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전라도(호남)'''
全羅道(湖南) | Jeolla Province(Honam)

【한반도 전도에서 위치보기】

'''위치'''
대한민국(한반도) 서남부 / 남한 서남부
'''면적'''
20,915.4㎢
'''인구'''
5,107,754명(2020년 11월)
'''광역지자체장'''
이용섭(광주광역시, 더불어민주당)
송하진(전라북도, 더불어민주당)
김영록(전라남도, 더불어민주당)
'''인구밀도'''
244.30명/㎢
'''행정구역'''
[image] 광주광역시
[image] 전라북도
[image] 전라남도
'''최대도시'''
[image] 광주광역시
'''별칭'''
호남
1. 개요
2. 역사
2.1. 현대: 인구 유출과 경기 침체
2.2. 사료
3. 인구
4. 지리
4.1. 생활권
4.2. 도시
4.3. 식문화
4.4. 사투리
4.5. 예술
5. 대학
6. 여담
7. 정치
8. 같이보기
9. 둘러보기
10. 세종실록지리지에서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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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주광역시, 전라북도, 전라남도의 3개 광역자치단체들을 통틀어 일컫는 명칭. 전라(全羅)도는 고려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앞글자를 따서 부르던 명칭이 현재까지 이어진 것이다. 인구는 2020년 10월 기준 5,109,611명이다. 다른 말로는 '''호남(湖南)'''이라고도 한다. 호남이라는 명칭은 '연려실기술' 지리전고에 따르면 한반도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인공 저수지로 불리는 김제시 벽골제의 남쪽이라는 설과 금강의 옛 이름인 호강(湖江)의 남쪽이라는 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소정방이 '중국동정호 남쪽 지방과 같이 기후가 온화하고 농사가 주업인 유사한 곳'이라 하여 전라도 지방을 호남 지방이라 칭했다는 설 등이 있다.
조선 8도상 전라도를 현재의 행정구역에 대응시켜 보면 광주광역시, 전라북도, 전라남도가 해당되고, 또 1895년 이전의 구획을 기준으로 하면 거기에 충청남도 금산군(1962년까지 전라북도 산하[1])까지 해당된다. 현대에는 '전라도'라는 말이 행정구역적 개념보다는 조선 8도에 따른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지리개념에 가까운데, 이런 의미로 쓸 때도 대개 제주도와 금산군을 제외하는 경우가 99%이다. 제주도는 원래부터 한반도 본토와 떨어져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 생활 양식 등을 지닌 곳이고, 금산군은 충청남도 편입 이후 대전광역시와 밀접한 생활권이 형성됐고 현행 행정구역상 전라남도·전라북도, 광주광역시만 전라도 또는 호남이라고 부른다.
1896년, 전국을 13도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전라도 역시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분도된다. 분도의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지만 고려에서 전주 일대의 강남도(江南道)와 나주 일대의 해양도(海陽道)로 원래 있다가 전라도로 합쳐졌듯이 전라도 문화권은 역시 1896년 분도된 경상도와 같이 비록 같은 경상도 문화권이지만 역사적으로 고려에서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산남도(山南道)로 원래 있다가 경상도로 합쳐진 대구 경북권과 부산 경남권이 각각의 개성과 차이가 있듯이, 전주시를 구심점으로 하는 전라북도 문화권과 광주광역시를 구심점으로 하는 광주&전라남도 문화권으로 나뉘고, 이에 따라 남북도 간에도 역사적, 문화적인 차이, 말씨 등에서 각각의 개성과 차이가 있다. 또한 남북을 통틀어 호남의 주요 도시로는 광주광역시, 전주시, 목포시, 여수시, 순천시, 익산시, 군산시 등이 있다.

2. 역사


'후한서'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은 서쪽에 54국, 진한은 동쪽에 12국, 변한은 남쪽에 12국이 있는데, 마한이 가장 강대하다'는 마한의 땅으로, 금강 상류 유역 및 섬진강 일부 유역은 대가야가 잠시 진출하기도 했다가 무령왕 시대에 모두 백제에 편입이 완료된다. 마한과 백제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백제의 이름 아래 병합되는데, 백제는 삼국 중에서 중앙집권이 가장 약했던 국가체제임을 보면 백제는 일종의 연합국가 성격도 띠고 있었다. 6세기 백제는 지역 체계로 22담로를 갖추고 있었는데, 6세기에서 7세기 전남권과 병합된 후 백제의 지역 체계가 37군으로 개편된 것으로 보아 마한 국가들이 마한이라는 이름 대신 백제라는 이름 아래 체계만 달리하여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기권 마한 17국은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았은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고구려가 이 지역으로 16개 행정구역을 편성한 것을 보면 이는 마한 54국 중에서 경기권 마한 17국 정도와 거의 일치한다. 즉 현재 지역 기준으로 경기권 마한 17국, 충청권 마한 12국, 전북권 마한 10국, 전남권 마한 15국으로 추정되는데 도합 마한 54국으로 이중에서 경기권 17국을 뺀 37국과 백제 멸망 무렵의 지역 체계가 일치한다.
행정구역으로써의 전라도의 형태는 통일신라의 행정구역 체계 9주 5소경에서 이미 완성되었는데, 당시에는 현 전주시를 중심으로 한 전라북도 지역 전주, 현 광주광역시를 중심으로 한 전라남도 지역 무주가 지금의 전라남북도 영역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2]

