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양자

 

智襄子
?~기원전 453년
1. 소개
2. 생애
3. 사후


1. 소개


진(晉)나라 말기의 실권자. 본명은 지요(智瑤).[1] 지씨 가문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지백(智伯) 요(瑤) 혹은 지백(智伯)라고도 불린다. 시호가 양이라 지양자라고 불려서 이 문서의 제목이 지양자이다. 지선자 지신(智申)의 아들.

2. 생애


아버지 지신이 그가 재주가 뛰어나서 뒤를 잇게 하려 했으나 친족인 지과(智果)가 그의 인격이 바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지신은 지요를 후계자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 지신이 죽자 그 뒤를 이었다. 한강자 한호(韓虎), 위환자 위구(魏駒), 조양자 조무휼(趙無恤)을 협박해 땅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한호와 위구는 후환이 두려워 들어주었으나 조양자만은 거절했다. 이에 지양자가 크게 분노해[2] 조씨 가문의 중심지인 진양(晉陽)을 포위했다.[3] 진양은 조씨 가문이 민심을 사놓고, 또 성벽이 든든하고 물자가 넉넉해 쉽게 함락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한 지양자는 수공을 썼다. 그리하여 진양성에 물이 들어찼다. 그러나 조양자가 한강자와 위환자를 설득해 진나라를 3개로 나누어 가지자고 해서 오히려 지백을 들이치게 하니 지백은 역관광을 당했다.[4] 그리고 지양자는 패해 죽고 그 일족은 몰살 당했다. 그리고 그 땅은 조씨, 위씨, 한씨가 각기 나눠 가졌다. 이것은 진출공 20년(기원전 455년)의 일이었다.

3. 사후


비록 지요는 횡포를 부리고 조씨에게 패해 죽었지만, 인재 보는 눈이 있어서인지 중항씨와 범씨의 연합 정권을 섬기던 사(士) 신분의 예양(豫讓)을 알아보고 대단히 중용했다고 한다. 그 예양은 지백이 죽자 달아난 뒤 조양자에게 그 원수를 갚기 위해 2차례나 암살 시도를 벌이나 결국 두번 다 실패해 죽게 되었고, 죽기 전에 조양자에게 부탁해 조양자의 옷을 받아 그것을 3번 찌르고 자결했다고 한다. 진(晉)나라의 식자들은 그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지씨 세력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1] 원래 성씨를 적용해서 순요(荀瑤)라고도 한다.[2] 사실 지양자와 조양자의 악연은 조간자 생전부터 있었다. 그 때는 조양자가 참고 넘어갔지만 이때는 조양자가 조씨의 당주쯤 되었기에 그냥 넘어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3] 참고로 진양은 현 타이위안으로 조양자 전대의 조가의 종주인 조간자 시절에 세워진 도시다.[4] 앞서 보았듯 한씨와 위씨는 이미 지씨에게 땅을 뜯긴 상황이라 지씨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고 무엇보다 조씨가 망해봐야 좋은건 지씨 뿐이었다. 실제로 조양자도 한씨위 위씨에게 "우리 망하면 다음은 당신들 차례" 라고 설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