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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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
제12대 국무총리이자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총리였고,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당하면서 대통령직이 궐위되자 통일주체국민회의의 표결을 거쳐 당선되어 그 직을 이어받게 되었다.
신군부가 주도한 12·12 군사반란으로 말미암아 재임 8개월 만에 축출되었으며,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짧은 임기를 지낸 대통령이 되었다.
1919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하여 호는 현석(玄石), 자는 서옥(瑞玉)이다. 2006년 10월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2. 생애
2.1. 10.26 사건 이전
가문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며,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 만주국 대동학원 정치행정반을 졸업(1부 15기)하였다. 졸업 후 길림성 통양현에서 행정과장으로 근무했다. 당연히 친일의혹이 제기되었지만, 뚜렷하게 드러난 행적은 없었기 때문에 결국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최규하의 친일 논란에 대해 [펼쳐 보기ㆍ접기]
광복 이후에는 경성사범대학[5] 영문과 조교수로 영어를 가르치던 중 1946년 4월 미군정 중앙식량행정처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유엔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FAO) 국제회의에서 유창한 영어 실력과 국제적 활동력을 인정받아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어,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이 되고 1959년에는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외무부 차관이 되었다. 1959년 12월 21일 조정환 외무부 장관이 재일교포 북송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1960년 4월 25일 허정이 외무부 장관에 임명될 때까지 외무부장관 대리로서 업무를 수행하였고, 4.19 혁명으로 허정 과도내각이 들어서고 얼마 뒤 5월 11일 차관직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외무부장관 대리로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3.15 부정선거에 관여되었을 수 있다하여 수사를 받았고 당시 고위공직에 있었다고 하여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따라 공민권을 제한받았다.
박정희는 최규하가 이승만 정권 시절의 외무차관이란 이유로 싫어했으나 외무장관 이동원의 강력한 추천으로 1964년 주 말레이시아 대사로 기용하였다가, 그 후 1967년 외무부 장관, 1971년에는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1975년 국무총리로 중용하였다. 전임자인 '''김종필'''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하자[6] 박정희가 정치적 야심이 전혀 없는 관료출신 최규하를 후임자로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몇년간 재임하다 공직생활을 마감할 운명이었는데...
2.2. 10.26 사건 이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같은 해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된다.[8] 다만 최규하가 박정희의 잔여임기인 4년의 임기를 다 채울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최규하 대통령은 권한대행 시절이던 1979년 11월 10일 특별담화를 열어, '대통령 궐위 시 3개월 이내 후임자를 선출한다'는 제4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우선 선출하되, 새 대통령은 가능한 한 빠른 기간 안에 민주헌법으로 개정한 후 이에 따라 다시 선거를 실시하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담화문은 야당 정치인을 포함해 모든 국민의 환영을 받았으며, 이 선언으로 인해 최규하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데 대내외적으로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실제 새로운 민주적 헌법을 마련하고 그에 따른 선거를 치러 다음 정부에 무사히 정권을 넘겨주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역할.
그러나 그 직후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1980년 5.17 내란으로 권력을 모두 장악한 후 5.18 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무력 진압하기까지 하는데, 이 과정에서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였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중동에 순방을 나갔던 최규하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고, 귀국 후에 신군부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뒤, 5월 25일 '냉정과 이성을 되찾고, 총기를 반환하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말 그대로 신군부의 허수아비였던 것이었다.