전라도라는 지명의 어원은 고려 시대 성종이 설치한 12목 중 강남도(江南道) 전주목과 해양도(海陽道) 나주목에서 유래하며, 고려시대 현종 때 나주와 전주의 첫글자로부터 전라도를 만드니 광역도의 시작이다. 즉 5도 양계의 시작으로 전라도를 만든 후 300여 년이 지나서 다른 광역도들이 만들어진다. 참고로 당시 지정된 도(道) 단위 행정명 중 현재까지 명칭이 유지중인 지역은 경상도와 이곳 단 둘뿐이다. 다만 일시적으로 영조 시대 나주에서 일어난 반역으로 영조 11년에 전광도(全光道)라는 명칭으로 바뀐 적은 있었다.# 이 일과 관련해 영조는 경상도에도 영남을 토벌했다며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특정 고을에서 역모가 있으면 그 고을의 등급을 낮추었는데, 도명의 유래가 된 고을에서 반역이 일어나면 도의 명칭에서 빼버렸다. 위 기사에서 보다시피 강원도원주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춘천을 따서 강춘도로 바뀐 적이 있으며, 충청도는 광해군 때 청주, 충주순으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충홍도(충주+홍주)에서 공홍도(공주+홍주)로 바뀌었다가 인조반정 후 충청도로 복귀한 일이 있다. 여튼 전라도는 3년 후인 영조 14년에 나주가 부로 재승격되면서 강원도와 함께 원래 이름을 되찾게 된다.
고대에는 이 지방에 군장국가 단계이던 마한의 여러 소국이 난립했다. 이 가운데 처음에는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에 자리잡은 걸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삼한 전체의 영도국 또는 명목상 영도국이었던 목지국의 영향력에 있었으나, 목지국의 영향력은 분명 무시할 수는 없으되 훗날 등장하는 백제의 그것에 비하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마한이라는 연합체에는 크게 보아 한강~임진강 유역권, 안성천 일대, 금강 유역권, 영산강 유역권, 섬진강 유역권 등 다섯 유역권이 있었고, 그 영향력은 물론 목지국만 못한 걸로 추정되지만 금강 유역권과 영산강 유역권 역시 나름 세력이 있었기에 그 지역들에는 그렇게까지 크게 미치진 못한 걸로 보인다. 섬진강 유역권은 세력은 미약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었기도 했고. 목지국이 3세기 중후반에 백제에게 소멸된 이후에는 백제가 목지국이 하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백제는 목지국과는 꽤 지향점이 다른 고대 국가였다. 금강 유역은 적어도 4~5세기에, 영산강 유역은 마한 고유의 묘제가 5세기까지도 유지된다.[3] 다만 영산강 유역 세력은 후기 마한연맹체를 이끈 바 없다. 굳이 후기 마한연맹체의 영도국을 든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백제국이다. 목지국이 망한 뒤엔 백제가 마한 구성국 중 하나로서 맹주국이 되었고, 영산강 유역 세력은 금강 일대는 고사하고 섬진강 일대, 전남 중동부 일대에도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군소 세력이었으며 그 영산강 유역 세력도 어느 한 소국을 중심으로 뭉친 모습 또한 나타나지 않음이 고고학적으로 입증[4]되고 있는 상황이다. 마한의 백제 편입 과정은 마한이 국가 대 국가로서 백제와 투쟁하는 과정이 아니라, 목지국을 대신해서 맹주국이 된 백제가 그 나머지 마한 소속 연맹 소국들을 중앙 집권체제로 편입해가는 과정이었다.
물론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바탕으로 이병도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근거로 주장한, 근초고왕이 마한, 즉 전라도 남해안 일대까지 모두 정복했다는 학설은 문제가 있는 학설이었다. 왜(倭) 또는 백제의 신라, 가야 정벌 기록도 있는데 신라, 가야 지역들을 정벌했다는 기록은 외면하고 굳이 마한의 소국, 가야의 소국으로 간주되고 위치도 추측만 하는 침미다례만 콕 집어 마한 전체를 정벌했다고 해석했던 게 그것. 그러나 그렇다고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어쨌든 고대사 해석에서 전부 배제해야 한다는 견해가 옳아지는 건 아니다. 적어도 비정한 지명이나, 근초고왕 이후 적어도 고고학적으로 볼 때는 금강 유역권 일대는 성장이 억제되는 점 그리고 백제가 대방군(현재 황해도 일대)의 옛 교역 루트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에는 성공한 걸 봤을 때, 오늘날의 전남 서부 일대 영산강 유역의 해남 백포만 일대로 추정되는 신미-침미다례를 점령하진 못했다고 하더라도 백제가 옛 목지국의 위상을 영산강 유역 세력권에까지 각인시키는데까지 성공했다는 건 무리한 추정이 아니다.[5] 이러한 설은 이병도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근거로 주장한 이론으로만 주장하는 게 아니라, 2000년대 후반에 충청남역사문화원에서 발간한 백제사 시리즈의 웅진백제편에서 고고학적 증거 및 삼국사기까지도 고려하여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475년 백제가 한성 함락이란 초유의 사태를 거치면서 일순간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는데, 이 시기를 전후해서 그간 억눌렀던 금강 일대 세력이 성장한다. 당연히 이 시기에 흔히 마한으로 통칭되거나 후기 마한 연합체를 이끌던 전남 서남부 일대 연합 세력으로도 추측되는 영산강 유역 세력이 또한 보다 독자성이 강해지는 것이고. 그래도 거리가 보다 가까운 금강 유역 세력은 적어도 4세기 후반 ~ 5세기 초반까진 백제의 직접적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보다 더 세력이 강한 영산강 유역은 시간이 더 걸렸다. 국보 제295호 나주 금동관이 보여주듯 6세기 초중반에는 오히려 더 큰 성세를 자랑하게 된다. 이 세력은 독자적으로 대중국 외교를 행했던 데다 웅진백제가 주도하는 대고구려 연합전에 초반에는 오히려 대가야보다도 시큰둥한 비협조적인 자세를 보여 백제를 크게 긴장시킨다. 영산강 유역 세력은 이 시기에 신라, 대가야 그리고 심지어는 일본 큐슈 일대와 교역을 강화하며 힘을 키운 게 고고학적으로 드러날 정도. 거꾸로 이 시기 대가야의 경우 신라보다는 백제 쪽으로 문화나 경제적, 군사적 의존도가 기울어지는 경향이 드러나는 걸 보면 서로 상반되는 경향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백제 왕실의 위신과 세력이 한성 공함으로 땅에 떨어진 틈을 타 무역으로 힘을 키운 영산강 세력과 백제 중앙 정부와의 미묘한 관계는, 동성왕-무령왕 시대에 백제가 고구려를 무찌르고 한숨을 돌려 여유가 생긴 5세기 후반 ~ 6세기 초반 또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에 영산강 일대 전체를 무력 시위와 회유를 통해 백제의 지배 체제에 편입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된다. 여기서 영산강 유역 일대가 마지막까지 마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논쟁이 있는 설이다.# 영산강 유역은 목지국으로 얘기되는 초기 마한 중심 세력과도 그렇게 직접적인 동질성은 없었다. 전북은 고사하고 전남 일대도 온전히 통할못하면서 거꾸로 해당 지역은 시간이 갈수록 백제의 영향력이 투사되는 게 드러나는데 어떻게 후기 마한의 영도국이 될 수 있는가? 영산강 유역은 거리도 멀고 원래부터 부강한 곳이었기에, 백제의 영향력 투사가 가장 마지막에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한편 신미 혹은 침미다례를 영산강 유역 중에서 해남 일대의 백포만 지역으로 추정하는데 자세히는 해남읍 화산면, 현산면, 계곡면 일대로 추정되지만 물론 신미 혹은 침미다례 위치를 근처 고해진을 근거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고해진 위치도 확실치 않고, 침미다례를 강진, 남해, 탐라 제주도로 보는 설도 있으나, 영산강 유역 중에서 해남 백포만 지역으로 추정하는건 고고학적인 면까지 고려해서 제기되고 있는 학계의 유력한 설들 중에 하나다. 전남 남해안에도 영산강 유역 세력권보다는 좀 약했으되 그들과는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또 다른 문화권이 있었으며, 전남북 동부는 아예 가야 문화권에 포섭되기도 하였다.[6]
통일신라 시대에 9주 5소경 체제에서는 지금의 전북에 해당하는 '전주(완산주)'와 전남에 해당하는 '무주(무진주)'로 남북이 분리되어 있었다. 이 무주(武州)는 전북 무주(茂朱)군이 아닌 지금의 광주광역시다. 이 행정 구역 설정은 사실 웅진-사비 백제 시절의 행정구역 설정과도 연관이 있는데, 완산주 일대는 동성왕-무령왕 대에 22담로제를 실시했을 때 백제가 지방관을 파견했던 지역이고, 무주는 이후 방군성제를 확립하면서 영역 전체에 대한 중앙집권을 관철했을 때 지방관 파견을 완비했던 지역이었다.
문무왕 때 백제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무진주라고 했다가 경덕왕의 지명 한화 정책으로 고친 것. 흔히 견훤이 "무진주를 점령하고 완산주를 도읍 삼았다"라고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틀린 거지만 삼국사기 기록에도 무진주라고 나오는 걸 보면 이명으로 즐겨 썼거나 회복한 듯. 한편 섬진강 일대 일부는 강주(현 진주시를 중심으로 한 경남 서부)에 속했다. 옛 가야의 영역. 한편 통일신라 시대에 당시까진 전남 영산강 유역보다 다소 낙후되어 있었던 전남 남해안 일대, 전남 동부 일대에 대한 개발사업이 행해지게 되는데, 이 시기에 통일신라가 전남 남부와 동부 일대 호족이나 인민들을 물리적으로 옮긴 예는 당연히 없으나 그 과정에서 원신라 지역 출신인들의 이주가 전남 중동부 일대에 이뤄지면서 오늘날 전남 서남부 일대의 영산강 호족들과 묘한 대립이 이뤄지게 된다. 이는 신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으로 등재된 3곳 즉 공주,부여,익산 중에서 고구려로부터 가장 먼 현재의 전북 익산에 의도적으로 고구려 유민들을 이주시킨 것과 대강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되며, 신라 입장에서는 혹시 있을지 모를 백제부흥운동의 방지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오늘날 전라도 영역 전체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인 들의 물리적 융합이 이뤄진 격이 되었다.
하지만 어렵게 이룬 통일신라 초기에 추구하던 화합정신 즉 원효의 '일심(一心) 사상'도 이러한 통합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종교, 지역, 문화, 사회의 모든 부문의 화합을 추구하던 초기의 정신이 쇠퇴하고, 금관가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또 원신라 지역이 아닌 충청도 진천 출신으로 삼국통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김유신마저도 쉽게 융화되지 못한 신라 골품제 특유의 폐쇄성 등으로 옛 백제 지역 전역에서는 반신라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9세기 후반에 의자왕의 뒤를 이어 백제를 부활하겠다는 신라 군인 견훤이 나타나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견훤을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삼국유사에는 고기(古記)에 의하면 견훤은 전라도 광주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후자는 견훤이 왕을 칭하던 초기에 퍼뜨렸을 개연성이 크며, 아자개와의 미묘한 관계나 아자개에 대한 고려 정부의 후대를 보면 전자였을 개연성이 더욱 농후하다. 전북 일대는 견훤의 백제부흥운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것으로 보이며, 전북 일대에 사민된 옛 보덕국 유민들은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전혀 고구려 부흥을 외친 흔적이 보이지 않으나 영산강 일대는 이들과 이해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의 오해와는 달리 백제가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한 이후부터는 오히려 전남 서부 일대에서 화려한 백제계 유물들이 더욱 많이 발굴되고 있는 형편이며[7], 따라서 전남 서부는 다른 전라도 지역 혹은 충청도 지역과는 달리 백제성이 별로 없었다는 얘긴 대단히 편견에 찬 사실과 다른 견해가 아닐 수 없다. 다만 견훤이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아무래도 본인과 처지가 비슷한, 주로 전남 중동부 호족들에게 보다 접근했던 것 같고, 당연히 이들을 후대할 수밖엔 없었다. 때문에 영산강 유역권은 태봉을 선택할 수밖엔 없었다.
이런 이유로 후삼국 시대 때는 전남 남서부 일대가 고려에게 포섭되었고, 다른 전라도 지역은 견훤후백제의 판도에 들어간다. 견훤은 기어코 나주 일대를 평정하면서 전라도 전체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지만 그 시기는 오래가지 못했고, 삼국통일이 될 때까지 전남 서부 일대는 왕건의 고려 영역으로 왕건의 주요 세력기반이 된다. 이후 고려 성종 때까지 중국의 행정구역 명을 딴 강남도와 해양도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현종이 고려를 5도 양계로 개편하면서 전라도로 통합시켜 비로소 모양을 갖춘다.
역사의 변천에 따라 범위가 조금씩 바뀌었는데, 탐라라고 불리운 제주도의 경우 고려 시대까지는 별개의 행정구역이었고 간섭기엔 탐라총관부로 별도 유지되었으며, 조선 태종 무렵부터 몇백년간은 전라도와 묶이게 되었다. 이후 제주도는 해방 직후인 1946년 다시 제주도(道)로 독립한다. 군정법령 제94호
조선 말 대한제국 초기 고종이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전라북도전라남도로 분리되었고 1963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는 전라북도 금산군 전체와 현 논산시 남부 지역 일부가 충청남도 금산군 및 논산군으로 편입되어 충청도로 넘어갔다. 때문에 전라북도 북쪽 지방에 사는 연세 많은 분들은 금산이 전라북도라고 말하는 분들이 꽤 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서 보듯, 전남도청은 원래 광주에 있었다. 그러나 1986년광주광역시(당시 직할시)가 독립하면서 현재의 1광역시 2도에 이르고 있다(전남도청은 2005년 무안군으로 이전했다).

