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제국

 



'''에티오피아 제국'''
'''የኢትዮጵያ ንጉሠ ነገሥት መንግሥ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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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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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7년 ~ 1975년
표어
ኢትዮጵያ ታበፅዕ እደዊሃ
ሃበ አግዚአብሐር
(에티오피아는 하느님을 향하여
손을 들 것입니다.)[1]
국가
에티오피아여 행복하라
위치
동아프리카
수도
아디스아바바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 입헌군주제[2]
국가원수
황제(느구서 너거스트)
공용어
그으즈어, 암하라어
종교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국교)
주요사건
(1137년 성립)
1894-95년 이탈리아와 전쟁
1931년 헌법 제정
1936년 이탈리아 강점[3]
1941년 이탈리아 강점에서 해방
1974년 쿠데타→멸망
통화
비르
성립 이전
자그웨 왕조
멸망 이후
사회주의 에티오피아 임시 군사 정부(Derg)[4]
1. 개요
2. 역사
3. 왕사
4.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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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아프리카에 있던 제국. 나중에 공산주의 때문에 붕괴된다. 한국과는 6.25 전쟁으로 인연이 있었다. 영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에리트리아까지 합친 영토이다.

2. 역사


에티오피아 역사의 시작은 수많은 고대 국가가 세워졌던 기원전 1,00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000년대 초반의 에티오피아에는 초기 농업과 목축 기술을 익힌 부족 집단이 살았다. 이후 고대 이집트 문명이 번창했을 때,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는 금, 흑요석, 상아 등의 귀중품을 교환하는 교역로를 설립하였다. 당시의 에티오피아 주민은 푼트 지역에 살며 아직도 에티오피아 문화에 일부 남아 있는 다양한 초기 농업 기술을 개발하였다.
에티오피아의 초기 왕조들 중 가장 강력했던 악숨 왕국에 대해서는 역사에도 잘 기록되어 있으나 전설로만 전해지는 부분도 많다. 기원전 4세기경에 건국된 악숨 왕국은 그 후로 500년 동안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에티오피아에 널리 퍼져 있는 나무에서 나는 귀중한 물자인 유향과 몰약은 악숨 사람들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 주었다. 이러한 상품의 수출에 더해 상아나 귀금속 등의 수익성 좋은 물자를 교역함으로써 악숨은 이집트, 로마, 인도를 연결하는 교역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 되었다. 악숨은 이렇게 얻은 부를 바탕으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화폐를 주조하였다.
그러나 번영에 가득 찬 수세기가 지나간 후, 전설에 따르면 반란으로 유딧 여왕이 정권을 잡은 후 왕국이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악숨은 오랫동안 기독교를 지지하는 지역이었는데 유대교도인 유딧 여왕이 정권을 잡기 위해 농촌을 파괴하고 다른 왕족들을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유딧의 일생과 통치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 논란의 대상이나 10세기에 그녀가 등장한 것과 악숨이 몰락하기 시작한 시기가 일치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악숨이 무너지고 난 12세기 초반에 설립된 자그웨 왕조는 20세기까지 이어져 내려온 에티오피아 제국의 시발점이다. 자그웨 왕조는 1세기 남짓 권력을 유지했을 뿐이지만 에티오피아 전역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공헌했으며 이는 에티오피아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십자군 전쟁에 소규모 지원군을 보내고 유럽국가들과 교류를 하기도 했다.
1270년에 예쿠노 암라크 황제가 일으킨 솔로몬 왕조는 그 이후로도 수세기에 걸쳐 에티오피아를 지배했다. 솔로몬 왕조의 지도자들은 성경에 언급되는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과 그의 왕비 마케다가 자신들의 선조라고 주장한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10세기에 마케다 여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시바 왕국(현대 에티오피아에 편입되었다고 여겨지는)을 떠나 이스라엘로 가서 존경받는 솔로몬 왕의 지혜를 배웠다고 한다. 솔로몬과 그녀의 관계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녀는 솔로몬의 아들 메넬리크 1세를 낳게 된다. 메넬리크 1세는 솔로몬 밑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에티오피아로 돌아가기 전 솔로몬에게서 전설의 언약궤를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기원전 950년경에 즉위한 메넬리크 1세는 성경에 언급되는 혈통의 시조로써 이후의 에티오피아 황제들에게 추앙받는다.
근대 에티오피아의 근대적 개혁은 지방 총독이던 테오드로스에 의해 본격화된다. 그는 군사 공장을 설치하고 지방 군벌들을 억눌렀는데, 이 과정에서 교회의 토지를 몰수하려 하자 교회의 반발을 겪게 되고 1868년에는 영국 원정군의 침략을 받게 되어 자살했다. 이후 권력은 티그라이의 요하네스 4세에게 넘어갔고, 요하네스 4세는 에티오피아의 통일을 위해 군사력과 외교력을 총동원하는 한편 셰와의 메넬리크와 혼인 동맹을 맺는 등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러나 그는 수단의 무슬림 군대와 전투하는 와중에 전사하게 된다.
