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조위 추존 황제'''
'''太祖 武皇帝 | 태조 무황제'''
'''묘호'''
'''태조(太祖)'''
'''시호'''
무왕(武王) → 무황제(武皇帝)
'''출생'''
155년
한나라 패국 초현[1]
'''사망'''
220년 3월 15일[2]
한나라 낙양
'''능묘'''
고릉(高陵)
'''재임'''
'''한나라의 사공'''
196년 12월 ~ 208년 8월
'''한나라의 승상'''
208년 8월 ~ 213년 7월
'''재위'''
'''한나라의 위공'''
213년 7월 ~ 216년 5월
'''한나라의 위왕'''
216년 5월[3] ~ 220년 1월
<^|1>{{{#!wiki style="margin:0 -10px -5px;"
[ 펼치기 · 접기 ]
''''''
조(曹)
''''''
조(操)[12]
''''''
맹덕(孟德)[13]
'''아명'''
아만(阿瞞), 길리(吉利)
'''부모'''
태황제 조숭, 태황후 정씨
'''황후'''
무선황후 변씨

1. 개요
2. 이름
5. 가족 관계
6. 조조의 무덤
8. 기타
9. 미디어 믹스
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寧敎我負天下人休敎天下人負我(영 교 아 부 천 하 인 휴 교 천 하 인 부 아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4]

삼국지연의에서 여백사를 살해한 조조에게 진궁이 왜 그랬는지 묻자 조조가 답한 후 이어서 한 말.#


固一世之雄也而今安在哉(고 일 세 지 웅 야 이 금 안 재 재

실로 일세의 영웅이었건만 지금은 어디 있는가?

'''소동파의 적벽부 中'''


한나라의 마지막 승상이자 삼국시대 태조. '''사실상 조위의 초대 황제이자 위진시대의 토대를 닦은 인물'''. 삼국지의 악역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카리스마 있고 강단있는 군주상으로 조명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조조의 일생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말도 있다.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5]
시호는 무황제(武皇帝). 사후 아들인 조비가 추증하였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위왕에 오른 조비가 조조에게 무왕(武王)의 시호를 올렸으나, 선위를 받아 황제가 되고서는 묘호와 존호를 더해 조조를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존하였다. 조조 본인은 황제에 오르지 않았고, 명목상으로나마 한나라의 신하로서 죽었다.
조조의 성인 조씨는 원래 그의 성은 아니고 그의 아버지인 조숭환관 조등의 의붓 아들로 들어가면서 얻은 성씨라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원래 성씨는 하후씨라 하며, 하후돈이나 하후연과는 친척 형제에 해당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조조의 원래 성씨가 하후씨인지 정말로 하후돈과 하후연이 친척 형제인지는 현재까지도 의견이 엇갈린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조숭#s-2 항목으로.

2. 이름


조조(曹操)의 이름인 조(操)와 인 맹덕(孟德)은 순자 권학편(勸學篇)의 구절 '덕조(德操)'에서 따온것이다. 다음은 해당 내용.

是故權利不能傾也(시고권리불능경야)

그러므로 권세와 이익이 넘어뜨릴 수 없으며,

群衆不能移也(군중불능이야)

타인들의 압력이 마음을 바꿀 수 없으며,

天下不能蕩也(천하불능탕야)

천하도 흔들 수 없다.

生乎由是(생호유시) 死乎由是(사호유시)

살더라도 이 배운 것을 따르고 죽더라도 배운 것을 따르니

夫是之謂'''德操'''(부시지위'''덕조''')

이것을 덕행(德行)의 지조(志操)라고 이르는 것이다.

'''德操'''然後能定('''덕조'''연후능정)

덕행의 지조 있은 뒤에는 자신의 마음이 안정되고,

能定然後能應(능정연후능응)

자신의 마음이 안정된 뒤에는 능히 적응해야 하며,

能定能應(능정능응)

마음이 안정되고 적응이 되면,

夫是之謂成人(부시지위성인)

무릇 이것을 일러 성인(成人)이라고 할수 있다.

현대 북경어 발음으로는 차오 차오(Cáo Cāo). 고전 영문판 삼국지를 플레이한 사람이라면 'Cao Cao'라는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 물론 당시 중국어는 현대 중국어와 발음이 많이 다르니 이게 원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당시 발음이었을 상고한어로는 /ŋtsˁu tsʰˤawʔ/(응쭈 차우)로, 같은 음절의 반복은 아니다. 현대 발음으로는 성조의 차이가 있다.
일본식 독음은 そうそう(소-소-)[6], 특이하게도 한중일 삼국에서 모두 같은 음절 반복으로 읽힌다.
베트남식으로는 Tao Thao(따오 타오)라고 읽는다. 상고한어와 마찬가지로 음절이 다르다.