2.1. 현대: 인구 유출과 경기 침체


가장 높은 지방 인구 유출을 보이고 있으며, 그때문에 자본 투자가 줄어들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 재밌는 사실은 전라도는 고려, 조선시대엔 인구가 많았고 도시(당시엔 큰 고을)도 많았지만 70년대 이후로 이런 인구유출 현상을 보였기에 마치 도심 공동화 현상과 비슷하다는 것.
대한민국에서 가장 경제가 침체된 곳이다 보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국에서 가장 인구 유출이 심각하다. 비수도권 지역의 인구 감소가 예사로운 일이라고 해도 '''전라도는 특히 심각하다'''. 당연히 안 그래도 안 좋은 경기 침체를 가속화시켜 전남, 전북, 광주의 GDP는 순위에서 서로 끝을 다투고 있는 악재가 계속되고 있으며, 전국에서도 특히 인구 증대, 재정 자립도, 지역민 복지 수준 등에서 하위권을 차지한다.
타 지역에 비해 타 도시나 수도권으로 이탈한 호남 출신 지역민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이는 인구 증감과 관련된 자료를 살펴봐도 알 수 있다.
1949년 → 2015년 9월 기준
  • 전북 약 205만 → 약 187만(약 18만 감소)
  • 광주·전남 약 304만 → 약 338만(약 34만 증가)
로 타 지역[자료]에 비해 증가세가 정체되있고 특히 전북은 대한민국 총 인구가 약 2,018만 → 약 5,148만으로 약 3,130만명이 증가하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인구가 감소한 지역이다.
간접적으로도 알 수 있는게 2018년에는 투표로 선출된 서울특별시 25개 구청장 중에서 구로구, 서초구, 금천구, 중구, 강서구 5개 구청장을 제외한 20개 구청장 출신 지역이 호남이다. 16개 구청장은 광주광역시전남 출신이고, 4개 구청장은 전북 출신이다.
진보 진영에서 호남 민심에 각별히 신경쓰는 이유이기도 한데 어느 정도 이념 대립이 완화되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전라도 현지 여론이 움직이면 몇달 후 서울 및 수도권 여론도 움직이고, 반대로 서울에서 여론이 움직여도 전라도 현지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그만 수그러들고 만다고 한다.

