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윈성
1. 개요
봉천군벌의 일원, 만주사변 이후 일본에 투항하여 한간이 되었다.
2. 생애
1879년 길림성 쌍성구에서 출생했다. 보정법정학당을 졸업하고 벼슬길에 올라 봉천성, 흑룡강성의 행정직을 맡았다.
1916년 5월 흑룡강성 정무처 처장에 임명되어 1917년 11월까지 재직하였다. 1918년 길림성 실업청 청장 겸 길림성 관은처 총판, 중동철도 좌판 등을 맡았다. 1920년 6월, 길림성 길장도윤 서리를 맡아 1927년 5월까지 재직했다. 이후 빈강도윤으로 옮겼으며 북양정부 외교부 특별장춘교섭위원, 길림철도 교섭국 총판, 빈강시정경비처 처장을 맡았다. 이후 동북변방군 사령장관공서 참의, 동북정무위원회 위원 등을 맡았다.
1928년 봉소전쟁이 발발하자 장쉐량의 대표로 소련과 교섭하였으며 국민정부의 훈련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하바롭스크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일본에 투항하여 1934년 11월 간도성장에 임명되었다. 만주국 총리대신 정샤오쉬로부터 총리대신으로 천거받았으나 일본은 묵살하고 조종하기 쉬운 장징후이를 신임 총리로 임명하였다.
1936년 6월 중앙은행 부총재, 1938년 4월 만주국 외무국장, 1940년 만주국 경제부대신에 임명되었다. 1942년 9월, 참의부 참의에 임명됨으로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으나 일제의 패망 이후 소련에 체포되는 걸 피하기 위해 국민정부로 도주하여 베이핑에 정착하였다.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마잔산과 함께 푸쭤이를 설득하여 공산당에 투항하게 했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베이징시 문사연구관 관원에 임명되었으며 1959년 81세를 일기로 병환으로 사망하는 등 천수를 누렸다.
3. 참고문헌
- 서우춘, 『民國人物大辭典』(석가장: 하북인민출판사, 1991).
- 송한용, 「장학량과 중동로 사건」 『중국사연구』10(1)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