결국 1980년 8월 16일 사임함으로써 역대 최단임 대통령이 되었다.[10] 그 직후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한 번 더 열어 대통령에 취임한 뒤 바로 헌법을 바꿔서 제5공화국 유일무이의 대통령이 되었다.''1980년 8월 16일 오전 10시 최규하 대통령은,''
''제10대 대통령직을 사임하면서 특별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책임정치의 구현으로 불신 풍조를 없애고,
불행했던 우리 헌정사에 평화적인 정권 이양의 선례를 남기며
또한 국민 모두가 심기일전하여 화합과 단결을 다짐으로써
시대적 요청에 따른 안정과 도의와 번영의 밝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기 위하야 애국충정과 대국적인 견지에서
나 자신의 거취에 관한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나는 오늘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헌법의 규정에 의거한 대통령 권한대행권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민주국가의 평화적인 정권 이양에 있어서는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국익 우선의 국가적인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헌적인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
확실히 정치 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대통령직을 떠나면서 나는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에게
대립과 분열이 아닌 이해와 화합으로 대동단결하고
불퇴전[9]
의 의지와 용기로 부강한 민주 국가를 건설하여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의 입각한 평화와 통일의 기반을
착실히 구축해 나가도록 간곡히 당부드리고자 합니다.
''약 10개월간 국가원수의 직무를 담당해온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에 따라''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s-5가 후임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됐습니다''
''최 대통령의 이번 사임은''
''책임을 맡기기 위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사임 성명을 발표한 이틀 후인 8월 18일 오전에''
''최규하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나''
'''대한뉴스 제 1295호 - 최규하 대통령 사임'''
2.3. 사임 이후
사임 후 1981년 4월부터 1988년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낸 후 1991년부터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현 민족사바로찾기연구원) 2대 의장을 지내다가, 1993년부터 윤택중 전 문교부장관에게 의장직을 물려주고 명예의장으로 추대되었다.
전직 국가원수에 대한 예우로 연금을 받았으나, 평소 유교 정신을 실천하는 검소한 성품이었기에 서교동 사저에 30년 이상 거주했으며 일본에서 산 선풍기를 수십 년 동안 사용했다.
1989년 5공특위로부터 국회증언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했고, 문민정부 때인 1994년 9월 및 1995년 12월에 서울지검으로부터 참고인 조사 요청을 받은 데 이어 1996년에도 신군부 일당이 내란죄로 재판을 받게 되자 서울지법으로부터 증인 소환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법정 증언을 끝까지 거부하여 이기창 변호사가 "전직 대통령이 국정행위에 대해 증언이나 해명을 하면 후임 대통령들이 책임있는 국정수행을 못한다"고 그 사유를 대신 말해줬다. 이 때문에 당시 풍자의 대상이 되거나 신문만평에서는 입에 자물쇠가 채워졌다거나, 김영삼이 최규하 대포를 쏘려는데 총포구가 꼬여서 발사가 안 되는 것처럼 최규하의 침묵을 표현한 만평들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말년에는 요통 등 지병을 앓으면서 2005년 8월에 대퇴부 골절상을 입어 한 달 동안 병상에 누웠고, 2006년 10월 22일 오전 6시께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7시 37분에 사망했다. 향년 88세.
사망 당일 병원 측은 그의 사인이 급성 심부전증으로 추측된다고 밝혔으며, 10월 26일엔 장례는 국민장 형식으로 서울 경복궁 흥례문에서 치러져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그의 유품 중 1천여점은 2009년 원주시청이 인수해 원주역사박물관 수장고에 기증했고, 이외 유품 653건 /1,822점은 2013년에 유족들이 서울시청에 기증했다.
많은 사람들이 재임 당시 신군부에 관련된 일을 기록으로라도 남겨놓지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끝내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갔다. 1995년 소환 시도 당시에 회고록이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최홍순 비서관은 이를 부인하며 외교관료 때부터 많이 썼던 메모는 있다고 밝혔다. 2006년 사망 당일 YTN 취재 결과 조문왔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비망록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으며, 측근들의 말로는 생전에 이를 토대로 회고록을 내려 했으나 본인의 뜻이 왜곡될까봐 주위의 만류로 포기했고, 일부는 서교동 자택 지하에 보존돼 있었으나 1980년대 당시 폭우로 지하실에 물이 들이치면서 젖어버리는 바람에 쓸모없게 된 데다 유언장이 없어 가족회의를 통해 공개될 수 있지만, 결국 이런저런 뒷말을 남긴 채 공개는 안 됐으며 2013년 유족이 유품들을 서울시에 기증했을 때도 문제의 비망록은 없었다.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말이 있는데 연금과 공직생활 중 모은 돈, 그리고 본인 내외의 생활습관으로 봤을때, 검소하게 살았던 모습이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강원도 지역사회에선 2012년에 그의 청백리 정신 등을 기리기 위해 '최규하대통령기념사업회'가 창립됐으나, 생전 기록을 남기지 않은 행보 등으로 인해 사업이 지지부진하고 있다.
