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

 


1. 개요
2. 유래
5. 어록
6. 본의 아닌 효과
7. 원인
7.1. 지나치게 잦은 전쟁
7.2. 내부의 반발
7.3. 기타
8. 과장된 사례
8.1. 전장에서 파스타를 먹었다는 오해
9. 분전 사례
10.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용병과 비교
11. 여담


1. 개요


이탈리아군이 어처구니 없이 패전한 경우가 많음을 조롱하는 이다. 대개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2. 유래


꽤나 오래전부터 있었던 인식인 듯 한데 Knowyourmeme에 따르면 이미 2차대전 당시부터 이탈리아군과 싸웠던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 사이에 이탈리아군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조롱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knowyourmeme: italian military jokes 1943년 미국에서 나온 영화에도 전쟁과는 맞지 않는 무능한 이탈리아군 장교의 스테레오타입이 나온다고 한다. 이탈리아제 전차는 후진 기어가 6개, 전진 기어가 1개라는 등 이탈리아군을 조롱하는 조크도 많이 있다.
그러던것이 일본에도 전파되어 '이탈리아군 전설(イタリア軍伝説)' 등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2006년 9월쯤 한국에 건너와 '이탈리아군의 전설'이나 '이탈리아군의 위력' 등의 제목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아래 내용들로 검색해보면 이 내용들이 이곳 저곳 퍼날려져 있다.

3. 전쟁사




4. 일화




5. 어록


이곳에서 몸의 사지인 개개인들에게는 탁월한 역량이 잠재해 있는데, 머리인 지도자들은 이러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결투나 적은 수의 사람들이 싸울 때, 이탈리아인들의 힘, 능력 및 재주가 얼마나 탁월한가를 보십시오. 그러나 일단 군대라는 형태로 싸우는 일에서는 결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도자의 유약함에서 비롯됩니다. 유능한 사람에게는 추종자가 없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제일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다른 지도자들로 하여금 우월성을 인정하게 할 정도로 자신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할 만한 충분한 역량이나 행운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오랫동안, 곧 지난 20년간 싸운 모든 전쟁에서 오직 이탈리아인 병사만으로 구성된 군대는 항상 부진을 면치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타로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카푸아, 제노바, 바일라, 볼로냐 및 메스트리의 전투들은 모두 이 판단의 타당성을 입증합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그의 저서 <군주론> 26장 '야만족의 지배로부터 이탈리아의 해방을 위한 호소' 에서.'''

"빌어먹을 이탈리아 놈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탈리아 전차들마다 백기가 준비되어 있다."

"이탈리아가 독일 남부를 공격한다면 독일소녀연합이나 킴제 호수의 늙은 농부들만으로도 퇴치할 수 있다."

"그런 놈들이 로마의 후예들이라니.... 로마인들은 창과 방패만 가지고도 그놈들보다는 잘 싸웠을 겁니다!"

영국에 포로로 잡힌 나치 독일 병사, 장교들의 도청 내용 중

-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나치의 병사들》, 민음사, 390~391페이지.[1]

한 나라와 다른 한 나라가 동맹을 맺어 마이너스가 된 경우는 이 경우(이탈리아)가 유일하다.

- 폴 케네디, <강대국의 흥망> 에서

잔인한 죽음이 닥쳐온다 한들

빨치산의 복수 또한 그만큼 강해질 뿐

비열한 파시스트 매국노들아,

너희들의 앞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

-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빨치산 군가, 바람이 불면 (Fischia il vento). 나치 독일, 군국주의 일본과는 달리 이탈리아에선 무솔리니 독재 기간 내내 조직적이고 유의미한 반체제 세력을 유지하다 연합군이 진주하자 무기와 외부 지원만 받고 종전까지 고딕 라인 후방에서 40만 가량의 독일군파시스트 살로공화국군을 묶어두었으며 결국 무솔리니를 스스로 처단한 업적을 세운 자체적인 레지스탕스가 있었다.[2]


