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

 



1. 개요
2. 생애
2.1. 위나라 시기
2.2. 조나라 시기
2.4. 대나라 시기


1. 개요


陳餘
(?~기원전 205년)
초한쟁패기장이와 함께 활약한 조나라 인물.

2. 생애



2.1. 위나라 시기


위나라 출신으로 고향은 수도였던 대량이다. 본래 유학 공부하기를 좋아했으며 당대의 유명인사인 장이에게 종종 찾아가서 교류하던 사이였다. 처음에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던 장이를 아버지로 모셨지만 친분이 깊어진 후에는 문경지교를 맺어서 친구가 됐다고 한다.
별 탈 없었으면 무난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겠지만 진시황이 이끄는 진나라는 기원전 225년에 위나라를 멸망시켰고 진여와 장이의 운명도 꼬이기 시작한다. 진시황은 전국의 통제를 위해서 유명인사였던 장이에게 현상금 1천 금, 진여에게는 5백 금을 걸어서 잡으려 했고 둘은 이름도 바꾸고 진성(陳城)으로 숨어 들어가 마을의 문지기 노릇을 하면서 살게된다.
이 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자세한 것은 장이 항목을 참고하는게 좋다.

2.2. 조나라 시기


이렇게 조심하며 살아가면서 희망이 없나했더니 진승이 난을 일으킨 후 빛을 보게 된다. 진승의 군대가 진성을 점령한 후 장이와 진여는 정체를 밝히며 나섰고 세력을 늘리기에 여념하던 진승은 그들을 우대했고 부하로 삼았다. 이후 진승에게 장이와 함께 아직 왕이 되는 것은 시급하지 않으며 먼저 진나라에 망한 다른 옛 전국7웅들을 복국시켜 진나라의 적을 늘리라고 조언하였으나 진승은 이를 듣지 않았다. 이후 진여는 장이와 함께 장초의 명령을 무시하고 옛 연나라와 대나라 지역을 손에 넣도록 조왕 무신을 권했다. 조나라 장수 한광은 연나라를 평정했으나 오히려 연왕으로 추대됐고, 진여는 조왕과 장이와 함께 연나라를 공격하러 갔는데 조왕이 연나라 군사에 사로잡혔다. 진여는 장이와 함께 근심했는데, 한 시양졸이 기지를 발휘해 겨우 조왕을 구출했다. 한편 상산을 공격하러 간 이량(李良)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을 죽이자, 조나라 사람들의 도움으로 진여와 함께 겨우 탈출해 군사를 모았다. 장이가 조나라 왕족 출신을 왕으로 세우도록 권유를 받아 조헐을 조왕에 옹립하고, 신도에 임시 수도를 정해 이량의 추격군을 격파했다.

2.3. 거록대전 시기


기원전 208년 9월, 진여는 항산에서 병사 수만을 모아 거록의 북쪽에 주둔하고, 장한은 극원에 있으면서 용도를 쌓아 왕리에게 군자를 공급했다. 왕리는 식량이 넉넉해 급히 공격했고, 거록성 안에는 식량이 부족했다. 그래서 장이는 진여에게 여러 차례 거록으로 오라고 했으나 진여는 군사가 적어서 감히 진나라에 도전하지 못했다. 여러 달이 지나자, 장이는 진여를 원망해 수하 장염(張黶)과 진석(陳澤)을 보내 같이 죽기로 했으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돕지 않는 것을 꾸짖었다. 진여는 승산이 전혀 없고 같이 죽을 뿐이라고 말렸으나, 장염과 진석이 시세가 급하다며 한사코 청하자 군사 5천을 주어 싸우게 했고, 이들은 모두 죽었다.
연나라에서는 조나라의 위급을 듣고 이세황제 3년 10월에 장도가 이끄는 구원군을 보냈고, 제나라의 실권자 전영은 사실 조나라와 사이가 나빠 구원군을 보낼 생각이 없었으나 전영의 장수 전도가 전영의 뜻에 반기를 들고 조나라를 구원하러 출진했으며, 장이의 아들 장오도 대군에서 1만여 군사를 모았으나, 이들은 진나라에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초나라에서는 이미 이세황제 2년 9월에 송의를 대장으로 삼아 구원군을 보냈으나, 송의는 사실 조나라를 힘써 구원할 생각이 없었고 진나라와 조나라가 싸우다 양측이 다 피곤해질 때 한 번에 무찌를 생각이었는데, 군권을 빼앗긴 항우가 이에 불만을 품고 송의를 쳐죽이고 적극적으로 조나라를 구원하러 움직였다. 먼저 영포 등의 선발대로 용도를 여러 차례 공격해 왕리 군의 식량을 핍절케 하고, 마침내 자신도 강을 건너 거록을 포위한 진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이를 본 제후군도 가담해 진나라 군대를 무찌르니, 12월에 거록의 포위가 그제야 풀렸다.

2.4. 대나라 시기


기원전 206년에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각지에 제후왕들을 봉하면서 원래의 육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각 나라를 쪼갰고, 자신을 따라온 장수들을 중용해 각각의 본국을 주고 원래의 왕들은 다른 곳으로 옮겼다. 따라서 조나라에서 대나라를 갈라내 원래의 조왕 헐은 대왕이 되었고, 항우를 따라 관중에 들어간 장이에게 나머지 조나라 영역을 가지고 새로 세운 항산(恒山)을 주어 왕으로 삼았으며 서울을 양국에 두었다. 한편 진여의 식객들이 항우에게 진여가 장이와 함께 조나라에서 공을 세웠다고 설득하자, 항우는 진여가 진나라 멸망에 공이 없다 해 그저 남피의 세 현을 주었다.
항우의 분봉에 불만을 품은 진여는 마침 비슷한 불만을 품은 전영이 항우가 쪼갠 세 제나라(제, 교동, 제북)를 아우르고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되어 자신에게 군사적 지원을 해 주자 봉읍에서 군사를 긁어모아 상산국을 공격해 장이를 쫓아냈다. 장이는 한왕 유방에게 달아났다. 조나라를 다시 아우르자, 대왕 헐을 다시 모셔와 조왕으로 옹립했고, 자신은 조왕에게서 대왕으로 봉해졌다. 아직 조나라가 안정되지 않았고 왕이 미약하므로 자신은 왕의 스승으로 국도에 남아 보좌하고 대에는 하열(夏說)을 상국으로 삼아 지키게 했다.
한왕 2년(기원전 205년), 한왕이 서초를 치면서 조에도 함께하기를 청하자, 장이의 목숨을 대가로 요구했다. 한왕은 장이를 죽이지 않고 진여를 속여 지원을 받아냈다. 한왕 2년 4월, 한왕이 이끄는 제후연합군이 팽성 전투에서 패배했고, 그 과정에서 장이가 안 죽었음을 알자 즉시 한나라에게서 돌아섰다. 한왕 3년 10월(기원전 204년), 한나라에서 돌아선 나라들을 공격하러 보낸 한신와 정형에서 싸워 격파돼 저수에서 참수됐다. 조왕 헐도 쫓기다 양국에서 죽어 조나라는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