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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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노(亡國奴)[3]
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4]
'''국공내전'''은 1927년 8월부터 1950년 5월까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중국의 재건과 패권을 두고 벌인 '''내전'''이다.모든 반동파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2. 배경
2.1. 국공합작과 제1차 국공내전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1912년에 중화민국이 건국되고 청나라는 멸망했으나, 초대 대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는 중앙 정부를 장악하여 쑹자오런 암살 사건 등 정적을 암살하고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국회를 무시하고 차관을 빌려오는 등 독재 정치를 폈고, 이에 반발하던 국민당은 계축전쟁을 일으켜 2차 혁명에 나섰으나 2달 만에 진압당하고 말았다. 위안스카이는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감행하고 초급 총통제 실시로 황제적 지위를 누렸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단행함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차이어, 량치차오 등이 호국전쟁을 일으켜 맞섰고 전국 각지에서 이에 호응하면서 열강들도 지지를 철회하자, 위안스카이는 궁지에 몰려 제제를 취소하고 3달 만에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후임 대총통 리위안훙이 국회와 약법 회복을 선포하고 8월 1일 국회가 다시 열리면서 상황이 좀 진정되나 싶었는데 돤치루이의 독재로 호법전쟁이 발발하고 결국 중국은 군웅할거의 난세에 돌입했다. 쑨원은 이런 군벌 세력들을 정리하여 진정한 공화국을 세우려고 하였다.
한편 갓 건국되었고, 당시 서방 국가들에 의해 고립되어 있던 소련은 중국에 영향력을 확대하여 자신의 우방을 늘리려고 했다. 그래서 코민테른의 명령에 따라 공산당이 국민당에 협력하는 방침을 채택했고, 공산당원들은 당적을 가진 채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식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합작하게 되었다. 이것을 1차 국공합작이라고 한다. 국민당은 광둥성을 세력 기반으로 하고 있었지만, 당시 중국은 군웅할거 상태였다.
'''국민당은 소련의 원조로 군대를 양성하여 국민혁명에 나섰고, 공산당은 이에 협력하여 중국은 국민당의 주도하에 통일되는 듯 했다.''' 하지만 쑨원 생전부터 공산당과 국민당의 사이는 상당히 삐걱거렸다. 쑨원 본인부터 미하일 보로딘의 볼셰비키적 개혁에 대해서 중국엔 맞지 않는다고 거부했고 소련도 쑨원이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등, 국공 합작은 중국의 공산화라는 목표를 볼 때는 잠시 거치는 중간 단계에 불과했다. 그리고 국민당 내부에서 우파들은 숫자도 얼마 안 되는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을 잡아먹고 있다고 크게 불만스러워했으며 향신,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 군관이나 중산층 당원들도 공산당이 자신들의 사유 재산을 건드릴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쑨원 사후에 국민당이 노동지파[5] , 태자파[6] , 당권파[7] 로 갈라졌을 때도 가장 세력이 센 당권파 내부에서도 후한민의 우파와 왕징웨이의 좌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왕징웨이는 1925년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이후 장제스, 미하일 보로딘과 힘을 합쳐 후한민, 쉬충즈 등을 숙청했고 장제스와 함께 국민당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1926년 중산함 사건이 터지면서 장제스가 공산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키산카를 비롯하여 자신에게 적대적인 소련 고문들을 강제 귀국시킨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때까지 친소 용공파로 인식되던 장제스는 차차 우익으로 변해갔다.
중산함 사건에 충격을 받은 왕징웨이는 프랑스로 외유를 떠났고 국민당을 장악한 장제스는 1926년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군벌이 장악한 북양 정부를 토벌하기 위한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감행한다. 이후 국공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영왕운동, 천도논쟁 등이 잇달아 발생했다. 공산당은 왕징웨이 등의 국민당 좌파와 연합, 장제스를 군사 독재자로 비판하면서 북벌을 계기로 강성해진 장제스를 실각시키려고 했다. 특히 미하일 보로딘은 장제스의 국민당 상무 위원회 주석 자리를 폐지하고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의 권한을 축소시켰으며 급기야 4월에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면직시켰다. 이에 우파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결국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난징 정부를 수립하고 공산당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게 되었다.
왕징웨이의 우한 정부와 공산당의 관계는 여전히 유지되었으나, 이후 소련의 방침이 바뀌어서 갑자기 공산당에게 자체적인 무장 세력을 조직할 것이며 국민당 중앙 집행 위원회를 장악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코민테른은 왕징웨이에게 새로운 공산당 방침을 통보하며 이를 따르지 않으면 국민당을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통보했다. 그제서야 공산당의 목표가 국민당의 장악이라는 걸 알아차린 왕징웨이도 국공 합작의 파기를 선언했다. 중국 공산당은 합작을 파기하기 3일 전 선제적으로 합작 파기 선언을 하였다.
이때 공산당은 8.7 긴급회의로 천두슈를 몰아내고 취추바이, 리리싼 등의 지도를 받아 난창 폭동, 추수폭동, 광저우 폭동, 창사 폭동을 일으켜 중요 도시를 장악하려는 반격 작전을 펼쳤으나 모두 실패했고, 마오쩌둥, 주더, 장궈타오를 비롯한 유격대 지휘관들이 지휘하는 홍군이 정강산 해방구를 비롯하여 양쯔강 이남의 15군데에 달하는 소규모 해방구를 설립한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국민정부는 초공작전을 벌여가며 토벌을 감행하였다. 이후 상하이에 있던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이 이끌던 강서성 중앙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토지 개혁으로 농민들을 징집하면서 내전을 지속해나갔다. '''하지만 제3차 초공작전 이후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주석 마오쩌둥과 보구를 비롯한 상하이 임시 당 중앙의 노선 갈등이 심각해졌고 제4차 초공작전에 즈음하여서는 마오쩌둥이 결국 실각했다.'''
이후 오토 브라운과 소련 유학파가 혁명을 지휘했지만 1933년 시작된 장제스의 제5차 초공작전에서 공산당은 궤멸 위기에 몰렸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잔존 병력과 당원들을 재편하여 부대별로 해방구를 탈출하여 서부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국민혁명군과 각 지역 군벌과의 끊임없는 전투 속에서도 핵심 당원을 보존한 채 중국 북서부의 산시성 옌안에 도착하였는데 이것을 대장정이라고 부른다.
2.2. 중일전쟁과 제2차 국공합작
홍군이 괴멸되지 않고 서북부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자, 장제스는 만주사변 이후 본거지를 잃고 산시성에 주둔 중인 장쉐량의 동북 군벌에 토벌을 명하게 된다.[8] 장쉐량의 군대는 홍군을 공격했지만 참패했고, 중국인끼리 싸우기보다는 일본과 싸우자는 공산당 측의 선전에 설득되면서 비밀리에 홍군은 휴전 협정를 맺고 전투를 중단한다. 이것에 열받은 장제스가 장쉐량을 닥달하기 위해서 산시성으로 오자, 오히려 장쉐량은 장제스를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 중단 및 전면적인 항일 전쟁을 강요하는 이른바 '시안 사건'을 일으켰다. 결국 시안 사건의 여파로 '''침략자 일본에 맞서 싸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공산당의 홍군이 국민당의 국민혁명군의 지휘를 받는다는 형식으로 2차 국공 합작이 성립되었다.
1937년 일본 제국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장제스는 루산회의를 소집, 국민당의 모든 인물들은 물론 주더, 저우언라이, 펑더화이를 비롯한 공산당의 여러 주요 인물들까지 초청하여 루산성명을 발표함으로 항일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홍군을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편성하여 옌시산 휘하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도록 지시했다. 이후 홍군은 전쟁 초반에 옌시산과 협력하여 핑싱관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수차례 격퇴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옌시산의 영지인 산시성을 공격하여 타이위안을 점령하고 옌시산도 산시 남방으로 밀려나자 공산당은 옌시산과의 협력을 중단하고 독자적인 활동에 나섰는데, 이 독자적인 활동이란 다름아닌 세력 확장이었다. 마오쩌둥은 일본군과의 교전을 극도로 회피하는 것을 명령하는 한편, '''해방구를 건설하여 홍군 지배 영역을 늘리는데 치중했고 한 때 화북의 일본군 점령지 중에 일본군이 통제할 수 있는 지역이 10%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신멸작전으로 팔로군은 화북에서 약화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들은 국민당과의 협정 위반이었으며 엄연히 자신들이 상관으로 모시겠다고 자처한 국민당 상부의 모든 명령들을 무시한 처사였다. 이렇게 확장된 홍군 영역들은 대부분 국민당이 홍군에게 할당해줬던 영역 바깥이었다. 거기다가, 홍군은 '''국민당 유격대나 국민당 부대들을 필요에 따라 닥치는 대로 습격하기도 서슴지 않았고 국민당의 지방 정부를 소멸시키며 확장했다.'''
이 때문에 명목상 홍군의 상관인 옌시산은 물론이고 국민당 전체가 굉장히 열받았었고, 국민당 상부에서 수차례 "하라는 항일은 안하고 도대체 뭐하냐!" 라고 항의 전문을 보내기도 했지만 공산당은 그냥 씹어버렸다. 결국, 어그로가 오를 대로 오른 국민당과 공산당이 한번 대충돌했던 것이 '''환난 사변'''이었는데 이 이후로 국민당은 공산당에 대한 모든 원조를 중단하고 공산당은 국민 참정회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하는 등 실질적으로 국공합작이 깨지고 만다.
