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자(춘추시대)

 


'''조(趙)씨 가문 7대 종주
양자
襄子
'''
''''''
영(嬴)
''''''
조(趙)
''''''
무휼(毋卹)
'''아버지'''
조간자(趙簡子) 조앙(趙鞅)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25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475년 ~ 기원전 425년
1. 소개
2. 생애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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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춘추시대 말기와 전국시대 진나라의 신하이자, 조씨 종주(趙氏宗主)로서는 제7대 종주. 이름은 조무휼(趙無恤).

2. 생애


조양자는 원래 적(翟)나라 출신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인 데다가 막내라서 후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사기 조세가에 의하면 정나라 출신 관상쟁이 고포 자경(高布 子卿)이 조앙의 적자들의 관상을 봤는데 '''장군이 될 만한 아들은 없는 것 같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말한다. 이후 자경은 지나가면서 조앙의 아들 같은 아이를 보고는 한 번 그 아이를 데려오도록 부탁했고, 이후 조앙이 무휼을 데려오자 자경은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이 아이야말로 진정 장군의 재목"이라고 지목했다. 조앙은 이 아이는 첩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라고 지목하자 고포 자경은 "하늘이 내려주신 그의 운명은 비록 천하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필시 귀한 신분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혹시나 싶었던 조앙은 얼마 뒤 아들들을 불러놓고 "내가 보물과 같은 부절을 상산(常山)에 감춰 놨다. 먼저 찾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말했다. 조앙의 아들들이 말을 달려 산에 올라가 찾았으나 찾지 못했는데, 무휼은 제일 먼저 돌아오더니 대뜸 부절을 찾았다고 알렸다. 조앙이 부절을 보여달라고 하자 "상산의 꼭대기에서 대(代) 땅이 보이는데, 대나라를 도모하라는 거 아니냐"고 대답했다. 조앙은 그제서야 확신을 갖고 태자를 적자인 백로(伯魯)에서 무휼로 교체했다.
무휼의 태자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일례로 기원전 464년 정나라를 공격할 때 조간자가 병이 나서 대신 무휼이 종군했는데, 여기서 지백이 술이 뿌리고 구타를 하며 모욕하였다. 무휼은 "부친께서 나를 태자로 삼은 것은 내가 능히 이런 치욕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라며 참았다. 지백은 정신을 못 차리고 귀국한 뒤에는 무휼을 폐하라고 조앙에게 권했지만 조앙은 무시하였다. 이렇게 무휼과 지백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어쨌건 기원전 458년 조간자가 죽자 무휼이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았다. 조양자는 아버지에게 선언했던 대로 가장 먼저 대나라를 공격했다. 조양자는 하옥산(夏屋山)에서 대나라의 왕을 초대했는데, 이 자리에서 요리사 락(犖)을 시켜서 구리 국자로 대나라 왕과 일행들을 때려 죽인 뒤 군대를 대나라로 보냈고, 결국 대나라는 조양자의 손에 떨어진다.[1] 조양자는 점령한 대나라를 (자신 때문에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형 백로의 아들 주(周)에게 위임하니 그가 대 성군(代成君)이다.
진나라 말엽인 기원전 452년, 지(智)·한(韓)·위(魏)씨의 세 가문과 함께 세력을 과시했는데 지씨가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려 하자 한·위와 힘을 합쳐 지씨를 멸하고, 세 가문이 함께 진의 영토를 나누어 가져 조나라의 시초를 만들었다.[2] 이를 '''삼가분진(三家分晋)'''이라 하는데, 흔히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된 사건들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3] 이는 한비자 십과(十過) 편에서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다 패망하는 사례'로 꼽기도 했다.
사기 자객열전에 나오는 예양이 암살하려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예양이 바로 조양자가 멸한 지씨를 섬겼던 인물이기 때문. 조양자는 지씨의 대부 지백과 그 후손을 멸하고 지백의 두개골에 칠을 해서 술잔[4]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지백이 조양자의 근거지 진양(晋陽)[5] 땅을 포위하고 3년 동안 수공을 펼쳤는데, 결국 성 안에 양식이 떨어져 굶주린 사람들이 자식을 교환해 잡아먹었을 정도로 처참한 지경까지 몰렸으니, 그야말로 골수까지 원한이 맺힐 수밖에.
그러나 예양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한 번은 "저 사람은 자기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 뿐이다"며 놓아주고, 두 번째 시도 때 예양이 그토록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를 듣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예자'라고 칭찬하고는 자신의 옷을 내 주어 예양에게 원수를 갚게 하는 퍼포먼스라도 시켜준 것[6]을 보면 잔인하긴 했어도 제법 배포가 큰 인물이었던 듯하다. 이건 적이었어도 자기 주인에 대해 충의를 지키는 사람은 용서한 아버지 조간자를 닮았다. 사실 지백에게 워낙 맺힌 게 많아서 그렇지,[7] 그 외에는 특별히 잔인하게 군 적도 없다. 예양도 자결하기 전에 '''원수인''' 조양자에게 자신을 신(臣)이라고 칭하며 '어진 사람'임을 인정하였다.[8][9]
사기 조세가에 의하면 조양자의 재위 기간은 33년에 달한다. 조양자에겐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아까 얘기했던 조카 주를 후계자로 삼았고, 주가 자신보다 먼저 죽자 주의 아들 완(浣)에게 가절을 물려준다. 이 완이 바로 조나라 헌후로 이후 조나라 군주 자리는 헌후의 후손들이 이어간다.[10]

