 사건에서 위 법원은 피고종증과 위 김재문의 위 주장을 받아드려 위 김진대는 위 묘비 등의 시설물을 철거하고 위 김진대와 원고종증은 김재문에게 위자료 금1.000.000원을 지급하라 는 판결을 선고 하였다
그러나 위 판결에 대하여 원고종증과 김진대가 불복 항소한 결과그 항소심인 서울고등법원에서는 1984.8..22위 김재문이 위 김순 및김문기 김현석의 종손임이 인정되지 아니한다는 이유로 위 제1심 판결을 취소하고 위 김재문의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선고 하였고 그에 대하여 위 김재문이 불복 상고 하였으나 대법원은 1985. 11.12. 위 김재문의 상고허가신청을 기각하는 결정을 함으로써 위 김재문 패소의 고등법원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바]원고종증의 대종증인 김녕김씨종증은 신라 경순왕의 후손인 김시흥이 고려시대 후기무렵 김녕군으로 봉군받은 것을 계기로 위 김시흥을 김녕김씨 시조로 삼은이래 조선조 초기부터 김해김씨로 칭하게 되었고 위 김문기 역시 김해김씨로 호칭되어 왔는데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원고종증측에서는 김수로왕의 후손인 원래의 김해김씨와의 혼동을 피하고자 1849년[기유 헌종15년]예조에 개관청원을 제출한 결과 조정의 재가를 얻어 원고종증의 본관이 김해김씨에서 김녕김씨로 바뀌게 되었음에 반하여 피고종증의 선대인 김희년은 사대부로서 벼슬길에 나아가 청풍김씨로 행세하였는데 피고종증은 그후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경주김씨로 개관하였다
[3]판단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위 김문기 및 김현석의 후손은 위 김충립 이하 원고종증의 선대들이고 위 김계훈 이하 피고종증의 선대들은 그 후손이 아닌 사실을 넉넉히 추단할수 있다고 할 것이다
[다]소결론
무릇 대동보라함은 한 성씨의 시조 이하 동계혈족간에 분파된 파계를 한데 모아 집대성한 것으로 각 파의 분파조는 시조로부터 몇세손이며 어느대에서 분파되어 파조가 되었는가를 한눈에 볼수 있도록 수록된 족보를말하는 것이므로 대동보에는 시조에서 분파된 모든 계파가 빠짐없이 수록되어야 하는 것이고
분파된 파계의 어느 일파라도 이를 누락시켜서는 안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피고종증이 위 김문기를 시조로 하는 이 사건 대동보를 발간함에 있어서 위
김문기 및 김현석의 후손으로 그 정당한 후손인 위 김충립 이하 원고종증선대들을 기재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 정당한 후손이 아닌 위 김계훈 이하 피고종증의 선대들만을 기재하였을 뿐더러 그에 그치지 아니하고 원고종증을 백촌공의 종통을 어지럽히는 사이비 무리들 사이비 백촌후손 충립이후 날조손이라고 지칭한 것은 위 김문기의 정당한 후손이 아닌 위 김계훈 이하 피고종증의 선대들로 종통이 이어지는 피고종증이 위 김문기의 정당한 후손인 김충립 이하 원고종증 선대들로 종통이 이어지는 원고종증에 대하여 그 지위를 잠탈한 것일뿐더러 위 김충립 등은 대외적으로 위 김문기의 후손이 아닌 인식되게
하여 위 김문기의 후손임을 표방하는 원고종증으로서는 그 존립기반이 부인됨은 물론 혈연관계가 없는 남의 조상을 자신의 조상으로 삼는 종증이라는
비난을 받게되며 위 김문기를 시조로 하여 공동성조의 분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봉행하며 종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그 동족들로 구성된 원고종증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될 것임이 명백하다고 할 것이므로 이는 원고종증의 사회적 평가로서의 명예를 훼손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 할 것이다