물론, 공산당 내부에서도 왕밍 등은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국민당과 계속 협력하여 항일 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공산당도 중국인이니만큼 조국을 침략한 일본군을 보고 분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펑더화이가 백단대전을 계획했을 때는 홍군 지휘관들이 앞을 다퉈서 자청했고 작전에 원래 포함되지 않은 부대들도 자발적으로 참가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백단대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피해는 미미했고 중국군의 피해는 컸기에 마오쩌둥은 백단대전이 전투를 회피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자신의 방침에 어긋난다고 심히 못마땅해했으며 자칫 패배하기라도 했으면 기껏 모아놓은 세력이 모두 다 날아갈 판이었다고 버럭대는 바람에 그 이후론 공산당은 변변한 전투 기록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마오쩌둥의 선택이 옳았고 결국은 세력을 키운 덕분에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3. 전개
3.1. 제2차 국공내전 발발
제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후, 공산당과 국민당 정부간의 회담이 열리는데, 1945년 8월 화평교섭회담(和平交涉會談)이 개최되고 같은 해 10월 쌍십협정(雙十協定)을 발표, 정치의 민주화와 함께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부강한 중국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뜻을 같이하고 의견을 도출해내었다. 참고로 쌍십협정이란 十월(10월) 十일(10일)에 협정이 발표되었다고 해서 쌍십 협정이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러한 협정을 이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국민당 역시 공산당이 복종하는 형식을 고집했기에 협상은 실질적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중원의 진정한 주인은 단 한 명만이 될 수 있었고, 이제는 그 최강자를 가려내야만 했다. 쌍십 협정이 벌어지고 있던 그 순간에서도 산시성 상당 지구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그 밖에도 허베이, 만주 일대에서 일본군이 물러나고 무주공산이 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게다가, 이 쌍십협정에서도 양자 모두 상대방을 거꾸러뜨릴 궁리만 하고 있느라 국공합작이 이뤄진다면 필요한 실무적 협상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채 뜬구름이나 잡는 소리에만 합의가 이뤄졌고, 공산당은 화북 5개의 성과 독자적 군대 보유를 끝까지 고집함으로서 공산당 자신들의 세력이 국민당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장제스는 1946년 3월 미국 국무장관 마셜이 방문하여 정전협정을 주선하고 귀국하기가 무섭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국민당 지배 영역 내부의 철로와 각종 요충지를 장악한 공산당을 완전히 몰아내지도 않고 무리한 공격이 가해짐으로써 안정되지 않은 후방을 짊어지고 싸우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만주에서 대패하고 난 뒤 항복과 투항 릴레이를 통해서 보여진다. 당시 홍군은 숫자는 100여만으로 크게 불어나긴 했지만 중화기가 부족해 장제스가 작정하고 공격하면 불리한 상황이었는데 이때 소련의 협조로 만주의 일본군 무기들을 대량으로 공여받아 무장을 몇 배로 강화했다.
결국 1946년 6월 장제스가 허베이 지역의 해방구에 공세를 명령하면서 내전이 재개된다. 초반에 국민혁명군은 상당히 선전하면서 사평 전투에서 홍군을 섬멸하였고 후쭝난은 산시의 옌안을, 바이충시는 만주를 맹공하여 창춘, 지린을 잇따라 점령하고 하얼빈까지 치고 올라갔다. 이에 6월 6일, 린뱌오가 하얼빈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상부에 건의하고 있었을 정도로 공산당에게 초기 상황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공산당은 미국의 로비#s-2와 국민당이 정전협정을 어겼다고 하소연을 했고 이에 미국은 이 이상의 진격을 하면 원조를 중단할 수 밖에 없다는 경고를 내렸고 물주인 미국의 말을 어길 수가 없었던 장제스는 깨갱하면서 바이충시에게 휴전을 명령했다. 바이충시는 난징까지 날아와서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했지만 장제스는 바이충시를 군정부장에 임명하여 내전에서 발을 빼도록 했다. 그리고, 미국이 벌어다준 이 소중한 시간 동안 공산당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정비하면서 대책없이 자신의 영역 내부 깊숙히 들어온 국민당을 타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사실 여기까지 보면 공산당이 밀리는 것 같지만, 이러한 교전 대부분은 홍군의 주력부대와의 교전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때문에 국민혁명군의 병력 밀도는 느슨해진 방면 홍군의 밀도는 오히려 높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의 정치, 군사적인 도움[9] 으로 인해서 전열을 가다듬은 공산당은 만주, 허베이, 그리고 양쯔강 중류에서 대규모의 군사 행동을 벌인다. 이러한 행동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만주에서 완전히 철수하거나[10] 만주에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야 했지만 둘 다 국민당의 역량을 완전히 벗어난 일이었다. 결국 국민당은 화중의 해방구를 토벌함과 동시에 공산당을 협상에 나오도록 독촉하기 위해 1947년 3월 옌안을 공격하지만 공산당 핵심 당 세포와 군대는 첩보를 입수하고 탈출한 뒤였다. 국민당은 이것을 대규모로 홍보했지만 공허한 승리였고, 이것은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거둔 최후의 대규모 승리였다.
3.2. 인민해방군의 편제
1948년 당시 홍군은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여 다음과 같은 편제를 갖추었다.
- 시베이 야전군(제1야전군) - 펑더화이 사령관, 시중쉰[11] 정치 장교
산시성, 간쑤성 방면
- 중원 야전군(제2야전군) - 류보청 사령관, 덩샤오핑 정치 장교
산둥성, 허난성 방면
- 화둥 야전군(제3야전군) - 천이 사령관(정치 장교 겸직)
양쯔강 이남 방면
- 둥베이 야전군(제4야전군) - 린뱌오 사령관, 뤄룽환 정치 장교
만주 방면
- 화베이 야전군 - 녜룽전 사령관, 보이보[12] 정치 장교
산시성, 허베이성 방면
참고로, 각 야전군 사령관들은 1955년 계급이 도입되었을 때 모두 원수 계급으로 진급한다.3.3. 요심 전역
결국 공산당을 섬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국민당이 진격을 멈추고 딱 먹기 좋은 표적으로 전환되자 처음엔 정신없이 밀리던 홍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보급에 애로사항이 꽃피던 국민혁명군에 대한 총반격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1947년 하반기부터 전략적으로 공세로 전환한 공산당은 1948년 초에 이르어 만주의 99%와 허베이의 대부분을 장악한다.[13] 린뱌오는 1948년 봄부터 공세로 전환, 2월에 요양과 영구를 함락시켰고 3월 14일에 사평가, 3월 19일에 영길을 점령했다. 이 시점에서 만주에서 군대를 대규모로 철수할 방법은 사라진 상황이었고 결국 장제스는 해당 구역을 요새화하여 싸운다는 방침을 내렸다. 하지만 빈곤한 보급과 내부 공산분자들의 공작으로 50만이 넘는 최정예 군대가 인민해방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 군대는 미군이 훈련시키고 미제 무기로 무장한 장제스의 최신식 정예 부대와 중앙군 부대들이 섞인, 장제스의 핵심 전력들이었다. 장제스는 10월 8일 직접 선양시로 날아와서 전투를 독려하고 관내의 병력을 빼내어 증원을 시도했지만 인민해방군은 보급 부족에 시달리는 국민당군을 어김없이 격파했다.
국민당이 위처럼 공산당에 몰리는 과정에서 국민당 계열 중국인들이 조선인을 많이 학살했는데 만주 조선인들의 친일 행적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으로 일부 조선인들은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고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국에서 중국인들의 영토를 분배받는 등 일본군의 침략행위와 관련이 있던 탓에 중국인과 국민당의 증오가 상당했다. 이런 친일 부역에 대한 분노가 국공내전을 통해 표출됐다.[윤휘탁,2012] 국민당이 조선인을 학살한 건 비판거리지만 문제는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 제국에 부역한 게 사실이라 한국에서도 제대로 문제 삼지는 못 한다. 그리고 한국에선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무조건 피해자라고 가르쳤는데 만주국 시절 부역행위 때문에 중국인들이 증오해서 보복 학살했다고 하면 국민들에게 혼란을 주는 점도 있을 것이다.[14]
1948년 10월 9일 인민해방군 둥베이야전군이 린뱌오의 지휘 하에 25만 명의 병력으로 1948년 9월 7일 금주를 공격해 점령했고 창춘도 완전히 포위되었다. 린뱌오는 창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 것을 지시, 창춘을 포위하여 굶겨 죽인다는 작전을 강구했고 10만 명의 국민당군과 50만 창춘 시민들은 쫄쫄 굶다 16만 명이 아사하는 참혹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결국 장제스는 창춘을 포기하고 포위망을 뚫어 선양으로 철수하란 지시를 내렸으나 창춘을 사수하던 국민당군 60군 사령관 증택생이 반란을 일으킴으로 무산되었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그럴 역량이 있었는지는 별개로 치더라도 말이다. 1948년 10월 17일 증택생의 반란에 이어 둥베이 지역의 소공 작전의 총책임자인 정동국 중장마저도 10월 21일에 공산당에 투항하면서 창춘은 완전히 공산당에 넘어갔고 인민해방군은 의기양양하게 창춘에 입성했다. 곧이어 선양까지 함락됨에 따라 11월 즈음에 국민당은 만주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린뱌오는 관내로 진출, 녜룽전, 허룽과 합세하여 화베이 공격에 가담했는데 요심 전역이라 불리는 5개월 간의 전투 끝에 장제스는 만주는 물론 수십만의 정예 병력과 막대한 물자를 잃었다. 이 와중에 장징궈가 야심차게 시도한 화폐개혁마저 실패하면서 국민당은 더욱 나락으로 몰렸다.
하지만 인민해방군이 민심을 바탕으로 이겼다는 공산당 선전과 달리 공산당은 창춘에서 국민당을 이기기 위해 수십만의 무고한 민간인의 죽음을 야기했고 창춘을 탈출하는 민간인들을 대대적으로 사살했다. 린뱌오조차도 그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마오쩌둥에게 전략의 수정을 요청하였으며 마오쩌둥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9월 11일 마오쩌둥의 허가 없이 창춘의 민간인들을 석방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마오쩌둥은 이 명령을 취소시켰다. 또한 16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강제로 징용되었고 80만 명의 전투원 또한 징병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강압적이었음은 당연했고 공산당은 협조하지 않는 민간인들에 대해 잔혹하게 보복했다.
요심 전역의 참혹한 패배와 경제개혁의 대실패가 겹쳐서 민심 이반이 심각해지자, 11월 26일 중화민국의 첫 헌정 내각이었던 웡원하오 내각이 총사퇴하였고 장제스의 리더십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3.4. 회해 전역
다음은 제남 전역에서 승리한 인민해방군의 서주 공략이었다. 인민해방군은 화둥 야전군과 중원 야전군 소속 32개군 등 도합 60만 대군으로 공세에 돌입했다. 이에 맞선 중화민국 국군도 60만이었지만 이들은 제남 전역의 패배와 사기 낮은 군벌군들의 혼재로 인하여 불안정했다. 사령관 유치는 수세적인 전략을 추구했으나 59군과 77군의 반란으로 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인민해방군은 서주의 핵심 교통로인 농해 철도를 장악하고 황백도가 지휘하는 제7병단을 포위했다. 구정천의 2병단과 이미의 11병단이 구원하려 했으나 인민해방군에게 제지되었고 구정천은 황백도랑 사이도 나빴던지라 11월 22일에 있었던 7병단의 전멸과 황백도의 전사를 수수방관했다. 상황이 이런 모양이니 일사분란한 인민해방군의 공세에 국군이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7병단의 패배로 중화민국 국군 18개 사단이 전멸했고 서주의 국민당군은 남북으로 갈려 고립되었다. 이 상황에서 장제스는 서주의 요충지 숙현을 탈환하여 진포 철로를 다시 개통한 다음에 서주의 병력을 철수시켜 난징의 방어를 강화하려 했으나 인민해방군의 손바닥 위에 있었던 중화민국 국군 12병단이 또 인민해방군의 공세에 포위되었다.[15] 결국 장제스는 두위밍에게 서주 포기를 명령했으나 마오쩌둥은 즉각 퇴각하는 두위밍을 습격, 두위밍 휘하 30만 병력을 포위해버렸다. 12월 15일 12병단이 전멸했고 17병단도 역시 전멸했다. 1949년 1월 6일 총공세로 두위밍 역시 패배, 30만 병력이 증발했으며 두위밍은 1월 10일에 포로로 사로잡혀 전향하게 된다. 국민당군은 이 전투에서 또 55만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다. 회해 전역의 패배는 정면 대결에서조차 국민당이 공산당에 밀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국민당 내의 분열로 총통직에서 물러나고 리쭝런이 총통 대리에 취임한다.
