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승
[clearfix]
1. 개요
진(秦)나라 말기 농민봉기의 주도자. 자는 섭(涉).
무능한 황제 호해와 환관 조고 때문에 몰락해가던 진나라에서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켜 결정적 몰락의 원인을 제공한 중국의 인물. 동양 최초의 민중 혁명가[1] 이자 초한전쟁의 계기가 된 인물.
2. 생애
평소 호방하고 보스 기질이 충분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지며, 소작농으로 전전하던 시절부터 허풍을 잘 떨어 그를 비웃는 사람들에게 ''''연작(燕雀, 제비와 참새)이 어찌 홍곡(鴻鵠,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겠느냐'''(燕雀安知 鴻鵠之志哉)'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은 현재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겠느냐 등으로 변용되어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만리장성의 건설에 동원되어 공사처로 향하던 중 큰 비 때문에 900명이 함께 고립되어 기일에 맞춰 도착할 수 없게 되자, 이대로는 엄격한 법 집행으로 목이 날아가게 된 처지라 이왕 죽을 바에 한번 뒤집어보고 죽자라는 생각으로 프로파간다를 퍼트렸다. 봉기에 앞서 비단천에 '진승왕'이라고 붉은 글로 쓴후 물고기 배속에 넣었던 것. 사람들이 그 물고기를 사다가 배를 가르니 '진승왕'이란 글이 적인 비단천이 나왔고 부하를 시켜 여우 목소리를 흉내내 "진승이 왕이 되어 초나라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라고 말하게 하자 모두들 진승이야 말로 하늘이 돕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 후 부하들의 신뢰를 얻은 진승은 동료 오광과 함께 초의 장군을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남긴 말이 그 유명한 "'''세상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왕후장상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2] 이후 스스로 '초를 부흥시킨다'라는 의미로 국호를 장초(長楚)라고 짓고 왕위에 올랐으며, 친구 오광을 가왕(假王)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진시황이 쫓던 당대의 명사 장이, 진여를 포섭해 휘하에 두어 세력을 확대시켰으며 자신이 진시황의 적자이며 억울하게 죽은 부소 황태자, 또는 초나라의 명장이자 항우의 할아버지인 항연 장군이라고 선전해 많은 무리가 호응하였다.
진승의 반란에 편승하여 진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밀고 올라와 기세를 크게 올리고 각지에서 군세를 일으켰다. 항우나 한고제도 이 무렵에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진승은 결국 일개 농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무수한 반군 세력을 통합하여 하나로 통솔할 수 있는 권위가 없었다.[3]
육국의 후손들은 진승에게 굳이 복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부하들도 점점 진승을 이탈하게 된다. 부하 무신(武臣)이 조왕(趙王)을 사칭하며 배반을 하고, 또 다른 부하인 주문이 함곡관에서 진나라의 명장 장한에 의해 패퇴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몰락의 조짐이 보인다. 더욱이 친구 오광마저 부하의 배신으로 죽자 실의에 빠지게 되고, 진 정부군의 대대적인 수세에 몰린 끝에 결국 자신의 마부에게 살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자세한 전개는 진승·오광의 난에서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패배자가 되었지만 그의 행동이 마냥 헛되지 않았다. 진의 멸망 및 훗날 전한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초한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
3. 평가
- 진승 오광의 난과 왕후장상 영유종호의 고사를 연구하면 절대로 누락되지 않는 요소가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진승의 몰락과 패배이다. 그 과정은 왕후장상 영유종호의 주장을 실력주의란 요지에서 더 확장된 의미로 오해하지 않게끔 강조하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해당고사를 설명하는 중문학자나 전문가들은 진승이 자신의 그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는 것을 왜곡이 있을지언정 반드시 부연하는 경향이 있다.
