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라이엘

 


'''찰스 라이엘
Charles Lyell
'''
'''출생'''
1797년 11월 14일 스코틀랜드 앵거스
'''사망'''
1875년 2월 22일 (향년 77세), 잉글랜드 런던
'''국적'''
영국 [image]
'''직업'''
지질학자
'''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수상'''
로열 메달[1]
코플리 메달[2]
월스턴 메달[3]
'''배우자'''
메리 호너 라이엘
1. 개요
2. 생애
3. 업적
3.1. 지질학 원리와 동일 과정설
3.2. 진화
3.3. 고고학
4. 평가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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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대 라이엘 준남작 찰스 라이엘(Sir Charles Lyell, 1st Baronet, FRS, 1797년 11월 14일~1875년 2월 22일)은 영국의 지질학자이다.
스코틀랜드 앵거스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지질학을 배우고, 1826년 왕립 학회 회원이 되었다. 로더릭 머치슨과 함께 이탈리아의 해성 제3기층을 연구하였으며, 이것이 동기가 되어 제라르 폴 데샤예의 힘을 얻어 백분율법을 완성하였다. 1830년 《지질학의 원리》라는 책을 썼는데, 허턴이 주장한 "현재는 과거에 대한 열쇠이다"라는 견해 아래서 지질 현상을 통일적으로 설명하고, 지질학의 근대적 체계를 확립하였다. 지질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2. 생애


1797년 스코틀랜드의 앵거스 키노디(Kinnordy)에서 10명의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라이엘의 아버지는 식물학을 즐기고 있었으며, 어린 라이엘에게 자연을 탐구하는 즐거움을 일깨워 주었다. 라이엘은 유년기를 뉴포레스트(New Forest)의 바틀리 롯지(Bartley Lodge)에서 보냈고, 자연계에 매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옥스퍼드 대학교 엑서터 칼리지에 다니며 지질학을 접했고, 윌리엄 버클랜드(William Buckland)의 지도하에 열심히 공부했다. 1816년 졸업한 이후엔 법률을 다루는 일로 주업을 삼았지만, 라이엘은 지질학에도 관심을 놓지 않고 두가지 일을 병행하였다. 라이엘은 1822년에 최초의 논문 〈On a Recent Formation of Freshwater Limestone in Forfarshire〉를 발표하고, 1827년 즈음에는 결국 법률 일을 단념하고 본격적으로 지질학에서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1830년 킹스 칼리지 런던 지질학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830년부터 1833년까지 《지질학의 원리》(Principles of Geology) 초판 3권(합계 약 1200페이지)을 썼다. 이것은 라이엘의 최초 간행물이자 가장 유명한 간행물이며, 라이엘이 지질학 이론가로 자리매김을 하게 해 준 책이다. 이 《지질학의 원리》가 바로 수 십년 전에 제임스 허턴에 의해 제창되던 아이디어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을 널리 세상에 알린 저서이다.
1840년대 라이엘은 미국캐나다로 여행했다. 이 때의 경험은 1845년의 《북미여행》과 1849년의 《미국 두 번째 방문》 등 지질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 기행문을 쓸 수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1875년 77세의 나이로 타계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3. 업적



3.1. 지질학 원리와 동일 과정설


라이엘은 제임스 허턴의 뒤를 이어 동일과정설을 주장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지질학원리는 기본적으로 동일과정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동일과정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현재는 과거의 열쇠이다.” 즉, 현재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자연현상은 과거에도 똑같이 일어났기 때문에 현재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현상을 이해하면 과거 지구에서 일어났던 일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 “지구 역사는 언제 시작했는지 알 수 없고 또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도 없다.” 이는 지구의 역사가 무한히 길다는 것을 표현한 진술로서, 현재 지표면에서 일어나는 과정(풍화→침식→운반→퇴적→암석화→융기→풍화)은 매우 느리게 일어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관찰에 바탕을 둔 결론이다.
라이엘은 〈지질학원리〉에서 지표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매우 느리게 일어난다고 해도 그러한 현상이 오랫동안 쌓이고 쌓이면 암석에 기록을 만든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한 예로 지중해에 있는 시칠리아 섬의 에트나 화산(높이 3,323m)은 현재 엄청난 양의 용암을 뿜어내고 있지만, 지난 수천 년 동안 분출한 용암의 양으로는 그처럼 높은 화산을 만들 수 없다는 점을 들었다. 에트나 화산처럼 높은 화산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 걸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라이엘은 격변론자들이 격변론의 증거로 제시한 현상을 동일과정 이론으로 설명하는 일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유럽 곳곳에서 발견되는 미아석은 격변론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큰 폭발이나 홍수 때 떠내려 온 것이 아니라 바다가 대륙을 덮었을 때 바다를 떠돌던 빙산에 박혀있던 돌이 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이엘이 〈지질학원리〉에서 특히 강조하려고 했던 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연현상에서 초자연적인 것은 없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격변론자들이 틀렸다는 점이었다.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의 지질학 교수였던 세지윅(Adam Sedgwick, 1785~1873)은 라이엘의 〈지질학원리〉를 칭찬했지만, 격변론자였던 세지윅은 시대에 따라 발견되는 화석의 종류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물계가 항상 똑같았다는 동일과정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지질학원리〉에 대한 세지윅의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라이엘의 이론에 대한 당시 학계의 반응은 상반되었다. 라이엘의 명쾌한 논리적 전개와 제시한 증거에 찬사를 보내는 한편,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과거나 현재나 항상 똑같다는 동일과정설의 기본 개념에는 의문을 제기했다. 만일 라이엘이 생각하는 것처럼 지구가 엄청나게 오래되었다면, 그처럼 오랫동안 지구를 항상 똑같은 상태로 움직이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것이 반론의 요지였다.

3.2. 진화


1831년 12월 27일 시작한 〈비글호〉의 항해를 떠나기 전에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는 항해의 동반자로 선택한 찰스 다윈에게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 1권을 선물한다. 이후 찰스 다윈은 5년간의 항해에서 이 책을 탐독하였으며, 그의 진화론이 세상에 나오는데 많은 도움을 준 책이 되었다. [4]

3.3. 고고학


찰스 라이엘이 창시한 층서학은 지구의 태고성을 밝혔고 이는 역사 이전 시대의 연구 필요성을 자각시켰다. 즉 이는 고고학의 필요성을 만들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고고학의 편년 체계에 이용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특히 지층수평의 법칙과 지층 연속성의 법칙은 층위를 통한 유구의 발견과 순서배열에 큰 도움을 줌으로서 고고학의 탄생에 기여했다.

4. 평가


라이엘은 동일과정설을 지질학계에 받아들이게 하고 격변론을 밀어냈다는 점에서 기존의 성경을 기반으로 하였언던 지질학을 기독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하고 지질학을 본격적인 과학으로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동일과정설이 너무 과도하게 받아들여진 나머지 앨버레즈 부자가 K-Pg 멸종의 원인을 소행성 충돌로 주장할때까지 대멸종에 대한 지질학계의 부정적인 인식을 만들어내었다.

5. 관련 문서


[1] 왕립학회가 매년 영국 연방에서 "자연에 대한 지식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두 사람과 "응용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공헌을 한" 한 사람에게 주는 상[2] 과학 업적에 대해 수여되는 가장 오래된 상[3] 참고로 찰스 다윈도 이 3개의 상을 수상했다.[4] 찰스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은 지구의 나이를 증가시킴으로서 진화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