2.2. 사료


태조 왕건훈요 10조에서 언급한 '차현(차령) 이남, 공주강(금강) 바깥'이 이 지역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고, 이를 두고 지역감정과 결부시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런 의견은 '''사서에선 공주강 이북으로 적혀있는 걸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이남으로 해석해 억지로 전라도와 결부시키는 등 사실상 역사왜곡이랑 다를 바 없는 엉터리 해석'''을 기저에 깔고 있다. 또한 지금의 차령산맥은 1903년 일본인 지질학자가 인부 4명과 당나귀 6마리로 14개월 동안 만든 산맥체계에 의해 처음으로 생긴 지명이라 왕건이 말하는 차현이랑은 아예 다르다. 심지어 차령산맥을 100여 년 동안 배워왔지만 2000년 대에 국토연구원에서 인공위성을 통해 측정한 결과 지하에 지맥도 없고, 그냥 흔한 낮은 구릉지대라고 한다. 역사에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던 차령산맥을 기준으로 해석하려니 공주강 이북을 공주강 이남으로 곡해하거나 흐지부지 넘어가거나 아예 생략하는 억지를 부린 것이다. 잘못된 훈요10조 해석에 관한 사안은 훈요 10조 문서에도 잘 정리되어 있다.
당장에 조작된 해석을 믿으면 고려는 전라도 인물을 등용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고려 역사 곳곳에는 전라도 출신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풍수지리의 비조 도선,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버린 신숭겸, 6대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보필하며 태사(太師)로 추증된 최지몽도 전라도 출신이다. 무엇보다 고려 왕실 자체가 전라도와 밀접한 관계이다. 태조 왕건의 장자(長子)로서 왕건의 적통을 이어 왕위에 오른 혜종은 전라도 나주 출신이며, 공예태후는 고려 18대 왕 의종, 19대 왕 명종, 20대 왕 신종의 모후(母后)이시자 여인의 몸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고려 왕실을 지키신 분인데 전라도 장흥 출신이다. 고려 2대 혜종의 직계인 고려 8대 왕 현종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전라도 나주로 몽진을 가기도 하였다. 그런 8대 현종 즉위 후 3대 정종에서 7대 목종의 세력 기반인 충청도 일부 지역을 견제하려고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고려 왕조를 통털어 불천지주에 오른 왕은 태조, 혜종, 현종 세분 뿐이다. 애초에 '차현 이남, 공주강 바깥'이란 지역에 대한 해석에 문제가 있다. 고려에서 강 외(外) 즉 강의 바깥(外)은 강을 관할하는 행정구역 바깥을 의미하는데, 공주성은 공주강 남쪽에 있으므로 공주강 외(外)는 공주강 북쪽을 의미한다. 즉 차현 이남(금북정맥 이남)과 공주강 북쪽(금강 북쪽) 즉 그 사이 지역이 된다. 통일 과정에서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할 때, 청주 민호 1천호가 철원으로 이주하였을만큼 친궁예 지지기반이던 청주를 포함한 지역 일대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경상도와 함께 '하삼도(下三道)', '삼남(三南)'으로 불리기도 했다.[8] 붕당 정치가 시작되기 전 면앙 송순, 기대승, 이항 등과 같은 유학자가 나와 조선 성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고, 붕당 형성에도 기여를 하였다.
선조시기 정여립의 난으로 인해 발생한 기축옥사에 휘말렸다. 직접 연류되어 죽은 사람이 수백명이며[9] 정여립과 무관하게 정개청을 추존한 사실 때문에 금고된 자가 400명, 죄인으로 억울하게 몰린 자가 50명, 그 중 유배형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은 자가 20명에 달하는 등 호남유림이 와해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고 전라도가 반역향으로 일시간 지정되었으나, 정여립 출신 지역이 왕실의 관향인 전주이고 직후 벌어진 임진왜란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정여립이 전주 출신임을 들어 전주를 엮으려다 본관 자체가 사라진 가문도 있었다. 선조가 "짐이 간악한 정철에게 속아 호남의 어진 선비들이 고초를 겪었다"고 언급하며 호남에 대한 실질적인 복권이 이루어졌다. 호남과는 별도로 정여립 사건 자체는 이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집권한 북인에 의한 복권시도가 있었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북인도 숙청당하면서, 숙종 대에 남인도 경신대출척과 갑술환국으로 축출당하고 권력과 멀어지면서 반란으로 규정되었다.
당시 정여립 사건으로 호남 유림이 와해되어 어려움을 겪었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이 일어서니, 예를 들어 임진왜란 초기 관군이 기를 쓰고 싸운 몇 안 되는 전투 중 하나인 동래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해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도 감복했다는 동래부사(현 부산광역시장) 송상현(宋象賢)이 전라도 정읍 출신이고, 임진왜란 전투 중에서도 대혈전으로 꼽히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전라도 화순 출신,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黃進) 전라도 남원 출신, 사령관 격인 김천일(金千鎰) 의병장 전라도 나주 출신, 형제 의병장 강희보, 강희열 전라도 광양 출신...등. 결국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최경회 전사, 황진 전사, 김천일 전사, 강희보 전사, 강희열 전사, 김천일 아들 김상건 전사, 고경명 아들 고종후 전사...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 10만명에 대적해 1만이 안되는 6,7천의 인원으로 싸웠고, 호남 의병은 3,500명이 참전하여 3,500명이 순절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 전라도 여수를 떠나 한산도로 군진을 옮기는 시점에 즈음하여 친구인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쓴 편지에서 그 동안의 소회를 밝히며 '호남 없이는 나라도 없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사적인 편지에서 호남의 지정학적인 전략적 중요성을 언급하기보다는 정황상 그 동안 생사를 넘나들며 함께 지낸 호남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과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그나마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호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하겠다.
호남 지역은 정여립의 난으로 호남 내 동인 계열이 많이 숙청되면서 인조반정 이후에는 노론·소론의 세가 강했다고 한다. 동인이 대거 사라졌으니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인 측면이 있고, 또한 이는 광산 김씨의 영향이 크다. 특히 서인의 종장(宗匠) 사계 김장생 가문이 그렇다. 사계 가문은 학문의 연원이 깊고, 종통이 무거워 한양 권문세가들의 기를 꺾을 수 있는 능력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한양 명문 거벌들의 수장으로서 종주(宗主) 역할을 하였다. 조선 양대 문벌(文閥)로 불리운 두 가문을 일컬어 '연리광김(延李光金)' 또는 '광김연리(光金延李)'라고 하는데, 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각각 7명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였다(양관 대제학 기준으로 홍문관 설치 이전까지 포함하면 광산 김씨 8명). 정여립 사건 이전에도 동인과 서인의 세가 비슷했던 호남 지역과 달리 영남 지역은 북인의 몰락으로 세가 약해진 인조반정 이전에도 남인을 주축으로 동인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서인은 극소수였다. 호남 지역은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의병장 전라도 광주 출신 고경명(髙敬命) 장군의 경우도 서인이었을만큼 처음부터 동인과 서인의 세가 비슷했던 반면 영남 지역은 북인이 몰락하고 서인 계통의 붕당이 집권한 이후에도 남인이 대세였다.