3. 묘소
사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되었다. 1985년에 설립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최초의 대통령이자, 현재 유일한 대통령이다.
4. 선거 이력
5. 소속 정당
6. 각종 타이틀
- 유일하게 전임자의 사망으로 인해 대통령직을 승계한 대통령
- 역대 최단기 재임 대통령이자 유일하게 재임 기간이 1년 미만인 대통령(8개월간 재임)
- 2020년 기준 역대 가장 키가 큰(182cm) 대통령
- 2020년 기준 역대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75kg) 대통령
-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재임기간 중 무소속이었던 대통령
- 유일한 관료(외교관) 출신 대통령
- 최초의 국무위원 출신 대통령
- 유일한 국무총리 출신 대통령. 이회창, 김종필 등 유력한 대선 후보까지 나갔거나 고건, 허정, 황교안처럼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한 적은 있어도 실제로 된 것은 최규하가 유일하다.
- 유일한 강원도 출신 대통령
- 유일하게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대통령
- 유일하게 종교가 유교인 대통령
7. 여담
- 할아버지 최재민이 조선 말기에 성균관 박사를 지낸 이름 높은 한학자였기에 3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선비로서의 훈도와 한학, 예절을 배웠으며, 특히 한자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과 고문학에도 실력이 뛰어났다. 원주보통학교(지금의 원주초등학교) 출신이어서 이 학교에 몇 점의 휘호와 자필 서신을 남겼으며 전통적인 한문 필체로 평가받는다.
- 윤보선과 함께 존재감 없는 대통령으로 꼽힌다. 하지만 윤보선은 의원내각제 대통령으로서 명목상의 국가원수일 뿐이었고, 퇴임 후에도 박정희와 선거에서 두 번이나 맞짱을 뜨는 등 정치 활동을 계속하였지만, 최규하는 막강한 유신헌법 하의 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권이 신군부에게 있었고, 퇴임 후에도 조용히 살다 죽었기 때문에, 존재감이 가장 작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윤보선은 의원 내각제 하의 대통령이긴 하지만, 장면이 도피하여 대통령이 5.16 군사반란을 진압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우유부단하게 행동했기에 신군부에 의해 이미 취임 때부터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최규하보다 더 무능하다는 평가가 있다. 게다가 윤보선은 이후 신군부가 들어서고 난 후에는 전두환과 친하게 지내고 1987년 대선 때는 노태우 지지선언까지 하면서 최규하에 비해 존재감과는 별도로 평가가 좋지 않다.
- 대통령 중에 가장 처음으로 생전에 살던 가옥이 문화재[16] 로 지정되었다. 개방 시설이므로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위치는 망원역과 합정역의 딱 중간이며 주소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15길 10"이다. 여담으로 그의 자택은 2015년에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동룡이네 집으로 등장했다.
