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양 진씨
'''驪陽陳氏'''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인 진씨(陳氏) 중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진 본관. 2000년 통계청의 인구집계조사에서는 97,372명으로 조사되었고, 2015년 기준 110,403명으로 조사되었으나 여양진씨대종회 홈페이지의 게시글과 여기에서는 45만명이라고 쓰여있다.
본관인 여양(驪陽)은 고려 시대 청주(靑州)의 여양현(驪陽縣)을 말하며, 여양현은 현재의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일대에 걸쳐있었던 지역이다.
시조는 고려 예종(1106년 - 1122년) 때 고려 중앙군인 2군 6위 중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내고 인종 4년(1126년)에 이자겸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여양현을 식읍으로 받고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진 진총후(陳寵厚)이다[1] .
그의 아들인 진준(陳俊)은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하여 칭송받던 무신으로,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의종이 폐위되는 와중에 무신들이 문신들을 모두 죽이려 하자, "우리가 원한을 가진 자는 이복기, 한뢰 등 4, 5인에 불과한데, 이 많은 무고한 사람을 이같이 살해하고 가산을 몰수함은 부당한 일이므로 중지하라."고 하였다. 진준 덕분에 적지 않은 문신과 그들의 가족이 화를 피했는데, 이에 사람들이 "음덕(陰德)이 있으니 후손들이 반드시 창성한다."라 하였다고 《고려사》에 전한다. 그 말처럼 진준의 다섯 아들과 다섯 손자가 모두 요직에 올라 가문의 토대를 다졌고, 이에 자손들이 진총후를 시조로 하고 봉작을 받았던 여양현을 본관으로 삼은 것이 여양 진씨의 시초이다.
송나라 복주 사람이며 우윤을 지냈던 진수(陳琇)라는 사람이 외침을 피해 고려로 망명하여 여양현 덕양산 아래 터를 잡고 살았는데 진총후는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여양 진씨 대종회에서 발행한 여양진씨사적(驪陽陳氏史蹟)에는 진수가 송나라 휘종(서기 1100~1125년)대의 사람이고, 그 후손인 진총후는 서기 1100~1122년에 벼슬이 신호위대장군 겸 상장군에 이르렀다고 쓰여 있으며, 여양 진씨 대종회 홈페이지의 진씨 유래에는 진총후가 진수의 후손이라는 확증이 없으므로 후인들의 넓은 고찰을 바란다고 쓰여있다. 남아 있는 기록이니 그대로 전하는 것이고 전해 내려오는 말과 기록의 오류를 후인이 보고 고증할 수 있도록 놓아둔 모양이다. 애초에 소개에만 나올 뿐, 족보에는 진총후가 시조이며 진수는 나오지 않는다.
고려 초기에 이미 진(陳)이라는 성을 사용했던 사람들이 기록에 몇 명 있다. <고려사>를 찾아보면 태조 때 반역을 꾀하고 처형된 청주수(靑州帥) 진선(陳瑄)이 등장하며, 현종 때인 1014년에는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뒤에 겨우 돌아온 진적(陳頔)의 관작을 올려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진총후의 생존 당시에도 또다른 진씨 인물들이 나오는데, 1135년 묘청의 난에 진경보(陳景甫)와 진숙(陳淑)이 우군사 이주연(李周衍)의 부사(副使)가 되어 출정했다고 하며, 1140년에는 진경보를 상서우복야 겸 상장군에 임명했다는 기록이, 1151년에는 의종이 진숙의 죽음을 슬퍼하며 3일간 조회를 철회했다는 기록도 있다. 모두 여양진씨의 족보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로, 역시 진(陳)을 성으로 쓰는 한국의 다른 집안의 족보에도 등장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들인 진준은 사적에 기록이 뚜렷하나 진총후는 후손의 기록에 거론되는 것 외에 단독으로는 기록에 없어 진총후가 본명이 아니라 왕에게 총애받는자라는 뜻의 별칭 같은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여양진씨 예빈경파에서 연세대학교 양권승 교수에게 의뢰하여 연구한 결과 총후는 본래 이름이 아니라 왕이 하사한 이름이며 활동시기와 행적이 비슷한 진숙이 총후의 본래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시중공파, 어사공파, 예빈경파, 매호공파, 전농공파의 대파 5파를 기점으로 하는 상계(上系)를 시작으로, 이들에서 갈라져 나온 중계(中系), 다시 여기서 분파된 하계(下系)로 나누어진다.
1. 개요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인 진씨(陳氏) 중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진 본관. 2000년 통계청의 인구집계조사에서는 97,372명으로 조사되었고, 2015년 기준 110,403명으로 조사되었으나 여양진씨대종회 홈페이지의 게시글과 여기에서는 45만명이라고 쓰여있다.
본관인 여양(驪陽)은 고려 시대 청주(靑州)의 여양현(驪陽縣)을 말하며, 여양현은 현재의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일대에 걸쳐있었던 지역이다.
