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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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골라의 독립운동가이며, 제2대 대통령으로, 동시에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MPLA)의 의장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장기집권한 독재자이자 자신의 권력과 사치만을 위하고 고도성장 과정에서 빈민층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 소흘히하면서 앙골라의 양극화를 극심하게 진행시킨 인물이기도 했다. 그나마 종신집권 하지 않고 스스로 물러난건 칭찬할 만 하지만 퇴임 뒤부터는 자식들과 측근들이 속속 해임당하거나 구속당하는 등 영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다.
산투스는 평범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950년대 중반에 포르투갈의 식민정책과 앙골라인에 대한 암목적인 차별에 대항하여 1956년에 앙골라 인민해방전선에 그러나 포르투갈의 탄압으로 1961년에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망명생활을 보내다가 소련으로 유학가서 아제르바이잔 석유화학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고, 1970년데 귀국하여 독립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앙골라가 독립한 이후에 좌우간 내전으로 앙골라가 다시 혼란에 빠지자 MPLA가 총재가 되었고 1979년에 아고스티뉴 네투 대통령이 사망하자 MPLA의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직을 이어받아 앙골라 제2대 대통령이 된다.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내전으로 인해 국가의 안정화같은건 전쟁에 급급한지라 이때는 별다른 업적같은걸 쌓을시간도 없었다.결국 냉전이 끝나자 1992년에 선거가 치러졌는데 조나스 사빔비가 위낙 악명이 높아서 1차 투표에서 49.5%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사빔비가 선거에 불복하고 다시 내전이 일어나면서 앙골라는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2년에 UNITA가 항복하면서 앙골라 전역을 통일하였고 이후에 앙골라를 빠르게 안정화 시켜나갔다. 산투스는 2009년 말에 예정되어 있는 대선에 불출마 입장을 밝혔지만 집권 연장에 나설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했는데 결국 대통령에 출마하여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안정화 이후에는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아프리카에서는 나름 강대국축에 드는 나라가 되기는 했지만 정작 부정부패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않고 교육이나 보육, 보건 예산에 대한 투자를 늘리지도 않으면서도 산투스 자신과 그 가족들, 측근들은 매년 수억달러가 넘는돈을 횡령해가며 재산을 불려나갔고, 그래서 국민들 대다수는 여전히 그 혜택을 제대로 받지못한채 빈곤층으로 살고있다. 2017년 퇴진 이후로 해외재산의 상당수가 앙골라 당국에 의해 몰수되는 형국이지만 한때 대통령 일가가 '''소유한 재산은 30%에 이를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래서 젊었을때 지녔던 이념따윈 내평겨치고 치부에 눈이 먼 타락한 인물이라는 평이 거의 지배적이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장기 집권 독재자였으며, 국제사회는 그를 "은둔형 독재자"로 평가하고 있다. 그가 다른 독재자들과 달리 크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막대한 자원을 통해 생기는 자금을 활용해 정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원유와 다이아몬드 수출로 챙기는 자금으로 정치세력을 관리하고 있으며 서방과의 관계도 원만한 편이다. 그는 2010년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꿨기 때문에 이 인간의 집권이 언제까지 연장될지는 알 수 없다.[1] 2012년 대선에서도 다시 당선되었다. 물론 야당과 국제사회는 불법선거로 이루어진 당선이라고 비판을 했다.
산투스 재임기의 앙골라는 외적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했으나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워지지 않았고 부패문제가 심각하여 앙골라가 고도성장을 하는 과정에서도 일단 극빈층의 수치는 줄기는 했지만 극빈층의 수치는 여전히 40%에 육박했으며 또한 공중보건에 대해 충분한 투자를 진행하지 않아서 영유아 사망률은 여전히 높아서 평균수명이 50대에 머물렀다. 또한 고도성장 과정에서 실업률은 10%를 넘었으며, 인권이야 말도 할거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야당의 세가 크게 약했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집권을 이어 나갈수는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평했을때 내정에 있어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기는 하나 양극화가 극심하게 진행되어 국민들이 큰 이득을 보지 못했다 평할수있다.
