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쉐량

 


'''봉천군벌 2대 수장
張學良
장쉐량 | Zhang Xueliang
'''
[image]
'''중화민국 서북초비부사령관
중화민국 국가부주석 권한대행
국민당 연대국방개혁연합참모위원장 직무대리
'''
'''정체'''
張學良
'''간체'''
张学良
'''한국식 독음'''
장학량
'''영문'''
Zhang Xueliang
'''아명'''
장샤오량(張孝良)
''''''
의암(毅庵)
''''''
한경(漢卿)
'''출생'''
1898년[?] 6월 4일
청나라 봉천성 안산부 해성현
'''사망'''
2001년 10월 14일 (향년 '''103세''')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국적'''
[image] 청나라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민국(대만)

'''학력'''
동삼성육군강무당
'''직업'''
군인, 정치가
'''부모'''
아버지 장쭤린어머니 자오춘구이
계모 라오서우쉔

'''형제'''
장충량
장쉐밍

'''배우자'''
자오이디(재혼)위펑즈(이혼)
취루이위

'''자녀'''
4남 1녀첫째아들 장뤼쉰딸 장뤼잉둘째아들 장뤼위셋째아들 장뤼치
넷째아들 장뤼린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부친의 전사
2.3. 열하사변과 패주
2.4. 서안 사건과 연금
2.5. 말년과 최후
3. 여담
4. 역사적 평가
4.1. 엇갈리는 평가
4.2. 만주 사변과 부저항 장군
4.3. 장쉐량은 도대체 왜 그랬는가
4.4. 시안 사건 - 만주의 통치자로서 취한 당연한 선택(?)
4.5. 각종 매체에서
5. 가족관계
6. 주요 경력
7. 사진
8.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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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군벌, 정치가. 한국식 독음인 장학량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1898년 태어난 청나라 유명 인물들 중 쑹메이링 다음으로 가장 장수한 인물로 신해혁명, 군벌시대, 국민혁명, 만주사변, 중일전쟁, 국공내전 등 중국 근현대사의 사건들은 직접 보거나 경험했다. 상단을 보면 알겠지만 1898년 출생 후 향년 '''103세'''(2001년)로 사망했다. 즉, '''19세기에 태어나 21세기에 죽음'''으로써 '''3세기'''를 사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다만 그 일생의 반 이상을 가택연금으로 보냈다.

2. 생애



2.1. 초기


봉천군벌의 지도자인 '대원수'로서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장쭤린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쭤린은 1925년 일본 제국미쓰야 협정을 맺고 만주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장쉐량은 이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초기에는 반(反)국민당, 친일파 성향을 갖고 있었다.
장쉐량은 동삼성육군강무당 1기로 입학하여 궈쑹링의 지도를 받았고 그에게 감복하여 의형제를 맺었다. 졸업 후 여단장에 부임했고 안직전쟁, 1차 직봉전쟁, 2차 직봉전쟁 등에 참여했다. 1925년 11월, 자신의 스승인 궈쑹링이 자신의 명의로 반봉사건을 일으켜 장덩쉬안을 죽이고 장쭤린, 양위팅의 하야를 요구하자 장쭤린은 장쉐량을 총살시키라고 소동을 일으키기까지 했지만 어디까지나 연기라서 그 뒤로도 봉천군벌의 주요 장령으로 활동했다.

2.2. 부친의 전사


1926년에는 국민당의 1차 북벌에 맞서 봉천 군벌을 지휘했다. 중국 국민당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분열해서 내분에 들어갔으나 영한합작을 통해 통합하여 1928년에는 국민당의 2차 북벌에 나서게 되었다. 국민혁명군의 공세에 봉천군은 패퇴를 거듭하여 베이징을 내주게 되었다.
그런데 봉천으로 퇴각하여 후일을 도모하던 부친 장쭤린이 관동군의 음모인 황고둔 사건으로 사망하고 일본이 매우 강압적으로 국민정부와 접촉하지 말 것을 요구하자 이에 반발하여 반일 감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리를 승계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협조가 필수적이었으므로 집권 초기에는 쇼와 덴노의 즉위식에 사절단을 보내는 등 일본에 친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결국 일본과 장제스 사이를 오가는 줄다리기 외교 끝에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였고 동북역치를 통해 난징 국민정부에 복속한다. 이후 양위팅, 창인화이(상음괴)를 비롯한 사관파를 숙청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였으며 1929년 반장전쟁이 일어났을 때 줄곧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1차 장풍전쟁 정도에만 소극적으로 개입했지만 1930년 중원대전에서 막판에 장제스의 편을 들어줘서 국민당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국민당의 2인자까지 꿰차게 된다.
그러나 1929년, 만주의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중동로 사건을 일으켰다가 바실리 블류헤르가 지휘하는 소련군에게 두들겨 맞았고 1931년의 만보산 사건나카무라 사건 때 일본의 도발을 야기할까봐 계속 부저항 정책을 고수했다. 이후 관동군 작전 참모였던 이시와라 간지의 주도로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사정은 급변한다.
장쉐량은 이를 기존과 같은 소규모 국지도발 정도로 오판하고 부저항 정책을 지시했으나 알고 보니 만주사변은 만주 전체를 침탈하려는 대규모 침공이었고 그간 장제스가 군사 지원을 빌미로 만주까지 먹어버릴까 봐 한사코 이를 거부해 온 장쉐량은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증원군을 요청하였으나 이미 초공작전1차 양광사변으로 정신 없던 장제스에겐 그럴 여력은 없었고 장쉐량 본인도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하다가 주요 도시를 다 날리고 열하까지 밀리고 나서야 뒤늦게 항전을 명령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이유인 즉슨, 사변 초기 (전면전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던) 장쉐랑이 '''일본군이 어떤 공격을 해와도 적대해서 저항하지 마라'''라는 사실상 비폭력 엄명을 내리는 바람에 쉽사리 밀리게 된 거고, 그 결과 얻게 된 '부저항'(不抵抗)이란 꼬리표는 장쉐량 생전은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따라다니게 된다.