6. 본의 아닌 효과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이탈리아군의 악명이 퍼지지 않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이를테면 스페인 내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바르셀로나 폭격은 나치 독일 루프트바페게르니카 폭격을 쌈싸먹는 규모였지만 화가 피카소의 작품으로 크게 알려진 게르니카에 비해 씹혔다. 이탈리아 본토의 국토 회복 운동과 직결된 지방인 현대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일대와 에티오피아 같은 곳에서는 정직하게 나치 독일과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을 만큼 전쟁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련의 에피소드들 때문에 이탈리아군은 너무도 무능해서 악행도 제대로 못한 집단이란 이미지가 붙어 알려지지 않은 점도 크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탈리아군 역시 전쟁범죄를 많이 일으켰다.
가령 이탈리아가 식민지로 삼았던 리비아에서는 군대를 동원해 강제로 원주민의 땅을 빼앗고, 본국인들을 정착시켰으며 이에 반대하는 베두인들을 사막을 가로지르게 한 후 강제수용소에 편입시켰고, 1933년 9월 폐쇄될때까지 4000명 이상의 베두인들이 사망했다. 또한 리비아인 저항세력의 구심적 역할을 하던 오마르 무크타르(Umar Al-Mukhtār)에 협력하는 현지인들에게는 잔인한 보복을 가했으며 키레나이카의 경우 해방까지 8만명의 리비아인이 사망한것으로 보고된다.[3] 1930년대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때는 독가스 사용을 금지한 1923년 서명한 제네바 의정서[4]에 참가했음에도, 전황이 좋지 않자 이를 상큼하게 씹고, 기어코 독가스를 사용하였으며, 점령 후에는 로돌포 그라치아니 총독 지휘하에 조직적인 파괴, 학살이 일어났다. 이 외 발칸반도에 이탈리아가 참가한 전역, 점령지에서도 전쟁범죄 행위가 일어났지만 이탈리아 정부의 빠른 항복과 이후 냉전의 정치적 논리, 그리고 상술한 이탈리아군의 졸전 이미지(...)에 따라 이탈리아의 전쟁범죄는 상대적으로 묻힌 감이 있다.
오죽하면 가장 이상적인 전쟁의 요소 중 하나가 이탈리아 적군이다. 나머지 요소는 독일의 무기, 소련의 겨울 군장, 영국의 여름 군장, 미국의 보급, 프랑스 위문단. 지브리 스튜디오 설립자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전 세계의 모든 군대가 이탈리아군만 같으면 세계 평화가 올 것이라며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일본에서는 일본 제국의 졸전을 감추기 위해서, 독일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이탈리아에 돌리기 위해서 이 밈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다.

7. 원인



7.1. 지나치게 잦은 전쟁


이탈리아는 1911의 그 오스만 제국에게서 리비아를 뺏어온 전쟁 → 1차세계대전 → 1920년대 내내 이어진 리비아 반란 → 에티오피아와의 전쟁 → 스페인 내전 개입으로 인해 '''20세기 초반부터 2차대전의 종결까지 한번도 제대로 비전시에 군비를 모으며 기술개발, 군제 개혁, 장교단 양성 등 현대전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예산과 인프라를 꾸준히 갈고 닦은 적이 없다.''' 2차 대전 역시 1935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감안하면 이미 다른 국가보다 3년이나 일찍 전쟁을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대외정책은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의 파시즘 체제에서 더욱 악화되었다. 실익은 전혀 없는 공허한 '승리'만 거두며 돈과 인력을 더럽게 낭비한 게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전간기 대외정책의 결과였다. 원래 싸움을 못하는 민족성인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든지간에 이렇게 소모적이면서도 무의미한 전초전만 잔뜩 치루다가 갑자기 본게임에 뛰어들면 졸전 일색에 사기가 바닥을 치는게 당연하다.[5] 2차 대전 역시 무솔리니는 리비아, 에티오피아, 스페인에서 까먹은 전력을 회복, 재구축하는데 투자는 커녕 바로 프랑스 침공에 끼어들고, 발칸반도, 북아프리카에서 삽질하다 그리스 침공에서 이 졸전의 전설에 백미를 찍었다. 동맹국 독일 눈치 탓도 할 수 없는게, 그리스 침공만 하더라도 오히려 히틀러는 어울리지 않게 온건책을 주장하며 이탈리아를 뜯어 말릴 정도였다. 2차 세계대전 직전 이탈리아는 경제발전 및 군비 강화에 써야 할 돈을 에티오피아 정복과 스페인 내전 개입으로 소모하는 바람에 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군의 평시 필요 탄약과 연료를 구입할 돈도 없는 상태였다.
완성도나 품질의 일관성에 대해선 말이 많아도 우리 주변엔 분명히 나름 유명한 이탈리아산 공업 브랜드도 있는 편이고, 개별 분야에서 보면 분명 나름 선진국 열강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데 막상 국가 차원에서 전쟁이랍시고 조직적으로 나라 내 동원가능한 기술과 인력을 모아 놓은 결과가 저 따위인 이유가 바로 이거다. 애초에 그리 제대로 된 총력전을 치룰만한 준비를 할 짬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즉,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무능은 단순한 군사적 차원 '따위'가 아니라 미완의 통일 민족 국가로서 근현대 역사상 계속 자국내 정치적 불안정을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모면하려다가 그것도 제대로 감당못해 총체적인 기술, 조직 적체를 초래한 근현대 이탈리아의 정치적 지도부 자체의 무능을 추궁해야한다.
스페인 내전에서도 독일군이 소수의 장교와 기술진, 조종사를 파견해 어디까지나 전술개선획득 및 신무기 검증을 목표로, 부차적으로 스페인 내 독일의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목표를 달성한 반면, 이탈리아는 남의 나라 내전에 완전무장한 78,500명의 병력, 6,800대의 차량, 항공기 760대, 1800문의 포를 무상으로 투입하고 얻은 실익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이탈리아 매 해 국가예산의 15~20%를 잡아먹어 이탈리아 경제에 부담을 가중시켰고, 시급한 현대화 사업도 뒷전으로 미뤄 2차 세계대전즈음 이미 이탈리아군은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허덕이는 상태였다.[6] 스페인 내전 대규모 개입 이전에는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소중한 예산과 인력을 다 까먹고 있었고, 그 이전엔 1920년대-30년대 초반 거진 10년 가까이 이탈리아령 리비아키레나이카 식민지에서 오마르 묵타르가 이끄는 현지 반란군 상대로 지리멸렬한 토벌전에 시달렸다. 즉, 2차대전시 이탈리아의 졸전을 그 자체로만 보면 그래도 나름 1차대전의 승자였던 열강이 왜 그리 못 싸웠는지 미스터리지만 이걸 1920, 30년대 전반부터 거진 10년 넘게 이어진 일련의 외교, 군사적 삽질의 거대한 스노우볼링의 결과물로 보면 더 이해가 쉽다.
당장 이탈리아 내부에서도 자신들의 전쟁 준비가 하나도 안된 것을 알고 있었으며 카를로 파바그로싸는 적어도 1942년이 되어야 대규모 작전을 할 수 있다고 무솔리니에게 직언을 했고 무솔리니도 제정신이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강철 조약을 맺고 지원을 받게 되었다.

