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곤

 



曹袞
(? ~ 235년)
삼국시대 위나라의 황족. 조조두씨의 아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뛰어났는데, 주변인들은 그의 건강을 걱정해서 만류했지만 조곤은 학문을 좋아해서 멈추지 않았다. 216년에 평향후(平鄕侯)를 시작으로 동향후(東鄕侯), 찬후(贊侯)에 바뀌어 봉해졌다. 221년에는 공으로 승진해 관속들에게 축하를 받자 오히려 자신의 과실을 바로 잡아 달라고 말했으며, 형제들이 서로 놀고 있을 때 조곤만 공부를 하는 것을 보고 주변인들은 조곤의 이 미덕을 상주해서 알리자 조곤은 오히려 공부는 당연한 것인데 이를 칭찬하기 위해 보고했다고 꾸짖었다.
조비가 황제이던 시절 조비는 형제들을 지방에 살게 하면서 그들을 엄격하게 관리 감독했다.[1] 그래서 조비 형제들의 허물과 악행이 매일 보고 되었는데 유일하게 조곤만이 삼가고 신중할 뿐만 아니라 배우기를 좋아하여 실수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이에 관리 감독하던 사람들이 허물을 보고하는 것도 당연한데 선행 또한 마땅히 보고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조곤은 도리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 하였다. 조곤은 당연히 해야할 일인데 굳이 칭찬의 글을 올린다고 이익될 게 없다고 주장했다. 권중달 교수는 주석을 통해 형제들을 시기하고 경계하는 조비와 같은 절대권력 하에서 조곤 자신이 두드러져 보이면 오히려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을 것 같아 두려워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222년에 이복형 조비에 의해서 북해왕에 봉해졌고 동일한 해에 누런 용이 업성의 서쪽 장수에서 나타나자 조곤이 이것이 길조라는 글을 써서 황제 조비를 칭송해서 황금 열 근을 수여받았으며, 이후 찬왕(贊王), 복양왕, 중산왕(中山王)에 바뀌어 봉해졌다. 절약 정신이 있어서 봉해진 곳으로 가서는 처첩에게까지 길쌈과 집안일을 하게 했으며, 입조했을 때 금령을 범한 적이 있어서 233년에 고소되었다.
황제 조예는 조곤의 평소 행실이 훌륭했기 때문에 처벌을 원치 않았으나 담당 관리가 고집해 조곤의 식읍을 깎았으며, 이후 조곤이 고심했기 때문에 조예가 234년에 식읍을 회복시켰다.
235년 가을에 조곤이 병에 걸렸고 태의의 진료, 모친과 동복형의 문병을 받았지만 병은 악화되었으며, 조곤은 죽음을 짐작하고는 속관들에게 동당을 짓도록 명하고 동당이 완공되자 수지지당(遂志之堂)이라 짓고 거기에 옮겨 살아 세자에게 가르침을 남기고 사망했다. 조곤이 저술한 문장은 총 2만여 자나 되었고 재능은 조식보다는 못했다고 하며, 적자 조부(曹孚)가 후사를 계승했다.
아래는 동당 건립 및 세자에게 남긴 가르침 관련 권중달 역 자치통감 8권 P.305에서 발췌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죽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빨리 때에 맞추어 동당을 지으라" (예기 상대기편)

세자에게 내린 가르침 관련

"'''너는 어려서 임금이 되니, 즐거움은 알겠지만 고생스러움이 어떻다는 것을 모를 것이어서 반드시 장차 교만하고 사치한 것으로 실패할 것이다.''' 형제 가운데 불량스런 행동을 하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무릎을 맞대고 그를 간언하도록 하고, 간언하였으나 좇지 아니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타일러라. 타일러도 고치지 아니하면 마침내 그 어머니께 알리고, 그래도 고치지 아니하면 마땅히 상주문을 올려서 보고를 하고, 아울러 국토를 박탈하여라 (식읍을 박탈하라). 이 은총을 지키다가 화를 입는 것이 빈천하면서 자기 몸을 온전히 하는 것만 못하다. 이것은 역시 큰 죄악인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그것이 미세한 허물이거나 작은 사고라면 마땅히 그를 덮고 가려주어야 할 것이다."

학문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조조가 학문을 좋아하는 자식에게 준 백벽도를 조곤이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백벽도가 완성된 이후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 있는 정사 삼국지의 번역 중 김원중본에서 조연(曹兗)이라고 되어 있는데, 곤(袞)과 연(兗)의 모양이 비슷해서 빚어진 일. 이를 참고한 파성넷의 번역에서도 조연으로 나오는 부분이 있다.

1. 창작물에서


소설 비열한 성자 조조에서는 전한 때 매승이 지은 칠발에 대해 읽는 모습으로 나오며, 조조가 무슨 글을 읽냐고 묻자 알려준다.

[1] 아버지 조조 생전 조식과 치열한 태자 다툼을 해야 했던 조비는 등극 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요소로 형제들을 염두에 둘수 밖에 없었고 그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걸 극도로 기피했다. 그래서 형제들끼리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그 뿐 만이 아니라 본문과 같이 자신의 형제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면서 통제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