2.3. 열하사변과 패주


그 후 자신의 16만 병력을 수습해 최후의 영지인 열하성을 통치했으나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다 열하사변에서도 패하고 산해관 안으로 철수, 왕징웨이를 비롯한 중국의 실력자들에게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는 맹비난을 받고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장제스에게 사임 의사를 밝혔다. 사퇴 후 유럽으로 잠시 외유를 떠났다가 돌아와[1] 사실상 낭인 신세로 전락한 채 서쪽의 산시 성 부근에 주둔한다. 하지만 여기는 이미 군벌 양호성(양후청)[2]이 거느리는 서북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더 서쪽인 옌안에는 막 대장정을 끝낸 마오쩌둥의 공산군 약 4만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때문에 장제스는 여기 주둔한 장쉐량을 서북 초비 부사령관으로 임명 후 공산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후 공산군의 게릴라 전술에 번번히 참패한 장쉐량은 점차 이렇다 할 지원 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는 장제스에 대해 불만을 품고 비밀리에 공산군과 강화를 맺고 장제스에게 초공을 중단하고 공산당과 합작하라고 간곡히 설득했지만 장제스는 크게 성을 내면서 거부하고 정 초공이 싫으면 복건성이나 안휘성으로 떠나라고 했다. 하지만 복건이나 안휘로 떠난다는 것은 초공은 안할 수 있어도 더 이상 중국 정치계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는 의미였으므로 장쉐량으로서는 따를 수 없는 조치였다.

2.4. 서안 사건과 연금


결국 장쉐량은 1936년 12월 12일 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장쉐량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장제스는 즉각 사면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10년을 공들인 초공작전을 망쳐놓은 장쉐량에게 큰 원한을 품은 장제스는 장쉐량을 절강성에 가택연금시켰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진 후에도 여기저기 끌려다녔다. 중일전쟁 후 만주 지역의 민심 수습을 위해 장쉐량을 동북지역으로 파견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 있었지만 장제스는 이를 묵살하고 장쭤린의 의형제 장쭤샹을 선택했으나 장쭤샹은 정치에서 은퇴한 상태라 그 역시 거절했다. 1949년 12월 7일 국부천대때도 잊지 않고 대만으로 끌고 갔다. 이후 외부와 연락이 차단되면서 최종적으로 신주 현으로 이동했다.
1954년 외출 허용 등 연금이 완화되었지만 여전히 외부와의 접촉은 차단되었고, 가택연금에서 풀려나려고 반성문을 써가는 과정에서 오른쪽 눈에 이상이 생기면서 반 실명상태가 되었다. 어쨌든 가택연금은 장징궈 시절에도 지속되었고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된 것은 리덩후이 총통 시대 때로 1990년 생일 때 생일축하연을 대만 총통부에서 직접 열면서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되었고, 1993년이 되어서 연금 상태에서 풀려났다.#

2.5. 말년과 최후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뒤로는 자신의 동생과 조카가 살고 있는 미국 하와이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 여하튼 하와이에서 여생을 보낼 때 중국과 대만 양측에서 장쉐량에게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고, 중국과 대만 가운데 어디로 갈 것인지 묻는 질문도 받았는데 그때마다 장쉐량은 난 국민당도 공산당도 아니라면서 이를 일축했다. 56년이나 가택연금 당하며 죄수 상태로 지냈는데 그 어떤 것에 관심이 있었겠는가.
2001년 10월 14일, 미국 하와이에서 103세로 사망했다.
따지고 보면 중일전쟁, 국공내전을 몸소 체험했고, 공산당이 대륙을 통일 한 후에 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전역이 혼란을 겪고 뒤 이어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또한 대만의 국제적인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한 편으로 대만이 민주화되면서 그 수혜를 자신이 입게 되고, 국민당이 선거를 통해 정권을 상실하고 천수이볜이 총통으로 등극하는 것까지 본 인물이다. 가히 살아있는 역사라고 봐도 좋을 정도.

