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칼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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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농구인으로, 단 한사람의 의지만으로 코네티컷 대학교를 듣보잡에서 전국구 강호로 바꿔놓은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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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보스턴 셀틱스에서 활약할 레지 루이스와 함께.
대학농구선수 출신으로 졸업 이후 고등학교팀 감독을 하다가 1972년에 노스이스턴 대학의 감독으로 선임되어 14년간 재직했다. 이후 코네티컷에서의 업적으로 인해 노스이스턴 시절은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지만 디비전1 소속 무명 학교인 노스이스턴을 NCAA 토너먼트에 5회 진출시키고 통산 245승 138패를 기록함과 동시에 훗날 NBA 스타가 되는 레지 루이스(1993년 작고)를 조련하는 등 이쪽에서의 업적도 대단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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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코네티컷 대학으로 옮기고, 4년만에 첫 NCAA 토너먼트 진출을 이룬다. 그의 등장과 프로스포츠팀의 부재로 인한 주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로 코네티컷 대학 농구는 단시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90년대 내내 코네티컷은 "그럭저럭 잘하지만 전국대회 8강 정도가 한계인 학교" 라는 이미지였으나 1999년 첫 파이널 포 진출과 함께 그당시 대학농구의 끝판왕 듀크 대학교를 결승에서 격퇴하고 첫 우승을 이루면서 명실상부한 전국구 강호로 자리매김했다.
2004년에는 지금도 대학농구 역사상 최강멤버 중 하나로 거론되는 에메카 오카포, 벤 고든, 조쉬 분, 찰리 빌라누에바, 마커스 윌리엄스의 팀으로 두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다. 그리고 같은 해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그리고 2011년에는 켐바 워커를 제외하고는 평범한 선수와 경험없는 1학년 밖에 없는 '''프리시즌에 탑25 랭킹조차 주어지지 않은 팀으로''' 시즌 막판 토너먼트 경기 11연승을 기록하며 세 번째 우승을 이룬다. 이 때의 업적으로 단순히 위대한 감독에서 한발 더 나아가 레전드의 반열에 올랐다는 평.
그러나 워커가 NBA로 떠난 후 치룬 2011-2012 시즌에는 얇은 선수층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NCAA 토너먼트 1라운드에서 조기 탈락당하는 수모를 당한다. 더군다나 개정된 NCAA 스포츠장학생 관리 규정에 따라, 농구팀 학생들의 학업성적 저조로 인해 코네티컷은 2012-2013 시즌 토너먼트 출전 불가라는 중징계를 당하게 되었고, 대학 농구 감독으로서 체육인이기 이전에 교직자인 칼훈 역시 여론의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2012년 9월 13일 70세의 나이로 40년의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고 은퇴를 선언하여 제자 케빈 올리 코치에게 인수인계한 후 야인으로 지내는 듯했지만, 2018년 웨스트 하트포드에 있는 디비전 3 대학 세인트 조셉대 농구부 감독으로 복귀했다.
감독으로서의 능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나 인성에 대해서는 평이 갈리는편. 선수들에게는 굉장히 엄한 지도자로 미국이라 빠따질만 안할 뿐이지 절대적인 복종과 헌신을 요구했다. 하지만 워낙 거물이고 본인부터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있어서 선수들은 싫은소리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연습시간에 아침일찍 나오라고 해서 짜증나도 감독님은 그 30분 전에 이미 나와 있는데 뭐라고 할 수 없는 식...
승리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정렬을 가졌고 동시에 자기주관이 무척 뚜렷해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과는 가차없이 대립했다. 결국 코네티컷 대학 농구부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게 되었고 심지어 대학 이사진 조차 그의 결정에는 간섭할 수 없엇다. 언론 대응에도 굉장히 적극적이어서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를 쓴 기자들에게는 직접 찾아가서 조목조목 따지는걸로 유명했다.
1. 소개
미국의 농구인으로, 단 한사람의 의지만으로 코네티컷 대학교를 듣보잡에서 전국구 강호로 바꿔놓은 장본인이다.
2. 커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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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보스턴 셀틱스에서 활약할 레지 루이스와 함께.
대학농구선수 출신으로 졸업 이후 고등학교팀 감독을 하다가 1972년에 노스이스턴 대학의 감독으로 선임되어 14년간 재직했다. 이후 코네티컷에서의 업적으로 인해 노스이스턴 시절은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지만 디비전1 소속 무명 학교인 노스이스턴을 NCAA 토너먼트에 5회 진출시키고 통산 245승 138패를 기록함과 동시에 훗날 NBA 스타가 되는 레지 루이스(1993년 작고)를 조련하는 등 이쪽에서의 업적도 대단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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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코네티컷 대학으로 옮기고, 4년만에 첫 NCAA 토너먼트 진출을 이룬다. 그의 등장과 프로스포츠팀의 부재로 인한 주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로 코네티컷 대학 농구는 단시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90년대 내내 코네티컷은 "그럭저럭 잘하지만 전국대회 8강 정도가 한계인 학교" 라는 이미지였으나 1999년 첫 파이널 포 진출과 함께 그당시 대학농구의 끝판왕 듀크 대학교를 결승에서 격퇴하고 첫 우승을 이루면서 명실상부한 전국구 강호로 자리매김했다.
