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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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聖一
1964년 1월 26일 ~ 1986년 11월 5일 (22세)
1. 소개
2. 삶
3. 죽음 이후
4. 추모
5. 기타


1. 소개


'''민주화 운동가'''
부산산업대학교[1] 법정대학 행정학과에 재학하던 중 10.28 건국대 항쟁이 일어나고 이것이 군사정권에 의해 테러에 가까운 폭력으로 진압되자 이에 항의하는 유서를 남기고 경성대학교 문과대(현 문화관) 옥상에서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인 뒤 아래로 투신하여 사망하였다.

2. 삶


1982년 부산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부산 산업대학교 법정대학 행정학과에 입학 1984년 군입대, 이후 1986년 행정학과에 복학하여 재학하던 중 10.28 건국대 항쟁이 일어나고 당시 전두환 정권에 의해 폭력적으로 강제 진압되자 전국의 각대학에서 이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가 일어난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당시 부산 산업대학교 현 경성대학교 총학생회는 대동제 준비에만 몰두할 뿐 당시의 시국에 대처하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학생들 또한 특별한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 1986년 11월 5일 12시 43분 문과대(현 시청각관) 옥상에서 10.28 건국대 항쟁에 대한 해명과 부산 산업대학교 당시 경성대학교 학생들의 각성을 요구하는 두 장의 유서 '''<건국대 농성사건에 즈음하여>'''와 '''<산대 학우에게>''' 를 카피한 10여 장의 유인물을 뿌린 후 경성대학교 문과대(현 문화관) 옥상에서 분투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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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죽음 이후


분투신 20여분 위 시신이 학교 바로 아래에 있는 재해병원으로 옮겨졌고 이후 오후 2시 즈음에 학생회관 앞에 대자보가 나붙고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전에 시위 다운 시위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경성대학이지만 이후로는 부산 지역 학생운동을 주도할 정도가 된다. 1천 여명 정도의 학생이 모여 추모 집회를 열고 이후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철야농성 등을 결의했지만 당시만 해도 학생운동과 완전히 무관했던 경성대학교였던지라 지도부가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알지 못해서 다음날 다시 의논하기로 하고 일단 해산했다. 이 와중에 경찰은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학교앞 재해병원을 기습하여 시신을 탈취했다.
다음 날인 11월 6일 학교 곳곳에 대자보가 나붙고 학생들은 가슴에 검은깃을 달기 시작했다. 진성일이 재학 중이던 행정학과를 중심으로 급히 장례위원회가 꾸려졌고 1500여명의 학생이 모여 추모집회를 여는 사이 임시 대의원회의가 열려 총학생회는 불신임이 가결된다. 11월 7일 대략 1700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행정학과 학회장을 장례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식을 치르고 시신은 화장되었다.

4. 추모


이후 이과대 자연관에서 도서관(현 멀티미디어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길목에 추모비가 세워졌고, 1996년 진성일 열사 추모사업회가 발족하여 경성대학교 민주동문회 주도로 해마다 계승제가 치러지고 있다.

5. 기타


  •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반감을 가지고 현실에 분노하긴 했지만 흔히 말하는 운동권은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은 10.28 건국대 항쟁에서 소위 운동권을 일망타진하겠다는 거창한 꿈을 꾸었지만 현실은 역효과. 운동권과 전혀 관련없는 진성일이 현실에 분노하여 자신의 죽음으로 현실에 저항하게 만들고, 당시까지만 해도 학생운동과 거의 무관할 정도였던 경성대학교를 부산권에서 가장 강성한 운동권 학교로 만들어버렸다.
  • 특이하게 북한의 장철구 상업대학에 명예졸업생으로 등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