이 시점에 이르러 장제스의 비서 천부레이가 1948년 11월 난징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결하고 장제스의 맹우인 다이지타오도 1949년 2월에 광저우에서 자결했다.
3.5. 평진 전역
당연하지만 승기를 잡은 마오쩌둥은 만주에서 만족하지 않고 즉각 남진을 개시했다. 이미 요심 전역이 끝나기 전부터 산둥 반도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어 9월 23일 성도 제남이 인민해방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1948년 11월부터 중원 야전군이 회해 전역에 돌입, 두위밍에 맞섰다. 두위밍은 인민해방군을 이기지 못하고 참패했고 이러한 패배의 배경엔 장제스의 무리한 간섭과 병크들이 있었다. 이어 평진 전역에서 국민당군은 참패했고 압도적인 병력으로 베이징을 포위한 린뱌오의 부대는 중화민국 국군 수비 사령관 푸쭤이를 설득하여 무혈 입성했다. (평진 전역) 장제스는 푸줘이에게 독전 편지를 보내는 등, 사수할 것을 권했으나, 푸줘이는 공산당원이었던 딸의 설득으로 시를 공산당에 무혈로 넘겼다. 장제스는 중앙군이라도 빼려 했으나 푸줘이의 비협조로 인해 그것도 실패했다. 다만, 무혈로 넘기는 항복 조건으로 공산당은 베이핑을 수비하던 국민당군이 철수할 수 있도록 포위망을 열어주었다. 이 덕분에 베이핑 시내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항복 회담장에서 푸쭤이가 한 말은 한마디, "나에겐 죄가 있습니다(我有罪)."였다고 한다 항복을 결정한 뒤, 참으로 복잡한 심경에서 나온 말인 듯 하다. 공산당도 이를 감안해서인지 이후 푸쭤이는 중국의 수리부(水利部) 장관을 20년간 역임하는 등 편히 지낼 수 있었다.
여하튼 베이징의 함락으로 인민해방군은 화베이 일대를 확실하게 장악하게 된다. 어차피 푸쭤이가 베이핑에서 농성을 했던들, 보급이 단절되고 완전히 포위된 중화민국 국군 수비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으며, 인민해방군의 진격을 몇 주 늦췄을 뿐이며, 어차피 결과는 국민당이 완전히 참패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민정부는 150만이 넘는 병력을 상실했다.
3.6. 옌시산의 몰락
한편 40여년 간 산시성을 지배하며 사실상의 왕으로 군림하여 온 옌시산은, 군벌들 중에서는 예외적으로 강한 전투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 의지와 전투 능력이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서 이미 1947년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 과정에서 옌시산은 인민해방군에 참패했고 베이핑이 함락되자 인민해방군의 정면 공격에 노출되어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48년 9월 28일 녜룽전이 산시성 침공을 개시했고 옌시산은 8만 명의 병력으로 맞섰지만 잇달아 참패하고 포위되기에 이르렀다. 옌시산은 투항한 일본군과 후쭝난이 공수해준 지원군을 동원하여 치열하게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고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옌시산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여서 반란을 일으킨 부하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공산당 간첩들도 모조리 색출해 목을 매달아버린 다음에 타이위안 전체를 폭파시킬 준비까지하는 악독한 각오로 치열하게 맞서 싸웠다. 옌시산의 처절한 저항에 녜룽전은 타이위안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인민해방군의 초점이 베이핑 함락에 집중되면서 옌시산은 잠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베이핑이 함락되자 옌시산은 엄청난 대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물자도 병력도 부족했던 옌시산은 1949년 2월 난징으로 가서 리쭝런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리쭝런도 딱히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인민해방군의 공세로 옌시산은 산시성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옌시산의 부하 왕징궈는 공산당의 전향 제안을 거부하고 끝까지 맞섰으나 인민해방군의 대공세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고 4월 24일 타이위안이 함락됨에 따라서 산시성도 무너졌다. 이제 후쭝난, 바이충시 정도를 제외하면 국민당이 믿을 수 있는 병력은 없다시피 했다. 한편 난징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옌시산은 행정원장 겸 국방장관에 임명되지만 결국 장제스를 따라 대만으로 달아나는 처지가 된다.
3.7. 양쯔강 도하
이후 인민해방군은 계속 남진하면서 양쯔강에 이르게 되었다. 양쯔강은 천연의 장벽이었기 때문에, 국민당은 이를 경계로 재기를 할려고 했다. 리쭝런이 공산당과 협상을 벌였지만, 공산당은 자신들이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협상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16]
공산당은 내전을 일으킨 전범으로서 장제스 외 48명을 체포할 것, 헌법을 폐기할 것 등의 8가지 조건을 내걸었지만 말이 좋아서 조건이지 사실상의 무조건 항복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조건에 반발한 국민당 정부는 협상을 거부하고 국민당 협상단은 결국 아예 공산당 측으로 전향한다. 인민해방군의 도하 작전이 시작되자 국군 일부가 배신하여 인민해방군으로 넘어가 역으로 아군에게 총을 돌리는 상황이 일어났고, 결국, 양쯔강 방어선이 뚫리자 4월 23일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이 함락되고난징의 총통부에는 홍기가 내걸렸다. (양쯔강 도하 작전)
3.8. 상하이 함락
이후 인민해방군은 상하이로 진격했고, 장제스는 중국 경제의 중심지이자 최대 연안 도시인 상하이를 사수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으나, 역시 간단히 함락되었다. 난징에서 참패하고 패주한 국민 정부는 광저우로 퇴각했다가, 10월 14일 광저우마저 함락되자 중일전쟁 당시 임시 수도였던 충칭으로 다시 퇴각한다.
4. 결과
4.1.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49년 10월 1일,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10월 14일 광저우를 점령하고, 11월 30일 중화민국의 임시 수도 충칭을 함락시켰다. 국민당이 새로 피신한 청두까지 12월 27일에 점령 당하고, 공산당이 대륙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4.2. 국민당의 대만 이동과 이후 계속된 교전
대륙을 잃은 장제스의 국민당은 대만으로 거처를 옮긴다. 자세한 것은 국부천대 참조.
국민당의 마지막 대륙 수도였던 청두까지 함락시킨 이후 중국 공산당은 아직까지 내륙 곳곳에서 저항중인 국민당군 잔당과 해안의 섬들을 점거하여 해상 봉쇄 중인 국민당군 소탕 작전에 나선다. 그 결과 쓰촨, 후난, 구이저우, 시캉, 윈난, 광시, 광둥 일대에서 저항중이던 국민당군 잔당을 1952년까지 완전 소탕하였다. 또한 어선을 징발한 대규모 상륙전을 여러 차례 감행해 1955년까지 대만을 제외한 국민당군 최대 거점이던 하이난 섬을 비롯해 저우산 군도, 완산 군도, 난아오 섬, 둥산 섬, 난펑 섬, 다천 군도 등 아직까지 국민당이 점거 중이던 대륙 근해의 여러 도서 지역 거점들을 수중에 넣었다. 한편 공산당은 신장과 칭하이 등 서북 지역에서 저항을 이어나가는 국민당계 회족 , 위구르족 군벌들에 대해서도 소탕 작전에 나서 1958년까지 완전 소탕하였다.
대륙에서 국민당 잔당이 대부분 정리된 이후 공산당은 마지막으로 남은 국민당 지역인 대만 공격을 몇 차례 검토하지만 이후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을 지원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하게 되었다. 북한이냐 대만이냐에서, 미 함대를 뚫을 방법이 없어 북한을 택한 것. 그래도 대만 공격에 대해 미련을 못 버린 공산당은 1958년 진먼 포격전으로 한번 시도를 해보았으나 국민당의 강력한 저항에 결국 포기한다. 이후 양안의 형세가 교전 없이 안정화되면서 내전은 이로서 사실상 종결된다.
5. 원인
5.1. 국민당의 패배 원인
국공내전의 흥미로운 점은 승리한 공산당은 물론이고, 패배한 국민당에서조차도 참패의 원인과 문제점을 국민당 내부에서 찾는다는 것에 있다. 즉, 국민당은 처음부터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무리한 내전을 벌였기에 참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이들은 전쟁의 승리보다 미국에서 얼마나 지원을 받을지에 대한 관심밖에 없다.'''
1948년 말, 어느 미국 고문단의 독백
5.1.1. 심각한 경제 파탄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1933년 폐량개원 개혁으로 화폐를 은화로 통일한 후 각 지방마다 군벌들이 마구 남발하는 화폐를 1935년 법폐개혁을 통해 법정 화폐로 통일하고, 은본위제를 폐지했으며, 농촌 진흥 운동과 공업화 정책을 통해 강소, 절강, 안휘성 일대에서 빠른 경제 성장이란 업적을 남겼다. 이는 십년 건설, 황금 10년이라 부를 정도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과실들은 중일전쟁을 통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수운, 철도, 도로를 비롯한 국내 수송망이 거의 다 붕괴되었고 해외와 교류할 창구도 잃어버렸으며 주 수입원인 농장, 세관 등도 상당수 상실하여 재정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거기에 전면전은 여전히 진행 중인 상태여서 막대한 양의 물자가 필요했는데 수입은 터무니없이 줄어버린 상태인데 반해서 일본군 점령지에서 5천만 ~ 9천만에 달하는 피난민이 내륙으로 몰려오면서 물자 수요는 훨씬 올라갔는데 공급은 바닥을 치는 상황에 치달았다. 그러니 인플레이션의 발생은 어찌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중일전쟁이 끝난 뒤에 국민당 정권은 경제 재건을 추진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고 민심이반이 나타나고 있었다. 거기에 2차 국공내전이 터지면서 사회 혼란과 경제 붕괴를 더욱 가중시되었고, 인플레이션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웡원하오 내각은 1948년 8월,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을 결정하였고 장징궈를 경제중심지 상하이로 파견, 물가통제와 화폐개혁을 포함한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소련 유학파 출신인 장징궈는 절강 재벌들의 매점매석을 초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가혹한 자본가 탄압에 들어갔지만, 상하이 시장 우궈전 등 친미 자유주의자들의 반발만 사면서 경제 개혁은 참혹하게 실패했다.