이후 1889년 즉위한 것이 바로 메넬리크 2세였다. 메넬리크 2세는 셰와의 관료제를 국가 통치에 도입하는 한편, 아디스아바바로 천도하면서 전선과 전화, 우방국 프랑스의 식민지 프랑스령 소말릴란드의 중심도시 지부티와 아디스아바바를 잇는 철도 등을 부설하고 에티오피아 최초의 현대식 병원과 학교를 개축하면서 본격적인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기관총을 비롯한 군사 무기의 도입과 군대의 육성에도 노력하여, 남쪽과 동쪽으로 식민지 정복활동을 했으며, 이는 에티오피아의 면적이 이전보다 두배나 확장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그러나 주변 지역의 위험은 커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홍해로 들어가는 길목인 지부티를 장악했고 영국은 수단 남부와 소말릴란드를 강탈했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뒤늦게 들어와 에리트레아와 지금의 소말리아 동남부 지역 일부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마침내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기 위해 내란에 가담하는 형식으로 에티오피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 등의 비호를 받던 에티오피아에 의해 1896년 아드와 전투에서 격퇴됨에 따라,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유일무이한 독립국으로 남게 된다.
1913년에 메넬리크 2세의 외손자인 이야수 5세가 에티오피아의 왕이 되었지만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가 국교인 나라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등 행동거지가 에티오피아인들 마음에 영 들지 않았다. 결국 1916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외세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인들에 의해 권좌에서 쫒겨나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메넬리크 2세의 딸인 자우디투가 에티오피아의 여왕으로 즉위했으며, 그녀와 6촌관계인 터퍼리 머콘는의 도움을 받으며 1930년 죽기 전까지 나라를 다스렸다.
1930년 자우디투는 터퍼리에게 왕위를 넘겨주었으며 터퍼리는 하일레 셀라시에라는 칭호를 얻었다. 셀라시에는 메넬리크 2세의 현대화 정신을 계승하여 1931년 메이지 헌법을 모델로 한 에티오피아 최초의 성문헌법을 채택했다.[5] 일본을 모델로 한 입헌군주국을 추구했기에 헌법을 통해 황제의 절대적인 권력을 성문화했으며, 여러 근대 문물을 들여온다. 또 일본 제국과의 관계에 관심이 깊어 1931년에 일본 제국에 사절단을 보내고, 일본에게 에티오피아 내 토지를 대여해 상공업 시설을 설치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 대한 항전에서도 크게 활약하였고,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창설을 제창하였으며 자메이카에선 살아있는 신으로 모셔진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1935년, 이탈리아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기어코 에티오피아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국제연맹에서 제명당하면서까지 무솔리니는 노력을 기해 독가스까지 동원하면서 1936년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이탈리아는 강점한 에티오피아를 에리트레아, 소말리아와 합쳐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식민지를 세운다. 그러나 1941년 1월부터 시작된 영국 주도 '아프리카 작전'에 이탈리아 점령지 통치는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고, 1941년 5월 아디스아바바가 영국 주도 연합군[6]에 의해 해방되고,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와 망명 정부는 환도했다. 1947년 연합국과 이탈리아 정부 간 '평화협정(Treaty of Peace)'에 의해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강점은 그 합법성이 부정되었고 동시에 이탈리아 정부는 에티오피아 정부에 전쟁 배상금을 지불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형제의 나라[7]라고 하는 터키공산주의의 위협 때문에 6.25 전쟁의 참전을 했지만 에티오피아는 오직 정의를 위해 참전을 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16개 유엔 참전국 가운데 아프리카 대륙에서 지상군 부대를 파견한 유일한 국가였다.
한국 파병부대 출국 신고식에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한국 파병 부대 이름을 ‘카녜우(ቃኘው) 대대’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고, 부대원들에게 "한국의 자유를 지켜라"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카녜우'는 암하라어로 ‘격파하다’ 라는 뜻이다.
카그뉴 대대는 1953년까지 5차에 걸쳐 총인원 6,037명이 참전하여 253번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전승의 신화를 만들었다.''' 121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냈으나 포로는 한 사람도 없없고 전장에 전우의 시신 한 구도 두고 오지 않았다. 이는 전우를 두고 가지 않겠다는 전우애와 이기든지 죽든지 둘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했던 그들의 용맹성 때문이었다. 대대는 전투 수행뿐만 아니라 1953년에 동두천에 보화교육원을 건립하고 1956년까지 한국인 고아들을 돌보기도 했다.