- 광부들의 노고를 잊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평생 연탄을 때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도 노년까지 직접 연탄을 집게로 날라 때운 연탄 보일러로 방을 덥혔다. 냉방 기계인 선풍기 또한 딸이 태어날 때 사들인 옛날 물건이었고, 에어컨 역시 장남이 미국서 사용하던 것 그대로 들여온 것이었다. 메모지도 달력을 잘라 제작했으며 그 달력에 빽빽히 매일매일의 일정을 기입했다. 볼펜 또한 1968년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당시 한미회담에서 썼던 볼펜을 쓰고 있었다. 심지어 맷돌과 돌절구도 썼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검소한 삶을 추구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어느 하루는 꽃동네의 신부가 우연히 산삼을 얻어 최규하에게 선물했는데, 그 산삼을 돌려보내며 다른 불우한 이들을 위해 써 달라고 했던 적도 있었다. 때문에 최규하를 비웃는 사람들은 있을지언정 그의 개인적인 면모는 존경하는 경우가 많다.
- 식단도 역대 대통령중 굉장히 검소하기로 유명했어서, 재직시절 즐기던 음식도 국수, 콩자반, 냉면, 나물 등이었으며, 술도 즐기지 않았다. 그나마 술을 마실 때에는 과일주와 나물에, 생선구이나 전골 등을 즐겼다고 한다.
- 영부인 홍기 여사와는 무려 69년을 함께 살았으며, 부인이 알츠하이머를 앓게 되자 8년 동안 직접 간호한 애처가. 홍기 여사가 와병하던 안방에 온도계를 달고 매일마다 실내 온도를 체크했으며, 화장실 출입이 어려울 것을 염려해 안방과 통하는 곳을 화장실로 개조하기까지 했다. 미국에서는 반대로 전직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알츠하이머를 앓았고, 영부인인 낸시 레이건 여사가 그를 돌봤다.
- 협박에 의해 긴급조치를 묵인한 것 외에는 특별히 악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전직 대통령 예우 차원에서 국민장을 치렀지만, 정작 대부분의 국민들은 국민장을 치렀는지 안 치렀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최규하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니? 같은 반응도 나왔다. 국민장 당일에는 2,000여 명 가량이 참여했다. 그래도 전직 대통령의 장례에 걸맞게 KBS, MBC, SBS, YTN등 주요 언론사들에서 주요 뉴스로 보도했고, 정계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와 한명숙 국무총리,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참석했다.
- 키 182cm의 장신. 2018년 시점에서도 182cm면 굉장한 수준이며, 저때는 독보적인 장신이었다. 오늘날 192cm 정도 되는 키다.
- 긍정적 수식어로 많이 붙는 표현이 '선비'. 언론에서나 다른 정치인들이 최규하를 수식하는 단어로 '선비 대통령', '선비 정신을 갖춘 대통령' 이런 식으로 간간히 쓰였고, 장례 때도 한명숙 전 총리의 조사에서 "선비의 표상"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했었다. 이는 사실 그가 한학을 배우기도 했었고, 절제와 검소한 삶을 살았던 걸 가리키는 수식어로 많이 쓰였지만, 정작 현대 한국에서는 '선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더 강한 경향이 있고, 검소함이나 절제와 함께 진정한 선비의 표상이라고 할 부분인 '절개'나 '기개'라는 부분에서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던 행적을 생각하면 묘한 느낌이 드는 표현이다.