사실 1940년대 후반의 화폐 개혁은 국공내전 전비로 인한 재정 적자와 인플레이션을 만회해보려고 단행한 것인데, 이것이 실패하면서 오히려 인플레이션이 더욱 심화된다. 그리고 이것이 국민당의 지지 기반인 양쯔강 삼각주의 중산층들의 재산을 모조리 날려버리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다.
5.1.2. 조지 마셜의 중재
중일 전쟁이 끝난 이후 다시 벌어진 내전에서 국민당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으나 미국의 조지 마셜의 중재 간섭으로 봄, 여름에 2차례에 걸쳐서 휴전이 선포됐다. 이 휴전은 공산당의 승리를 굳히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줬다. 만주를 점령한 소련은 일본군이 두고 간 엄청난 물자들을 모조리 중국공산당에 넘겨주었는데, 이것이 대략 소총 70만 정, 기관포 1만 4000정 , 탱크 700대에 달한다. 당연히 이 군수품들은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국민당에 맞서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하였다.[18]
물론 태평양 전쟁이 끝난 이후 남겨진 미군의 잉여 무기들의 대부분은 국민당군에게 지원되었다. 국민당군의 장성들조차도 무기의 부족이 국공내전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고 있다고 로이드 이스트만이 쓴 "장제스는 왜 패하였는가"에 언급되어 있다. 다만, 국민당의 장비나 운용비, 특히 유류가 모두 미국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중재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5.1.3. 전략적 실책
전쟁 초기 국민정부는 43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에 비해서 중국 공산당은 127만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내전 초기에는 국민 정부가 우세를 점했지만 국민정부는 합법 정부라는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점령지, 특히 중요 도시를 무리하게 고수하는 정책을 펼쳤고 유격전을 벌이는 홍군의 주력을 섬멸하는 데도 실패하였다. 이에 홍군은 국민혁명군의 수비가 취약한 만주, 허베이 지역의 주요 교통로를 확보한 뒤에 반격에 나섰다.
국민혁명군은 주요 대도시에서 보급이 차단된 채 중장비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창춘에 고립돼서 정예병력을 허무하게 잃은게 대표적이다. [19]
거기다 국민혁명군은 말이 정부군이지 장제스 직할의 중앙군과 군벌이 혼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일적인 작전이 힘들었다.[20] 군벌들은 개개인의 관계에 연연하는 사적인 면이 강했기 자기들 멋대로 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장제스의 명령도 거부하는 등 막장 행태를 보여주었다.
5.1.4. 공산당의 농촌 토지개혁
중국 공산당은 소작농, 빈농이나 이주민, 부랑자들을 선동한 폭력적인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를 살해하거나 토지를 강제로 배분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정부가 해당 지역을 재장악할 경우에 살아남은 지주, 향신, 부농들 또는 그 유가족이 보복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라도 공산당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농지가 어쨌든 늘긴 늘었기 때문에 큰 저항은 하지 않았다. 일종의 공범이 된 것이다. 지역상황마다 다른 대응을 한 것이다. 다만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자신들이 승리한 원인 중 하나를 토지 개혁에서 찾는 것과 달리 일본 지배를 거쳐 지주체제가 된 한국처럼 소작농이 대다수는 아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한국만큼 공산당이나 사회주의가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21] 이승만 정권이 장제스의 실패 이유를 분석한 것도 그 이유. 그것 때문에 한국이 공산화되는 건 방지할 수 있었다.
5.1.5. 심리전의 실패
국민혁명군의 대부분은 서남 지역에서 강제로 징병된 군대였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국공내전이 공산당을 토벌하는 작전이 아니라 같은 민족끼리의 분쟁이 되었기 때문에 전투에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공산당은 그들을 통한 심리전을 통해 수많은 부대를 회유, 투항시키는데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이에 비해서 중국 공산당은 내전이 시작하기 전부터 공산군답게 정치장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원년 멤버들이야 당연히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하니 들어온 것이고, 신병들 역시 정치 장교들의 정훈교육으로 정신 무장을 배양할 수 있어 전투 부대들에게 이런 사기 저하를 방지할 수 있었다.
5.1.6. 내부의 부정부패
미국은 국공내전 기간동안 19억 달러[23] 에 달하는 지원금을 지원했지만 그중 40% ~ 50% 이상을 부패로 상실하였고 그중 절대 다수가 공산당에게 흘러갔다. 그 결과 미국에 있는 국민정부 인사의 일부는 장제스를 향한 미국의 지원을 끊어야한다고 요구할 정도였다.'''"이런 군대가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 군사 고문단[22]
미 고문단의 보고에 따르면 부패한 국민당 장군들이 물자와 군자금을 횡령하여 최전선에 싸우는 병사들에게는 색소를 탄 가짜 약과 개돼지도 못 먹는 썩은 쌀이나 모래를 섞은 군량미만 지금되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거나 아사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고 굶주림과 질병에 지친 정부군 병사들이 약탈을 일삼아 민심이반을 가져오는 등 최악의 사태를 가져왔고 이는 공산당에 대한 지지세력만 강화 되었다. 심지어 미국이 지원해준 군사장비도 공산세력에 팔아넘기는 등 중공군의 무장만 강화시켰다. 오죽하면 6.25전쟁 당시 미국장비로 무장한 중공군을 한국군으로 착각했다가 큰 피해를 보는 사태까지도 초래했다.
장제스도 국민당 내부의 부정부패를 알고 있었으나 당시 군벌 연합체였던 국민당군 내부분열을 막기위해 이를 방치하였다.
'''5.16 군사정변의 핵심멤버이자 극우단체에서 활동하는''' 장경순도 자기가 학도병으로 끌려갔을때 국부군은 부자집을 약탈했는데 모택동의 팔로군은 그러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5.1.7. 중일전쟁의 피해
중일 전쟁 당시 중국을 지배하며 일본 제국에게 맞서 싸우다 300만 ~ 1000만의 사상자와 132만의 사망자를 낸 국민당과 달리 50만의 사상자도 내지 않은 공산군의 피해는 당연히 체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이치고 작전으로 수많은 정예 사단과 부대들이 날아간 것도 결정적이다. 물론 일본 제국의 항복 이후에도 국민당군이 우위였던 건 변함 없지만 일본 제국과 피터지게 싸워 승리를 얻어낸 국민당과 달리 세력 확장을 한 공산군과의 간격은 많이 좁혀진 상태였다. 당장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된다. 당시 국민당에게 공산군은 언제든지 쓸어버릴 수 있는 상대였고 실제로 일본 제국도 국민당을 강대한 적으로 인식하고 대적했지 공산당은 비적 취급 당한 것만 봐도... 실제로 중일전쟁으로 국민당군이 본 피해는 공산당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5.2. 공산국가의 지원과 미국의 소극적 태도
소련과 몽골은 만주를 통해 중국 공산당에게 대규모의 군수물자를 후원하고 있었고 국민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만주로 진공했으나 위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전략적 차원에서의 실패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또한 북한의 김일성 정권과 소련군정 또한 물자 지원, 부상자 치료, 무역 등을 통해 중국 공산당을 도왔다.[24] 그러나 미국은 중일전쟁 기간 동안의 국민 정부의 무능함에 실망해 추가 지원에 회의적이었고 여기에 공산당에 대한 막연한 환상[25] 에 쩔어 있었고 그리스 내전까지 터지면서 중국에만 관심을 쏟을 수 없게 되었다.
6. 의의
6.1. 아시아 공산 블록의 대확대
한국사에도 국공내전의 의의는 크다. 공산당의 승리가 없었다면 김일성의 이북정권이 6.25 전쟁을 일으킬 국력을 갖출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장제스의 자유중국과 이승만의 대한민국에 의해 남북으로 포위되며 이북정권은 자멸했을 가능성이 크다.[26]
설령 국민당이 대륙에서 패망하지 않고[27] 남북으로 분단되었다면 6.25 전쟁 시기에 국민당과 대치함에 따라 공산당이 인민해방군을 한반도로 파병할 수 없었을 것이다. 2차 국공내전 재개 이전부터 한반도는 분할되어 38선이 그어진 상태였고, 김일성은 그 때부터 이미 무력 통일을 꿈꾸고 있었는데 그 배후에는 중공보다 소련이 더욱 큰 영향력 행사를 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에게 김일성은 매번 남침을 주장하며 징징거렸으나 스탈린은 국공내전이 끝날 때까지 그 주장을 묵살했다. 한편, 북한은 소련이 기획했던 대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간도와 동만주 ~ 남만주 일대를 흡수하려고 했다. 이 사건 역시 북한에게는 체제 대립에서 정통성을 과시하려고 무력 통일을 기도할 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2차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이런 균형은 무너지게 되었다. 북한의 건국 주역들은 보천보 전투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중국 공산당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으며 북한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국공내전 기간 중 대놓고 중국 공산당을 지원한 바가 있다. 그래서 국공내전을 통해서 조선인민군의 전투 경험은 더욱 풍부해졌고, 국공내전이 종식된 이후 인민해방군 출신의 164 ~ 166 3개 사단이 입북하게 되면서 1949년 5만에 불과했던 북한군의 숫자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
결국, 국공내전의 승리는 애치슨 라인 뒷편에 있는 한국을 침공하는데 전혀 두려울 것도 없는 무소불위의 상황처럼 인식했고 김일성이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나도 인민군을 이끌고 이승만이랑 한판 붙으면 충분히 적화통일 가능할 것 같은데?"'''라고 오판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스탈린이 배후에서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한 것도 역시 문제가 심각해질 경우 꿩먹고 알먹고 격으로 한반도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국공내전은 베트남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중국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이후인 1950년 1월에 소련보다도 먼저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승인하였고,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호찌민 덕분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베트민은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호찌민은 류사오치와 긴밀한 관계였는데, 이 관계는 1969년 두 사람이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 이에 프랑스도 중국 공산당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국공내전 시기에 국민당을 적극 후원하지 않았다. 1949년 12월 인민해방군이 중월 국경 지역까지 장악하자 국민당군이 후퇴해서 베트남으로 들어왔는데, 프랑스는 인민해방군의 베트남 진입을 우려해서 이들을 무장 해제시켰다. # # 이처럼 중국의 지원 덕분에 베트남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6.2. 구 체제의 청산과 현대 동아시아 체제의 완성
한국과 중국 양국에서 모두 전쟁 이후로 구 체제가 완전히 청산되고, 현대의 국민 국가를 건국하게 되었다. 전쟁 초반 내전의 성격을 어느 정도 가미하고 있었던 6.25 전쟁과 국공내전이 최후에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두 국가(남북한, 중화 인민 공화국 / 중화민국)의 국민을 확실하게 구분지었고, 따라서 분단과 국민 국가를 완성했다. 이는 아시아에서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1950년대부터 현대로 취급하는 이유이다. 장제스 치하의 중국(더불어 일제 시대의 한반도)은 제대로 된 근대 국가가 아니었다는 견해다.[28]
그러나 급격한 동아시아 공산권 블록 확장에 깜놀한 미국이 역코스 정책을 시행하는 바람에, 유럽의 2차 대전 당사국들보다도 훨씬 더 기존 파시즘 부역자(한국의 친일파, 구 일본 제국의 파시즘 레짐 부역자들)들이 반공으로 갈아타서 연명하게 되고, 우익 세력이 재기하여 일본의 우경화로 일본의 과거청산이 현재진행형으로 미완성이 된 역사의 그림자 또한 분명히 있다.