7.2. 내부의 반발


이탈리아인들은 이런 목적도 없고 지도자도 마음에 안드는 전쟁에 억지로 내몰린 것에 가까운지라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이탈리아 본토로 향해가자 곳곳에서 연합군을 환영했고, 자발적으로 반무솔리니 레지스탕스가 되어 싸우는 이들도 있었다. 사실 전쟁 막바지에 들어서야 순식간에 불어났고 그 전공도 실제보다 과장되었던 프랑스 레지스탕스나 개개인 중심의 점조직 네트워크에 그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반나치 집단들과 달리, 이탈리아 빨치산은 1930년대 부터 스페인 내전에 국제여단으로 참가하고, 1943년 3월에는 밀라노, 토리노, 리보르노 같은 좌파 세력의 영향력이 강했던 북부의 산업도시들에서 10만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여한 거대 파업을 유도하는 등 무솔리니 정권 시기에도 활동을 지속하며 반파시스트 투쟁을 지속했다.
나치 독일 본토가 패망할 때까지 유지됐던 중부와 북부 이탈리아의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점령지는 연합군의 진격이 안 닿은 곳에서도 지속적으로 빨치산 부대들과 전쟁을 벌여야했고, 비록 몇개월 만에 독일군의 직접적인 공격으로 진압당하긴 하였지만 북부 이탈리아 농촌 여러 곳에서 1944년 가을~겨울 중에 빨치산 해방 구역이 세워졌다.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달리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 집권기 중에도 대중적인 기반을 두고 체제에 반대하여 지하에서 투쟁을 벌였던 '다른 이탈리아'의 세력이 상당히 컸던 것이다. 이렇게 이탈리아 내에서 파시즘에 반대하고, 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연합군이 진주하니 실제로 군대라고 부를 만한 규모와 전력의 동맹 세력을 형성했던 반대파가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다른 추축국인 일본, 독일보다 먼저 국제 사회로 신속히 재편입될 수 있었다. 전후 파시즘 정권이 무너진 이후의 동독과 서독, 일본 정부의 경우 파시즘 정권 하에서도 존속했던 기존의 정부를 완전히 해체하고 재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나치스, 제국 군부와 공식적으로 협력한 전과가 없는 개인들을 발굴하여 기존 정부 부서의 고위직에 임명하는 정도에 그친 반면, 이탈리아는 어쨌든 이미 하나의 정부를 구성할 만큼의 내부적 역량을 유지했던 반체제 집단들이 있었다.
그렇게 반파시스트 집단들 위주로 만들어진 전후 이탈리아 정부는 서독, 프랑스, 영국 등지의 재건 과정에서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이 함부로 서유럽에 공세를 펼치지 못 하도록 하는 방패가 되어주었다.

7.3. 기타


1차 에티오피아 침공 때는 창칼로 무장한[7] 에티오피아군에 진 것은 군사적 외의 영역에서 노력이 부족했다. 남아공줄루 제국은 아산들와나 전투에서 영국군을 이겼음에도 부족들이 영국군 편들어버려 결국 제국이 멸망했는데, 영국과 달리 이탈리아는 이런 부족들을 회유하는 방법을 그리 쓰지 않았다.

8. 과장된 사례


이 이탈리아의 졸전 기록 중에 과장되거나 오해인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군이 구식 화승총과 창칼 든 에티오피아군에게 졌다는 루머가 있다. 심지어 6.25때 유엔군으로 참전한 에티오피아군이 창칼 들고 참전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위 각주에서도 보듯 부족들 중 창과 칼을 들고 싸운 경우도 있긴 했으나 중앙 군대는 현대적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사실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졸전을 한번씩은 보여주기는 했다. 미군의 경우 본격적으로 참전한 북아프리카 전역의 후반기 때에는 카세린 협곡 등지에서 추태를 보여서 이 때는 이탈리아군도 미군을 무시하고 영국도 미군을 '연합군의 이탈리아군'이라고 조소한 적도 있었다.[8] 물론 미군은 초창기에는 이런 해이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 이후로는 전략전술면에서 대활약을 보이며 결과적으로 2차대전 승전국의 일원이 되었지만 이탈리아군은 끝까지 한심한 모습을 보였다.

