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옥련

 


성명
진옥련(陳玉鍊)
본관
여양 진씨
생몰
1860년[1] ~ 1944년 11월 10일
출생지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황청리
(현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2]
추서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진옥련은 1860년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황청리(현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생으로 곽종석의 문하에서 수학한 바 있었다.
1919년 스승인 곽종석이 파리장서 의거로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자, 그해 4월 26일 스승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노쇠한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당일 오전 10시경 마을 남쪽 입구 도로에서 친구 아들로 구장(區長)을 지낸 홍연구(洪淵九)가 인사를 하며 어디에 가시냐고 묻자, 진옥련은 홍연구에게 3.1 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스승 곽종석의 동정을 살피러 간다고 말하면서, "너는 친구의 아들이기에 믿음이 가는데, 이 지방의 독립운동은 어떠한가? 너도 이 마을에서는 원래 구장을 한 일이 있는 손꼽힐 만한 사람이니, 속히 마을 주민들을 규합해 시기를 골라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운동을 하여 함께 그 목적을 달성하자."고 권유하였다. 이에 홍연구는 "자신은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얼마 후 이 사실을 파악한 일본 경찰은 위와 같은 말을 한 것을 빌미삼아 진옥련을 체포했으며, 그는 1919년 7월 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언도받아# 항소하여 그해 8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그대로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944년 11월 10일 별세하였다.
200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 판결문에는 1850년 9월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는 우선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의 기록을 따른다.[2] 여양 진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홍묵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