또한 전쟁 이후 중국과 북한의 국경이 "조중변계조약" 등으로 확립되면서 당시의 국경선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은 한때 소련의 지지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간도를 포함한 만주 일부의 영유권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었다. 한편 백두산을 둘러싼 국경 문제는 중국이 주장한 석을수가 아닌 과거 대한제국의 토문 감계사 이중하가 주장했던 홍토수를 따르게 되면서 기존의 국경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6.3. 공산권 세력 판도의 변화
공산화 초기의 중국은 일단 소련을 사회주의 혁명의 선배로서 존중을 해주긴 했지만, 1950년대 말에 들면 점차 양국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기에 이른다. 사실, 국력만 놓고 봐도 중국은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아 있기에 너무나도 큰 나라였는데, 일단 국토 면적으로 따지면 소련이 다른 공산 국가들의 국토를 합친 것보다 훨씬 컸지만 인구로 따지면 중국은 다른 공산 국가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더욱이 2차 대전 이후 탄생된 공산 정권 대부분이 소련에 의해 세워진데 반해 중국은 비록 소련의 지원이 있긴 했지만 시종일관 중국 공산당의 주도로 혁명을 이루었기 때문에 크렘린의 노선을 일방적으로 추진하지 않았고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할 수 있었다. 결국, 중국은 스스로 공산 국가로 건국, 재탄생하고 중소결렬 이후 중 - 소 갈등이 본격화가 되면서 공산권의 세력 판도는 기존의 소련 1강 체제에서 중 - 소 양강 구도의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나아가 중국은 미국과 '데탕트'하며 소련의 뒷통수를 후려 갈기기도 했다.
6.4. 후일담: 지속된 체제 경쟁
UN 5개 상임 이사국 중 하나이자 아시아 주요국으로서 중화민국의 국제적 위상은 당분간 유지되었다.[29] 한국 전쟁으로 미국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기 때문이다. 진먼 포격전(금문도 포격전)이 이 때의 일이다. 1971년 UN 총회에서 그동안 중화민국이 갖고 있던 중국의 대표권을 중화인민공화국이 얻고 중화민국이 자진탈퇴 형식으로 사실상 쫓겨나기 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은 제1세계에서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미중 수교, 중일 수교가 성사되면서 데탕트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일본의 국제 사회 복귀가 달성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어느 쪽을 중국의 정부로 인정할지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였다. 미국은 당연히 UN 상임이사국인 중화민국을 초청하자고 주장했으나, 영국은 홍콩이 위협받을 가능성을 염려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초청하자고 주장하여 깔끔하게 '''양쪽 다 초대하지 않는 걸로 합의'''했다.[30]
여담으로 1940년대에 GHQ의 배려로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하여 일본 본토의 공장 설비를 철거하는 방식으로 광둥 성과 타이완 성에 이전하여 경공업을 재건한 중화민국은[31] 1950년대를 맞이하면서 외교 무대에서 매우 불리했고, 중화민국과 일본의 손해 배상금 협상은 결렬을 거듭했으니,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일본과 우호적 관계를 쌓는 것이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정책에 유리하기 때문에 1952년의 중일화평조약(中日和平條約)에서 일본에 대하여 손해배상 청구권을 마지못해 포기했다. 1972년의 중일공동성명(中日共同聲明)에서 손해 배상 청구권을 포기한 중화인민공화국은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신중국'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수단으로 활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정책(사유 재산 몰수 → 협동 조합 소유)의 관점에서 손해 배상(현금 → 자연인)을 거부하는 대신에 ODA(현물 → 법인)를 노렸다.[32]
중화민국은 헌법 제1조로 내세우는 국시가 삼민주의이며 삼민주의에는 민주주의가 명시되어 있어, 중화민국 체제에서 민주주의는 지극히 합당한 명분을 가지고 있고, 그 구체적인 시행 방법까지도 삼민주의에서 제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이 민주주의를 시행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대만 계엄령은 장제스의 사후에도 유지되었고 메이리다오 사건처럼 대만에서 민주화를 주장하면 반란을 선동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투옥할 정도였다. 또한, 국민대회나 입법위원 선거도 보궐 선거 또는 증원 선거로 진행되었고 국민당 후보와 위성 정당 2중대 후보, 무소속 후보만 출마했고 당외 세력은 출마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장징궈가 집권하던 시대의 말기부터 시민 세력의 반발로 인해 점차 민주화 논의가 진척되더니, 리덩후이에 의해 국민 대회와 입법원의 총선이 진행되었고, 대만의 중국 국민당 1당 독재 체제에서 다당제를 인정하고 민주 체제를 완전히 확립하게 된 건 1996년으로 오래 걸렸다. 민주진보당의 정권 교체와 뒤이어서 다시 중국 국민당의 정권 교체로 인해 제도상으로는 완전한 민주 국가가 되었다.
물론, 정치 체제를 고찰해보자면, 소모적인 정쟁이 그치지 않으며 고위층의 고질적인 부패나 정치 보복, 권력 남용도 상당히 일어나고 있는데, 제도는 정착되었지만 민주적 마인드가 완전히 갖추어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건국초기부터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서구식 민주주의 개념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조금씩 민주화 운동이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러나 습근평 집권 이후 갈수록 독재와 여론감시, 언론통제, 인권탄압이 강화되고 있기에 민주주의와의 거리는 중화민국보다 더 멀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체제 경쟁에서는 대만이 확실히 우세한 것으로 보였다. 인구가 50배 넘게 차이나는데도 80년대 후반에서 1992년까지 대만의 명목 GDP는 중국 대륙의 40% 수준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경제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룩한 중국인지라 이제는 그 의미마저도 상당히 희석되었다. 물론 2019년인 현재까지도 대만의 1인당 GDP는 중국의 1인당 GDP의 2배가 넘기는 하지만, 중국 내 각 행정구역별로 비교하면 베이징과 상하이같은 지역은 대만을 턱밑까지 쫓아온 상황이다.[33][34] 현재 양쪽의 상호 방문 인원은 현재 각각 수백만 명에 달하며 대만인이 중국으로 가는 것은 1980년대 말부터 이미 별 문제가 없었다.
또한, 중국인들의 대만 방문이나 관광도 2000년대부터 별 문제가 없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한국인이 평양에 가는 것이 베이징이나 도쿄에 가는 것과 별 차이도 없고, 북한인도 자유롭게 서울을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아니, 방문이나 관광을 넘어서 체류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2013년 기준으로 대만에 체류하는 중국인(홍콩, 마카오 제외) 일시 거주자는 241,455명, 영구 거주자는 128,744명이다. 출처 [35]
중국은 자유가 제한된 1당 독재 국가이고, 대만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인이 딱히 자유를 찾아서 대만으로 망명할만한 메리트도 예전에 비해선 많이 없어졌다. 대만에서도 중국인의 망명은 예전만큼은 잘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대만은 한국에서 탈북자에 주는 포상금 같은 것을 1980년대 말에 모두 없애버렸다.
즉, 20세기까지는 중화민국이 어느정도 우위인 면이 있었지만 21세기들어서 그나마남은 우위마저도 중화인민공화국에 완벽히 추월당하기 시작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에 와선 거의 모든 면에서 이제 중화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대도 되지 않는 상황이다. 현재 대만이 중국보다 확실히 우위에 있는 것은 개인의 자유 및 1인당 GDP.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대만으로 도망쳐 간신히 살아남긴 했지만 이후 1971년 유엔에서 쫓겨나다시피 탈퇴하면서 국가 취급도 받지 못하기 시작했으니 이 내전의 승패는 사실상 공산당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마저도 공산당이 국공내전을 완전히 종결하겠다고 중화민국의 대만섬을 계속 위협하는 암울한 상황이 계속 되고있다.[36]
7. 논란
7.1. 조선 인민군 참전 논란
근래에 당시 조선인민군이 국공내전에 대거 참전하였다는 주장을 불확실한 근거들을 들어 강변하다가 전공자에게 반박된 일이 있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연구자들마저 현혹시키는 감이 있는데 북한 전문가인 이종석이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반박한 바 있다. 관련 블로거가 강변한 이유는 이종석을 좌파라고 몰아붙이면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이종석은 국내에서는 최초로 북한을 진지하게 연구한 학자이며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다. 특히, 논쟁 중에 이종석의 의견을 들고 온 유저들에 대해서 인신공격을 좀 심하게 했다. 비슷한 사례로 이런 것도 존재한다. http://panzerbear.blogspot.kr/2010/11/blog-post_21.html?m=1
- 조선인민군 병력이 만주에 대거 파견되었다고 하는 1946 ~ 1947년은 소군정기였는데, 당시 소련은 중국 공산당 지원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 대규모의 병력 지원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를 놓고 국민당 / 미국과 북한 / 소련 간의 갈등 양상이 빚어졌을 텐데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국공내전에 관한 중국 내의 어떠한 저작물이나 증언에도 북한군의 대거 참전을 암시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 북한 측에서도 공식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 바 없다. (이종석, 《북한-중국 관계 : 1945년 ~ 2000년》(중심, 2000년), 69쪽 ~ 74쪽.)
북한측이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을 지원한 것으로 밝혀진 것은 병력 제공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 간부의 가족들을 피난 시켜준 것과 만주 지역에서 국민당군에 쫓기던 인민해방군이 북한 지역을 통과하여 안전히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국공내전의 전세 역전이 만주 전역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중국 공산당 측으로서는 북한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런 고마움은 후에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 # # # #
물론 브루스 커밍스 교수에 의하면 실제로 8.15 광복 직후 북한에 들어오려던 팔로군 소속 조선 의용군[37] 이 소련군에 의해 설득되어 국공내전에 참전한 사례는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 시점에서는 절대 조선 인민군이 아니었으며 당시의 남한 지역에서는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나온 것과 같이 마치 중국계 군사력을 소련계가 막은 공산당의 주도권 다툼으로 선전되었으나 실제로는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측이 이들을 설득시켜 참전하도록 한 것이다. 이들은 인민해방군 내에서도 정예 부대였으며 어려운 임무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었다. #
그리고 국공내전이 끝나자 1949년 말에서 1950년 한국전쟁 직전까지 '''조선인들로 구성돼서 국공내전에서 싸웠던 인민해방군 사단들이 조선인민군에 편입된다.''' 당시 소속 부대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상부에서 부대가 이동한다고 해서 기차에 탔는데, 내려보니 북한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리자마자 바로 조선인민군 군복으로 갈아입으라는 명령을 들었다고.