어느 조선 후기 척제(瘠齊) 이서구(李書九, 1754~1825)라는 사람이 단가 "호남가"를 지은 적이 있다. 이 사람은 1793(정조 17)년과 1820(순조 20)년 2차례 전라 감사를 역임한 바 있는데, 전라도 곳곳에는 이서구와 관련된 민간 전승이 다수 남아 있다. 이 "호남가"를 보면, 조선 시대 전라도의 여러 고을들이 나와 있다. 여기에는 진산(珍山) 등 누락된 고을도 있으며, 현재는 충청남도로 편입된 금산군 및 전라도에서 분리된 제주도도 포함되어 있다. 아래 시를 자세히 보면 각각의 고을 이름을 의역하여 나름대로 의미와 내용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서구는 천문, 수리, 풍수에 능했고, 이로 인해 여러 설화를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이서구가 "물은 30장(丈)이 내려가고, 땅은 30장(丈)이 올라온다"고 했던 곳은 훗날 새만금 간척지가 되었고, "이 앞으로 화마(火馬)가 지나간다"고 했던 곳은 훗날 기차가 지나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咸平(함평)''' 天地(천지) 늙은 몸이 '''光州(광주)''' 故鄕(고향)을 보랴 하고,

'''濟州(제주)'''[10]

>漁船(어선) 빌려타고 '''海南(해남)'''으로 건너갈 제,

'''興陽(흥양)'''에 돋은 해는 '''寶城(보성)'''에 비쳐 있고,

'''高山(고산)'''에 아침 안개 '''霊岩(영암)'''을 둘러 있다.

'''泰仁(태인)'''하신 우리 聖君(성군) 藝樂(예악)을 '''長興(장흥)'''하니,

三台六卿(삼태육경)은 '''順天'''心('''순천'''심)이요, 方伯守令(방백수령)은 '''鎭安'''民('''진안'''민)이라.

'''高敞'''城('''고창'''성) 높이 앉아 '''羅州(나주)''' 風景(풍경)을 바라보니,

萬丈(만장) '''雲峰(운봉)''' 높이 솟아 層層(층층)한 '''益山(익산)'''이요,

百里(백리) '''潭陽(담양)''' 흐르는 물은 굽이굽이 '''萬頃(만경)'''인데,

'''龍潭(용담)'''에 맑은 물은 이 아니 '''龍安'''處('''용안'''처)[11]

이며,

'''陵州(능주)'''의 붉은 꽃은 골골마다 '''錦山(금산)'''[12]

이라.

'''南原(남원)'''에 봄이 들어 各色花草(각색화초) '''茂長(무장)'''하니,

나무 나무 '''任實(임실)'''이요, 가지 가지 '''玉果(옥과)'''로다.

風俗(풍속)은 '''和順(화순)'''이요, 人心(인심)은 '''咸悅(함열)'''인데,

異草(이초)는 '''茂朱(무주)'''하고, 瑞氣(서기)는 '''靈光(영광)'''이라.

'''昌平(창평)'''한 좋은 세상 '''務安(무안)'''을 일삼으니,

士農工商(사농공상) '''樂安(낙안)'''이요, 父子兄弟(부자형제) '''同福(동복)'''이라.

'''康津(강진)'''의 商賈船(상가선)은 '''珍島(진도)'''로 건너갈 제,

'''金溝(금구)'''의 금을 일어 싸 놓으니 '''金堤(김제)'''로다.

農事(농사)하는 '''沃溝'''百姓('''옥구'''백성) '''臨陂'''城('''임피'''성)을 둘러 있고,

'''井邑(정읍)'''의 井田(정전)법은 納稅人心(납세인심) '''淳昌(순창)'''하고,

'''古阜(고부)''' 春陽(춘양) 楊柳色(양류색)은 '''光陽'''春風('''광양'''춘풍) 새로워라.

'''谷城(곡성)'''에 묻힌 선비 '''求禮(구례)'''도 하거니와,

'''興德(흥덕)'''하기를 나날이 時習(시습)하니, '''扶安'''齊家('''부안'''제가) 이 아닌가.

우리 湖南(호남) 좋은 '''法聖(법성)''' '''全州'''百姓('''전주'''백성)을 거느리고[13]

,

'''長城(장성)'''을 널리 싸고 '''長水(장수)'''로 돌렸는데,

'''礪山(여산)'''돌 칼을 갈아 '''南平'''樓('''남평'''루)에 꽂아 놓으니,

어느 外方之國(외방지국)이 輕擧(경거)할 뜻을 둘까 보냐.


3. 인구


{{{+1 ''' {{{#000000 광역자치단체 인구현황
2020년 10월}}} ''' }}}











전라남도
1,850,680명


전라북도
1,805,937명


광주광역시
1,452,994명


''' 호남지방 인구 추이 '''











1960년
5,948,265명


1966년
6,569,976명


1970년
6,318,921명


1975년
6,440,526명


1980년
6,067,426명


1985년
5,950,506명


1990년
5,716,402명


1995년
5,226,522명


2000년
5,239,922명


2005년
5,021,548명


2010년
5,242,084명


2015년
5,250,906명


2020년 10월
5,109,611명


{{{+1 ''' {{{#000000 주요도시 인구순위
2020년 10월}}} ''' }}}











광주광역시
1,452,994명


전주시
657,185명


익산시
282,847명


순천시
282,676명


여수시
280,584명


군산시
267,987명


목포시
225,278명


광양시
150,461명



4. 지리


호남 지역에는 두 개의 평야가 있는데, 하나는 한반도 최대의 평야인 전북 서부의 호남 평야가 있고 다른 하나는 전남 서부에 위치한 나주 평야가 있다. 호남 평야에는 도시가 발달하여 김제시, 전주시, 익산시, 군산시가 있다. 반면 호남 동부는 험준한 산지이다. 특히 전북 동부는 진안 고원으로, 같은 전북 도내의 서부지역과는 완전히 다른 지리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4.1. 생활권


광주·전남권과 전북권은 대개 노령산맥을 경계로 나뉜다. 다만 노령산맥이 온전히 전남북의 경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북 동반부는 노령산맥 이남에 있으나 전북이고, 영광군은 노령산맥 이북에 있으나 전남이다. 사실 노령산맥이 전남북 경계에 걸리는 곳은 장성군 - 정읍시, 고창군 뿐.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전북의 드넓은 호남 평야가 이어지다가 큰 산이 보이는데, 이곳이 노령이고 이 산의 호남 터널을 지나면 전라남도이다. 이 노령은 과거부터 전북과 전남을 구분했으며 현재도 전북과 전남의 도시권/생활권/문화권을 구분짓고 있다. 전북과 전남의 사투리 차이도 크게 존재하며 도시권 역시 다르다. 실제로 광주광역시가 전라북도에 도시권을 미치는 범위는 고창군 정도이며 나머지 도시들은 정읍시순창군처럼 전북 남부에 위치해 있어도 전주시의 도시권 영향을 매우 크게 받는다. 광주전남과 전북의 자연적 지리특성이 과거부터 두 지역을 구분지었고 현재도 도시권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호남 지역일지라도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사투리의 경우 흔히 접하는 전형적인 전라도 방언의 경우, 광주전남방언이고, 전북 지역의 방언은 북쪽으로 갈수록 충청 방언과 가까워지는 특성이 있다.