3. 생애




4. 업적과 능력




5. 가족 관계


  • 양조부모
  • 부모
    • 아버지 조숭: 조덕과 함께 낭야에서 조조를 찾아가던 중 도겸의 부하에 의해 조덕과 살해당한다.
    • 어머니 태황후 정씨
  • 형제자매
    • 남동생 조덕: 조숭과 함께 낭야에서 조조를 찾아가던 중 도겸의 부하에 의해 조숭과 살해당한다.
    • 남동생 조빈(曹彬): 조조의 아들 조균이 숙부 조빈의 뒤를 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 남동생 조옥(曹玉): 조조의 아들 조휘가 숙부 조옥의 뒤를 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 남동생 해양애후(海陽哀侯): 하후형의 장인어른으로, 해양애후라는 봉호만 알려져있고 본명은 불명이라서 조조의 동생들 중 유일하게 봉호가 알려지지 않은 조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 조카뻘
    • 조카 조안민: 완 전투에서 조앙과 전사한다.
    • 조휴: 촌수로는 상당히 먼 것으로 추정된다. 대사마를 역임했다.
    • 조진: 조위의 3대 황제 조예 때 군부 1인자로 활약한다.
    • 덕양향주 조씨: 조진의 누이이다.
  • 사촌형제
처첩과 자녀들
  • 정실부인: 정부인: 첫 번째 정실. 여성편력이 화려한 그 조조가 유일하게 몇 번이나 재결합하자고 애걸복걸했음에도 재결합에 실패한 여성.
  • 정실부인: 무선황후: 조비#s-1의 모친이자 훗날 왕후가 되는 변씨는 가기 출신이다. 정부인이 떠난 후 그녀가 두 번째 정실이 된다.
  • 첩: 유부인#s-2: 정부인과 함께 조조의 최초 처첩이다.
  • 첩: 환부인 : 조조의 서주 대학살 때 조조의 첩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첩: 두씨: 여포를 토벌할 때 관우가 여포의 수하인 진의록의 처 두씨를 자신에게 달라고 했을 때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실제로 보니 미인인지라 조조 자신이 취했다.[7]
  • 첩: 진씨(秦氏)
  • 첩: 윤씨: 조비 등과 형제처럼 자라난 하안의 어머니 윤씨는 하진의 며느리였지만 조조의 첩으로 개가했다.
    • 1남: 조구
  • 첩: 왕소의(王昭儀): 조간의 양모이다. 조조의 총애를 받았고 조비가 황제가 되는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
  • 첩: 손희(孫姬)
    • 1남: 조상
    • 2남: 조표
    • 3남: 조근
  • 첩: 이희(李姬)
    • 1남: 조승
    • 2남: 조정
    • 3남: 조경
  • 첩: 주희(周姬)
  • 첩: 유희(劉姬)
    • 1남: 조극
  • 첩: 송희(宋姬)
    • 1남: 조휘
  • 첩: 조희(趙姬)
    • 1남: 조무
  • 첩: 진씨(陳氏): 조간의 친모이지만 조간이 어릴 때 죽었다.
    • 1남: 조간: 조조가 환갑을 넘어서 본 막내로(조조가 60대 중후반에 사망했으니 죽기 몇년 전에 얻은 늦둥이다.) 조비와는 30살이나 차이나서 조비를 보면 이 아니라 할아버지라고 불러 조비가 "난 할아버지가 아니라 형이다."라고 고쳐줬다고 한다(…). 조비가 자기 형제들 중 잘 대해준 거의 몇 없는 사례.
  • 생모 미상
  • 양자
    • 진랑: 조조와 재혼한 두씨가 데려온 아들이다.
    • 하안: 조조와 재혼한 윤씨가 데려온 아들이다.
이상하리만큼 유부녀와 관련이 깊다.''' 이 탓인지 2차 매체에서의 조조는 유부녀 취향으로 그려지는 일이 잦다. 아버지만큼이나 유부녀에 심취한 아들 조비도 함께이다. 아마도 남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이라는 측면이 그의 예민한 감수성을 제대로 자극한 모양이다. 고대 중국의 상류층 가십거리인 세설신어에서 어릴 적 원소와 짜고 남의 집 신부를 납치강간하려다 발각되어 달아난 적이 있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면 조조가 여자, 특히 유부녀를 좋아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음을 짐작 가능하다. 이 유부녀 편력 때문에 조위가 멸망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조앙 항목 참조.
다만 당시는 난세였기 때문에 남편이 일찍 죽은 아내&적 측에 약탈당한 아내도 많았으며, 결혼 연령도 현대와 비교하면 상당히 낮았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워낙 난세다보니 온 나라에 과부가 넘쳐났고 크게는 호족들 간의 정략결혼, 작게는 국력을 위해서 과부들이 수절하기보다는 개가해서 건강한 씨를 받아 애를 낳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만연했기 때문에 개가하는 사례는 많았다. 예를 들어, 당대의 유명한 여류 문학가 채염은 여러 사유 때문에 여러 번 결혼을 했다. 물론, 이런 이유가 있다고 해도 당대 조조 정도의 위치나, 조조가 맞이한 과부들에게 정략적 이유도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개인의 취향 외에 굳이 과부를 취할 이유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조조가 노렸으나 얻지 못한 여자들은 다음과 같다.
  • 문소황후: 세설신어에 따르면 문소황후 견씨는 지혜롭고 용모가 아름다웠는데 본래 원희의 처가 되어 매우 사랑받고 있었다. 조조가 업성을 함락시키고 문소황후를 즉시 데리고 오도록 명령했지만 주위에서 아들인 조비가 이미 데리고 갔다고 대답하였다. 이를 들은 조조는 금년에 군사를 일으킨 건 다 조비를 위한 일이었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 이교: 삼국지연의 한정. 적벽대전 당시 제갈량이 주유를 격동시켜 주전론을 펴기 위해 동작대부를 조작하긴 했지만 실제로 조조도 이교를 노리고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바로 조조가 단가행을 읊는 편인데 조조가 자기 스스로 대교와 소교를 동작대로 데려가겠다고 선포까지 한다.[8]
  • 추씨: 장수를 토벌할 때 장수의 숙모인 추씨를 건드려서 조앙#s-1전위, 조안민이 죽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 [9]