3. 기타


한참 후인 811년, 유라시아의 반대편에서 동로마 제국황제 니키포로스 1세가 불가르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불가르의 크룸이 니케포로스 1세의 두개골을 으로 도금하고 술잔으로 만들어 버린 일이 일어났다. [11]
[1] 죽은 대나라 왕의 부인은 바로 조양자의 누이였는데, 남편이 죽자 대나라에 있던 조양자의 누이는 비녀로 자기 목을 찔러 자결했다.[2] 원래 지·한·위·조 네 가문 중 지씨가 가장 세력이 강해 지백은 한·위에게 함께 조씨를 공격해서 땅을 나눠갖자고 했으나 조양자는 거점인 성에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해 두고 무한방어에 들어갔다. 이후 조씨에 대한 공격이 지지부진해지자 수공으로 조씨를 위협하지만 조양자는 지씨 몰래 한·위에게 사자를 보내 우리가 망하면 다음은 당신들 차례가 될 것이라며 이들을 설득하였고 이들 역시 땅을 뺏긴(과거 지백은 자신의 힘만 믿고 한·위의 땅을 강탈한 적이 있었는데 조양자가 이를 거부함으로써 전쟁이 일어났던 것) 원한이 있던 데다가 어차피 조씨를 쳐 봤자 대부분의 땅은 지씨가 차지할 게 뻔한 터라 조씨와 손을 잡고 지씨를 쳐 무너뜨렸다.[3] 이 때문에 진을 갈라먹은 삼진(조·위·한)은 춘추전국시대 주요 국가 중에서는 처음으로 주나라의 봉작을 받지 않고 건국 후 승인을 받은 나라들이다.[4] 혹은 요강이라는 말도 있지만 초기 기록에는 술잔으로 나온다.[5] 태원(타이위안)[6] 예양이 옷이라도 벨 수 있게 해달라고 조양자에게 요청하자 선뜻 자기 옷을 내 주었다. 예양은 세 번을 뛰어 조양자의 옷을 베고 자결했다.[7] 앞서 보았듯 조간자 생전에는 구타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바로 위의 문단을 보면 알겠지만 지백과의 전쟁에서 막판에는 사람들이 식인을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이러니 화가 안 치밀어오르는게 이상한 일[8] 열국지에는 예양이 벤 조양자의 옷에 선혈이 묻었고 이를 보고 놀란 조양자가 이후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고 적혔지만, 사기 등 실제 사서에는 전혀 그런 기록이 없다. 오히려, 생몰연도를 비교해보면 알수 있지만, 조양자는 예양이 죽고나서도 꽤 오래 살았다.[9] 예양 문서에도 자세히 나와있지만, 사기 자객열전에서 예양과 조양자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결코 화해할수는 없지만) 서로를 최대한 인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10] 다만 헌후도 완전히 순탄하게 지위를 물려받은 건 아니고 조양자 사후, 종조부(당숙이란 말도 있음) 조환자와 다툰 끝에 당주 자리를 손에 넣었다.[11] 사실 "숙적의 두개골을 도금해서 술잔으로 썼다 카더라" 식의 일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종 써먹는 레파토리다. 물론 그 술잔이 증거물로 남은 것도 아니어서 그냥 썰인지 정말 있었던 일인지 확실히 알 방법은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