- 문학서나 대중서는 대개 진승이란 인물을 민중을 해방하고 압제에 대항하려는 순수하고 능력있는 효웅이었으나 권력욕과 오만함에 방자해져 타락하고 끝내 죽었다는 식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진승에 대해 대다수 자료를 제공하는 사기(역사책) 진섭세가의 내용과도 다르고 근현대 사가들의 분석과도 다르다. 진(陳)에서 장초왕을 자칭한 과정과 그 뒤 부하들의 연이은 반란에도 불구 후방에 안주하여 직접 전선에 나서지 않았단 사실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소작농인 진승이 갑옷을 걸치고 칼을 들었지만 상위계급의 전유물인 승마와 전차조종을 직접 할 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해석한다. 앞서서 사열하고 전선에서 부대를 선도할 가장 기본적인 능력과 그 능력으로 표현되는 권위를 호소할 방법이 없었기에 전선으로 나가고 독립해버린 부하들을 뒤쫒아 직접 통제할 수단이 없었으리라는 분석은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진나라의 장한이 장초의 수도를 공격하자 도주하게 된 진승은 그 때도 직접 수레를 몰지 않았고 그의 마부에 손에 죽었다.
- 사마천은 사기에서 진승에 대한 박한 평가에도 불구 단순한 반란 주동자로 기록하지 않고 제후들을 기록하는 '세가'에 그를 당당하게 기록해 놓았다. 진승은 진에 반기를 들고 진의 타도에 실패하였지만 진승이 봉한 제후들과 장상들이 결국 진을 몰락시켰다는 점에서 세가 범주에 포함시킨 것 같다. 진승이 왕이라 칭할 수 있었던 기간은 고작 6개월밖에 되지 않지만 후에 진승이 일으킨 반란을 시작으로 그 휘하에 있던 장졸들이 결국에는 진 제국을 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사마천이 진승을 달리 보는 것이다. 한고제도 진승을 반기를 든 선배로 높이 보아 진승의 무덤에 사람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고 은왕(隱王)이라는 시호도 내려주었다.
- 진승이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옛 친구가 찾아왔는데, 허름한 옷차림 때문에 병사들에게 문전박대 당하는 그를 진승이 반갑게 맞이하여 궁궐에서 왕래할 수 있게끔 하였으나, 일자무식 농부 친구는 궁궐에서 무시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으려고 진승의 과거 를 재미삼아, 그것도 여러 번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다가 이것이 진승의 귀에 들어간다. 진승은 왕을 모욕하였다며 크게 분노하고, 결국 옛 친구를 처형했다고 한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 진섭세가에 적힌 일화이다.
김태권은 이 일화가 과거에 자신을 박대한 사람에게 오히려 벼슬을 주고 등용한 한신과 대조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혹자는 이 일화를 '전제군주 시절 무슨 이유로든 간에 왕을 욕보이는 것은 크나큰 죄였고, 엄벌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므로 사마천이 진승이 아니라 그 옛 친구를 비난하기 위해 적었다'라고 해석하나 사기 진섭세가 본문에도 "이 일이 있자 많은 사람들이 진승을 버리고 떠났다."라고 쓰여있다. 진승의 옹졸함을 비난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 현대 중국 정부에서는 인민 봉기의 선구적인 인물로 보고 매년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4. 둘러보기(계보)
[1] 황금가지에서 정식으로 낸 쿠보다 센타로 원작 일본만화 만화로 읽는 사기 1-항우와 유방에선 세계 최초의 민중 혁명이라고 잘못 나왔다. 이보다 200여년전 로마나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기에 세계 최초는 아니다.[2] 이는 고려시대 만적의 난 때에도 만적이 인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 말의 서양 버전 명대사는 1381년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와트 타일러의 난 때의 유명한 구호인 "아담이 경작하고 이브가 길쌈하던 시절에 귀족이 어디 있었는가?(When Adam delved and Eve span, Who was then the gentleman?)" [3] 훗날 항량은 이 점을 보완하여 초 왕실의 후예 초회왕을 의제로 옹립하여 권위를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