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 개요
이탈리아 왕국이 에티오피아 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벌였던, 그러나 너무나도 준비가 부족했기에 속절없이 패배한 침략전쟁. 근대 세계에서 유럽 제국주의 열강이 아프리카 국가와의 전쟁에서 참패한 최초의 사례다.[1] 그 전에 다른 유럽 국가인 영국이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줄루군에게 패한 적은 있지만 곧바로 이어진 로크스 드리프트 전투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최종적으로 줄루 전쟁을 승리로 끝낸 반면, 이탈리아는 말 그대로 '''전쟁에서 완벽하게 쳐발렸다.'''
2. 배경
19세기 들어서 통일국가가 완성된 에티오피아 제국의 왕위계승 분쟁 와중에서 이 지역을 노리고 있던 이탈리아 왕국이 후원한 왕족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니 그가 바로 메넬리크 2세이다. 이탈리아는 자국이 지원한 인물이 왕이 된 것에 대해 매우 기뻐하였고, 메넬리크 2세도 자신을 지지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며 양국은 1889년 5월 2일 우찰레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을 통해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에 에리트리아 지역의 영유권을 넘겨주었고 이 지역은 근대 이탈리아 역사상 최초의 해외식민지가 된다.
문제는 같은 조약의 제17조에 있었다. 이 조항은 에티오피아의 외교권에 대한 부분인데 이에 대한 해석이 엇갈린 것이다. 이탈리아측은 에티오피아가 외교권을 행사하는 데 '''이탈리아의 자문을 무조건 받아야 한다'''고 해석, 즉 을사조약처럼 에티오피아의 외교권을 완전히 강탈했다고 해석했으나 정작 에티오피아와 메넬리크 2세는 '''이탈리아의 자문을 받을 수도 있다''' 즉 에티오피아에 외교적 자주권이 있다고 해석하였다.
이에 양국의 분쟁은 가시화되었고, 격분한 메넬리크 2세는 1893년 우찰레 조약의 완전 폐기를 선언하여 사이가 험악해진 양국은 '''전쟁'''이 벌어지기에 이른다.
3. 개전
3.1. 1895년
1894년 12월 15일, 에리트리아 식민지의 이탈리아군은 에리트리아 총독 오레스테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의 지휘하에 국경을 넘어 진군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공세는 1895년 초에 시작되었고, 에티오피아 북부 일부 토호 세력들을 가볍게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메넬리크 2세는 제국 전체에 총동원령을 선포하여 중앙군은 물론, 각 부족의 병력까지 탈탈 긁어모아 일전을 준비했다. 이때 메넬리크 2세 휘하에 모인 에티오피아군 병력은 중앙군 8만에 지방 토호군을 포함하면 무려 20만에 달하였다. 여기에 이탈리아가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아니꼽게 보던 프랑스는 군수물자를, 같은 이유로 러시아는 중포 등을 지원하였다. 특히 에티오피아군의 주력인 중앙군 8만은 유럽식 화기로 무장하고 훈련받은 제대로 된 부대로 당시 유럽 정규군에 비하면 그 훈련도는 부족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규모였다.[2] 지방 토호군 12만은 활과 창, 검으로 무장한 구시대적 군대였지만 규모가 워낙 많아서 보조전력으로는 매우 의미있었다.[3]