2. 시조와 연원
시조는 고려 예종(1106년 - 1122년) 때 고려 중앙군인 2군 6위 중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내고 인종 4년(1126년)에 이자겸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여양현을 식읍으로 받고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진 진총후(陳寵厚)이다[1] .
그의 아들인 진준(陳俊)은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하여 칭송받던 무신으로,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의종이 폐위되는 와중에 무신들이 문신들을 모두 죽이려 하자, "우리가 원한을 가진 자는 이복기, 한뢰 등 4, 5인에 불과한데, 이 많은 무고한 사람을 이같이 살해하고 가산을 몰수함은 부당한 일이므로 중지하라."고 하였다. 진준 덕분에 적지 않은 문신과 그들의 가족이 화를 피했는데, 이에 사람들이 "음덕(陰德)이 있으니 후손들이 반드시 창성한다."라 하였다고 《고려사》에 전한다. 그 말처럼 진준의 다섯 아들과 다섯 손자가 모두 요직에 올라 가문의 토대를 다졌고, 이에 자손들이 진총후를 시조로 하고 봉작을 받았던 여양현을 본관으로 삼은 것이 여양 진씨의 시초이다.
2.1. 진수 동래설
송나라 복주 사람이며 우윤을 지냈던 진수(陳琇)라는 사람이 외침을 피해 고려로 망명하여 여양현 덕양산 아래 터를 잡고 살았는데 진총후는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여양 진씨 대종회에서 발행한 여양진씨사적(驪陽陳氏史蹟)에는 진수가 송나라 휘종(서기 1100~1125년)대의 사람이고, 그 후손인 진총후는 서기 1100~1122년에 벼슬이 신호위대장군 겸 상장군에 이르렀다고 쓰여 있으며, 여양 진씨 대종회 홈페이지의 진씨 유래에는 진총후가 진수의 후손이라는 확증이 없으므로 후인들의 넓은 고찰을 바란다고 쓰여있다. 남아 있는 기록이니 그대로 전하는 것이고 전해 내려오는 말과 기록의 오류를 후인이 보고 고증할 수 있도록 놓아둔 모양이다. 애초에 소개에만 나올 뿐, 족보에는 진총후가 시조이며 진수는 나오지 않는다.
2.2. 토착성씨설
고려 초기에 이미 진(陳)이라는 성을 사용했던 사람들이 기록에 몇 명 있다. <고려사>를 찾아보면 태조 때 반역을 꾀하고 처형된 청주수(靑州帥) 진선(陳瑄)이 등장하며, 현종 때인 1014년에는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뒤에 겨우 돌아온 진적(陳頔)의 관작을 올려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진총후의 생존 당시에도 또다른 진씨 인물들이 나오는데, 1135년 묘청의 난에 진경보(陳景甫)와 진숙(陳淑)이 우군사 이주연(李周衍)의 부사(副使)가 되어 출정했다고 하며, 1140년에는 진경보를 상서우복야 겸 상장군에 임명했다는 기록이, 1151년에는 의종이 진숙의 죽음을 슬퍼하며 3일간 조회를 철회했다는 기록도 있다. 모두 여양진씨의 족보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로, 역시 진(陳)을 성으로 쓰는 한국의 다른 집안의 족보에도 등장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들인 진준은 사적에 기록이 뚜렷하나 진총후는 후손의 기록에 거론되는 것 외에 단독으로는 기록에 없어 진총후가 본명이 아니라 왕에게 총애받는자라는 뜻의 별칭 같은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여양진씨 예빈경파에서 연세대학교 양권승 교수에게 의뢰하여 연구한 결과 총후는 본래 이름이 아니라 왕이 하사한 이름이며 활동시기와 행적이 비슷한 진숙이 총후의 본래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3. 주요 분파
시중공파, 어사공파, 예빈경파, 매호공파, 전농공파의 대파 5파를 기점으로 하는 상계(上系)를 시작으로, 이들에서 갈라져 나온 중계(中系), 다시 여기서 분파된 하계(下系)로 나누어진다.
- 시중공파(侍中公派) : 진총후의 증손자로 문하시중을 지낸 진담(陳湛)을 파조로 한다.
- 어사공파(御史公派) : 시중 진담의 사촌 아우로 어사대부를 지낸 진식(陳湜)을 파조로 한다.
- 예빈경파(禮賓卿派) : 어사대부 진식의 아우로 예빈경을 지낸 진온(陳溫)을 파조로 한다.
- 매호공파(梅湖公派) : 어사대부 진식과 예빈경 진온의 아우인 지공주사(知公州事) 진화(陳澕)를 파조로 한다. 매호(梅湖)는 진화의 호이다.
- 전농공파(典農公派) : 시중 진담과 어사대부 진식의 사촌 아우로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지낸 진택(陳澤)을 파조로 한다.
4. 실존 인물
[1] 하지만 이 사람의 이름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 정사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아래에 서술된 아들 진준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