따라서 피고는 원고에게 피고의 위와같은 불법행위로 인하여 원고가 입은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이고 그 위자료 액수는 이 사건 변론에 나타난 여러가지 사정들을 참작하여 보면 금 10.000.000.원으로 정함이 상당하다 나아가 위 대동보 수권 그 권지일 및 위 종통고증록이 배포되게 되면 원고에 대한 명예훼손이 계속될 염여가 있음에이 명백하므로 원고의 청구에 따라 그방지를 위하여 피고는 위 책자들을 배포하지 아니할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이다
[결론]
[ㄴ]원고의 명예를 훼손하는 위 대동보 증 수권 권지일 종통고증록을 배포하여서는 아니될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인바 원고의 이 사건 청구는 위 인정범위 내에서 이유있어 이를 인용하고 나머지 청구는 이유없어 이를 각 기각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와 결론을 일부 달리 한 원심판결의 원고 패소부분은 부당하므로 원심판결 중 위에서 인정한 금 8.000.000원 및 그 지연손해금의 지급과 위 대동보중 권지일의 배포금지를 명한 부분에 해당하는 원고 패소부분을 취소하여 피고에 대하여 그 이행을 명하기로 하고 원고의 나머지 항소와 피고의 항소는 모두 이유없어 이를 각 기각하며 ,
1986.5.2 부터 로 정정하는 것으로 경정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19**년*월*일
재판장 ;판사; 홍일표
판사; 정종식
판사; 이성훈
3.2. 김녕김씨 충의공파와 경주김씨 백촌공파의 종통소송 대법원 판결문
*** 제1부 ***
*** 판결 ***
사건 97다13542 손해배상[기]
원고,피상고인 김녕김씨 충의공파 대종회
대구 ** *** ***
대표자 회장 김진석
소송 대리인 변호사 김 ** 김 **
피고,상고인 경주김씨 백촌공파 종증
서울 *** *** ***
대표자 회장 김제현
소송 대리인 변호사 김 ** 윤 **
환송판결 대법원 1990,2,27,선고 89다카12275 판결
원심판결 서울 고등법원 1997,1,31,선고 90나12788 판결
주문 ; 상고를 기각한다
상고비용은 피고의 부담으로 한다
이유 ;상고이유[기간 도과후 ,,,,,,,,]를 본다
1,상고이유 1점에 관하여
원심판결에 의하면 원심은 그 사실인정 증거의 하나로 시호교지[갑제24호증의 2]와 증직교지[갑제24호 증의1]를 들고 있는데 감정인 박 **의 감정서
[갑제35호증]에 의하면 시호교지는 진본이고 증직교지에 관하여는 직인과 서체는 맞으나 처음보는 문서 이어서 진본임을 단정할수 없다 라고 감정하고 있어 그 진정성립에 의문을 표시하고는 있으나 원심은 증인 김대희의 증언에 의하여 그 진정성립을 인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문서의 진정성립에 관한여는 특별한 제한이 없고 그 증명방법에 신빙성이 있다면 된다고 할것인 바 [당원 1994,10,11,선고 94다23746판결 참조] 기록에 의하여 살펴보면 원심이 위 증인에 의하여 그 진정성립을 인정한 조치는 정당한 것으로 수긍할수 있고 거기에 문서의 증명력에 관한 법리 오해의 위법이 있다고 할수있다 논지는 이유 없다
2,나머지 상고이유에 관하여
원심은 거시 증거에 의하여 판시와 같은 사실을 각 인정한 다음 그 인정사실에 의하면 위 김문기 및 김현석의 후손은 위 김충립 이하 원고종증의 후손 들이고 위 김계훈 이하 피고종증의 선대들은 위 김문기및 김현석의 후손이 아닌 사실을 추단할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여 살펴보면 원심의 사실인정 및 판단은 모두 정당한 것으로 수긍할수 있고 소론이 지적하는 바와 같은 원고종증 족보들의 의문점 모순점 등은 위와같은 결론에 영향을 미칠 사유가 되지 못한다고 하겠다