3. 여담


  • 대만에서 연금 생활을 할 때 하나의 일화가 있었는데 장제스의 생일날 장쉐량은 '시계'를 선물했다. 많은 시간이 흘러간 만큼 이제 연금을 해제해 줘도 되지 않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장제스는 답례로 낚싯대를 선물로 보냈다. 아직 멀었으니 세월이나 낚고 있으라는 뜻.
  • 그의 사후 5년 뒤 2006년 그의 유품들이 고향인 랴오닝성에서 전시되었는데, 개중엔 미키 마우스 인형과 용자 시리즈 장난감도 있었다. 가택 연금이 낳은 비극인가, 아니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가? 것도 그럴것이 50년 넘게 가택연금을 당했는게 그 기간 동안 할 일이 하도 없으니까, 역사 연구에 몰두해서 명, 청조 시대의 굉장한 권위자가 되었다고 하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 젊었을 적엔 잘생긴 외모로 민국 4공자 중 하나로 꼽혔다. 민국 4공자로 누굴 꼽는 지에는 여러 의견이 있다. 위안커윈(위안스카이의 아들), 돤훙강(군벌 돤치루이의 아들), 장샤오뤄(기업인이자 쑨원의 조력자 장젠의 아들), 우바오추(청의 군인 우장칭의 아들), 루사오쟈(군벌 루융샹의 아들), 장보쥐(군벌 장전팡의 아들) 등이 4공자로 꼽힌다.[3]그러나 어느 조합이든 장쉐량은 꼭 들어간다. 이로 인해 숱한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심지어 쑹메이링과의 관계도 인구에 회자된다. 유럽을 방문했을 때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딸인 에다 무솔리니와 연애했다는 설도 있다.
  • 그가 남긴 여러 로맨스 중 죽을 때까지 해로한 2번째 부인 자오이디(조일적, 趙一荻)과의 이야기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연애사다. 자오이디는 16세 때 무도회에서 유부남인 장학량을 만나 사랑에 빠져 그의 비서로 일했는데, 이후 장학량이 연금되자 그를 따라가 함께 생활했다. 본처인 위펑즈(우봉지, 于鳳至)는 그 정성에 감동하여 기꺼이 이혼하고 정식 결혼을 허락했다. 재미있는데 두 부인 모두 장쉐량과 마찬가지로 장수했다는 것. 위펑즈는(1897~1990) 93세, 자오이디는(1912~2000) 88세까지 살았다.
  • 중국에서는 이러한 농담이 전해져 온다고 한다. 술과 담배를 멀리한 린뱌오는 60대에 죽었고,[4] 담배를 멀리하고 술만 즐긴 저우언라이는 70대에 죽었고[5], 술은 멀리하고 담배만 즐긴 마오쩌둥은 80대에 죽었으며, 술과 담배를 모두 즐긴 덩샤오핑은 90대에 죽었다. 하지만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마약에다가 여자까지 즐긴 장쉐량은 100세까지 살았다는 것이다.[6] # 게다가 장학량은 마약도 오래 했다. 1930년대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15세부터 했다는데#, 해외 웹에서는 1924년부터 한 것으로 나온다.# 비록 1933년에 끊기는 했지만 무려 10년 가까이를 약쟁이로 보낸 것이다. 그 덕택에 중국에서든 대만에서든간에 애주가, 애연가들이 술이나 담배를 끊으라는 훈계나 충고를 받을 때마다 반례로 써먹는 예시(?)중 하나이기도 한다. 다만, 장쉐량은 1936년 시안 사변 이후 사실상 정치생명이 끝나 거의 남은 생 전체를 가택연금으로 보냈던 반면 위에 열거한 다른 인물들은 죽을 때까지 정치싸움을 했으므로, 받은 스트레스의 양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 만주사변 당시 재만조선인들을 장쉐량 휘하의 군대가 대규모로 학살한적이 있었다. 1931년의 대규모 배화폭동 이후 수 많은 화교 난민들은 당시 봉천군벌의 지도자였던 장쉐량 측으로 몰려갔다. 하지만 얼마안가 만주사변까지 발생하자 분노한 장쉐량의 군대는 수 많은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학살약탈을 실행하였다. 당시 봉천의 일본 총영사관에서 조선총독부 관방외사과로 보낸 자료에 따르면 이 당시 재만조선인들이 입은 피해 규모는 사건 이후부터 7개월 동안 살상, 약탈 등은 2500여 건에 달하였고, 학살당한 사건만 193건이나 되었다.