8.1. 전장에서 파스타를 먹었다는 오해


[image]
현대에 복원된 이탈리아군 전투식량. 이것이 그 사막에서 데쳐 먹었다는 파스타의 진실이다.
주요 일화 중 북아프리카 전역사막에서 파스타를 삶아먹는 이탈리아군 이야기의 경우, 그 파스타는 짬밥의 개념으로 보급된 파스타이다. 애초에 서양인들이 인식하는 파스타라는건 식당에서 웨이터 부르며 먹는 멋들어진 요리가 아니라,[9] 인스턴트 라면처럼 적당히 한끼 해결하는 요리일 뿐이다. 따라서 이탈리아군이 전장에서 허세 부리며 고급 요리를 먹었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한국군으로 치자면 어디까지나 라면 끓여먹은 것 뿐이다. 더군다나 주둔지용 파스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파스타가 맞지만, 전투식량용 파스타는 캔처리된 조리 파스타였다. 즉, 파스타를 삶아먹기는 했는데 사막에서 식당처럼 삶고 난 뒤 물을 버리고 소스에 버무려서 맛있게 먹은게 아니라 그냥 캔에 들어간 통통 불어터진 파스타를 꺼내 먹은것이다. 이탈리아군은 전투식량용 파스타와 주둔지용 파스타를 달리 사용했는데, 이탈리아군의 주둔지 식단에서는 단순히 파스타 뿐만 아니라 싱싱한 야채, 과일, 고기 샌드위치, 스튜, 등을 지급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정작 북아프리카 전역의 독일군은 캔파스타고 나발이고 사령관인 에르빈 롬멜조차 제대로 먹질 못해서 황달을 비롯한 위장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북아프리카 군단이 아프리카에 파병될 때 초기에 꽤 식량 문제가 있었다. 이탈리아군에게서도 뜯어먹은 경우가 많다. 기존의 독일군용 관급빵 등이 사막 기후에서 쉽게 상했기 때문.
정작 이 파스타 일화와 비슷한 사례라면 같은 동맹군인 일본군이 가지고 있었다. 일일히 쌀과 냄비를 들고 다니고 밥짓느라 식수는 식수[10]대로 필요 했으며 태평양 전쟁 초 코레히도르 전투의 경우처럼 밥짓는 연기 때문에 미군에게 포격을 맞은 사례도 있다. 국내에서는 일본군이 이탈리아군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 것도 재미있는 점. 물론 일본군이 다른 추축국에 비해서 문제가 많았던거는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도 까인다는 점에서 유사한데, 가령 정규군과의 싸움에서는 이긴적이 없다거나,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카미카제로 엘리트들을 날려먹었다는등의 내용. 카미카제는 전쟁 전반이 아니라 후반에 나온거고 그 이전에 소모전을 치르면서 싹 날려먹은거라 사실과는 다르다. 그리고 타사파롱가 해전처럼 제대로 준비하고 나온 상대에게 이긴 경우도 의외로 있다. 물론 다른 추축국과 마찬가지로 전투에서는 이겨도 전쟁에서는 결국 패배했지만.
사실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의 전투식량은 맛있기로 유명한 현대 이탈리아군의 전투식량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고 한다.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송된 한 다큐멘터리에는 당시 이탈리아군 전투식량이 영국요리보다 맛없기로 유명했고 이탈리아군 전투식량을 노획한 영국군들이 한입먹고 그 끔찍한 맛과 식감에 모두 폐기처분할 정도였으며 실제로 당시 이탈리아 전투식량을 복원한 제품을 시식하게 해주자 먹은 사람들이 "고기는 누린내 나는 똥이요, 진흙덩어리 빵은 시멘트"라고 평하는 내용이 나온다. 딱 억지로 꾸억꾸억 먹던 수준이라는 얘기이다.
당시 이탈리아군의 배급은 장교와 사병의 차별이 아주 극심하여 북아프리카에서 근무한 어떤 이탈리아 사병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실컷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모래먼지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반해 장교들의 식사는... 글에 나오는 그것과 비슷했다고 한다. 전장에서 여유와 미식을 즐긴 이탈리아군 이미지는 아마 당시 이런 이탈리아군의 무개념 고위장교들의 행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탈리아군은 이 주둔지 식단이 맘에 안든다고 점령지 현지인 집에 쳐들어가서 '''제 값을 지불하고''' 현지 음식을 먹고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9. 분전 사례