다만 로버트 무가베나 이사야스 아페워키 등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대통령 독재자와 달리 죽을때까지 영구 집권하려는 의욕이 없었는지 2017년 총선 이전에 물러날 것이라고 했고, # 로렌수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산투스는 퇴진 이후로는 개혁바람이 불면서 영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다. 일단 산투스 자신은 영국과 포르투갈을 오가며 해외에 머물고있기 때문에 구속은 되지않고있지만, 측근 일부가 구속되고 있고 자녀들도 고위직에서 해임되었으며 아들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2014년 말부터 유가하락으로 재정수입이 크게 줄면서 앙골라의 경제가 고도성장을 마감하고 침체기에 접어든데다가 2017년 총선에서 뚜렸한 지지율 하락세가 확인 되었기 때문에 후임 대통령인 로렌수 입장에서 산투스와 그 측근들에게 칼을 들이대면서까지 재정을 추가로 확충해야할 필요가 있는데다가 고도성장 과정에서 소외받은 서민층을 달래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최고의 여성 부호로 꼽히는 이사벨 두스 산투스가 그의 장녀이다. 조제 에두아르두가 아제르바이잔에서 공부하면서 만난 러시아인 전부인 타치아나 쿠카노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사벨은 대학을 갓 마친 24세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각종 관급 사업을 사실상 독점계약하며 급속도로 현금을 불렸고, 투자업체인 켄토홀딩을 설립해 포르투갈의 각종 기업들 지분을 사들였다. 2013년에는 포르투갈의 미디어 복합기업 존 멀티미디어 지분 10%를 1억 6400만 유로(한화 2600억원)에 인수했고, Optimus 역시 인수하고 이들을 합병하여 NOS#s-5를 만든다. 포르투갈 은행인 방쿠 에스피리투 산투, 전력회사인 에네르지아스 데 포르투갈 등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성공 비결이 본인의 자질보다는 아버지인 조제 산투스의 빽이라는 것이지만. 그리고 자신의 특권을 재산 증식에 악용한 정황이 드러났다.# 두스 산토스가 여러 자녀 중에서 유달리 이사벨을 편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2]
유명 가수인 머라이어 캐리가 앙골라 호세 대통령을 위해 거액인 100만 달러( 약 10억6050만원)를 받고 2시간 공연을 벌여 국제 인권단체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 토르 이사장은 "머라이어 캐리는 독재자들로부터 받은 현금이 아직 충분치 않은 모양이다"라며 "불과 5년 전 카다피 가족 앞에서 공연했는데, 또 아프리카 최고 인권 파괴자이자 타락한 정권(로버트 무가베도 만만치 않다.)의 전시 공연을 했다"고 비난했다.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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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골라의 독립운동가이며, 제2대 대통령으로, 동시에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MPLA)의 의장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장기집권한 독재자이자 자신의 권력과 사치만을 위하고 고도성장 과정에서 빈민층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 소흘히하면서 앙골라의 양극화를 극심하게 진행시킨 인물이기도 했다. 그나마 종신집권 하지 않고 스스로 물러난건 칭찬할 만 하지만 퇴임 뒤부터는 자식들과 측근들이 속속 해임당하거나 구속당하는 등 영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다.
2. 생애
산투스는 평범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950년대 중반에 포르투갈의 식민정책과 앙골라인에 대한 암목적인 차별에 대항하여 1956년에 앙골라 인민해방전선에 그러나 포르투갈의 탄압으로 1961년에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망명생활을 보내다가 소련으로 유학가서 아제르바이잔 석유화학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고, 1970년데 귀국하여 독립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앙골라가 독립한 이후에 좌우간 내전으로 앙골라가 다시 혼란에 빠지자 MPLA가 총재가 되었고 1979년에 아고스티뉴 네투 대통령이 사망하자 MPLA의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직을 이어받아 앙골라 제2대 대통령이 된다.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내전으로 인해 국가의 안정화같은건 전쟁에 급급한지라 이때는 별다른 업적같은걸 쌓을시간도 없었다.결국 냉전이 끝나자 1992년에 선거가 치러졌는데 조나스 사빔비가 위낙 악명이 높아서 1차 투표에서 49.5%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사빔비가 선거에 불복하고 다시 내전이 일어나면서 앙골라는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2년에 UNITA가 항복하면서 앙골라 전역을 통일하였고 이후에 앙골라를 빠르게 안정화 시켜나갔다. 산투스는 2009년 말에 예정되어 있는 대선에 불출마 입장을 밝혔지만 집권 연장에 나설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했는데 결국 대통령에 출마하여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안정화 이후에는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아프리카에서는 나름 강대국축에 드는 나라가 되기는 했지만 정작 부정부패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않고 교육이나 보육, 보건 예산에 대한 투자를 늘리지도 않으면서도 산투스 자신과 그 가족들, 측근들은 매년 수억달러가 넘는돈을 횡령해가며 재산을 불려나갔고, 그래서 국민들 대다수는 여전히 그 혜택을 제대로 받지못한채 빈곤층으로 살고있다. 2017년 퇴진 이후로 해외재산의 상당수가 앙골라 당국에 의해 몰수되는 형국이지만 한때 대통령 일가가 '''소유한 재산은 30%에 이를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래서 젊었을때 지녔던 이념따윈 내평겨치고 치부에 눈이 먼 타락한 인물이라는 평이 거의 지배적이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장기 집권 독재자였으며, 국제사회는 그를 "은둔형 독재자"로 평가하고 있다. 그가 다른 독재자들과 달리 크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막대한 자원을 통해 생기는 자금을 활용해 정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원유와 다이아몬드 수출로 챙기는 자금으로 정치세력을 관리하고 있으며 서방과의 관계도 원만한 편이다. 그는 2010년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꿨기 때문에 이 인간의 집권이 언제까지 연장될지는 알 수 없다.[1] 2012년 대선에서도 다시 당선되었다. 물론 야당과 국제사회는 불법선거로 이루어진 당선이라고 비판을 했다.