반면 일본 조선군사령부 측의 자료에 의하며, 1931년 10월 말까지 조선인 피해의 장소와 시간이 밝혀진 사건만, 학살 323건, 능욕 50건, 소실가옥 300건, 약탈호수 약 2000건에 달하였고, 확실하지만 조사 중인 사건이 학살 180건, 능욕 100건, 소실가옥 500건, 약탈호수 1000건을 헤아렸으며, 이 외에 조사가 불가능한 오지 방면의 피해 수는 이보다 배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하지만 당시 언론에 보도된 피해상황을 종합해 보면, 이보다 더 심하였는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31년 9월 20일부터 1932년 1월 9일까지 재만조선인의 피해 상황은 사망 843명, 행방불명 807명, 부상 362명, 납치 110명, 금품강탈 36건, 구타 13명, 강간 6명 등이었다.[7] #

4. 역사적 평가



4.1. 엇갈리는 평가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 중국 공산당 측의 평가는 대단히 우호적인데 반해 중화민국 계열이나 한국 역덕 커뮤니티에서의 평가는 매국노, 저능아 취급이다. 거의 원균이나 무다구치 렌야에 비견될 정도의 트롤러로 비판을 받는다.
특히 시안 사건으로 중국 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중화인민공화국 측에서는 시안 사건을 '구국의 결단'으로 평가하여 그를 제 2차 국공 합작을 이루어내 항일 전쟁에 공헌한 애국자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실 장쉐량이 시안 사건을 일으킨 이유가 뭐든간에 시안 사건이 아니었다면 중국 공산당이 소멸되었을지도 모르니 어찌 보면 당연한 평가일 것이다. [8] 2016년에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少帅(청년 원수)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제작, 방영되기도 했다.
반면 중화민국중국 국민당에서는 그야말로 역적 취급. 공산당, 일본제국의 프락치로 취급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행적 덕분에 '''한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장제스는 '''"8년간 들인 공(공산당 토벌 작전)이 불과 2주일 만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라고 치를 떨었다.
또한 장쉐량은 행적 외에도 인성과 역량, 인간상의 측면에서도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장쉐량은 특유의 귀공자스러운 곱상한 외모로 인해 공산당 측의 다큐멘터리나 드라마 같은 매체에선 한없이 영웅으로 미화되고 있다. 반듯하고 올바른 청년 혁명가 그 자체로, 거의 정의의 용사 급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반면 비판 측에서 장쉐량을 평가할 땐 외모와 정반대로 인격이 비열하고 이기적이라는 평이 많이 나온다. 한 마디로 견부호자라는 것. 허허벌판이었던 동북지방을 공업화시키고 중국 최대급의 세력을 일궈낸 아버지 장쭤린의 그릇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장쉐량은 전형적인 후진국 독재자스러운 면모, 비유하자면 김정일, 김정은와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파티를 신나게 벌이다가 수틀리면 부하를 잔인하게 사살하거나 아편, 사치와 향락에 몰두하는 등의 모습 말이다. 후술되겠지만 장쉐량은 특유의 기이한 행보를 많이 보였다. 대표적으로 만주 사변에서의 대응이나 시안 사건에서의 괴이한 행적 같은 것들 말이다. 하도 이해가 안되는 판단 때문에 일각에선 방탕한 사생활 및 아편 중독 때문에 머리가 망가져 대국을 그르친 것인가 하고 추측을 할 정도.
사실 이 시안사건만 아니었으면 중국 공산당 자체를 소멸시킬 수 있었고 국민당이 중국을 통일할 수도 있었으니 이렇게 치를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물론 국민당 자체가 본인들조차 참패의 원인과 문제점을 국민당 내부에서 찾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내부의 부패와 분열 때문에 국공내전에서 패한 것이라 장쉐량 혼자 욕먹기에는 약간 억울한 감도 있긴 하다.
장쉐량 본인은 육성 회고록에서 '군인으로서는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으나, 이 일에 대해서는 양심에 있어서 떳떳하다. 1936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주저 않고 다시 시안 사건을 일으킬 것이다' 라고 하여 이 사건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육성 회고록은 장쉐량이 아직 연금 상태였던 1990년대 초에 녹음된 것이며 본인이 컬럼비아 대학에 기증했다. 양안 관계로 인해 이 자료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회고록에서 장쉐량은 장제스가 중국을 통일할 인물이라고 생각했기에 풀어 주었으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

