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평가
1. 개요
긍정 부정 평가를 양분하기 전에, 전두환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좋지 않다. 교과서에서도 민주주의 체제에서 절대로 따르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로 그려져 있다. 극우주의자 중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더러 있지만, 단순히 호남 지역에 대한 반감으로 옹호하거나, 80년대 경제 황금기에 대한 향수 등의 영향이 클 뿐, 전두환 개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정치인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전두환을 긍정적으로 평하면 집중 포화를 각오해야 할 정도이다.[1] 이런 인식이 큰 이유는, 일단 전두환이 '''민주주의에 완전히 어긋나는 독재자'''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같은 독재자인 이승만, 박정희는 적어도 초기집권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당선됐다. 전두환은 과정으로 보나[2] 결과로 보나[3] 정통성과 정당성 측면에서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악인 대통령이다.
전두환은 일단 한국전이 한창이던 1951년에 육군사관학교에 제11기로 입교하였다. 원래 제10기, 생도 2기가 정식 4년제 1기에 해당하는 세대였어야 하나 한국전 발발과 동시에 입교한 10기, 생도 2기는 6월 1일 입교후 석달 만(10월 23일)에 오히려 전시동원되었고 11기가 정식 4년제가 되었다. 전시에 장교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에 입교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공명심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쨌거나 목숨을 건 선택이었다. 실제 8기부터 10기까지의 육사 졸업생들은 소위 계급장을 달고 숱하게 산화하였다. 물론 11기는 4년의 과정을 마치고 휴전 후 임관하긴 했다. 하지만 10기의 사례에서 보듯이 언제 전쟁터로 향하게 될지 모르는 전시에 사관학교에 입교한다는 것은 애국심이 없고서는 불가능하다. 일단 젊은 시절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달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위관장교 시절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대위 시절 육사 생도 퍼레이드를 통해 박정희의 눈에 들기 시작한 이후 박정희로부터 국회의원 출마를 제의받는 등 본격적인 정치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박정희의 제의를 거절한 전두환은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조직하여 군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 나가고, 하나회는 박정희 대통령의 군 내 친위조직으로 기능하였다. 월남전에서 훈장까지 따온 전두환은[4] 쾌속진급으로 대령[5] 과 준장에 오른 이후 소장이 되어, 대통령의 최측근 제복군인으로 김재규와 차지철을 견제하는 박정희의 충복으로서 요직인 보안사령관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10.26 사태로 인해 박정희가 차지철과 함께 김재규에게 저격당해 세상을 뜨자,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순식간에 권력의 핵심으로 급부상한다.
이후 10.26 사태를 수습한다며 나선 본격적 집권 과정에서 전두환과 그 하나회 무리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데다, 서울의 봄 및 5.18 민주화운동 등의 진압 과정 중 명백한 시민 학살을 저질렀고, 임기 동안 저지른 고문과 인권 유린은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심지어 대통령 퇴임 직전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고[6] , 퇴임 후에도 과거 비자금에 대한 '''추징금''' 납부 거부, 아들이나 친동생의(후자는 새마을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주범이다.) 탈세 등으로, 대다수 국민들의 평가는 완전히 바닥을 친다.
2. 긍정적 평가
3. 부정적 평가
[1] 이 점이 박정희와의 큰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박정희는 세계 최하위급의 가난한 나라에서 국가 인프라 구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경제를 성장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고 노무현, 유시민, 문재인 같은 진보 성향 인물들도 이 부분은 명백히 박정희 정권의 공이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한 그의 딸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로 '''박정희의 후광'''이 있었다는 점도 부정하기 힘들다.[2] 두 차례의 쿠데타를 거쳐 대통령을 겁박하여 하야시키고,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3] 자신에게 반대하는 다수의 국민을 고문하고 인권유린을 일삼는가 하면, 5.18로 대표되는 자국민에 대한 학살까지 자행[4] 물론 전두환이 월남전에서 제대로 활약한 것은 절대 아니다. 전두환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서 식수도 부족한 상황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태업을 일삼는가 하면 본인의 전과를 거짓으로 꾸미기 위해 '''무기 밀매상'''으로부터 매입한 무기를 '''노획품'''으로 둔갑시켰다가 걸리기도 했다.[5] 육사 동기 중 가장 먼저 대령을 달았다.[6] 후에 이 조치는 6월 항쟁을 점화하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