한국전쟁에서 남침의 선봉이었던 조선인민군 4사단과 6사단이 바로 그런 식으로 전환된 사단이다. 그 외의 사단에도 일정수의 전직 인민해방군이 있었다. 이들은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6.25 전쟁 초기에 맹활약을 했다. 대전에서 미군 24사단을 패퇴시키고 딘 소장을 포로로 잡은 부대가 바로 이들 부대였다. 제4사단장 이권무와 제6사단장 방호산은 모두 인민해방군 출신이다.
간단히 말하면 인민해방군 → 조선인민군 테크를 탄 것이지, 조선인민군 → 인민해방군 테크가 아니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위의 모 블로거가 한 주장은 '''앞뒤를 착각한 주장'''이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코민테른의 1국 1당 원칙, 즉 "한 나라에는 국적과 민족 불문하고 한 개의 공산당만을 인정한다"라는 원칙에 따라 1930년대 중국에서 활동하던 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서 일본군과 맞서싸웠다.[38] 비록, 소속은 중국 공산당이었지만 항일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활약한 이후 중국과 북한 수뇌부의 합의에 따라 1945년 8.15 해방 이후 순차적으로 북한으로 귀국해서 조선인민군의 주축이 된다. 그리고, 2군단장 김무정을 위시한 이들 인민해방군 출신들은 풍부한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6.25 전쟁에서 맹활약한다.
그러나, 전후 김무정을 위시한 이권무, 방호산 등의 인민해방군 출신 장교들은 김일성에 의해 대부분 숙청당하고, 이상조 같은 일부는 소련으로 망명을 한다. 익숙한 중국이 아니라 소련으로 망명한 이유는 당시 중국과 북한은 혈맹 관계였기 때문에 중국으로 망명하면 다시 북한으로 송환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39]
8. 여담
8.1. 고궁박물원 유물수송
국민당이 대만으로 도망갈 때 미국에서 군인들의 가족을 수송한다는 명분으로 수송선을 지원받아 그중 5척에 베이징 고궁 박물원의 유물들을 '왕창' 털어서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으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국민정부의 국립고궁박물원 유물 이전은 1933년 열하사변 시기부터 중일전쟁 때 내내 이어진 중요 국가사업이었으며 대만으로 옮겨간 유물도 일본의 폭격을 피해서 사천성으로 옮겼던 유물의 일부이며 1947년 고궁박물원 난징분원에 모아놓았다가 그중에서도 25%에 해당하는 3000상자만 챙겨간 것이다. 수송선 지원 야사는 엔하 시절부터 돌고 있지만 그 출처를 알 수도 없고 사실관계도 부합되지 않는 내용뿐이다. 여하튼 그 뒤 대륙에서 문화대혁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병크를 터뜨리면서 홍위병이 중국 전역의 문화재를 열심히 부수고 다닐 동안, 다행히 국민당이 가지고 있었던 문화재만큼은 그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또한 유물은 아니지만, 공자의 종손으로서 대대로 대접을 받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인 쿵더청을 이 때 대만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그래서 공자 가문의 종가는 대만에서 이어지고 있다. 대륙에는 정강의 변 당시 강남으로 피난갔다가 원나라의 송나라 정복 이후 여지껏 고향을 지킨 아우 집안에게 연성공 작위를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며 제2의 종가로 존경받아온 남종 가문과, 쿵더청의 누이인 쿵더마오(孔德懋 공덕무)의 후손만이 남아 있다.
8.2. 의외로(?) 활약한 일본군 97식 전차
[image]
97식 전차 치하가 전차로서 제대로 대활약(!)했던 전쟁이기도 하다. 중일 전쟁이 종결된 후 상당수의 일본군 전차가 중국군에게 노획된 상태에서 셔먼은 고사하고 스튜어트 경전차조차 지나가지 못하는 도로를 치하는 잘만 이용하여 기동전을 수행했다. 그 당시 중국의 열악했던 도로망 때문에 벌어진 일. 이 때문에 94식 경장갑차 같은 경장갑 차량이 활약할 정도다. 덕분에 희한하게도 일부 중국 밀덕들은 치하에 대해서 국공내전 한정이라는 전제하에서 "치하 전차는 의외로 쓸 만했다."라고 평가한다.
원래 일본군 전차라는 것이 1차 대전의 전차와 같이 보병 지원용의 컨셉으로 제작된 것이라서 국공내전과 같이 화력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드럼통으로 만들어낸 조잡한 박격포인 비뢰포 정도였던 보병 전쟁에서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셈이었다. 또한 국민당에겐 미국에게서 받은 셔먼과 스튜어트가 있었고, 그것을 상대로 이겼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국민당도 치하를 꽤나 사용했다 한다.
9. 대중 문화에서
9.1. 드라마
- CCTV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0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30부작 드라마인 중국명운적결전(中国命运的决战)이 있다. 국공내전을 소재로 하였다.
9.2. 영화
- 한국에 알려진 영화로는 '집결호'가 있다. 중국 공산당의 창업 과정이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굉장히 많은 영화가 제작되었다.
- 1990년에 만들어진 대결전(大決戰)이라는 3부작 영화가 있는데, 이것은 위에 제4기를 다루고 있다. 또한 2009년 개봉한 '건국대업(建國大業)'이 있다. 이 작품은 1945년 - 1949년의 국공내전을 묘사하고 있는데 보다보면 중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건국 60주년을 기념해서 중국 정부가 그야말로 연예계 스타들을 총동원해서 만든 선전 영화다.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40주년 기념 영화 개국대전과 60주년 기념 영화 건국대업이 국공내전을 다루고 있다.
9.3. 소설
왕람(王藍)이라는 작가가 1958년에 발표한 <람여흑(藍與黑)>이라는 장편 소설이 있다. 해당 소설은 1966년 홍콩 쇼브라더스에서 영화화를 하였고, 홍콩과 대만에서 여러 차례 드라마화가 진행되기도 해서 더욱 유명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중일 전쟁에서 부터 국공내전을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애국 청년인 주인공 장성아가 중일 전쟁과 국공내전이라는 난세의 풍운 속에 겪었던 여러가지 일들과 모험, 그리고 주인공 장성아가 열렬히 사랑했었던 두 여인 당기와 정미장과의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작가이자 화가인 왕람은 중일전쟁에 직접 참전했었으며, 그와 같이 참전하였던 그의 친구는 전쟁 도중에 전사 했다고 한다. 전쟁 이후 왕람은 자신이 겪은 전쟁을 소재로 여러 편의 소설을 썼는데, 이 소설 <람여흑>은 그의 소설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걸작이며[40] , 대만과 홍콩에서 드라마화,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도 1967년 삼일각에서 상 하, 두 권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번역 수준은 대체적으로 우수한 편이지만, 세로본이라 가독성이 떨어진다는게 옥의 티. 그리고 출판년도가 오래된 만큼 절판 되었고, 헌책방에서 구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영화는 데일리모션이나 유쿠 등 잘 찾아 보면 나오고 영어 자막도 있어서 중국어를 몰라도 대충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 전쟁과 국공내전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자세히 표현되었는데, 이 시기의 정세가 매우 상세히 몰입감 있게 자세히 잘 설명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 중국에 대한 아무런 사전 배경 지식이 없이도 충분히 몰입하면서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시대 여러 계층의 중국인들의 생활상에 대해서도 고증이 잘 된 편이다. 소설에 표현된 공산당의 악행들, 예를 들어 중일전쟁 당시의 팔로군의 만행이라든지, 이런 내용들은 대부분이 거의가 다 실제 사실에 기반한 내용들.
10. 대체 역사물에서
10.1. 중화민국의 승리
대체 역사 가정 에세이집 만약에(what if?) 1권의 마지막 챕터는 미국의 요청대로 장제스가 만주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1947년 국공내전 휴전에 동의했을 때를 가정한다. 즉, 실제 역사의 남북한처럼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 - 문화대혁명이란 잃어버린 10년(어쩌면 20년)의 대삽질 없이, 즉 덩샤오핑의 개방이 필요없이 중국(중화민국)은 빠른 속도의 경제 성장을 이뤘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참고로 한일 양국은 반공의 전진 기지로서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받을 가능성이 없어지면서 경제 발전을 아마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는데, 역사가 달리 진행된 이상 확언할 수 없는 가설이다. '''일단 장제스가 한국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생각해보자.''' 우리나라가 미국 대신 중국의 경제 원조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장제스는 1963년 한국에 흉년이 들었을 때 '''자국의 식량 사정도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한국에 식량을 수출하면서 '''"한국 같은 나라에게 겨우 쌀을 5만 톤밖에(!) 주지 않으면서 돈까지 받아야 하는게 한스럽다. 중원을 차지하고 있었으면 55만 톤 정도는 그냥 주었을 텐데."'''라고 말하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이 경우 한국은 미중 양국의 신임을 받는 우방국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한국 입장에서도 2명의 은인, 그리고 좌청룡 우백호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게 더 나쁠 수도 있는 것이, 중화민국이 승리해서 중국을 통일했다면 대한민국이나 일본과 같은 동북아시아권 자본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 중국의 위성국, 즉 친중국가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높다.[41]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을 통일한 중화민국을 최우선적인 동맹으로 여겼을 것이고, 이에 따라 중화민국이 주변의 한국이나 일본을 자국의 영향권 하에 두는 것을 묵인했을 공산이 매우 크다. 다만 이후 중화민국이 국력을 일으켜 구소련이나 현재의 중국처럼 미국의 패권에 도전한다면 한반도는 미중 간에 패권 충돌 지점이 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국공내전과 관계없이 북한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국은 여전히 최전선이다. 다만 남침을 강행할 뒷심인 중공이 없기 때문에 김일성이 전쟁을 통해 독재를 확립하지 못하고 그냥 끝까지 소련의 괴뢰국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20세기 한강의 기적은 중국이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을 벌이며 삽질을 푸고있었던 점이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으니 중국이 멀정한 자본주의 국가였다면 한국 경제의 급성장도 불가능했을 수 있다. 중공의 개혁개방 이후에나 시작된 중국시장 의존이 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면 체급 차이 때문에 경제종속이 심화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화민국이 승리했다면 북경 성을 위시하여 수많은 문화재들이 문화대혁명을 피해 보다 잘 보존되었을 것이다.
그 외의 대체역사물은 스탈린의 편지 정도이다. 그렇게 메이저한 소재는 아니다. 하지만, 중화민국/역사와 장제스 항목 등에서 보듯이 관련 역덕들에게는 영원한 떡밥거리가 되고 있다.