4.2. 만주 사변과 부저항 장군


만주 사변 당시 동북군에게 내렸던, '저항하지 말고 관동군에게 협조하라'라는 부저항 명령 때문에 만주 전역을 일본에게 빼앗긴 점에 대해서도 큰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부저항'이란 꼬리표가 아직도 유행할 정도다. 원균 하면 칠천량 참패를 떠올리듯, 장쉐량 하면 '부저항 장군'으로 통하는 급으로 낙인이 찍혀 버린 것.
장쉐량은 1만 명 수준의 관동군의 침략에 무대책으로 방관했다. 질은 처참했으나 어쨌든 규모만은 거대했던, 정규군만 30만 규모의 최대 군벌세력인 동북군을 가지고 말이다. 요충지가 시시각각으로 함락됨에도 상황 파악은 하지 않고 늘상 있던 국지도발에 불과할 것이라 치부하며 외교적 협상에만 목을 맸다. 기도 메타에 올인하며 그야말로 우유부단하고 지리멸렬한 대응으로 일관한 것이다. 덕분에 중국 공업력의 코어였던 만주를 순식간에 실함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은 장쉐량이 군벌로서 동북 지방은 팽개친 채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화북 지방의 땅따먹기에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행보라고 욕을 먹는 부분.
장쉐량은 수하들의 봉천 복귀 권유도 무시하고[9] 동북군의 기량이 처참하게 몰락하는 것도 방치한 채[10] 주력 부대 절반을 북경에 박아두고 있었다. 동북 지방에 잔류한 부대는 질이 형편없었고 만주의 상황이 심각함에도 주력부대는 북경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방관에 더한 부저항 지시 때문에 그나마 전투력이 있는 동북군들도 제대로 된 대응이 되지 않은 채 처참하게 박살이 나버리거나 관동군에 고스란히 항복했다. 결국 전쟁 발발 이후 고작 몇개월 만에 만주가 날아갔다. 중국은 만주 상실로 인해 중국 최대 규모의 수많은 중공업 시설과 군수품 생산단지를 날려먹음으로서 전쟁 동력에 크나큰 데미지를 입게 되었다. 거의 중국을 팔아먹은 매국노로 봐도 될 정도의 행적이다.
시안 사건 당시 장쉐량이 내세운 명분이 동족끼리 싸우지 말고 일제에 대항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항일투사 코스프레는 실컷 하는 인간이 정작 일본이 침략해 왔을 때 내렸던 명령은 일본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었으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장쉐량이 적극적으로 나라를 망칠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내릴 수가 없는 미스테리한 명령이다. 장쉐량 본인은 '당시 일본의 의도를 몰라서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나의 책임이다. 일본의 침략 의도를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책임을 인정하였다.
시안 사건에서 내세웠던 장쉐량의 항일 명분은 정말 코스프레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장쉐량은 일본은 무서워하면서도 훈련 등의 군대 강화 노력 역시 도외시했다. 아버지 장쭤린을 폭사시킨 게 일본인데 복수를 위한 군비 강화는 커녕 일본 영사에게 친일 약속이나 해대며 정권의 생존을 위한 줄타기만 하던게 장쉐량이었다.
때문에 만주사변 막바지인 1931년 말 관동군의 남하 상황에서 남경정부의 항전 지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쉐량의 선택은 오로지 후퇴였고 관동군은 진저우에서 무혈입성했다. 더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장쉐량이 남경정부의 중앙군 북상 제안을 얼버무리는 식으로 거절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화북 세력권이 침탈당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만주 사변 이후에도 장쉐량은 자기 세력권 보존과 병력 아끼기에만 몰두하며 군벌스러운 행태만을 보였다.