사실 이탈리아군이라고 항상 완전 약체였던 것만은 아니고 정예부대는 다른 나라의 정예부대 못지않게 용감하게 싸웠다.
특히 용맹을 상징하는 검은 수탉의 깃털을 헬멧에 달고 다닌 베르살리에리 부대의 경우 튀니지 전투에서 최후까지 교전하며 그 감투정신을 증명하였고, 폴고레 공수사단의 부대원들은 10월 23일 시작된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의 라이트 풋(Light Foot) 작전에서 영국군 7기갑사단, 44, 50보병사단, 자유 프랑스 제1사단 및 그리스 여단 등을 7개 대대 3,500명의 병력으로 막아냈다. 사실 이 정도면 사단이 아니라 여단급의 병력. 기가 질린 영국군은 3일후 퇴각했으나, 사실상 폴고레 사단은 고립되었고 결국 폴고레 사단은 물도, 탄약도, 차량도 없이 염천의 사막을 걸어서 후퇴해야 했다. 그나마 살아남아 항복한 사람은 고작 295명이고, 그들은 항복할 때 백기를 들지 않았으며, 심지어 손도 들지 않았다고 전한다.
44사단장 허기스 장군은 폴고레 사단을 가리켜 "나는 내 남은 생애에 두번 다시 폴고레 사단과 같은 적을 만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라고 말했으며, 런던 라디오는 육군 보고서를 인용하며 "폴고레 사단은 현재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저항하고 있다."고 했다. 윈스턴 처칠마저도 "우리는 사자와 같던 폴고레 사단의 생존자들을 위하여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라고 하지만 처칠이 이런 연설을 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는게 정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부 해외자료가 처칠이 1942년 11월 2일 하원 연설에서 이런 언급을 했다고 주장하나, 공식 기록을 살펴보면 당일 하원은 소집된 바 없다. 다만 폴고레 사단 장병들의 분투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이탈리아 육군 제132 아리에테 기갑사단은 롬멜이 다른 독일사단보다도 신뢰한 사단이었다. 이후 독일군 제21기갑사단과 마찬가지로 연료가 떨어지면서 후퇴가 불가능해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립되어 분전하다가 전멸했다. 롬멜은 아리에테 사단이 전멸하자 일기에 비통한 어조로 이 사실을 기록했다.

아리에테 사단과 더불어 노장의 이탈리아 전우들을 잃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형편없는 장비로써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계속 요구했다.

게다가 아리에테 사단은 전멸당하기 전까지 토브룩이나 심지어는 독일군의 기나긴 패주 때도 선봉을 맡아 영국군을 개발살내던 정예부대였다. 결국은 독일군의 제공권 장악실패와 보급의 부재로 어쩔 수 없이 전멸당하긴 했지만 그건 당시 나머지 독일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아니, 아리에테 사단이 그만큼 싸워주었기에 독일군의 후퇴가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무엇보다 롬멜이 그렇게 징징거렸던 보급 역시 독일 공군의 비협조라는[11] 악조건에서도 이탈리아 해군이 지중해 최종보스인 영국 지중해 함대와 몰타 섬의 공군 병력에게 그야말로 몸이 찢어 발겨지면서 악착같이 보급했다. 그리고 영국이 지중해의 제해권을 항상 장악한 것은 아니라서 한때 이탈리아군의 기습으로 전함 2척이 큰 타격을 입으면서 안그래도 상황이 안 좋던 영국군이 이탈리아 해군을 피해다니는 추태를 보이게 만든 적도 있다. 다만 나중에 여기에 미 해군까지 끼어들면서 이탈리아 해군은 더더욱 나서기 어렵게 된다. 물론 미 해군의 주력은 태평양에 몰려 있었지만 한 고비 넘기면서 사우스다코타급 전함과 같은 신예 전력들도 대서양과 지중해로 투입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정부의 지휘 아래 싸운 정규군은 아니었지만, 위에 언급했듯이 스페인 내전 당시 이탈리아 출신 지원병들로 구성된 주세페 가리발디 대대는 출신 성분 자체가 전 세계의 헌신적인 좌익 운동가들이나 모험과 위험을 일부러 찾아 온 사람들이니 맹렬한 전의로 명성이 자자했던 국제 여단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사기가 높았던 부대 중 하나로 이름을 떨쳤다. 국제 여단이 맹활약한 마드리드 공방전, 하라마 전투, 과달라하라 전투, 에브로 공세 등 굵직한 전투에 모두 참여해 그 때마다 국제 여단 전력의 주축을 구성했다. 특히 스페인 공화국이 1936년 여름의 쿠데타로 끝나버리지 않고 기나긴 3년간의 내전 동안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국가군 상대로 전쟁을 치룰 수 있게 한 마드리드 공방전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벌여졌던 장소 중 하나가 지금도 전설로 화자되는 스페인 유수의 국립 대학, 마드리드 꼼플루텐세 대학 캠퍼스를 둘러싼 전투였는데, 문자 그대로 대학 건물 하나 하나를 두고 국가군과 국제 여단원들이 피 말리는 전투를 벌였다. 여기서 결국 공화파가 캠퍼스 전체를 장악하고 이를 기점으로 마드리드 시 전체에서 결국 국가군을 몰아내는데 기점이 된 중앙 도서관과 약대 건물 점령전에서 결정적인 활약을 한게 가리발디 대대였다.
본 목록에 나와있는 전간기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전적 중 거물급 사건인 스페인 내전 당시 37년 봄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증원온 공화인민군이 역포위된 이탈리아군을 쌈싸먹을수 있게 인근 마을들에서 방어전을 펼치며 버텼던게 이 12 국제여단 소속 가리발디 대대였다. 프랑코군에 증원된 이탈리아군이 5만명 규모의 군단급 대규모 파병이었다면, 공화파 측에서 싸운 이탈리아인들도 3천명 가량 단일 국적으론 프랑스 다음으로 많은 수의 의용병들이 투신했다. 특히 이탈리아나 독일 출신의 국제 여단원들은 조국이 이미 무솔리니, 히틀러의 파시스트들에게 넘어가버려 돌아갈 곳이 없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더 치열한 투지를 발휘했다. 이탈리아군 본문에서도 나오지만 이 항목의 다른 정예 부대와 마찬가지로 동기 부여가 명확한 경우 오히려 이탈리아인들의 투지는 오히려 다른 군부대를 초월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안전하게 돌아갈 조국도 남아 있지 않았던 이탈리아출신 국제여단원들은 공화국 패망과 더불어 대부분 남프랑스 국경쪽의 구르 수용소 (Camp de Gurs) 같은 난민수용소에 있다가 2차대전 발발과 함께 프랑스 외인부대 소속으로 노르웨이 전역 같은 곳에서 총알받이로 굴려졌거나, 프랑스 함락 이후 나치, 비시 당국에 의해 본국이나 나치 독일의 수용소로 송환되어 수용소에서 최후를 맞거나, 수용소 신세에서 어찌 탈주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인원들은 자국이나 나치 점령하 프랑스 같은 곳에서 파르티잔 형성의 주축이 되었다.