반면, 이탈리아는 아무런 준비나 지원도 없이 '''전쟁을 전적으로 에리트리아 식민지에 일임'''하는 병크를 저지른다. 바라티에리 총독은 최소한 에티오피아에 대한 정보는 대략적으로 입수하고 있었기에 에리트레아 식민지의 전력으로 에티오피아에 전면적인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것은 어렵다고 알고 있었다. 바라티에리 총독은 약 2만 내외인 1만 7천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중 7천여 명은 에리트리아 현지에서 고용하거나 징발한 현지인 병력인 '아스카리'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바라티에리 총독은 저항하는 에티오피아 군을 착실하게 격파하며 남하하였으나 12월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에티오피아군의 반격이 시작되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1895년 12월 7일 앰바 알리지(Amba Alagi) 전투에서 식민지군 중심의 이탈리아군 2천여 명이 무려 3만에 달하는 에티오피아 중앙군에 포위당해 괴멸, 포로로 잡힌 현지군 1,300명은 배신자라는 이유로 모두 처형당한다. 흠좀무. 뒤이어 메켈레 전투에서도 포위당한 이탈리아군이 에티오피아군에게 패배하고 항복(1896.1)하여 메켈레를 빼앗기면서 이탈리아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3.2. 1896년: 아드와 전투
바라티에리 총독은 즉시 군을 물리며 태세를 재정비하고 본국에 후퇴 혹은 증원을 요청했다. 사실 이 시점에서 퇴각했으면 이탈리아는 본국의 증원을 받아 다시 한 번 재공세에 나설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탈리아 본국은 증원을 보낼만한 재정적 여력이 없었다. 괜히 총독부에 전쟁을 위임한 게 아니다(…). 그러면서도 후퇴는커녕 어서 에티오피아 군을 격파하고 결정적 승리를 거두라는 현실과 거리가 안드로메다만큼 떨어진 지시를 내린다. 이를 거부할 경우 총독직을 박탈하겠다는 엄포와 함께(…). 물론 바라티에리에게 조금만 더 결단력이 있었다면 본국의 훈령을 무시하고 철수를 강행했겠지만 그에겐 본국의 훈령을 거부할 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게다가 제한된 정보로 인하여 에티오피아의 전력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가 파악한 에티오피아의 중앙군은 약 5만 내외로, 질적 차이를 생각하면 한타를 통해 충분히 역전할 수 있는 상황이라 판단한 것이다.[4]
결국 3월 1일, 이탈리아 군은 아드와(Adwa)[5] 에서 전면 공세에 돌입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탈리아 군이 지형에 익숙하지 못하고 병력도 열세인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세에 나섰다는 데 있었다. 차라리 공격을 유도하여 방어전을 하면 모르겠는데, 보급 문제가 있던 이탈리아 군은 먼저 공세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군은 주력을 총 3개 여단으로 구성, 좌우 및 중앙으로 3방면 동시 공세를 가하기로 했는데, 정작 중앙 공세를 맡은 여단이 익숙치 못한 지형과 짙은 안개로 인해 헤매느라 공세에 나서지 못하는 참사가 발생한다(…). 설상가상으로 좌익과 우익 여단은 그 사실을 전달조차 못 받아 그대로 에티오피아 진영을 기습한다. 고지에서 전세를 살피던 메넬리크 2세는 정작 중앙에 공격이 없는 걸 보자 즉시 예하 부대 중 일부인 3만 명을 투입해서 이탈리아군의 좌익 여단을 포위 공격한다. 좌익 여단은 약 2시간에 걸쳐 기어이 이를 방어해냈으나, 메넬리크 2세가 그동안 아껴오던 '''국왕 근위대''' 3만을 투입하자, 이름처럼 화기와 훈련도에서 이탈리아 군이 아쉽지 않을 정예들을 결국 당해내지 못하면서 전선이 붕괴되었으며, 공세에 참여하지 못한 중앙 여단도 이 공세에 함께 휘말려 순식간에 2개 여단이 괴멸당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황을 그제서야 보고받은''' 바라티에리 총독은 경악하며 우익 여단에게 퇴각 명령을 내린다. 에티오피아 군 주력이 이탈리아 군 좌익과 중앙에 집중하는 동안 냉병기 중심의 지방군을 상대로 천천히 밀어붙이고 있던 우익 여단은 느닷없는 전선 붕괴와 패전 소식에 당황하여 철수에 나서나, 이들이 진군해온 길에 새로운 에티오피아 군이 다른 길로 들어와서 가로막아 퇴로를 차단한 상태였다. 결국 이탈리아 군의 우익 여단도 포위·섬멸당한다.