4.3. 장쉐량은 도대체 왜 그랬는가


한편으로는 만주사변 때 장쉐량이 이런 짓을 한 이유로, 장쉐량이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장쉐량은 아편에 중독된 상태였고 이 때문에 건강이 크게 망가져 있었다. 외모만 봐도, 동북역치~만주사변 때와 시안 사건 이후 연금 생활을 할 때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확연하게 차이난다. 이런 건강 문제 때문에 장쉐량이 판단력이 흐려져서 '부저항'이란 결정을 내린게 아니냐는 해석이다. 장쉐량이 수하들의 봉천 복귀 권유를 무시하고 만주 아닌 베이징에 박혀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아편 중독설 외에도 여색 혹은 연극 관람에 빠져 있었다는 설과 장티푸스를 치료 중이었다는 설, 혹은 장티푸스를 핑계로 아편 중독을 치료했다는 설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차이잉원 정부에서 당시에 장쉐량과 장제스 사이에 오갔던 전보문[11]을 공개하면서, 통념과는 달리 장쉐량은 일본의 야욕을 알고 있었으며, 부저항은 오히려 장제스의 의도였다는 주장이 제시되고 있다.[12]
다만 이런 주장도 설득력이 부족한 것이 장쉐량은 장제스의 명령을 무시하는 상태였고 만주의 독립세력으로 컨트롤이 거의 되지 않았다.[13] 세금도 안 보내고 온갖 명령을 다 씹던 인간이 부저항만 장제스가 시킨대로 했다는 주장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만에 하나 부저항이란 명령이 내려왔다 한들 장쉐량이 매번 하던 것처럼 명령을 무시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었으니 부저항은 철저하게 장쉐량 본인의 의중에 맞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한 위의 전보문은 장쉐량이 일본의 야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설명해주지만 장제스가 부저항이란 명령을 내렸다는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윗 문단의 주장은 장쉐량을 추켜세우고 장제스를 깎아내리고자 하는 중국 공산당 측의 입맛에 맞는 내용이며[14] 통념을 반박하기는 커녕 전형적 음모론에 가까운 것이다. 또한 '장제스가 부저항하라고 장쉐량에게 시켰다, 모두 장제스 때문이다'라는 주장이 오히려 기존의 통념이며, 현대 중국 공산당이나 중국인들의 일반적 상식에 가깝다. 그런 내용의 책들이 한국의 서점에 깔려 있고 도올 같은 대중지식인이 TV에서 그게 정설인 것마냥 강의하는 것이 현실이다.
장제스는 왕징웨이와의 내전[15], 초공작전까지 중지하려는 움직임과 함께 군대를 북상시켰다. 만주사변이 아니었다면 광저우 정부는 지속되지 못했을 것인데 만주사변에 대응하느라 모든 것이 틀어지게 된 것이다.[16] 또한 국제연맹에 일본의 침략을 제소함과 함께 장쉐량의 단독협상 시도를 막으려 했다. [17] 부저항과는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는 움직임이다. 장제스가 장쉐량에게 부저항 지시를 내렸다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으나 증거가 딱히 없는 상황이다.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근거는 장쉐량의 비서장 궈웨이청의 회고다. 장제스가 전화를 통해 장쉐량에게 부저항하라는 지시를 몇번이고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료 등으로 보충되지 않는 개인의 주장에 불과하며 장제스는 신중한 대응과 지속적인 보고를 요청했을 뿐 사태 파악이 전혀 되지 않는 상태로서 지시를 내릴 만한 여건이 전혀 안되어 있었다. 만주사변 이전에도 장쉐량은 독립왕국의 군주 격으로서 장제스는 그저 장쉐량의 여러 행동을 묵인할 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장쉐량 스스로도 NHK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부저항은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고 밝힌 바 있다.
만주 사변 이전까지 장제스의 대일방침이 충돌을 삼가며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었고[18], 장쉐량의 판단이 이런 방침에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고 가정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간첩혐의자에 대한 총살이었던 나카무라 사건과 연대 규모 병력의 기습으로 본격화 된 만주 사변은 차원이 다른 사건이다.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는 방침이 일본의 자작극에 반응하지 말고 전쟁 위협을 회피하란 것일 수는 있겠으나 이미 전쟁을 걸어온 일본군에 자동문을 열어주며 총 한발 안 쏴보고 두들겨 맞으면서 만주를 넘겨주라는 내용일 리는 없다. 남경에서 내부수습에 정신을 못 차리던 장제스가 만주의 사정이 파악이 되었을 리도 없고 일본이 도발을 해오는지 전쟁을 걸어오는지 파악하고 적절한 대처를 내려야 했던 건 장쉐량이었다.
장쉐량이 일본의 전력을 과대평가하거나 겁에 질려 있었고, 때문에 확전을 극도로 회피하며 단독협상에 눈이 멀었다고 해석하는 쪽이 자연스러우며 실제 행적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일단 장쉐량의 동북정권은 근본 자체가 일본에 의존적이었다. 동북정권이 만주, 화북을 아우르는 거대 군벌로 성장하는 데에 일본의 지원이 핵심적 역할을 했고 이건 장쭤린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장쭤린은 지속적으로 일본에 이권을 뜯겨왔고 종국에는 반쯤 조종당하시다시피 하는 처지로 전락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장쭤린은 여기에 저항하다가 일본에 폭사를 당해버렸다. 그러나 동북정권은 창업자의 폭사라는 전무후무한 사태를 목도하고도 복수는 커녕 여전히 일본에 굴종하며 장제스와 일본 사이에서 간을 볼 뿐이었다.
동북정권의 수뇌부엔 친일 성향의 인물들이 수두룩하게 포진되어 있었다. 장징후이 같은 원로들은 만주사변 당시 관동군에 적극 협력하며 만주국 성립 이후 총리가 되기까지 했다. 또한 장쉐량은 소련 등의 열강에 처참하게 깨지는 동북군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관계를 이어오고 있던 일본에 대한 외교적 협상 외의 다른 해결책을 전혀 모색하지 않았다.
다만 관동군은 일본 본국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광인처럼 날뛰는 상태였으므로 부저항과 협상, 외교적 시도는 전혀 먹히지 않는 상황이었다. 통제는 커녕 일선 지휘관들이 개인의 공적을 위해 자기 맘대로 도발과 침공을 일삼고 정부가 거기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게 일본이었으니 말이다.
일단 야욕에 불타던 관동군은 절대로 만주 침략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부저항 지시를 내려봐야 관동군에 자동문을 열어주기만 할 뿐, 결과적으로는 만주를 송두리째 넘기는 꼴이 되어버린 것.