9.1. 이탈리아 해군


이탈리아 해군의 경우, 1차 대전 종전 직전 숙적인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신생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연합국[12]에 자국의 테게토프급 전함 유고슬라비아함[13]을 포함한 함대 및 해군 시설 전부를 양도하자, 인계가 끝난 지 수 시간 만에 단 두 명의 요원들을 어뢰를 통해 풀라 항에 잠입시켜 유고슬라비아함 하부에 폭탄을 설치해서 폭침시켰던 적이 있다. 또한 2차 대전 당시에는 데치마 플로틸리아 MAS라는 부대가 유명한데 이들은 어뢰를 개조한 특수잠항정 3기를 이용해 어뢰 1기당 2명씩 총 6명의 대원을 영국 해군의 주요 군항인 알렉산드리아 군항에 침투시켜 35,000톤급의 전함 2대와 유조선 1대를 수중폭파시킴으로써 해군 특수전의 역사를 처음 쓰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한때는 영국 지중해 함대에 사용가능한 전함이 남아있지 않아서 영국 함대가 적 대형 함선과의 교전을 꺼리는 상황이 발생하고, 폭파된 전함을 긴급수리하는 한편 외부에는 해당 전함들이 멀쩡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국기 게양식을 하고 의장대를 사열하며 수병들을 주기적으로 이동시키는 연극까지 감행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이 부대는 이탈리아가 항복하는 43년까지 어뢰정과 특수장비만으로 20만톤의 함선들을 격침했고 그 전과는 서쪽의 지브롤터에서 동쪽으로는 소련의 세바스토폴에 이르기까지 지중해와 흑해를 넘나 들었다. 이 사건으로 "이탈리아 해군의 용기는 타는 배의 크기에 반비례한다."는 농담도 나오게 되었다.
잠수함 부대에서는 유능한 선임장교였던 해군중장 안젤로 파로나 제독을 독일 해군에 파견, 당시 U보트 부대 지휘관으로 용명을 떨치던 카를 되니츠 제독과 더불어 지중해상의 세력 판도를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독일에 파견된 이탈리아 함장 중 두 명은 각각 16척 86,438톤, 11척 96,601톤을 격침시켜, 1939년 제정 기사 철십자 훈장을 거머쥐었다. 기사 철십자 훈장은 2급, 1급 철십자 훈장과 격을 달리한다. 2차대전 중 독일군과 그 동맹국 군대의 수많은 장병 중 수훈자가 7,300여명뿐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철십자 훈장 항목 참조. 되니츠 제독은 훗날 출판된 자신의 전쟁 회고록 <10년 20일>에서 이탈리아 잠수함 부대원들의 감투정신을 격찬했다. 또한 프랑스에 파견되어 BETASOM이라는 기지에서 활약한 이탈리아 해군의 경우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약 59만톤의 연합군 상선을 격침시켰다. 이는 이탈리아 해군의 격침 톤수 전체인 72만톤중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정작 이탈리아의 앞마당인 지중해의 경우 오히려 영국의 잠수함대가 대활약했고 영국이 작정하고 대잠 작전을 수행해서 타격이 컸다.