산투스 재임기의 앙골라는 외적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했으나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워지지 않았고 부패문제가 심각하여 앙골라가 고도성장을 하는 과정에서도 일단 극빈층의 수치는 줄기는 했지만 극빈층의 수치는 여전히 40%에 육박했으며 또한 공중보건에 대해 충분한 투자를 진행하지 않아서 영유아 사망률은 여전히 높아서 평균수명이 50대에 머물렀다. 또한 고도성장 과정에서 실업률은 10%를 넘었으며, 인권이야 말도 할거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야당의 세가 크게 약했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집권을 이어 나갈수는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평했을때 내정에 있어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기는 하나 양극화가 극심하게 진행되어 국민들이 큰 이득을 보지 못했다 평할수있다.
다만 로버트 무가베나 이사야스 아페워키 등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대통령 독재자와 달리 죽을때까지 영구 집권하려는 의욕이 없었는지 2017년 총선 이전에 물러날 것이라고 했고, # 로렌수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산투스는 퇴진 이후로는 개혁바람이 불면서 영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다. 일단 산투스 자신은 영국과 포르투갈을 오가며 해외에 머물고있기 때문에 구속은 되지않고있지만, 측근 일부가 구속되고 있고 자녀들도 고위직에서 해임되었으며 아들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2014년 말부터 유가하락으로 재정수입이 크게 줄면서 앙골라의 경제가 고도성장을 마감하고 침체기에 접어든데다가 2017년 총선에서 뚜렸한 지지율 하락세가 확인 되었기 때문에 후임 대통령인 로렌수 입장에서 산투스와 그 측근들에게 칼을 들이대면서까지 재정을 추가로 확충해야할 필요가 있는데다가 고도성장 과정에서 소외받은 서민층을 달래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3. 기타
아프리카 최고의 여성 부호로 꼽히는 이사벨 두스 산투스가 그의 장녀이다. 조제 에두아르두가 아제르바이잔에서 공부하면서 만난 러시아인 전부인 타치아나 쿠카노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사벨은 대학을 갓 마친 24세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각종 관급 사업을 사실상 독점계약하며 급속도로 현금을 불렸고, 투자업체인 켄토홀딩을 설립해 포르투갈의 각종 기업들 지분을 사들였다. 2013년에는 포르투갈의 미디어 복합기업 존 멀티미디어 지분 10%를 1억 6400만 유로(한화 2600억원)에 인수했고, Optimus 역시 인수하고 이들을 합병하여 NOS#s-5를 만든다. 포르투갈 은행인 방쿠 에스피리투 산투, 전력회사인 에네르지아스 데 포르투갈 등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성공 비결이 본인의 자질보다는 아버지인 조제 산투스의 빽이라는 것이지만. 그리고 자신의 특권을 재산 증식에 악용한 정황이 드러났다.# 두스 산토스가 여러 자녀 중에서 유달리 이사벨을 편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2]
유명 가수인 머라이어 캐리가 앙골라 호세 대통령을 위해 거액인 100만 달러( 약 10억6050만원)를 받고 2시간 공연을 벌여 국제 인권단체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 토르 이사장은 "머라이어 캐리는 독재자들로부터 받은 현금이 아직 충분치 않은 모양이다"라며 "불과 5년 전 카다피 가족 앞에서 공연했는데, 또 아프리카 최고 인권 파괴자이자 타락한 정권(로버트 무가베도 만만치 않다.)의 전시 공연을 했다"고 비난했다. 자료
[1] 여담으로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을 때 앙골라의 야당인 UNITA 소속 라울 단다 의원은 "오늘은 앙골라의 민주주의에 매우 슬픈 날, 이는 민주주의를 파묻기 위해 무덤으로 향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비난했던 이야기도 있다.[2] 공식적으로 확인된 자녀로는 러시아인 전 부인 사이에서 낳은 딸 이사벨 한 명과 아들 두 명 이렇게 총 세 명이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