- 최규하 권한대행에겐 늘 따라 다니는 인물평은 '남이 돌다리를 두드려 건너는 것을 본 뒤라야 그 위를 건너는 사람'이였다. 이 인물평처럼 최규하는 대단히 꼼꼼한 성격으로 결재할 때 영어 스펠링이나 한글의 맞춤법까지 지적했고, 외교관이면서도 골프를 일체 치지 않았다. 실제로 '골프 안 치고도 총리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일할 때, 한 번은 돈지갑을 안 가지고 구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가 동석한 다른 특보로부터 500원을 빌려 점심값을 냈다. 그 며칠 뒤에 500원짜리 지폐를 봉투에 넣어 그 특보에게 상환을 했다.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성격인 최규하는 결코 인맥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경기고 동창회에 초대돼도 '총리가 동문회에 참석하면 교육계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거절했다. 그는 깨끗한 처신으로써 주위의 존경을 받기도 한 반면 지나친 조심성으로 해서 업무 처리가 늦어진다는 불평을 사기도 했다. 경성 제 1고보(지금의 경기고) 동창생인 최세황(전국방차관)은 '특징이 없었던 점이 그의 특징이었다'고 학창 시절의 최권한대행을 평할 정도였다. 일제가 만든 괴뢰 만주국의 관리로써 출세를 시작한 그는 4·19 직후를 제외하곤 자유당, 공화당 정권 아래에서 중단 없고 순탄한 관리생활을 해왔다. 최대행은 룰이 확립된 외교관 생활에 젖어 그의 행동은 극히 규격적이었다.#
- 최규하 전 대통령의 비서관을 지낸 권영민 전 독일대사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최규하의 우유부단함이나 신중함을 비꼬는 의미로 국민들이 "최 주사#s-4"라고 부르기도 했었다고 한다. 최 전 대통령 본인은 당연히 매우 불쾌해 했는데, 권 전 대사는 평소에 온화하던 최 전 대통령이 그 말을 듣고는 그렇게 불같이 화를 냈었다고 회고했다.[17] 사실 '주사'라는 표현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6급 공무원을 지칭하는 직급명이긴 하나, 지방직 공무원들의 경우 공무원끼리 서로, 또 민원인들이 공무원을 부를 때 적당히 사용할 만한 경칭으로 'OOO주사(님)을 사용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만나는 소시민적 공무원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널리 쓰인다. 특히 9급으로 공무원 경력을 시작할 경우, 승진 시험 없이 경력 차면 연공만으로 승진 가능한 직급이 대개 6급 주사까지인 점을 감안하면, 동사무소나 면사무소 등에서 특별한 권한이나 재량 없이 지시와 규정대로 정해진 일이나 하다가, 화난 민원인이라도 찾아오면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적당히 달래 돌려 보내는 중년, 또는 초로의 아저씨... 정도가 흔히 생각하는 '주사'의 이미지인 것. 말하자면 공무원의 초라하고 무기력한(더 나아가 무능한) 측면에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함축된 표현이다. 게다가 직급상으로도 주사 위에 사무관, 서기관, 부이사관, 이사관, 관리관, 차관, 장관, 부총리, 국무총리, 국가원수 총 11직급차이난다. 5급 사무관과는 한 급 차이일 뿐이지만 호칭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의 차이는 상당하다. [18] 이런 이미지를 생각하면 최규하를 지칭하던 '최 주사'라는 표현은 단순히 우유부단함과 신중함만을 비꼰 것이 아니라 대통령씩이나 하면서 하는 일은 말단 공무원같다, 즉 자기 권한과 재량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지는 못하고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서식 맞춰 서류나 써낸다는 식으로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고 자리나 차지하고 앉아있을 뿐 딱히 하는 일도 없다는 굉장히 심한 조롱이다. 그의 장점으로 꼽히는 검소함이나 자기절제 역시 이런 부정적인 평가와 얽혀서 '좀스럽고 째째하다'는 나쁜 의미로 해석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평가를 받은 것은 최규하 자신의 책임이고, 이런 평가가 억울하다고만 하기는 어려운 것이 그의 행적이긴 하지만 불같이 화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모욕적인 표현임은 분명한 것.
8. 대중매체에서
-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김성원, SBS 코리아게이트와 삼김시대에서는 김진태가 연기했지만, 가장 싱크로율이 높은 것은 김성겸으로 꼽힌다. 둘은 외모, 체격 까지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1993년 KBS1 다큐멘터리 극장, 1995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점잖은 분위기로 연기했다.[19] 이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약간 코믹함을 가미해서 연기했다는 게 차이점이다. 일례로 전두환이 정승화를 체포하는 건에 대해서 최규하에게 사인을 받으러 간 장면에서 나온 "국방장관을 찾아오세요."라는 대사의 톤이 상당히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