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군벌

 

'''奉天軍閥'''
Fengtian cl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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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군벌의 기
1. 개요
2. 역사
2.1. 북양정부 시절
2.2. 국민정부 시절
3. 참고 문헌
4. 관련 문서
4.1. 관련 인물
4.2. 사건


1. 개요



1927~28년 봉천군벌의 전투 모습이 찍힌 희귀한 기록 영상. 장쉐량이 중국군의 대원수라는 설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는 황고둔 사건 이후에 찍힌 영상으로 보인다. 영상 설명란에는 국공 간의 전투라 설명되어 있으나 이는 오류다.
만주 지역에서 성립된 북양군벌의 한 파벌. '대원수'라 불리던 장쭤린이 영도했으며 장쭤린 사후 장쭤린의 여섯번째 아들인 '소원수' 장쉐량에게 대권이 넘어갔고 국민정부에 복종을 선택하면서 군벌시대는 겉모습상 끝난다. 만주사변, 열하사변을 거치면서 몰락했고 그 잔당도 1936년 서안 사건 이후로 사실상 소멸했다.
봉계, 봉천파, 봉계군벌(奉系軍閥), 동북군벌이라고도 부른다.
일단 북양군벌의 중요 파벌 중 하나로 분류하기는 하는데 그 시초가 장쭤린의 마적단이라서 북양군의 고급 장령들이 시초가 된 안휘군벌이나 직예군벌과는 이질적인 면이 강하고 소련, 일본 제국과 접경해 있다는 특수성 역시 깊게 작용하여 아예 봉천군벌이라는 독자 파벌로 분류하기도 한다. 북양정부 몰락 이후에도 국민정부 산하에서도 오래 가기도 했다.

2. 역사



2.1. 북양정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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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승왕부에서 우페이푸와 회의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장쭤린과 봉천군벌 장령들[1]
시작은 만주의 마적이던 장쭤린의 비적떼였다. 장쭤린은 러일전쟁, 신해혁명 등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일개 마적단에 불과했던 그의 세력을 봉천군벌이라 불리는 거대 세력으로 성장시켰고 멍언위안 등 만주의 경쟁 세력들을 차례로 제압, 만주의 지배자가 되었다. 1917년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돤치루이안휘군벌과 동맹을 맺고 1차 관내출병을 단행하여 동삼성순열사에 임명되었으며 북양군벌 내부에서 무시할 수 없는 힘의 축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되었다.
원래 안휘군벌과 동맹관계였던 봉천군벌은 돤치루이의 측근인 쉬수정의 전횡으로 환계와 단절하고 펑궈장직예군벌과 동맹하게 되었다. 돤치루이가 쉬수정을 서북주변사 겸 변방군사령관에 임명하여 외몽골 출병을 단행하는 등 동북의 장쭤린에 맞먹는 세력을 구축하려 하자 봉계와 직계는 환계에 대항하는 8성 동맹을 체결하여 환계에 맞섰다. 1920년 3월, 우페이푸의 직군이 호남에서 북상하여 변방군과 대치하자 장쭤린은 대총통 쉬스창의 요청에 따라 중재자 역할을 맡게 되었으나 돤치루이의 입장이 완고하여 협상은 결렬되었고 쉬수정이 장쭤린 암살을 시도하면서 1920년 7월 안직전쟁이 발발하였다. 여기서 봉천군벌은 직예군벌과 힘을 합쳐 크게 승리, 천하의 패권을 쥐게 되었다.
하지만 직예군벌과 관계가 악화되면서 1922년 봉천군벌은 안휘군벌과 다시 힘을 합쳐 1차 직봉전쟁을 일으켰으나 마적단 출신이 대부분이라 현대적 군대와 거리가 먼 오합지졸로 구성되어 있던 봉천군벌은 참패했고[2] 장쭤린은 궈쑹링 등 현대 군사교육을 받은 참모단을 중시하면서 봉천군 현대화에 나섰다. 이후 봉천군벌은 원로들로 구성된 구파, 양위팅을 비롯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사관파, 궈쑹링 등의 육대파로 분할되었다. 이후 1924년 2차 직봉전쟁에서 장쭤린은 돤치루이, 펑위샹과 연합하여 우페이푸차오쿤을 축출하고 북경정변을 통해 베이징을 점령, 돤치루이를 임시 집정에 추대하고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환계군벌 루융샹, 왕읍당 등을 축출하고 강남 지역으로 무리하게 세력을 확장하다가 직계의 쑨촨팡 등이 반발하여 손봉전쟁을 일으키고 궈쑹링이 반봉사건을 일으키는 등 위기에 처했다.
장쭤린은 일단 국민군을 자처하면서 자신을 타도하려는 펑위샹을 견제하기 위해 직계와 연합, 옌시산, 우페이푸와 연합하여 직봉풍전쟁을 통해 펑위샹을 격퇴했다. 하지만 1926년 7월 장제스가 영도하는 중국 국민당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여 북상하면서 다시 상황이 급변했다. 북양군벌들은 장쭤린을 중심으로 뭉쳐 장제스에게 대항하려 했지만 국민혁명군은 파죽지세로 하남-산동에 이르는 지역까지 진출했다. 1927년 국민당 내부의 국공갈등이 심각해지면서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는 등 국민당의 내분으로 북벌은 잠시 중단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국공결렬, 영한합작을 거치면서 국민당은 난징 국민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에 나서게 되었고 펑위샹, 옌시산도 여기에 가담했다.
북양군벌들은 장쭤린을 중화민국 육해공 대원수로 추대하여 북양정부의 국가원수로 삼았지만 국민혁명군을 당해낼 순 없었다. 결국 장쭤린은 보경안민을 주장하는 구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봉천으로 퇴각하여 후일을 도모하려 했지만 고모토 다이사쿠를 비롯한 관동군 과격파의 음모로 1928년 6월 황고둔 사건으로 암살당하고 만다. 장쭤린 사후, 그의 여섯번째 아들이며 육대파와 구파의 지지를 받던 장쉐량이 봉천군벌의 수장에 올라 자신을 견제하는 양위팅, 창인화이 등을 숙청하고 권력을 확고히 했다.
만몽분리를 노리던 일본 제국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장쉐량에게 보경안민에 힘쓰며 국민당과 협력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나 이들의 강압적인 요구와 만주까지 불어온 내셔널리즘 열풍에 장쉐량은 오히려 동북역치를 선언, 국민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당시 봉천군벌의 특징 중 하나로 해군력이 있다. 중국은 청일전쟁 이후 해군력 회복에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고, 신해혁명 이후 군벌시대가 열리면서 중국의 해군력은 거의 무의미한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봉천군벌의 해군력은 그 얼마되지 않는 중국의 해군력 중 거의 전부를 차지했다.
물론 시작이 마적떼인 이상 봉천군벌이 처음부터 이런 해군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다. 초창기엔 봉천군벌도 소형 포함 등 명목상의 해상 전력만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직복풍전쟁에서 칭다오에 주둔하던 원수더(温樹德)의 발해함대를 손에 넣고 이를 강화하면서 봉천군벌의 해군력은 중국 해군 중 가장 강력한 전력을 차지했다. 당시 중국 해군의 규모는 장병 5400여명, 총배수량 42,000톤 정도였는데 그 중에서 봉천군벌의 해군인 동북해군의 전력은 대소 군함 27척과 장병 3300여명, 총배수량 32,200톤에 달하여 전체의 약 77%를 차지했다.

