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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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조봉호(趙鳳鎬)
본관
한양 조씨
생몰
1884년 5월 12일 ~ 1920년 4월 28일
출생지
전라도 제주목 구우면 귀덕리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1]#
사망지
대구형무소
종교
대종교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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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상세


조봉호는 1884년 5월 12일 전라도 제주목 구우면(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의 부농 가정에서 아버지 조만형(趙萬馨)과 어머니 김진실(金眞實)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언더우드가 설립한 서울의 경신학교에 다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1904년 부친이 사망한 이후 귀도하여 1908년 제주도 금성교회를 설립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3.1 운동 이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조봉호 열사는 독립금 자본을 모금한다. 그는 제주도 일대에서 1만원 가량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을 하였다. 그러나 1919년 7월 일제 경찰에 의해 이러한 사실이 발각 되어 관련자 60여명이 체포되었다. 조봉호 열사는 동지들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스스로 제주도 내 자금 모금 총 책임자라고 자처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명으로 당시 관련자의 증언이 남아있다.
1919년 11월 조봉호 열사는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조봉호 열사는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가혹한 고문으로 1920년 4월 28일, 37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으나, 현재까지 유해를 찾지 못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조봉호 열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1977년 조봉호 열사와 제주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제주도 사라봉에 순국지사 기념비와 모충사(慕忠祠)를 건립하였다.

[1] 한양 조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조대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