이는 우파들을 비롯한 국민당 옹호 측에서는 공산당의 "건국신화"가 서방의 우호적인 좌파 역사가들에 의해 멋대로 대중에 유포되어 버렸다는 시각을, 공산당 옹호 측에서는 무능한 장제스를 이념적으로 복구하려는 소수의 무리수라는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쟁거리는 과거 베트남 전쟁과 68운동 이후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까지 옹호했던 좌파 역사가들의 전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42]
덤으로 역시 이념 전쟁을 치렀고 분단 상태인 남북한의 체제 경쟁 문제까지 고려하면 그야말로 헬게이트를 볼 수 있다. 일단 주류 학계에선 1970년대 이후로 중국에 대한 시각이 대격변을 겪게 되면서 중일 전쟁 당시 국민당의 활약이나 장제스의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다는 과거의 시각에서 보다 진일보하여 장제스의 난징 정부 기간(1927년 ~ 1937년)을 황금의 10년이란 표현까지 나오는 수준이다. 이 기간의 눈부신 경제 성장은 장제스 비판론자의 대표격인 로이드 이스트만까지 인정하는 편이다.
결국 중국의 공산화를 저지하는 것 자체가 세계사에 미쳤을 영향, 특히 바로 옆의 한국사에 미쳤을 영향도 어마어마했겠지만, 그 파급력을 예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중화민국의 승리와 공산권의 축소 자체로도 세계사 전반이 새로 쓰이기 때문에''' 섣불리 어떻게 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자체가 떡밥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10.2. 중국의 분단
국공 내전이 무승부로 끝난다면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펼쳐질 것이다.
- 국공 내전보다는 중국 전쟁이라 불릴 것이다.
- 하나의 중국 개념이 시기가 지날수록 더욱 강화되어 상호 충돌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혹은 1개만 존재하였다가 2개 이상의 정권으로 바뀐 한국처럼 2개의 정부로 쪼개지듯이 두 개의 중국으로 탈바꿈하려는 움직임이 클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2개의 중국이 공존하는 양상이 나오게 되고 하나의 중국을 위시한 무력 충돌, 갈등 따위의 걱정은 없을 수 있다.
- 냉전기에는 남중국(홍콩, 마카오 포함)+남한+남베트남+미국+일본 VS 북중국+북한+북베트남+소련+몽골로 치열한 대립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45]
- 문화대혁명은 북중국에서만 일어났을 것이고 남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과는 관계없이 문화재들이 대부분 보존되었을 것이다.
-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 더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고, 마카오 역시 포르투갈의 보호령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된다.[46] 다만 조약대로 기간이 지난 후에 도로 중국(중화민국)에 복귀할 가능성도 있다.[47] 아니면 광저우만 처럼 90년대 이전에 중화민국에 반환되었을 수도 있다. 특히 포르투갈의 경우 카네이션 혁명 이후 중국에 마카오를 지속적으로 반환하려 하였지만 중국이 외교적 고립으로 인해 마카오를 외교 창구로서 두고 싶어 하였기에 90년대 이전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 티베트, 위구르는 몽골처럼 독립국이 될 것이다. 다만 이 둘은 중화민국 및 중화인민공화국 둘다 중국 영토로 여겨지고 있었고 세계에서도 미승인국이었기에 남북중국이 계속해서 종주권을 행사하여 하나의 중국을 유지하려 들었을 것이다. 다만, 남중국과 북중국 간에 내전과 대치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 먼 곳까지 관할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다.[48]
일단 공산당이 재건에 성공하여 중국이 분단했다는 가정을 적용한 경우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이다. 여기서는 1935년 옌안에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를 포함한 마지막 공산당 잔당이 모두 국민혁명군에게 사살됨에 따라 제1차 국공내전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국민당의 실정과 굴욕 외교 덕택에 유리한 재기 조건을 갖춘 뒤, 류사오치와 펑더화이가 1950년 11월 신장에서 '신장 소비에트'를 결성하여 간쑤성 등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1953년 4월에 제2차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국민당은 개털려서 베이핑과 톈진을 잃었고, 1956년 2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산둥성의 교주만과 관동주, 만주국을 영유하고 있던 일본 제국이 "황허 남쪽에서도 전쟁하면 우리도 참전함!"이라고 위협(소위 '도조 선언')하자 결국 공산당이 협상에 응하면서 마침내 그 해 7월 6일 허난성 정저우에서 황허를 경계로 한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그리하여 소설의 배경인 1987년 현재 중국 대륙은 황허 남쪽의 중화민국, 황하 북쪽의 중화 인민 공화국, 랴오허 동쪽의 만주국, 이렇게 3국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중화 인민 공화국의 통일 정책 및 만주국과 중화민국에서 전개되는 학생 운동권의 통일 운동이 지속되면서 대륙 통일을 향한 열망이 뜨거워지고 있다.
한편 라이트 노벨 풀메탈 패닉에서는 대체역사 배경으로 남중국과 북중국으로 나누어져 있다.10.3. 기타 대체 역사
그 외의 대체역사 소재로
- 서로 반목하지 않고 미국이 바라던 대로 중국 국민당(여당)과 중국 공산당(야당)이 공존하는 양당제 국가가 될 가능성도 있다.[49]
- 한국전쟁이 개전 1개월 ~ 2개월 내에 손쉽게 적화통일로 끝났거나 개전이 1년 ~ 2년 연기되어 인민해방군이 한반도에 투입되지 않고 예정대로 대만 상륙을 개시했을 수도 있다.
- 국민당이 대만이 아니라 쓰촨성으로 본진을 옮겼다면?
- 김일성이 스탈린의 허가를 빨리 얻어내서 인민해방군의 하이난 섬 점령 이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거나, 하이난의 중화민국군이 1950년 6월 25일까지 버티는 데 성공하여 하이난 섬을 중화민국이 점유했다면?
- 한국 전쟁 당시 맥아더의 구상대로 중국 본토에 전면 핵 공격을 개시하고 대만군을 중국 동남 해안에 상륙시켜 제2전선을 구축했다면?
- 몰락 작전이 진행되어 일본 본토나 한반도의 분단과는 별개로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군이 정비할 시간을 벌어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면? 아니면 대륙의 상황은 실제와 다를 바 없으나 미국이 소련군의 한반도 전체 무장해제를 인정함에 따라 한반도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음에 따라 중공군이 대만을 침공했다면?
11. 참고 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 출판사
- 장개석 vs 모택동, 이건일, 도서 출판 삼화
- 중국지 하 대란대치편, 현이섭, 인카운터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 아카데미
-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상, 장융, 존 핼리데이, 까치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로이드 이스트만, 지식 산업사
- 마오쩌둥 평전, 로스 테릴, 이룸
- 해방의 비극, 프랑크 디쾨터, 열린 책들
- 중국백서, 미국무성
- 국공내전 연재 시리즈
12. 관련 문서
- 1차 국공합작(1924년)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1925년)
- 서산회의(1925년)
- 중산함 사건(1926년)
- 국민당의 1차 북벌(1926년 ~ 1927년)
- 영왕운동
- 상하이 폭동
- 천도논쟁
- 난징사건(1927년)
- 4.12 상하이 쿠데타(1927년)
- 4.15 광저우 쿠데타(1927년 4월 15일)
- 마일사변(1927년)
- 국공결렬(1927년)
- 난창 폭동(1927년)
- 8.7 긴급회의(1927년)
- 추수폭동(1927년)
- 정강산 투쟁(1927년 ~ 1929년)
- 장황사변(1927년)
- 광저우 폭동(1927년)
- 국민당의 2차 북벌(1928년)
- 창사 폭동(1930년)
- 초공작전(1930년 ~ 1936년)
- 부전사변(1930년)
- 1차 양광사변(1931년)
- 만주사변(1931년)
-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선포(1931년)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년)
- 열하사변(1933년)
- 복건사변(1933년)
- 대장정(1934년 ~ 1935년)
- 동정항일(1936년)
- 2차 양광사변(1936년)
- 서안 사건(1936년)
- 2차 국공 합작(1936년)
- 중일전쟁(1937년 ~ 1945년)
- 쌍십협정(1945년)
[1] 어느 쪽이건 병력를 보유한 서로를 그대로 놔둘 생각은 없었다. 사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후반기 정도를 빼곤 대체적으로 전세가 유리한 국민당이 더 적극적이었다.[2] 양안관계 참고[3] 주권을 외국에 의해서 상실된 국가의 국민을 일컫는 말.[4] 이 말이 나온 것은 장제스가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나온 말이지만, 중국의 열악한 인권 상황을 보면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5] 후한민을 중심으로 한 동맹회 중심 인물.[6] 쑨원의 아들 쑨커를 중심으로 한 파벌.[7]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 직계.[8] 장쉐량의 동북 군벌은 동북역치 이후 형식적으로는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의 통치에 들어갔지만, 하지만 실제적으론 독자적인 행정 체계와 군사력을 보유하고 만주와 베이징 일대를 지배하던 독립 군벌로 장쉐량은 만주의 '''왕'''이었다. 하지만 만주 사변으로 본거지를 모두 잃고 잔존 병력 일부만 데리고 산시성으로 도망와서 눈칫밥만 먹는 신세로 전락했다. 예전 같으면 장제스의 명령 따위는 씹어버렸겠지만, 이때는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는 상황.[9] 미국 정부는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으나 중국 공산당의 정치, 군사적인 행동이 소련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10] 그러나 이 경우 만주가 소련의 위성국화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11] 시진핑 현 중국 주석의 아버지이다.[12] 유명한 보시라이의 아버지이다.[13] 또한 병력에서도 변화를 겪게 되는데 6월경에 인민해방군은 병력이 120만 명이나 증가해 280만명으로 늘어났고 중화민국 국군은 430만명에서 365만명으로 줄어들었다. 그중 전선에 투입된 병력은 170만명밖에 되지 않았다.[윤휘탁,2012] 윤휘탁, 논문(論文) : "복합민족국가(複合民族國家)"의 파탄; 만주국의 붕괴와 "만주국인(滿洲國人)"의 충돌,수난, 中國史硏究(Journal of Chinese historical researches Vol.78, 2012[14] 이러한 국민당에 의한 가혹한 친일청산은 한간들이 대부분 공산당을 선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대중동원을 통해서 그들을 제거했다. 