4.2. 도시


광역시로는 광주광역시가 있고, 특례시로는 전주시가 있다. 현재 전남권의 중심 도시는 광주광역시, 전북권의 중심 도시는 전주시이다. 두 지역이 각 권역에서 큰 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실제로 전남광주광역시를 중심으로 도로가 뻗어나가는 형태로 도로가 건설되어 있으며, 전라북도 역시 전주시를 중심으로 한 교통망이 많이 개설되어 있다. 다만 철도의 중심지는 익산역이 있는 익산시이다.
광주와 전주 이외에도 많은 중소도시가 있다. 전남의 목포시는 전남 서부권의 중심도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순천시는 동부권 중심도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여수시는 거대한 석유화학단지가 있는 공업도시이며 광양시 역시 제철 산업이 발달하고 전남 최대의 항구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 전북의 익산시는 호남 철도의 집결요새 역할을 하고 있는 철도의 도시이며 익산국가식품클러스터를 통한 산업이 발전하고 전주의 배후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14] 군산시 역시 산업이 발달하고 항구가 발달했으며 새만금의 중심도시로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시되는 도시이다.

4.3. 식문화


전라도는 음식과 요리가 전국 기준으로 상당히 발달한 것으로 유명하다. 연예계에서는 박나래, EXID의 서혜린 등 요리 잘하는 호남 출신 인물을 볼 수 있고, 그래서인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에서 요리의 달인이라 하면 전라도 출신으로 설정하는 편.[15] 보통 남도 음식으로 통용된다.

그래서 전라도 지역은 식문화가 발달되었다는 인식이 있다. 실제로 전라도라 하면 음식부터 떠올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홍어, 젓갈[16], 한정식 등이 특히 발달되었다. 남부지방에 위치해 기후가 온화하고, 이 귀하던 시절에 쌀로 과자를 만들어 먹을 정도로 전통적으로 물산도 많고, 사람도 많아 식문화가 발달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특히 무진장이라고도 불리는 무주, 진안, 장수 등의 산지 지역과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은 김제평야와 같은 평야 지역, 그리고 지척에 바닷가인 군산이 서로 맞닿아 물산이 풍부한 전주 같은 경우가 음식으로 유명하다.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춘 곳으로 전남 지역의 물자가 집중된 나주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전라도의 음식이 유명한 이유에는 농업 중심의 전라도에 무언가 한국 음식의 전통이 유지되어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17]
남부지방의 더운 기후 탓에 양념을 강하게 치고, 젓갈류와 장류가 발달하였으며, 서남해안 갯벌이 있고, 드넓은 평야가 있어서 물산이 풍부해 식재료가 다양하다.[18] 음식 종류가 엄청 다양해 상차림에도 많은 음식이 올라간다. 정성을 많이 쏟으며 장식과 구성이 다양하다.
전라도 음식이 맛있다는 세간의 인식은 아래와 같이 일제강점기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전주는 음식 솜씨가 조선에서 제일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과연 음식 솜씨는 사치도 하려니와 첫재는 더운 철에는 더운 철을 따르는 듯한 민첩한 솜씨도 있는 듯하고 제법 영양분에 대한 주의도 게으르지 않은 듯합니다. 지금도 먹고 싶은 것은 그 슬슬 녹는 듯한 생정과입니다.

- '''1932년''' 9월 11일자 동아일보

다만 음식이라는 건 개인의 취향 및 성장 배경에 따라 사람마다 선호가 다른 게 당연하기 때문에 전라도 음식이 전반적으로 양념을 강하게 넣고 짜고 맵거나 단 맛이 강한 자극적인 맛이라 하여 입맛에 맞지 않아 하는 사람도 있으며, 국제화된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서울특별시 기준 다양한 외국의 음식 문화가 들어와 있고, 전국의 향토 음식도 다 진출해 있어 사람들의 입맛도 그만큼 다양해진 만큼 현지 식문화에 대하여 과도한 기대를 갖거나 자신의 개인적 호불호를 꼭 절대화할 필요는 없다.
물론 도 탄수화물이고, 한과를 만들 때 들어가는 조청도 단맛을 내니 전라도와 단맛이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부에서 필요 이상 달게 먹는 건 서양 식습관의 영향이지 전라도와는 관계가 없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가 한국을 대표하는 장수마을로 선정한 곳도 고추장으로 유명한 전라북도 순창이고, 전라남도 구례, 곡성, 담양 등 서울대 노화연구소가 장수의 원인을 심층 연구하는 곳들이 집중되어 있으며, 보건복지부 통계 전국에서 장수 동네를 최다 보유한 곳도 전라도이고, 역사적으로 전라도에 장수 지역이 많았던 점을 보면 물론 수명을 결정하는 데는 공기, 스트레스 같은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식습관도 주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전라도 식습관이 건강에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되지 해가 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 입맛도 시대에 따라 변해서 청와대 조리장 출신으로 7년 동안 대통령 식사를 담당했던 한상훈 쉐프는 레스토랑에서 본인도 그렇고 간을 옛날보다 세게 한다고 하는데, 왜냐 하면 사람들 입맛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짠맛은 스낵에도 짠맛이 있는 외국에 비하면 그렇게 짜다고 할 수 없다는 평도 있다. 물론 짠맛은 혈압과 상관관계가 있지만, 여기에도 논란이 있어서, 미국 심장학회(AHA)가 고혈압 기준을 낮추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고혈압 환자군이 대거 늘어난데 대하여 미국 내과학회의 반발과 미국 내에서도 AHA가 제약기업들의 로비단체가 아니냐는 비판, 그리고 실제로는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보다는 혈압이 낮아서 발생하는 뇌경색 발병률이 월등하게 높다는 논란이 있기도 하다. 다만 이는 기저에 그런 논쟁도 있다는 것이고, 공식적으로 의료계는 저염식을 권장하고 있다.

4.4. 사투리


전라도 사투리 즉 서남 방언을 사용한다.
다만 모두 같은 서남 방언은 아니고, 매체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전라도 사투리는 대부분 전남 지역 사투리이다. 전북 지역 사투리는 서부 평야 지대는 충청도 사투리에 가까우며 동부 지역의 경우엔 동남 방언 억양이 섞인 지역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서남 방언 참고.

4.5. 예술


조선 중후기 권력에서 밀려나거나 귀향한 명사들을 중심으로 양반문화가 발달했다. 16세기 양팽손, 17세기 윤두서, 그리고 19세기 허련을 중심으로 남종화가 발달했고, 송순, 정철, 윤선도 등은 전라도 지역에서 많은 가사문학을 남겼다.
구한말에는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의병 활동이 활발한 지역 중 하나였다. 남한대토벌 작전으로 씨가 말랐지만.
판소리로도 유명하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서대석 명예교수는 판소리의 악조 장단 및 여러 음악적 요소들은 퍼져 나가는 과정에서 각도의 민요와 소리패들의 소리를 수용하면서 복잡해졌기 때문에 이들 중 한가지 요소만을 추적하여 판소리의 기원을 찾는 작업은 판소리의 본원을 잘못 파악할 위험성이 있다며, 판소리의 기원이 무속 제전에서 서사 무가의 가창 형식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판소리 악곡이 호남 지역 민요인 육자배기토리를 주조로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조선 창극사'에서 거론된 명창들 출신지 대부분이 호남이라는 점 등을 들어 판소리 발생지는 전라도라고 하였다. 현재는 중고제동편제가 맥이 거의 끊기면서 서남지방 중심의 서편제만이 명맥을 잇고 있어 판소리 구전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5. 대학


