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보병사단 화학지원대 총기난사 사건

 




1. 개요
2. 피해자 및 가해자
2.1. 피해자
2.2. 가해자
2.3. 기타


1. 개요


1985년 2월 24일, 제28보병사단 직할부대 화학지원대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 이 사건으로 8명의 사망자와 4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범인 박 모 이병(보급병)은 도주했지만 얼마 후 자수를 했다.
조사 결과 사건의 원인은 '''병영부조리'''와 '''가혹행위'''로 밝혀졌지만 당시 전두환 정부 시절이라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고, 해당 지휘관과 책임자들만 징계 및 처벌하는 선에서 끝났다. 직속상관 최 모 중사는 징역 1년 6월. 집유 2년을 선고받았고, 지휘관들은 보직 해임 처분을 받았다. 이외 병사들에 대해서도 구타 및 가혹행위 가해자들에게는 형사처벌 및 징계가 내려졌겠지만 어떤 형태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가혹행위 등으로 저지른 범죄임이 인정되었고 동정론도 있었지만 희생자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사형이 확정되었고, 박 이병이 상고를 포기하여 1986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은 군에서 이뤄진 마지막 사형 집행이기도 하다.[1]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병사들 중 일부는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사건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도 20년이 지난 후 530GP 사건이 터지고 부터이다. 그동안 병사들은 군대 내의 사건/사고에 대해서 발설하선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 끔찍한 사건이라 증언 자체를 하고 싶어하질 않았고, 정부와 국방부의 언론통제가 겹치면서 20년 가까이 은폐된 사건이 된 것이다.# 당장 이 사건도 희생자 가족이나 군이 아니라 해당 현장에 출동한 의무병 출신 전역군인의 제보로 밝혀진 것이다. 더군다나 1985년이면 '''대한민국 제5공화국''', 즉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점이 있다면 국방부는 사건 현장을 보존하지 않고 박 이병에 대한 현장검증 등의 조사만 끝낸 뒤 바로 정리했다는 점. 동료 병사 및 간부들 외출, 외박 3개월 금지, 유가족에게 사건 현장 보여주지 않기[2], 3일 만에 장례를 치르는 등 국방부의 조직적인 사건 축소, 은폐, 조작 현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2. 피해자 및 가해자



2.1. 피해자


피해자 목록은 오마이뉴스 피해자 유가족 인터뷰를 통해서 공개되었다.#
  • 김성호 병장
  • 김상식 상병
  • 명승오 상병
  • 정종해 상병
  • 양경호 상병
  • 안명근 일병
  • 손정일 이병
  • 배진형 이병

2.2. 가해자


[image]
  • 박 모 이병

2.3. 기타


  • 민간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부대 내부에서는 '이등병이 부대 몰살시킨 사건' 등으로 알음알음 소문이 내려왔다. 아니, 민간에만 안 알린거지 내부에서는 사건 현장 사진, 총살형 집행 전후를 찍은 사진을 전시하기까지 했다.
  • 530GP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알려진 사건인데, 530GP 사건의 범인 김 일병의 변호인이었던 이기욱 변호사는 이 사건 당시 군법무관으로 박 이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본인은 사형폐지론자지만 이 사건은 피해가 너무 커 사형에 반대할 수 없었다는데, 지금도 다수 사망자를 낸 총기난사 사건의 사형에 반대하기 쉽지 않다. 이런 총기난사 사건에서 판결도 아닌 사형 반대 대법관 의견이 처음 나온 것이 30여년 후의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이다.
[1] 의외로 이 사건 이후 12년 동안 사형 선고도 이뤄지지 않았다. 1997년에야 한 건이 확정됐는데, 그 전년도인 1996년 동료 3명을 살해한 육군 상병에 대한 사형 선고. 다만 그 뒤에는 사형 확정이 늘어서 2008년(육군 김일병)과 2013년(해병대 김상병) 각각 2건이 더 추가됐고, 2016년 1건(육군 임병장)이 추가로 확정되었다. 네 건 모두 총기난사 사건.[2] 당시에는 그냥 시신을 보여 주고 확인을 한 뒤 사건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결과를 통보하는 게 전부였다. 유가족들끼리 만나지도 못하게 했으며 보상금을 지급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