2004년에는 지금도 대학농구 역사상 최강멤버 중 하나로 거론되는 에메카 오카포, 벤 고든, 조쉬 분, 찰리 빌라누에바, 마커스 윌리엄스의 팀으로 두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다. 그리고 같은 해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그리고 2011년에는 켐바 워커를 제외하고는 평범한 선수와 경험없는 1학년 밖에 없는 '''프리시즌에 탑25 랭킹조차 주어지지 않은 팀으로''' 시즌 막판 토너먼트 경기 11연승을 기록하며 세 번째 우승을 이룬다. 이 때의 업적으로 단순히 위대한 감독에서 한발 더 나아가 레전드의 반열에 올랐다는 평.
그러나 워커가 NBA로 떠난 후 치룬 2011-2012 시즌에는 얇은 선수층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NCAA 토너먼트 1라운드에서 조기 탈락당하는 수모를 당한다. 더군다나 개정된 NCAA 스포츠장학생 관리 규정에 따라, 농구팀 학생들의 학업성적 저조로 인해 코네티컷은 2012-2013 시즌 토너먼트 출전 불가라는 중징계를 당하게 되었고, 대학 농구 감독으로서 체육인이기 이전에 교직자인 칼훈 역시 여론의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2012년 9월 13일 70세의 나이로 40년의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고 은퇴를 선언하여 제자 케빈 올리 코치에게 인수인계한 후 야인으로 지내는 듯했지만, 2018년 웨스트 하트포드에 있는 디비전 3 대학 세인트 조셉대 농구부 감독으로 복귀했다.
3. 성격
감독으로서의 능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나 인성에 대해서는 평이 갈리는편. 선수들에게는 굉장히 엄한 지도자로 미국이라 빠따질만 안할 뿐이지 절대적인 복종과 헌신을 요구했다. 하지만 워낙 거물이고 본인부터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있어서 선수들은 싫은소리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연습시간에 아침일찍 나오라고 해서 짜증나도 감독님은 그 30분 전에 이미 나와 있는데 뭐라고 할 수 없는 식...
승리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정렬을 가졌고 동시에 자기주관이 무척 뚜렷해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과는 가차없이 대립했다. 결국 코네티컷 대학 농구부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게 되었고 심지어 대학 이사진 조차 그의 결정에는 간섭할 수 없엇다. 언론 대응에도 굉장히 적극적이어서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를 쓴 기자들에게는 직접 찾아가서 조목조목 따지는걸로 유명했다.
4. 기타
- 1986년 채용 직후 기자회견에서 기자가 반쯤 농담으로 "코네티컷이 언젠가는 전국구 강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라고 질문하자 "할수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 2000년대 들어서 건강이 상당히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직을 떠나지 않았다. 2003년에는 전립선암 선고를 받았으나 전립선 제거수술을 받고 단 16일만에 코트에 복귀했다. 2009년에는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갈비뼈 다섯개가 부러졌고, 2012년에 다시 자전거 사고로 왼쪽 골반에 골절상을 입었다. 2012년에는 척추관 협착증을 치료하기 위해 수술을 받았고 마찬가지로 수술 이후 10일만에 복귀했다. 환갑이 지난 노인이 이쯤되면 이미 인간이 아니다.
- 우승을 한 2003-2004년 시즌 당시 정규 리그에서 코네티컷 최고의 라이벌은 프로비던스 대학이었고, 그 프로비던스 대학을 이끌고 있었던 것은 바로 코네티컷 출신이었지만 칼훈의 선택을 받지 못한 라이언 곰즈라는 선수였다. 곰즈를 코네티컷으로 데려오지 않은 것에 대해 이미 언론에서는 칼훈 감독의 미스라는 이야기가 돌던 중, 결국 코네티컷이 2004년 1월 24일 곰즈의 맹활약으로 인해 프로비던스에게 패배하자 한 기자가 그에게 곰즈에 대해 질문하자 칼훈이 폭발했다.
문제의 기자는 당연히 데꿀멍내가 ㅅㅂ 살다살다 그런 병신같은 질문은 처음 듣는다. 벌서 1000번은 더 설명한거 같은데? 내가 ㅅㅂ 실수했다고. 내가 라이언 곰즈를 놓쳤어. 인정하니까 좋냐? 하나님 아버지... 그래 심지어 내가 18개월에 걸쳐서 프로비던스에 추천하기까지 했다. 벌써 기사에도 나왔잖아. (질문을 한 기자가 고개를 가로젓는걸 보고) 그딴 표정 짓지 마 임마! 니가 질문해서 내가 지금 솔직히 얘기해 주고 있잖아. 난 에메카 오카포와 캐런 버틀러를 대려왔어. 걔네도 잘하잖아. 우리도 체육장학생은 13명밖에 못뽑는데 모든 선수를 다 대려올 순 없다고. 결국은 내가 ㅅㅂ 실수했다는 소리가 듣고 싶은거지? 그래 실수했다. 그렇게 써. 그냥 내가 실수했다는 기사를 쓰고 싶은거 아냐? 다섯번째 말할께: 내가 ㅅㅂ 실수했다고. 그러니까 기사에도 다섯번 써.
- 2005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과 2006년 대학농구 명예의 전당에 각각 헌액됐다.
- 2009년 기준으로 코네티컷 주를 통틀어 가장 높은 급료를 받는 공무원이었다.[1]
[1] 주립대인 유콘의 농구 감독이니 일단은 공무원. 매년 260만달러, 우리돈으로 약 30억원 정도를 받았다. 보통 다른 주의 경우는 풋볼팀 헤드코치가 제일 많이 받지만, 코네티컷주에는 풋볼에 돈 많이 쓰는 대학교가 없고 유콘은 농구에 주력하는 대학교라서 짐 칼훈에게 큰 돈을 줄 수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