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

 



1. 소개
2. 생애


1. 소개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1st Earl of Chatham, 1708년 11월 15일~1778년 5월 11일)는 영국의 수상이다. 둘째 아들이자 수상을 역임한 아들과 대비하여 이쪽은 대(大)피트라고 불린다.

2. 생애


웨스트민스터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27세에 하원에 입성했으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는 재무성의 육군 담당 회계장관을 역임했다. 7년전쟁 발발 당시인 1756년 국방장관에 임명될 당시 "나는 이 나라를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구할 수 있음을 자신한다"라는 호기로운 말로 취임했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영국은 피트가 고안해 낸 전략에 힘입어 승리를 쟁취했다.
그는 영국이 유럽 내 영토전쟁보다 식민지에 치중하도록 이끌었으며 이를 위해 대륙의 프로이센을 지지했다. 여러 전장에서 적을 동시에 상대하면서 프랑스를 주적으로 삼았지만 동시에 전통적으로 프랑스를 싫어한 영국인이 이 기나긴 전쟁을 지지하게끔 했다. 1761년 조지 2세가 죽고 그를 싫어했던 조지 3세가 즉위하면서 그를 강제로 국방 장관에서 해임했지만[1] 피트는 영국이 전쟁에서 이미 이길 수 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그는 1766년 총리로 취임하였으나 몇 년 후 영국 의회가 아메리카 식민지에 세금을 과도하게 물리는 근시안적인 정책을 시행하자 이에 반대하다가 사임하였다.
피트는 1778년 5월 11일 그에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Iliad〉 중 헥토르의 장례식 장면을 읽어주던 아들 윌리엄의 품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장관을 이룬 장례행렬과 국민들의 슬픔을 뒤로 하고 생전에 원했던 대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1] 조지 3세 입장에서 분노할 만한 게 피트가 내놓은 전략은 왕조의 뿌리인 하노버를 지키는 것이 국왕의 이익이지 나라의 이익은 아니므로 하노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