6. 조조의 무덤




7. 평가




8. 기타


갑(𢂿, 모자)은 위나라 무제가 만든 것이다. 군중에서 복장의 간편함을 위해 만들었으며, 또한 오색의 갑(𢃫)을 만들어 방면(方面)을 표시했다.

고금주 『여복』

위나라 무제는 마노석으로 만든 말 재갈과 거거(車渠)[10]

로 만든 술 사발을 만들었다.

고금주 『잡주』

봉(棒)은 최정웅(崔正熊,최표崔豹)의 주註에서 이르길: 거폭車輻이다. 한나라 때 집금오(執金吾)의 금오(金吾) 또한 봉이다. 구리로 만들고 황금으로 양 끝을 칠했기에 금오라 하였다. 어사대부, 사례교위 또한 그것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을 수레바퀴에 끼웠기에 거폭이라 하였다. 한편으로는 그 모양이 수레바퀴살과 비슷해서 거폭이라 했다고도 한다. 위나라의 조조가 낙양북부도위로 있을 때 문에 오색 봉을 걸어 호활(豪猾)들에게 위엄을 보였다.

중화고금주

위나라 무제는 일찍이 골짜기에서 검을 하나 얻었는데 금가루로 맹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무제는 늘 그것을 착용하였다.

도검록


9. 미디어 믹스



맨 위에도 나와있듯 발음이 같은 죠죠와 엮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참고로 일본에선 서서의 발음이 죠죠와 더 비슷하기 때문에 서서가 죠죠드립과 엮인다.
현대에 와서는 주로 일본 창작품의 영향을 받아서 미남으로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위서에 '키가 작지만 언행에 거침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당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키가 작았을 것이다.
일본 미디어에서의 조조=노부나가 공식에 의해 조조를 한나라를 부정한 혁명가, 개혁자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는 한나라를 부정하기는 커녕 협천자를 칭하며 한나라의 권위에 기대어 등골까지 쪽쪽 빼먹었지만.
천자를 끼고 원소가 죽은 이후 그의 세력을 흡수한 시점에서 최종 보스가 되기 때문에 조조가 주인공인 작품은 전반부와 중반부에 온 힘을 쏟는다던가 픽션으로 후반부를 꾸미게 된다.
배우를 봐도 이런 이미지 변화를 느낄 수 있는데 이전의 조조는 위의 동상들에서 볼 수 있듯이 군주로의 위엄과 냉혹함을 강조한 이미지로 등장했지만, 최근에는 이미지가 다양화되고 있다.
[image]
왼쪽은 코에이 삼국지 12의 조조, 오른쪽은 노부나가의 야망 천도노부나가.
위에서 보듯이 일본 코에이사의 삼국지 시리즈의 조조의 모습은 비슷한 시기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모습과 거의 같다. 코에이 사의 역사 시뮬레이션이 인물 개개인의 매력에 의지하는 경향이 큰 만큼, 여러 인물들의 특징적인 면들을 강조하다 보니 이런 일이 왕왕 발생하는 것. 코에이를 비롯한 일본에서 씌여진 2차 창작에서 조조와 오다 노부나가를 등치시키는 면이 상당히 강하다.
일본에서 조조를 '냉혹한 초인'으로 묘사한 것은 나쁠 것 없는 '캐릭터' 해석이었다. 중화권의 삼국지 컨텐츠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코에이 게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국내 삼국지 팬덤의 현실상, 코에이 게임의 이미지 메이킹, 특히나 그 정점에 선 캐릭터인 조조의 이미지는 국내 삼국지 팬덤에 깊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11]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조의 이미지도 점점 노부나가와는 차이가 생기게 되어 점점 인간적인 모습이 추가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최근엔 아예 조조란 이름 두글자를 자음 ㅉ에 모음 ㅛ로 합쳐 '''쬬'''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아졌는데 주로 조조를 깔 때 이렇게 부른다.