아드와 전투는 그야말로 이탈리아 군의 대재앙이었다. 전사자 7천에 포로 5천[6] , 무사히 살아돌아간 것은 5천여 명에 불과했다. 에티오피아 군의 피해는 전사 5천 명, 부상자 1만여 명이였다. 바라티에리 총독은 겨우 살아돌아갔으며 이탈리아 군 여단장 3명 중 2명은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했고, 1명은 항복하여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중간 지휘부도 무너졌다. 공세를 위해 투입한 중포 56문은 모두 현장에 방기하여 에티오피아 군이 고스란히 노획했다. 이 전투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은 식민지의 이탈리아 군은 공세는 커녕 에리트리아 식민지 방어도 안심할 수 없게 되었다.
4. 결과
아드와 전투의 참패는 이탈리아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7] 결국 아드와 전투의 패전 책임을 물어 바라티에리가 경질되었으나 모든 책임을 일개 총독에게 넘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시당초 무리한 공격을 요구한 건 본국이었고, 본국의 크리스티 내각도 패전 책임으로 일괄 사퇴한다. 더군다나 메넬리크 2세가 이탈리아 령 에리트레아의 경계선까지 밀고 왔다는 사실에 로마는 패닉에 빠진다.
하지만 메넬리크 2세는 더 이상 밀고 오지 않았다. 화력이 아쉬웠기 때문에 에티오피아 측의 피해도 컸고, 각지의 부족들은 진작에 퍼져서 더 이상의 병력을 제공하지 않았다. 중앙군만으로도 공세에 나설 수 있었지만 부족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상황이라 자칫하면 내부 분란이 생길 수도 있었다. 메넬리크 2세는 이탈리아에 대한 완벽한 승리를 추구할 경우, 부족들의 반란과 이탈리아 본국의 분노를 동시에 감당할 수 없다고 냉정히 판단하고 있었다.
결국 영국·프랑스의 중재를 받아들여 양국은 1896년 10월 26일 아디스아바바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식한다. 이탈리아는 포로의 몸값으로 1천만 리라를 에티오피아에 지불했고, 이탈리아 령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 간의 국경선을 에티오피아 측에 조금 더 유리하게 재조정[8] 하며, 문제의 발단이 된 우찰레 조약을 폐기하기로 하였다. 에티오피아 측도 에리트레아를 이탈리아 영토로 계속 인정하며 몸값을 받고 포로들을 돌려보내 주었다.[9]
참고로 에티오피아의 포로가 되었던 이탈리아 인들은 본국으로 그냥 내보내는 정도였으나 이탈리아 군에 복무하던 에리트레아 인인 아스카리들은 에티오피아의 풍습에 따라 손발이 잘리거나 고자가 되어 돌아왔다고 한다(…).
[1] 아시아 최초의 사례로는 1839~1842년에 있었던 제1차 영국-아프간 전쟁에서 영국군이 패배하였다.[2] 무엇보다 에티오피아군의 기병 전력도 상당했는데 아드와 전투에 동원된 기병이 8600이나 된다.[3] 19세기 말은 자동화기나 연발화기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나 아직은 전장의 주역으로 떠오르기 이전의 시대였다. 때문에 화기로 무장하지 않은 대규모의 군대라도 화기로 무장한 소규모의 군대에 큰 위협이 되었다.[4] 하지만 당시 동원된 에티오피아 군은 10만이나 되었다. 이탈리아 군은 1만 7천에 불과.[5] 또는 아두와(Adouwa)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어 공식 명칭은 Battle of Adwa.[6] 3천 명이 항복하여 포로로 잡혔고 부상자 2천 명이 추가로 붙잡혀서 포로가 되었다.[7] 사실 이 결과는 이탈리아 뿐만이 아니라 유럽 열강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식민지 그 이상의 국가나 지역이 아니였던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탈리아라는 유럽 강국을 격파한 것이었기에 의미는 더욱 컸다.[8] 영토가 약 20㎢ 정도 확장되었다고 한다.[9] 이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아디스아바바 조약에 치욕이라고 반발하며 보복해야 한다는 폭력 시위까지 발생하였고 이탈리아 정부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서 진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