2.2. 국민정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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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쉐량장제스
일단 동북역치로 명목상 국민정부에 속하게 된 장쉐량이지만 다수의 군벌들이 그렇듯이 깃발만 국민당으로 바꾸었지 실질적으로는 기존의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1929년 군사력을 감축하여 교육과 경제성장에 투자하자는 편견회의가 개최되자 각 지방의 군벌들은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장제스에게 반발하여 반장전쟁을 일으켰다. 1929년 2~3월, 광서파의 리쭝런바이충시1차 장계전쟁을 일으켰고 5월에 펑위샹이 1차 장풍전쟁을 일으켰다. 장쉐량은 일단 중앙옹호를 타전하며 봉천군벌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펑위샹을 견제하기 위해 옌시산, 장제스와 손을 잡는다는 방침을 잡았으나 반장파에 합류하는 선택지 역시 고려했다. 이때 만주의 경제적 위기가 심화되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중동로 사건을 일으켰다가 바실리 블류헤르가 지휘하는 붉은 군대에게 봉소전쟁에서 개패듯이 두들겨맞기도 했다.
하지만 1930년 중원대전이 발발했을 때 장쉐량은 중앙옹호를 통전, 관내진출을 단행하면서 장제스가 중원대전을 진압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고 국민혁명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국민정부의 2인자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단물을 오래 누리기도 전에 1931년 나카무라 사건, 만보산 사건 등 봉천군벌을 도발하기 위한 일본 제국의 음모가 이어졌고 1931년 이시와라 간지 등의 주도로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봉천군벌은 어이없게 몰락하였다. 보경안민을 주장하는 만주 구파를 무시하고 중동로 회수와 관내진출에 나서던 장쉐량은 관동군을 상대로 부저항주의를 취했고 결과적으로 1만 5천명에 불과한 관동군에게 만주를 허망하게 잃으면서 전국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자기 자신도 열하성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일본 제국은 만주 구파를 포섭하여 선통제를 옹립, 만주국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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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 사건 당시의 장쉐량과 동북군의 장령들
1933년 열하사변이 발생하였을 때도 장쉐량은 무기력하게 패배했고 왕징웨이 등 전국의 요인들의 비난을 받고 사직을 통전, 유럽으로 외유를 떠났는데 이때 갈레아초 치아노, 베니토 무솔리니, 아돌프 히틀러 등을 만나 파시즘 뽕에 빠지게 되었다.(...) 1934년 귀국한 장쉐량은 서북 초비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제5차 초공작전으로 개박살나서 대장정에 오른 섬서성의 중국 공산당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장쉐량은 공산당 토벌보다는 본거지인 만주 탈환을 하고 싶었고 공산당의 완강한 저항에 큰 피해를 입게 되자 초공작전이 더더욱 싫어졌다. 이에 장제스의 중앙정부 강화 정책에 불만을 품던 섬서성 군벌 양후청과 합세하여 초공 독전을 위해 찾아온 장제스를 감금하는 서안 사건을 일으켰다.
서안 사건은 어찌어찌 평화적으로 해결되어 2차 국공합작이 결정되었으나 다 잡은 공산당을 풀어주었던 장쉐량은 가택연금에 처해졌고 양후청은 외유를 떠나야 했다. 봉천군벌의 수장인 장쉐량이 감금당하면서 봉천군벌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고 장쭤샹 등 살아남은 원로들도 야인으로 살거나 장징후이처럼 일본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하면서 봉천군벌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참고 문헌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4. 관련 문서



4.1. 관련 인물



4.2. 사건



[1] 1번이 장쭤린, 2번이 장쭝창, 3번이 우페이푸, 4번이 장쉐량이다.[2] 원로들은 엄정한 기율이나 현대적 군사훈련이 실전에서 병사들을 허약하게 만들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현대적인 군사 교육 제도를 괄시했지만 1차 직봉전쟁에서 원로들은 패주했고 궈쑹링과 장쉐량 등은 오히려 선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