국립대학으로는 대규모 종합대학인 전북대학교전주시 덕진구에 있고, 전남대학교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다. 호남에서는 이 두 대학의 규모가 가장 크며,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외에도 군산대학교, 목포대학교, 순천대학교, 목포해양대학교가 있다. 이밖에 교육대학전주교육대학교광주교육대학교가 있고, 과학기술원광주과학기술원도 있다.
규모가 큰 사립대학으로는 전라북도 익산시원광대학교가, 광주광역시 동구조선대학교가 있다. 이외에도 우석대학교, 호남대학교, 광주대학교, 동신대학교, 전주대학교 등의 사립대학이 있다. 광주여자대학교는 4년제 여자대학교들 가운데 유일하게 지방에 있는 학교이다.
결국 후술했던 이유와 수도권과의 거리로 인해, 제주특별자치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유일하게[19] 분캠 및 분리공시 대학이 없는 지역이다.'''[20]

6. 여담


통계청에 따르면 종교적으로는 한반도 평균(개신교 18%, 불교 22%)에 비해 개신교의 세가 약 20~25%로 강하고, 반대로 불교의 세가 15% 정도로 비교적 약한 편이라 한다. 가톨릭은 호남 지역에 2개의 교구를 두고 있는데, 광주, 전남 지역의 성교회을 관할하는 천주교 광주대교구와 전북 지역을 담당하는 천주교 전주교구가 있다. 한반도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최초의 천주교 순교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21] 원불교는 전북교구와 전남교구 이외에 익산의 중앙 총부와 그 주변으로 구성된 중앙교구가 있다.
세계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분포한 6만여 기의 고인돌 중에서 한반도에 4만여 기가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전라도에 있을만큼 압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서양에서는 '청동기 시대'를 '영웅들의 시대'라고도 하는데,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신화 일리아드 오디세이의 배경이 바로 청동기 시대이기 때문. 그런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으로 거석 문화를 대표하는 고인돌이 이곳에 밀집해 있는 이유는 미스테리이다. 한반도 고인돌들은 전라도에서 퍼져나간 패턴을 보이며 인근 지역들도 고인돌이 많아서 강화도에 있는 고인돌들도 유네스코에 등재되었고, 인근 지역인 경상도 역시 고인돌이 많다. 또한 종교성이 강한 곳으로 3대 신흥 종교가 전부 전라도에서 일어났다. 대한불교조계종의 본산인 서울 조계사 대웅전도 전라도 정읍에 있던 보천교 십일전을 분해해서 그대로 옮기었다. 조선조 남사고 선생은 '인류 구원의 대도(大道)는 이 땅 조선에서 출현한다. 전라도에서 천지의 기운이 통하니 무극대도(無極大道)이다'라는 예언을 하기도 하였다.
유명한 바둑기사가 많이 나온다. 정운창(전남 보성), 조남철(전북 부안), 조훈현(전남 목포), 이세돌(전남 신안), 김인(전남 강진), 이창호(전북 전주) , 조치훈 역시 조남철의 조카이고, 박정환 역시 아버지가 광주 출신이다.
동학농민운동, 호남의병항쟁, 광주학생항일운동, 5.18 민주화운동등 압제적인 통치에 저항하는 운동이 많이 일어났던 지역이다.
간혹 한 글자가 같고 이름이 비슷한 '''호서(湖西)''' 지방과 헷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호서 지방은 충청도를 일컬는 단어이다.

7. 정치


호남은 전국에서 정치 편향도가 가장 심한 지역이다. 대구 및 경상북도 권역과 반대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인구수가 적기 때문에 의석수도 적어 민주당계 정당의 주요 지역 지지 기반인 서울특별시가 실질적인 민주당계 정당의 정치적 권력을 창출한다.[22] 전라도 지역은 오히려 민주계 인사와 당령에 승낙 사인을 내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실제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성장한 이들은 호남 현지에서의 지지를 바탕으로 전국구 후보로 발돋움하였다.[23] 전라도의 승낙, 지지를 받은 인물과 당령이 전국 민주당 지지자들의 향방을 이끄는게 특징이다. 더 쉽게 표현하면, 정치적 실권은 서울특별시를 비롯해 인구수가 많은 수도권 지역이 이끌지만, 명분 및 상징성의 면에선 여전히 전라도 지역의 여론 및 지지가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다. 사실, 보수 정당의 본진인 경상도가 수도권 다음으로 인구가 많고 수도권과 충청도도 보수 정당 지지층과 무당층이 상당하기 때문에 전라도는 다른 지역에서도 보수 정당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과 세력에게 전략적 투표로 힘을 실어준다.[24]
민주당계 정당이 분열되어 있으면 전라도에서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가 관심사가 되는데,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분당된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전북도지사는 열린우리당, 전남도지사와 광주시장은 민주당이 가져갔다. 새정치민주연합 분당으로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이 등장한 후 전라도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호남 홀대론이 불어 국민의당에게 많은 지지를 몰아줬으나, 이후 헌재소장 임명사건을 둔 국민의당의 결정적 실책으로 인해 여론이 급변해 2017년 19대 대선에서 2018년 7회 지방선거와 2020년 21대 총선까지 더불어민주당을 제대로 밀어주고 있다. 호남 출신인 이낙연 전 총리가 유력한 대선 후보로 부각되는 것도 있다.
정치 성향의 정도는 3개 광역자치단체가 대체로 비슷하지만 굳이 따지면 5.18 민주화운동의 중심지로 민주-진보 진영으로부터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은 광주광역시가 가장 강하고 그 다음이 전라남도, 전라북도 순이다. 지역에 따라 비율은 다르지만, 친 민주당계 정서와 반 보수당계 정서가 태반으로 이 둘이 합쳐져 민주당의 세가 강하다. 다만 민주당계가 못할때나 보수당계 반감의 정도가 약해졌을땐 반 보수당계가 다른 목소리를 내 보수당에게 소수나마 문을 열어주는 경우가 있다.
보수주의 정당의 지지율(7%선)이 정의당류의 진보주의 정당의 지지율(8%선)과 비슷하게 나오는 편이다.# 하지만 5.18 망언이 터져나오거나 신흥 인터넷 극우 혹은 보수 언론에서 전라도 비하 논란이 터져나오면 보수주의 정당의 지지율이 1% 미만으로 폭락하는 특징을 보인다. 사실상 열성 보수 지지자가 없다시피하거나, 전라도의 보수주의자들이 지역비하와 과거사 논란에 민감하단걸 보여주는 반증이다. 특히 선거가 가까워지면 인터넷 극우들의 활동세가 강해지고, 5.18 망언들이 언론 카메라에 잡히면서 평시와 선거철의 보수정당 지지율이 큰 차이를 보이는게 정치지형의 특징이다. 전라도가 배출한 보수계 인사인 이정현, 정운천의 경우는 시기적인 운도 따라주고 당시 보수여론이 전라도에 내비친 호의 덕분에 전라도에서 정치적 기반을 자리잡을 수 있었던 사례였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다시 대립이 심해지고 인터넷 극우와 이들의 지지를 받는 극우 성향 정치인들의 영향으로 호남에서의 보수정당에 대한 반감이 다시 강해지고 이정현과 정운천은 호남에서 지역구 당선이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25]
이처럼 민주당이 지역 정계를 꽉 잡는 상황이라서 진보주의 정당은 어부지리격으로 명목상 '지역 야당' 역할을 하는 편. 실제로도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등에서는 대부분 민주당이 지지율 1위를, 그 다음 자리를 진보 정당이 차지하는 편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명목상일 뿐, 전라도 지역 내에서도 실질적으로 민주당계 정당과 1:1로 대립할 체급은 아직 되지 못한다.
정치 성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각각 광주광역시/정치, 전라북도/정치, 전라남도/정치에 나와있다. 특히 광주광역시/정치 문서는 호남의 현대 정치사를 압축하여 서술되어 있고, 전주시/정치 문서는 전북권의 정치사가 압축 서술되어 있다.

