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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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정칠성(鄭七星)
일본식 성명
大原榮一
이명
정락(鄭洛)
본관
하동 정씨#
생몰
1908년[2] 4월 20일 ~ 1971년 11월 11일
출생지
경상북도 칠곡군 파미면
(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칠성은 1908년 4월 20일 경상북도 칠곡군 파미면(현 왜관읍 왜관리)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후 인근의 낙산리로 이주하여 이곳에 본적을 두기도 했다.# 주로 신문배달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1932년 왜관면에서 최소복(崔小福)·이석(李錫)·이병기(李炳基)·김주석(金周錫) 등과 농민조합건설준비협의회를 조직하여 이 협의회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독서회를 결성·개최하는 한편 표면적으로는 칠곡군내 각지에 농민야학을 설치하면서 농민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상경하여 경성부 다옥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다동)에 살다가 연건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으로 재차 이주하여 살던 중 1933년 11월 13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기도경찰부에 검거되었으며#, 1935년 12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180일 산입)을 언도받아# 같은 달 23일부터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1936년 5월 23일에는 대전형무소에 이감되어 복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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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6월 16일,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1937년 6월 24일 출옥한 그는 침체된 칠곡지역의 농민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야학회나 독서회 등을 통하여 농민층의 대중적 기반을 확대해 갔다. 이 때 이들의 운동방침은 일제의 경계망을 피하기 위하여 농촌진흥조합이나 그 부속 야학회 등과 같은 어용조직에 들어가 농민을 의식적으로 계몽해 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활동하던 중 1939년 가을에 다시 체포되어 1940년 한 해 동안 6차례 구류갱신이 결정되는 등# 2년 반 동안 미결수로서 고문당하다가 1941년 3월 7일에서야 대구지검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942년 2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840일 통산)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71년 11월 11일 별세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1935년 1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2] 1934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11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