1968년에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한국을 방문했을 정도로 한국과 가까운 사이었다. 국가기록원 영상자료에 보면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방한 영상이 있다.
에티오피아의 영토였다가 1880년대에 이탈리아에게 빼앗겼던 홍해 연안의 에리트레아 지역을 1952년 다시 차지했다.
이후 셀라시에 황제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남았는데 전쟁의 여파와 경제개발 실패가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극심한 기근과 실업 또한 심각한 문제가 되었으며 1960년 에티오피아는 남동부에 있는 오가덴 지역을 두고 소말리아와 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1961년 에리트레아가 독립을 주장하자 정부가 에리트레아 의회를 해산시켰고 그 결과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 당시에는 그냥저냥 평범한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 이미지였으며 얼마 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중령을 중심으로 한 군의 소장파 장교들이 1974년 쿠데타를 일으켜 이듬해 셀라시에 황제를 폐위한 다음 에티오피아 제정을 폐지하여 에티오피아 제국은 멸망한다. 그 결과 에티오피아는 멩기스투에 의해 공화국이 되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책을 채택하였다. 멩기스투 정권은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오가덴 전쟁에서 소련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하였고 미국은 에티오피아에 대한 견제로 전쟁 이후 친미로 돌아서게 된[8] 소말리아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하게 된다.

3. 왕사



  • 메넬리크 2세 - 1889~1913년
  • 이야수 5세 - 1913년~1916년. 메넬리크 2세의 외손자로 즉위했으나,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자칭한데다 1차 대전에서 동맹국 편에 가담하려 하자 폐위되었다.
  • 자우디투 - 1916년~1930년. 메넬리크 2세의 딸.
  • 하일레셀라시에 1세 - 1930년~1974년.
  • [9]

4. 국가





[1] 성경 시편 68:31 (공동번역성서). 개역개정판에서는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2] 1931년 헌법 제정, 1955년 개정. 하지만 황제의 권한이 강했다.[3] 국제연맹을 포함하여 미국, 멕시코, 소련, 중국 등의 국가들이 끝까지 이탈리아의 강점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탈리아 왕의 에티오피아 황제 겸임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전후 1947년 평화협정(Treaty of Peace)에서도 이탈리아 강점의 합법성은 부정됐다.[4] 데르그 정권.[5] Bahru Zewde, A History of Modern Ethiopia : 1855–1991 , second edition (Oxford : James Currey, 2001), p. 110[6] 영국군 외에도 자유 벨기에군과 그때까지 에티오피아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에티오피아 저항세력 등이 이 '아프리카 작전'에 참가했다.[7] 애초에 터키 사람이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건 돌궐에서 이어지는 튀르크족 민족 의식 때문이지 한국 전쟁 참전 때문이 아니다.[8] 다만 소말리아도 이 때 당시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의 독재를 펼치던 시절이였다.[9] 황태자. 스위스에서 요양중 데르그 쿠데타 세력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본인이 거부했고 데르그는 이듬해 왕정을 폐지시켜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