10. 둘러보기






'''후한의 사공'''
71대 장희#s-1

'''72대 조조'''

후한 멸망
'''후한의 승상'''
신규 책봉

'''1대 조조'''

2대 조비
'''후한의 위왕'''
신규 책봉

'''조조'''

조비






[1]허난성 보저우시[2]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 음력으로는 220년 1월 경자일에 사망하였다고 하는데, 220년 1월의 경자일은 23일이었다.[3] 자치통감, 위서 무제기 기준. 후한서 효헌제기에는 4월 25일로 되어 있다.[4] 정사에선 '천하'대신 '다른 사람'이었는데 연의에서 약간 각색된 것이다. 난세의 간웅이란 정체성을 지닌 조조라는 인물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홍길동전의 판본 중에는 “천하가 나를 저버릴지언정, 내가 천하를 저버리지 않겠다.”라는 대사로 패러디 됐다. [5] 간옹이 아니다! 간사한(혹은 간특한) 영웅이라는 뜻. 심지어 이 문서에도 한때 간옹으로 적혀있었을 정도로(...) 많이들 헷갈리는 대목이다.[6] 역사적 가나 표기법으로는 さうさう. 아마 옛날에는 '사우사우'로 읽었을 것이나 후대에 철자는 남은 채 '소-소-'로 발음이 바뀌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좀 더 간단한 현대 가나 표기법으로 교체되면서 そうそう로 쓰게 되었다.[7] 호사가들이 관우가 조조를 떠난 이유 중에선 두씨를 조조가 차지해서 그런 거 아니냐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물론 애시당초 그랬다면 관우가 조조에게 받은 은혜는 꼭 갚고 떠나겠다고 하진 않았겠고, 관우는 조조에게 받은 상을 다 봉한 채로 은혜를 갚고 떠났다. 애시당초 관우는 조조에게 받은 은혜를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안량 참살과 백마포위 해제라는 큰 공으로 갚았다. 조조에게 앙심이 있었다면 목숨을 걸고 은혜를 갚으려 하진 않았을 터이다. 다만 관우 성격에 약속을 어기는 모습을 좋게 보지는 않았을 것이니 조조를 유비보다 낮게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는 됐을 것이다.[8] 신삼국에서는 이 유부녀 취향 떡밥을 제대로 물어서, 제갈량이 동오 측에 정 전쟁이 싫으면 조조에게 강동이교를 줘버리라고 했다가 동오 측에서 이 둘이 손책과 주유의 아내라며 화를 내자 추가타로 "어머 이거 진짜 큰일났네요. 조조 인처모에인 거 모르세요? 추씨랑 두씨 보면 아시잖아요. 그냥 미인도 아니고 선후와 도독의 아내분? 이거 완전 X됐네염."이라며 제대로 도발을 걸었다.[9] 개드립으로 조조의 관우에 대한 변하지 않는 호감과 어떻게든 자신의 옆에 두려고 했던 시도는, 일반적인 군신 관계를 넘어선 유비와 관우의 우애와 충절을 보고 관우를 유비의 일생의 동반자처럼 생각했고 뺏고 싶어진 게 아니냐는 말이 있다.[10] 커다란 조개껍데기, 꽤나 비싼 사치품이라고 한다.[11] 그러다보니 팬덤에서 이런 영상도 만든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