4.4. 시안 사건 - 만주의 통치자로서 취한 당연한 선택(?)


시안 사건에서의 장쉐량의 행적도 자기 땅 지키는 것에만 관심 있는 '''봉건제 영주'''의 마인드로 이해하면 잘 맞는다.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승계한 만주 국왕으로 보면 기이한 행동들이 대체로 설명이 된다.
1. 만주는 내 땅이다. 통치는 당연한 내 권리.
2. 근데 장제스가 (내가 날려먹은) 만주 수복을 안 해주고 벽지에 쳐박고선 공산당과 싸우라고 한다.
3. 어? 졌네? 열받네? 만주는 못가고 군대는 날리고 나만 억울하네?
4. 공산당 : 장제스는 항일은 안하고 동족이나 죽이는 놈임. 우리 싸우지 말고 같이 항일하면서 만주도 수복하자.
5. 와, 내 맘 알아주는 건 너 밖에 없어! 빨리 쿠데타해서 장제스를 붙잡은 다음 만주 쳐들어가자고 협박해야지!
시안 사건 덕분에 공업력과 공세 역량을 성장시키며 전선을 유지하다가 1940년 이후에 만주를 수복하려 했던 장제스의 대전략은 어긋났으며 중일전쟁에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게 되었다. 후스가 당시 중국이 일본과 싸울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고 지적한 것처럼 개전시점이 완전히 어긋나 독소전에서의 소련과 같은 참담한 패전을 수도 없이 겪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섬멸 직전의 위기에 몰려 위태로웠던 공산당이 살아남아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고 중일전쟁 이후 공산당이 승리하는 발판이 되었다. 즉 장쉐량의 2회에 이은 트롤링은 중화민국 대전략 붕괴와 몰락의 제1원인이나 다름없다. 이러니 중국 공산당이 장쉐량을 고평가하며 빨아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공산당측 사관을 거의 그대로 대변하는 도올 같은 학자의 경우에도 장쉐량과 시안 사건을 대단히 고평가하고 있다. 중국 민족의 좌우 분열을 그치게 하고 단합하여 일제에 항거하게 만든 영웅적 행적으로 평가하는 식이다.
공산당 토벌 작전이 실패한 이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났고 이것이 김일성6.25 전쟁 개전의 계기가 되었음을 고려하면 한국에 미친 나비효과도 컸다고 할 수 있다.

4.5. 각종 매체에서


일본 요미우리 신문사의 중국 특파원 출신 아라이 도시아키는 자신의 저서 '반역자'에서 중국 역사의 반역자 중 한 사람[19]으로 그를 꼽았다. #
국내에서도 96년 ~ 97년 경 KBS 2TV에서 방영해준 '견자단정무문'에서 단역으로 잠깐 등장한 적 있다. 물론 실제 장학량 본인이 등장한 건 아니고, 일본의 장작림 폭살 음모 에피소드에서 등장해 진진과 잠시 권법 한 수를 겨루기도 했다. 장작림 살해 후, 진진에게 원수 같은 일본 놈들을 반드시 몰아내야 한다는 항일 정신을 배우는 것으로 그려진다.

5. 가족관계


부모 형제에 관해서는 장쭤린/가족관계 문서 참조.

6. 주요 경력


'''봉천군벌 역대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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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장쭤린

'''2대 장쉐량'''

7.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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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8. 같이보기



