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

 


程曉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계명(季明). 정욱의 손자.
249년에 황문시랑이 되었고 여러가지 사물의 사리를 구분할 줄 알았다고 하며, 당시 교사(감찰관)가 방자하고 횡포를 부리자 상소를 올렸다.
그는 처음엔 교사의 관직이 행정에 관여하는 일이 없었는데 교사의 관직이 처음에는 행정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조조 시절엔 관직이 갖추어 지지 않고 병사들이 고생하고 민심이 불안해 사소한 죄가 있어도 살피지 않을 수 없어서 교사가 생겼으며, 이 때는 감찰하고 제어하는 것에 방도가 있어 함부로 방자하게 굴지 않았지만 이후에는 교사가 점차 중시되고 신임받으면서 교사의 폐단이 생겼다고 했다.
지금 밖에는 공경,장교가 모든 관청을 통솔하고, 안에서는 시중,상서가 천하의 정치를 담당하고 있으며, 사예교위가 수도의 수레를 감독하고, 어사중승이 궁전을 감독하며 바로잡고 있느데, 모두 현명하고 재능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그 직무를 담당하도록 하고, 법문과 칙령을 명백하게 나타내어 그 위반하는 것을 다스리게 하는데 만일 이런 현명한 사람들을 충분히 신임하지 않는다면 교사(校事)의 작은 관리는 더욱 더 신뢰할 수 없을 것이며 만일 이런 현명한 사람들이 각기 충절을 다하려고 생각한다면, 교사가 마음을 작게 하더라도 그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며 인재를 교사로 삼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사중승, 사예교위와 중복된다고 했다.
설사 교사의 관직이 국가에 이익이 된다고 하더라고, 예의와 도의로써 그것을 말하여, 대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더구나 간사함을 폭로했지만, 또 폐지하지 않는데, 그것은 정치적 결함을 시정하지 않은 것이고, 미혹되었으나 돌이키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교사의 관직은 폐지되고 여남태수로 승진해 40여 세에 사망했으며, 문장을 많이 써놓았지만 대부분 사라져 남아있는 것이 10분의 1도 되지 못한다.
저서로는 정효집, 여전 등이 있고 그가 남긴 시로는 조열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