또한 상고심으로 부터 사건을 환송받은 법원은 그 사건을 재판함에 있어서 상고법원이 파기한 이유로 한 법률상의 판단에 대하여 환송후의 심리과정에서 새로운 주장이나 입증이 제출되어 기속적 판단의 기초가 된 사실관계에 변동이 생기지 아니하는 한 이에 기속을 받는다고 할것인 바[당원 1977,2,28,선고 95다49233 판결 참조] 원심이 피고종증이 발행한 대동보에 원고종증의 위 김충립과 그 형제들의 기재를 누락한 것이 원고종증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하 시킨다고 판단한 것은 당원의 환송취지에 따른 것으로 정당하다
결국 원심판기에 소론주장과 같은 이유모순 심리미진 채증법칙위배 법리오해 등의 위법이 있다고 할수없다 논지는 모두 이유없다
3,그러므로 상고를 기각하고 소송비용은 패소자의 부담으로 하여 관여 법관들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1997,7,22
재판관 대법관 이돈희,주심 대법관 최종영,대법관 정귀호,대법관 이임수
4. 상기 소송 경주김씨 백촌공파 대동보 입장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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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閼智后孫(김알지후손)으로 당대는 本貫(본관)을 金海(김해)로 使用(사용) 하였으나 后代(후대)에 이르러 그后孫(후손)들이 金首露王(김수로왕)의 後孫(후손)인 金海金氏(김해김씨)와 구별하기 위하여 憲宗十二年(헌종12년)에 격쟁하여 憲宗王(헌종왕)으로 부터 后金海金氏(후김해김씨)의 后裔(후예)는 全部慶州(전부경주)로 復官(복관)하라는 允許(윤허)을받고 慶州(경주)로 貫鄕(관향)을 하고 있으나 아직도 김해(金海)또는金寧(김녕)으로 使用(사용)하는 門中(문중)도있다. 白村公宗統是非(백촌공종통시비)로 數十年問訢訟(수십년문흔송)이 進行確定的(진행확정적)인 判決(판결)을 보지 못한체 계속 中(중)임을 가슴아프게 生覺(생각)하나 王朝實錄(왕조실록)과 安東權氏族譜靈山辛氏族譜(안동권씨족보영산신씨족보)에 白村公(백촌공)의 宗孫(종손)은 慶州(경주)로 明記(명기)되어있음으로 判決(판결)과 관계없이 慶州金氏白村公派가宗統(경주김씨백촌공파가종통)임
경주김씨 대동보 발간일자 : 1995년 을해년 3월
5. 상기 내용에 대한 김녕김씨 충의공파 후손 반박글
- 내용이 길어서 링크로 대체합니다. (궁금하신분은 링크클릭)
2. 경주김씨 백촌공파 주장에 대한 김녕김씨 충의공파 후손의 반박 두번째 글
6. 그 외
여담으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그의 후손이다. 김재규가 중앙 정보 부장 시절 그를 무리하게 사육신에 끼워넣으려 했다고 하는데, 김재규도 높이 평가하는 문중에서는 김재규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1] . 사실 김문기는 계유정난 관련 인물로 민신, 조극관과 함께 장릉배식록의 '''삼중신'''(三重臣)에 포함되어 있지만, 사육신의 네임밸류가 어마어마한 관계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듯 하다.
어쨌든 조선도 공식적으로 김문기의 공을 인정하였고, 역사적인 사료에서도 그 근거 자체는 확실히 발견할 수 있으므로, 1977년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 김문기를 사육신에 헌창했다. 그러다가 1982년 11월 국사 편찬 위원회 합의 사항에서는 그런 적이 없다라고 발표를 하면서 다시 복잡해졌고. 2008년 국사 편찬 위원회가 최초의 6인에서 변함이 없다고 1982년 합의 사항을 재확인했다.
이 때문에 공식적으로 김문기는 사육신 명단에 포함되지 않는다.
사실 사육신이니 삼중신이니 따지는 것도 웃긴 일이긴 하다.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목숨을 건 동지들이었다는 것은 매한가지니.
[1] 중앙 정보 부장이 되기 전에는 일을 했으나, 된 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