9.2. 기타


제1차 세계대전의 이탈리아군은 동맹국과의 싸움에서 어느정도 분전했다. 물론 카포레토 회전같이 대패한 전투도 있지만 직후 오스트리아군에게 50만의 피해를 입혔고(물론 오스트리아군은 동수의 러시아군은 물론 세르비아에게도 장렬하게 얻어터지던 약체였음도 감안해야 한다) 이탈리아 전선의 대표적인 격전지였던 그라파 산 전투[14]에서는 독일군을 비롯한 동맹군들의 진격을 연거푸 좌절시키면서 끝내 지켜냈던 전적이 있다.
위에 언급된 글 중간에도 포로수용소에서 미 해병대와 주먹다짐으로 싸워 이겼다는 부분도 있고, 북아프리카 원주민 사이에 교묘하게 숨어든 영국군을 수색할 때 독일군이 온갖 노력을 해도 찾지 못하던 것을 "님들아 영국 병사 한명당 설탕 5봉지 + 밀가루 5봉지 콜?"이란 제안으로 전원 잡아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포위당한 적군이 변장하고 빠져나가려 했을 때, 다른 군대의 보초병은 다 속여도 이탈리아군의 눈만은 결코 속일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경계가 투철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변장의 어색한 부분이 이탈리아군의 패셔니스트 감각에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롬멜에게 이탈리아군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묻자, 롬멜의 대답인즉 병사 개개인은 사자, 장교들은 소시지, 참모본부는 퇴비더미라고 한 적도 있었다.

10.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용병과 비교


르네상스 시기에 이탈리아인 용병 대장들은 열심히 싸우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하들이 죽으면 손실이 생기고 돈에 따라 고용되는 용병이기 때문에 지금 적이 나중엔 자기편이 될 수도 있으니까.[15] 게다가 이탈리아인 용병대장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고 심지어 친구이기도 해서 서로 전투를 하는둥 마는둥 했다고 한다. 이들은 전쟁을 전쟁으로 안보고 아예 경마나 예술이나 마찬가지로 보았다고 한다. 어찌나 제대로 싸우지 않았는지, 근대 정치학의 시조 니콜로 마키아벨리의《군주론》을 읽다보면 용병을 믿지 말라는 말이 지겹게 나온다. 강한 군대는 국민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닌 셈.
결국 당대의 이탈리아 용병은 외부의 침입에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했고,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프랑스군과 신성로마제국군에게 개작살났다. 용병끼리의 싸움에 익숙해 있던 이탈리아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파괴와 약탈이, 프랑스군의 입장에서는 전쟁 때면 으레 하는 일이었다. 오늘날에야 ‘성격이 전혀 달랐다’ 라고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인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는데, 1494년에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할 때까지만 해도 프랑스 편이었던 밀라노가 전쟁 1년만에 편을 바꾸어 베네치아와 교황령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결성한 반(反)프랑스 동맹에 가담할 정도.
사실 민족의 개념은 단순한 언어적, 풍토적 차이 정도로만 인식했고, 근대적 의미에서 '국적'이란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르네상스의 사례를 여기에 끼워 맞추어 해석하려는건 무리가 있다. 당장 상술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군대들을 작살냈다는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의 군대들도 동맹 성향의 이탈리아 장군, 부대가 지휘, 싸우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군대들이 전적으로 무능했다기보다는 르네상스 시기에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국가적 인프라 자체는 선진적이었으나 체급의 차이로 밀렸다 보는게 맞다. 게다가 이것은 육군에 한정된 이야기로 해군의 경우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군은 이탈리아의 특수성 운운할것도 없이 그냥 질적인 측면에선 지중해 최강이었던 강대한 해군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는 이런 막강한 해군력 덕분에 야전에서 여러번 패배하고도 적절한 외교와 사활을 건 돈풀이, 청야전술로 근세 시대 유일하게 이탈리아의 네이티브 열강 세력으로 독립뿐만 아니라 위세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건 어느 정도 마키아벨리의 편견의 산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같은 이탈리아에서도 베네치아의 경우 용병대장을 유력자의 딸과 결혼시켜 지배층에 편입시키거나 서로 앙숙인 용병대장끼리 경쟁을 붙혀서 매우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애초에 그 양반은 학자였지 군인이 아니었다. 피렌체 국민군은 용병에 비해 효율적인 전투를 하지 못했으며 결국 다시 용병제로 회귀했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안기아리 전투에서 1명이 말에서 떨어져 죽었을뿐이라고 했지만 실제 안기아리 전투는 1,0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한 격렬한 전투였다. 나아가 베네치아는 용병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캉브레 동맹을 저지하기도 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적인 관점에서 용병대장이 도시의 지배권을 강탈하는 장면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용병대를 낮게 평가했지만 중세부터 이미 이탈리아 용병들은 인기있는 수출품이었고, 이러한 구조는 후에 16, 17세기의 유럽에서도 통용되었다. 특히 16, 17세기 유럽을 호령했던 스페인 군대 중 두번째로 강한 군대로 평가받았던 것이 바로 이탈리아 테르시오였다. 다만 본국에서 동족간의 혈전에는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인정미 넘치지 않겠는가. 그리고 용병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 시대의 중세 국가들은 농업이 위주였는데, 국민군을 써서 굳이 피해를 직격으로 받느니 차라리 벌어놓은 돈으로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 더 이득이었던 만큼, 주로 썼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다만 베네치아군도 해군 전통을 육군에 억지로 대입시키는 병크를 저지르기도 했다. 뱃사람들에게 있어 선장의 권한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육군 부대에서도 '선장의 권한'을 그대로 대입해, 1개 부대에 1개 대장을 두고 나머지 하급 지휘관을 싹 없애버렸다. 대장 1명 빼고 다 같은 병사로 통일해버리는 장렬한 삽질은 헝가리 왕국군에게 육전에서 패배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11. 여담