8. 같이보기



9. 둘러보기




10. 세종실록지리지에서의 설명




[1] 금산군은 1895년 23부제 실시 때 잠시 공주부에 편입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전라북도로 편입되었고, 1963년 충청남도에 편입되었다.[2] 세부적으로 따지면 경계선은 조금씩은 차이가 있다.[3] 물론 나주 복암리 고분 봉분들 크기가 크고 ,부장품들도 금동신발,은제장식,장식대도 등 비상한 관심을 끄는 점도 사실이고, 신라도 지증왕 시기 즉 6세기 초까지 마립간 시대의 특징으로 대형고분들이 있었고, 백제 능산리 왕릉들도 2020년 문화재청이 실시한 지하물리탐사 결과 왕릉들의 크기가 훨씬 더 큰 것으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갈수록 한반도 전역에서 그 전 시기에 비해 무덤의 크기가 점차 줄어드는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이는 세계적으로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관료 체제가 확립되면서 왕의 무덤 크기와 왕의 권위가 일치하지는 않게 된다.[4] 학자들 대부분은 백제의 의도적인 견제를 이유로 든다. 이런 정황은 백제가 힘을 투사하는게 한계가 있었던 가야 일대에선 드러나지 않는다.[5] 백제의 마한 병합 과정은 신라의 진한 병합과정과도 비슷하지만 다른 면도 있었다. 애초에 마한의 영역 자체가 진한의 2~3배에 달하는 데다가 독자적인 수계가 있는 영역권들은 최소한 4~5개는 있었기에 사로국의 진한 병합과는 이 점이 꽤 달랐고, 처음에는 인접 지역에 대해 가급적 직접 지배를 관철하려 하였으나 범위가 멀거나 영산강 유역권 같이 나름의 독자적 힘이 강했던 지역에 대해서는 중앙행정력의 투사력이 상대적으로 크게 떨어졌을 뿐이다.[6] 경북 북부 지역인 의성,군위,상주,예천,안동,영주,봉화,청송 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들은 경주 토기와는 다르고,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백제식 금동관, 환두대도 같은 백제 유물들이 출토되며 또한 고려에서 신라부흥운동도 경북 남부 지역에서 일어나고,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호응이 없었듯 전라도 지역과 마찬가지로 경상도 지역 심지어 경북 지역 내에서도 당시에는 단일한 집단이 아니었듯이 어차피 고대사의 견해들 자체가 어느 정도는 추측에 기반해서 이뤄질 수밖엔 없으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신미-침미다례 전체를 은연중 전남 혹은 전라도 전체로 비정하거나 혹은 아예 마한으로 보는 일각의 억지스러운 추측일 것이다.[7] 이 지역은 본디, 백제가 목지국을 타도하기 이전부터도 번영하던 유서 깊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당연히 백제중앙정부가 복속 이후에도 견제와 동시에 우대도 더할 수밖에 없었다.[자료] 수도권 약 419만 → 약 '''2545만'''(약 '''2126만''' 증가), 강원도 약 114만 → 약 155만(약 41만 증가), 충북 약 115만 → 약 158만(약 43만 증가), 대전·충남 약 203만 → 약 379만(약 176만 증가), 대경권 약 320만 → 약 519만(약 199만 증가), 동남권 약 313만 → 약 805만(약 492만 증가), 제주도 약 25만 → 약 62만(약 37만 증가)[8] 이러한 삼남(三南) 의식은 1961년 5.16 당시 이북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부에서 호남 출신 장성들이 같은 삼남(三南) 출신을 지지한다는 명분 아래 영남 출신 박정희를 지지하여 삼남(三南) 출신들이 이북 출신들을 군부에서 축출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9] 기축년 10월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20개월 사이에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 조신(朝臣)·명관(名官) 중에 죽은 자가 10여 인이었으며#[10] 해방 이후 1946년 제주도(현 제주특별자치도)로 분리되기 전까지 전라도(1896년 이후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다.[11] 문자 그대로 '이 편안히 쉬는 곳'으로도 읽힐 수 있다.[12] 1963년 충청남도로 편입되기 전까지 전라도(1896년 이후에는 전라북도)에 속해 있었다.[13] 여기에서는 '모든 고을의 백성을 거느린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다.[14] 심지어 익산시 역시 전주시 처럼 익산시/음식 항목이 개설될 정도로 음식문화가 뛰어나다.[15] 허영만 작가의 대표 히트작 식객의 주인공 성찬이 그 예.[16] 바다가 가까워서 해산물을 많이 이용한다.[17] 그런데 댓글 반응을 보면 “그런거 모르겠고 그냥 맛있던데?”가 압도적이다.[18] 특히 새끼 돼지를 재료로 한 애저나 푹 발효시킨 삭힌 홍어 등이 아주 매니악한(...) 인기가 있다.[19] 정확히는 전남대학교/여수캠퍼스예원예술대학교가 있는데, 전남대는 광주랑 전남이란 단순 소재지 차이라 의미가 없으며, 예원예대는 사실상 경기도 캠으로 모조리 옮겼기 때문에 역시 의미가 없다.[20] 경기도, 충청도는 입이 아플 정도이며, 인천 역시 이원화 캠퍼스가 존재하며, '''서울에도 제2캠퍼스로 분류한, 분리공시 대학도 존재한다.''' 그나마 비슷한 사정인, 경상도에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가 존재한다.[21] 훗날 호남 최초의 순교지에 성당을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전주 전동성당이다.[22] 사실 전라도의 자체 인구가 줄어든 이유가 일자리를 찾아 서울경기로 이주했기 때문이라서 수도권의 민주-진보층은 대체로 호남의 여론을 따라간다. 인천은 충청 출신이 많긴 한데 세월이 지나면서 우촌좌도에 가까워지고 전방지역으로 분류되는 강화군옹진군 정도를 제외하면 민주당이 우세한 상태다.[23] 대표적인 사례가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 때 광주에서 승리를 거뒀던 노무현이다. 전북 출신인 정동영이 원사이드로 패배한 이후로, 노무현의 후계자로 지지를 받은 문재인에게 힘을 실어 줬다.[24] 3당 합당으로 비호남권 보수층이 대거 보수정당으로 넘어갔던 충격이 크기도 했다.[25] 대경권도 다시 보수결집이 강해지면서 김부겸, 홍의락이 낙선됐다. 다만 도시 지역구를 중심으로 20-30%대의 고정 진보층은 남은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