공산당은 장정 이후 생존을 위해 몸집 불리기용으로 견지한 신민주주의 정책을 폐기하고 과도기 총노선을 발표하면서 그동안 협력해왔으나 공산주의에 맞지 않는 민족주의적 기업인(민족 부르주아지), 협력 지주 등을 쳐냈고 이 과정에서 한간들도 버림받게 된 것이다. 즉 공산당은 한간들을 단순 도구로 써먹은 것에 불과했다. 또한 여기서도 살아 남은 한간들은 문화대혁명때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 당하는 운명에 처해지게 된다. 반면 장개석은 대만으로 가서는 국민당을 지원한 대만의 한간들을 처벌하지 않는다. 대표적 사례로는 구셴중일가를 들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구셴중의 첫째 아들 구천푸를 1946년 감옥 보냈으나 곧 풀려나고 구천푸는 홍콩으로 망명간다. 그리고 1949년 다시 대만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는 감옥에 집어넣지 않았다.[15] 인민해방군을 추격하다가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해 퇴각하려는 순간 습격을 당했다.[16] 당시 국민당은 '한반도'를 예로 들면서 양쯔강을 경계로한 남북 분할을 제안했다고 한다.[17] 천이페이(陈逸飞), 웨이징산(魏景山)의 유화. 1977년작. 찢겨나간 청천백일만지홍기에 주목.[18] 다만 소련 측에서는 이 무기의 대부분을 국민정부에 양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19] 평소에는 잘 느끼지는 못하지만 도시는 식량의 블랙홀로 농어촌에서의 식품공급이 끊기는 순간 거대한 공동묘지가 된다. 국민당군이 대도시 사수에 집착하자, 홍군은 초기에는 특기인 농촌지대의 유격전으로 식량공급을 방해했고, 전열을 갖춘 뒤엔 대도시 포위전략으로 국민당군을 말려죽인다. 국민당군은 먹여살려야 할 사람은 많은데, 도시에 갇혀서 식량을 조달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중앙군과 군벌 사이의 갈등으로 내부 단합도 안 돼서 포위망을 뚫지도 못했다.[20] 장제스 직할의 중앙군은 훈련도 충실했고 미국의 원조로 물자도 풍부한데다가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실전경험도 풍부했다. 초기에 군벌들이 중앙군의 지휘에 일사분란하게 따라주었다면, 내전의 전개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21] 애초에 이 논리대로라면 1949년 하반기부터 국민정부가 통제한 서남지역에서 토지개혁이 시작되었음에도 국민정부가 해당 지역을 상실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22] 국공내전 중 국민당군의 부정부패를 본 고문단이 미 정부에 올린 보고이다.[23] 55억 달러라고 하는 문헌들이 많은데 그것은 UN의 전후 복구 기금이었다.[24] 국공내전 초기 만주 지역에서 국민당군에 밀린 홍군 병력과 당간부 수만여명이 압록강을 넘어서 북한으로 피신했다. 모든 물자를 버리고 맨 몸으로 넘어왔던 이들은 휴식을 취한뒤에 김일성 정권과 소군정이 제공한 물자로 완전무장하고 다시 만주로 진격했다. 또한 내전기간 내내 북한은 홍군 부상자들을 수용해서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치료해 주었다. 이런 관계가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끼친다.[25] 중국 공산당이 소련에게만 의지하지 않는다던가, 민주당파를 끌어담을 수 있다던가 등등.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미국 정부는 연합 정부를 지지한 적은 없다.[26] 당장 오늘날의 이북정권이 미국과 서방의 경제봉쇄를 버틸 수 있는 것은 김씨왕조 특유의 강력한 지배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중국공산당이 국제적인 대북제재를 무시하고 대북원조 및 북중무역을 벌이고 있는 탓이 크다.[27] 마치 요나라 및 금나라와 송나라의 그것처럼[28] 중화민국 국군 장교를 하다가 (패망 이전) 미국으로 유학해 하버드 대학교의 중국사 교수를 한 황런위(레이 황, 1918년 ~ 2000년)의 "허드슨강에서 중국 역사를 말하다"에서도 그런 견해가 나온다는 말도 있다. 그의 "장제스 일기를 읽다"의 경우는 장제스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식민지배를 경험한 국가들의 역사는 '근세'가 추가되는데, 근대→현대 루트에서 근대→근세→현대 루트가 된 것이다. 근대와 근세는 '민족국가'. 일본에게 강점당한 조선은 철도, 자본주의 등 근대 문물이 들어섰지만 외국에게 정치주권을 빼앗긴 상태였기에 '근대'라 하기 어려워 새로 만들어진 단어다.[29] 국제연맹(LoN) 당시에는 일본이 상임이사국이었다.[30] 한국 또한 초대받지 못했는데 한국은 전쟁 피해국이 아니라 식민지 피지배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이 오랫동안 식민지로서 일제의 탄압, 수탈, 학살에 시달려왔기는 했으나 그것은 제국주의의 피해자로서의 사정이고 국토가 직접적으로 전장이 되거나 자국 군대가 저항군으로서 연합군에 가담해야하는 '''전쟁 피해국과는 별개의 사안이었던 것'''.[31] 일본 정부는 한일기본조약에서 한국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전면부정하려 했으나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반공 교두보로 한일공동전선의 수립을 원하던 미국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은행과 증권과 보험, 연금과 예금과 송금, 주식과 저축과 국채에 대하여 손실보상 청구권만 인정했다. 그런데 손해배상(reparation)과 손실보상(compensation)은 알맹이가 비슷하나 법학의 관점에서는 다른 개념이다.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손해 배상금을 지불한 서독의 연방정부가 징발과 징용에 대하여 손실 보상금을 지불한 이유를 생각해 보라.[32] 실제로 소비에트 연방은 1940년대에 독일 본토의 공장 설비를 철거하여 국유 기업에 인도하는 방식으로 손해 배상을 실행했다.[33] 아시아의 4마리 용과 중국 행정구역들의 인당 GDP 추이[34] 물론 한 국가 내부의 특정 행정구역을 다른 국가 전체와 인당 GDP로 비교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보기 힘들다.[35] 만일 서울에서 인공기를 펼쳐들고 비슷한 시위를 한다고 하면 무슨 취급을 받을까. 그러나 대만에선 경찰들이 대륙 출신자들을 지켜주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36] 물론 미국과 일본이 대만 섬을 예의주시하고 있어서 무작정 쳐들어가지는 못한다. 반대로 확률이 높진 않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내부분열이 일어나서 붕괴할 경우 미국과 연합해서 대륙을 수복해 장강 이남까지 확보할수 있을지도.[37] 원래는 수백명 단위였으나, 만주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가담하여 수가 사단급으로 늘어났다.[38] 그 이전에는 조선공산당 만주위원회가 존재했으나, 1930년대에 코민테른이 1국1당 원칙에 따라서 중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라는 결정을 내린다.[39] 그러나 그들의 우려와는 달리 중국으로 도망갔다 해도 송환시키지는 않았다.[40] 대만에서는 왕람의 람여흑, 반인목(潘人木)의 련의표매(蓮漪表妹), 기강(紀剛)의 곤곤료하(滾滾遼河), 서종패(徐鍾珮)의 여음(餘音) 1950년대 - 1960년대 출판되었고, 중일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 네 작품들을 사대 항일 소설로 꼽는다.[41] 그런데,'친중'이라는 단어의 뜻이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중화민국에 우호적이라는 뜻이라면 현재마냥 친중이라는 단어의 인식이 나쁠 리가 없다. 오히려 한국은 1980년대까지 진성 친중(화민국)국가였다.[42] 대표적으로 국내에선 1970~80년대 일련의 저작에서 문화대혁명을 긍정적으로 서술했던 리영희가 있다. 리영희는 말년에 자신의 정보부족으로 오판했었다고 사과를 하긴 했지만, 별 반향은 없었다.[43] 유럽은 아무래도 중국어 교육이 간체자 중심이지만 미국은 중국과 수교한 지 40년이 넘었음에도 간체자 일변도의 교육을 하진 않는다. 간체자와 정체자와 공존하는 편이다. 그러니 외교 관계라는 것이 어찌 보면 절대적이진 않다. 대만을 봐도, 미국과 단교 후에 미국식 영어 교육을 폐기하면서 외교 관계가 있는 벨리즈, 마셜제도, 세인트빈센트그레나딘 같은 나라가 쓰는 영어로 교육 방식을 바꾼 것이 절대 아니다. 계속 미국식 영어 교육을 유지한다. 바티칸(중화민국의 수교국) 박물관 역시 중국어 안내에서 간체를 사용한다.[44] 이건 실제로 단교 전까지 우리나라가 대만을 부르던 명칭이다.[45] 다만 만주랑 가까운 북한은 몰라도 북베트남의 경우 중국 국민당이 대륙을 통일했어도 비슷하겠지만 중국 남부를 중화민국이 지배했다면 중공이나 소련의 지원을 못받게 되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패배하여 프랑스에 의해 재식민지화되었거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포기했어도 중화민국이나 미국에 의해 공산화가 저지되었을 것이다. 이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마찬가지.[46] 동아시아 유일의 영국 영토인 홍콩은 실제대로 1997년 중국에 공식 반환되었고 마카오 역시 1999년 말쯤에 반환되었다.[47] 홍콩 섬 자체는 영국에 할양하였으니 계속 유지될 수 있겠지만 섬 단독으로 경제를 꾸려가는 것이 힘든 만큼 무리를 하지 않는 이상 결국 돌려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90년대 말에서야 홍콩과 마카오가 반환된 이유부터가 그 이전까지는 죽의 장막으로 유명한 폐쇄적인 나라였던 중국이 서방 국가와의 대화창구로 써먹을 겸, 이 두 도시를 인질삼아서 이런저런 외교 분쟁에서 서방 측에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 고의로 반환을 거부한 탓이 컸다. 그랬던 것이 냉전이 끝나서 더 이상 이렇게 할 필요가 없어진 중국 측에서 그제서야 홍콩과 마카오에 대한 반환 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만일 중화민국이 중국을 통일했으면, 같은 친미, 친서방 국가인 만큼 이 두 도시에 대한 반환 협상이 좀더 일찍 성사되었을 것이다. 물론 마카오는 당시의 종주국인 포르투갈의 독재자인 안토니우 살라자르가 해외 식민지들을 놓지 않으려고 머리 굴리던 것을 생각하면 바로 반환받기는 어려웠을테지만, 역시 본국에서 너무 멀고 포르투갈이 중화민국한테 군사적으로 밀린다는 점에서 인도가 역시 포르투갈령이던 고아를 무력으로 되찾은 것처럼, 중화민국군이 무력으로 마카오를 점령했을 공산이 크다.[48] 아마, 티베트와 위구르는 소련과 북중국 및 남중국, 그리고 인도 간의 분쟁을 막기위한 완충국 정도의 지위는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중, 위구르는 위치 상의 이유로 북중국과 소련의 영향을 받아서 공산화가 되거나, 최소한 그 정도는 아녀도 친소나 친중 성향의 정권이 들어섰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완충국 역할을 하는데 실패했다면, 위구르의 일부 또는 전체가 소련의 구성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49] 하지만 마오쩌둥과 장제스 둘다 상생할 마음은 죽어도 없었다. 양당의 수뇌부가 다 갈려서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수뇌부가 되지 않는 한 절대로 불가능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