[image]
이 밈과 함께 자주 쓰는 듯한 사진이다. 영국 육군 마틸다 승무원들이 노획한 이탈리아 왕국 국기를 전차에 거꾸로[16] 매달고 가는 장면이다. 언뜻 보기엔 이탈리아 육군이 마틸다 전차노획해 끌고 가는 사진으로 보이지만 이탈리아군이 자국 국기를 거꾸로 달고 다닐 리 없기에 구별할 수 있다.
폴란드공에서도 이 소재가 자주 쓰인다. italian armyball
여담이지만 나폴레옹도 이탈리아군을 무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폴레옹 본인도 코르시카 사람이니 이탈리아와 어느 정도 연은 있는 셈이기는 하다.
해외에서는 자매품으로 프랑스의 졸전 기록이 있다. 이탈리아 조롱이 너무 식상해져서 대상을 프랑스로 바꾼 것인데, 2차대전 때 이탈리아는 그래도 싸우기라도 했지, 프랑스는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항복했다는 게 포인트.
혐한 만화 헤타리아의 제목으로 유명한 헤타리아는 일본어로 '헤타레'(나약한) + '이탈리아'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로 본래 이 밈을 가리키는 말이다.
[1] 같은 챕터에서 다른 나라 군대에 대한 독일군들의 평가가 나와있는데, 영국군비열한 방법을 쓰긴 하지만 대체로 노련하고 절도있는 병사들로, 프랑스군나약하고 무능하며, 미군물질적 우위에 의존하는 나약한 군대라고 평가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최대 적수였던 소련군에 대한 평가로 '''죽음을 모르고 짐승같이 싸우는 용맹스러운 전사들'''로 타국군들의 평가에 비하면 엄청나게 후하게 평가했다. 슬라브족을 하등 종족 취급한 나치당의 인종주의와는 상반되는 부분으로, 독소전에서 독일군이 입은 어마어마한 피해규모를 생각하면 아주 정확한 평가다.[2] 이탈리아 소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의 주인공들이 이때 레지스탕스에서 싸운 전우들이었다.[3] The Dark Side of Democracy: Explaining Ethnic Cleansing. p309[4] 정식명칭은 “질식성, 독성 또는 기타 가스 및 세균적 전쟁수단의 전시사용 금지에 관한 의정서”[5] 당장 영국의 묵인 아래 꾸준히 군사력을 증강해왔던 독일군도 폴란드 침공 중 폴란드 군과 민간인들의 지독한 저항에 현장 지휘관들이 기가 죽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전술에 고착되는 현상이 발생하자 야전의 고참 부사관, 엘리트 초급장교들이 지휘관 명령 때문에 최상의 타이밍을 놓치고 뒷목잡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6] 웃긴건 스페인 내전에서 그렇게 프랑코를 열심히 밀어줬건만, 정작 이후에 이탈리아가 얻은 실익은 거의 없었다. 독일처럼 전략물자를 확보하거나 광산, 보급항구를 획득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스페인군은 이탈리아를 경계한답시고 1940년, 탕헤르를 강제점령 해버렸다. 정치적으로도 '누가 지중해와 국제 파시즘의 대빵인지 가르쳐준다'는 목적도 저렇게 중간 과정에서 터진 군사적 삽질로 인한 오명때문에 하나도 달성 못했다.[7] 아주 이게 틀린 말은 아니다. 에티오피아 제국군은 이미 수만여정 총기로 무장했으나 제국에게 따르지 않은 부족들이 무장을 지원받지 못해 창칼이나 화살로 싸웠기 때문이다. 이는 후술하는 것처럼 부족들이 서구 열강을 지지할 위험성을 회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오해하면 안될 것이, 이미 서구식 총기로 무장한 황제 직속 중앙군만 해도 이탈리아군을 압도할 만큼 많았다. 이들의 기량은 서구 열강의 일류급 부대와 비한다면 조금 모자라겠지만, 결코 서구 군대와 교전을 벌이기에 크게 모자라지는 않았다.[8] 그래서 이런 꼬락서니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 조지 패튼.[9] 물론 비싸게 먹으면 어떻게든 고급화시킬 수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김치찌개도 럭셔리 요리로 둔갑시킬 수 있다.[10] 특히나 습한 동남아에서 물을 함부로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풍토병 방지를 막기 위해서 여러 작업이 필요 했다,[11] 이탈리아 공군의 상태가 말이 아닌지라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막상 전투에 들어갔을 때 약속한 독일기는 나타나지도 않았다거나(마타판 해전 등)...[12] 유고슬라비아 왕국 설립 직전 존재했던 미승인 임시정부.[13] 원래 함명은 비리투스 유니티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표어다.[14] 배틀필드 1에 나오는 그라파 산이 맞다.[15] 참고로 동시대 스위스와 독일의 용병들은 같은 이유로 죽자사자 싸웠다...[16] 방패의 뾰족한 부분이 위를 향하고 있고 색이 연한 부분(빨간색)이 왼쪽에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