[?] 출생 연도에 관해선 논란 있음.[1] 이때 베니토 무솔리니 영도 하의 이탈리아 등을 방문하여 파시즘에 호의적인 생각을 품고 장제스를 파시즘 지도자로 내세워 중국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2] 이후 그와 함께 서안 사건을 일으킨다.[3] 외모라는건 상대적인 기준이기도 하고, 잘생긴 사람이 따져보면 귀한건 아니다 보니 4공자, 8공자, 10공자까지도 들며, 군벌 자녀 뿐 아니라 극작가 메이란팡, 후스등 비군인, 순리런, 장링푸 등 중일전쟁기의 장군들, 거기다가 저우언라이, 왕징웨이, 하다못해 장제스도 든다.[4] 다만 린뱌오의 경우는 비행기 사고로 사망.[5] 사망원인은 방광암.[6] 근데 사실 마오쩌둥은 여자도 꽤 즐기기는 했다. 식생활을 어느정도 절제하기는 했지만.[7] 이명종, 근대 한국인의 만주인식 연구 = The Koreans' discourses on Manchuria during the modern period, 2014, 185쪽[8] 다만 국내 역사 커뮤니티에서는 이 같은 공산당 측의 해석이 역사왜곡에 가까운 것이라는 비판도 많다. 아무리 장쉐량의 시안 사건 같은 행적이 공산당에 도움이 됐다 한들 만주사변에서의 역적스러운 행동까지 정당화시키지는 못하며 인생 전반을 되돌아 볼때 이기적인 군벌로서의 행보만 보일 뿐 딱히 애국자의 모습을 보인 적이 전혀 없다.[9] 장쭤샹 같은 동북군 원로들은 관동군의 동태가 심상찮음을 보고하며 봉천 복귀를 지속적으로 권유했다.[10] 장쉐량은 집권 초기 소련을 상대로 군사적 모험을 걸어댔는데 처참하게 발렸다. 관동군 관전무관에게 오합지졸 잡군이라는 비아냥을 살 정도였다.[11] 장쉐량이 보낸 전보문 중 일부분 원문: 近來對日外交性情緊迫, 彼國朝野上下'''公然密謀侵佔我東北'''(彼方謂為滿蒙), 勢甚積極, 不可終日.(근래 대일 외교의 형세가 긴박합니다. 일본은 조정과 재야 상하를 가리지 않고 공공연히 우리의 동북(그들 말로는 만몽)을 침공할 것을 밀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 또한 적극적이며 끝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12] 이와 같은 주장이 한국어 위키백과에도 그대로 실려 있는데 중국 공산당 측 사관이나 아라이 도시아키의 저서 반역자의 내용을 그대로 따온 부분이다.[13] 장제스는 명목상으로만 중국을 통일했을 뿐 중국의 각지에 각자도생하는 거대 군벌들이 깔려 있는 상태였다. 운남왕이라고까지 불리던 룽윈, 중앙의 법제도에 저항하여 독자화폐까지 만들던 계계군벌, 산서 군벌, 섬서 군벌 등 중국은 이합집산하는 군벌들의 느슨한 집합체였다. 특히나 장쉐량의 경우 중국을 통일할 뻔했다는 평을 듣는 아버지의 거대한 세력을 물려받은 중국 유력 군벌이었다. 비유하자면 장제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마냥, '당신이 섬서성 유력자니까 그쪽 전선은 당신 군벌이 담당하시오'식의 느슨한 지배력 정도만 행사할 수 있는 정도였고 직접적 통제력이 미치는 영역은 난징 일대의 한정된 지역에 한했다. 거대군벌들은 일본의 전국시대마냥 거대한 병력을 유지하며 왕처럼 군림했고 중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벌이 난립하는 상태가 유지된다. 이같은 모래알 조직력은 중일전쟁 초기 참패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14] 중국 공산당은 항일전쟁에 나서던 국민혁명군을 기습하는 등 중일전쟁의 혼란 속에서 세력을 키우는 것에만 골몰했던 원죄가 있다. 때문에 항일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애썼다.[15] 1차 양광사변은 대단히 심각한 사태였고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일본에 저항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16] 광저우 정부의 왕징웨이 같은 인물들은 만주사변이 벌어졌음에도 항일은 도외시하고 장제스 하야와 집권에만 목숨을 걸었고 일본과 협상하여 만주 점령을 용인하려고 들기까지 했다. 이후 이들은 친일파로 변질된다.[17] 동북군과 관동군의 국지적 사태가 아닌 국가 단위의 문제로 본격화시키기 위함이다.[18] 일본과 중국의 전쟁역량은 상대가 안 되었고 1937년 시점에서도 중국이 개박살이 날 정도였기 때문이다.[19] 해당 서적은 역사적 파장이 거대했던 반역자들을 다루는 책이다. 다만 책의 특성상 반역자들을 대단히 낭만적, 영웅주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장쉐량도 '장제스를 감금한 청년 장군' 같은 식으로 미화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중국 공산당 사관과 별 다를바 없는 시각이 되는 것. 다만 마오쩌둥 등 일부 인물에 한해서는 홍위병 사태 같은 흑역사도 다루며 공산당을 만들고 스스로 파괴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20] 장제스와의 연합 후 쑨원 묘소에서 장쉐량(좌)와 장제스(우)[21] 1953년 징상 온천에 연금된 장학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