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피트

 


'''영국 제16/18대 총리
The Right Honourable[1]
William Pitt'''
'''본명'''
William Pitt the Younger[2]
윌리엄 피트
'''국적'''
영국 [image]
'''출생'''
1759년 5월 28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켄트 주 헤이스
'''사망'''
1806년 1월 23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서리 주 푸트니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펨브룩칼리지
(수학, 고전학 / 졸업) (1773-1778년)[3]
'''직업'''
정치인
'''정당'''
'''토리당'''
'''재임 기간'''
1기: 1783년 12월 19일1801년 3월 14일
2기: 1804년 5월 10일1806년 1월 23일
1. 소개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의 피트
4. 관련 문서

[clearfix]

1. 소개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1759년 05월 28일 ~ 1806년 01월 23일)는 영국정치가이자 총리(수상)이다. 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大 피트)의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난 둘째 아들로 역시 영국 총리를 지낸 아버지와의 구분을 위해 소(小) 피트라고 불린다. 프랑스 혁명전쟁 당시 전시내각을 이끌었던 것과 어릴적부터의 친구였던 윌리엄 윌버포스와 함께 영국에서의 노예제도를 폐지한 공로로 유명한 총리.
휘그당에서 폭스와 대립하여 갈라져 나와[4] 토리당의 당수가 되었고, 당수로서 1783년 24세(!)의 나이에 영국의 수상이 되었다. 1801년 수상직에서 물러났으나 1804년 다시 선임되어 사망할 때까지 역임하였고, 재무장관을 겸직하기도 하였다. 피트가 재임한 조지 3세의 재위기간 동안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과 같은 큰 사건들이 있었다.
어머니 헤스터 그렌빌은 8대 총리 조지 그렌빌의 여동생이며 사촌인 윌리엄 윈덤 그렌빌 또한 19대 총리이다.

2. 생애


피트는 켄트 주의 하이즈에서 윌리엄 피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병약하였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펨브로크 컬리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고, 정계에 진출해 22세에는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24세에 최연소 총리가 되었다. 하원의 반대당은 그를 무시해 비웃었으나 피트는 1784년 총선거에서 크게 이긴 후, 17년 동안 정권을 잡았다. 피트는 미국 독립 전쟁 이후 영국의 경제를 재건하는데 힘썼으며 자유무역주의를 존중하여 시민 계급의 지지를 받아 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피트는 '대프랑스 동맹'의 중심이 되어 국내의 개혁 운동과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했다. 1801년 아일랜드 합병에서 가톨릭 해방 문제에 관련해 조지 3세와의 알력으로 물러났지만, 새 내각의 실패로 1804년 다시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거국 일치 내각은 지지부진했고,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의 활약으로 큰 승리를 거뒀음에도 대프랑스 동맹이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패했다. 그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후 머지않아 런던에서 사망했다. 다만 충격만으로 죽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고, 이미 오랜 공직 생활에서 누적된 과로에다가 평생의 습관이었던 과도한 음주로 인해 건강이 상당히 나빠진 상태였고, 그것이 진짜 중요한 사인이었다. 실제로 50세도 되지 않은 신체 건강한 사람이 아무리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해서 갑자기 죽어버리는 일은 드물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의 충격을 받은 나머지, 24시간 동안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고 하며, 이를 딴 '아우스터리츠 안색'이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세상과 하직하기 전 "지도를 치우게. 앞으로 10년 동안은 필요없을 거야(Roll up that map; it will not be wanted these ten years)."라고 탄식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유럽 전체가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들어갈테니, 굳이 지도로 국경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 영국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이기고, '''로스차일드 가문이 대불동맹 각국에 사실상 무기한으로 빌려준 막대한 자금 지원을 끼고도''' 대륙의 판세가 한방에 나폴레옹에게 넘어갔으니 분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미국 독립전쟁과 식민지 무역 단절 등으로 국가부채가 쌓였을 때 총리에 올라서 재정혁신을 단행하기도 했다. 프랑스 등과 낮은 관세로 협정(1786)을 맺었으며, 광범위한 간접세를 도입했고, 1799년에는 연 200파운드 이상 수입에 대해서 10%의 '''소득세'''를 도입해서 전쟁비용을 크게 충당했다.
피트는 영국의 흑인 노예제도에 대한 폐지운동을 돕다가 별세하여 그 끝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그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법원에서 지지 않고 노예제에 대한 폐지를 호소하여, 결국 영국은 1807년에 노예무역이 폐지되었으며 1833년에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그가 이루지 못한 또다른 목표였던 영국 가톨릭 해방도 비슷한 시기에 실현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의 피트


윌리엄 윌버포스의 일대기를 다룬 어메이징 그레이스에서 윌버포스의 절친이자 든든한 지원군으로 나서며 의회에서 윌버포스의 노예제 폐지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으로 나온다. 배우는 셜록으로 유명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맡았는데 초상화 사진이랑 비슷할 정도로 싱크로율이 좋아 굿캐스팅이라는 소리가 들린다.
나폴레옹 토탈워에서는 시작시 영국의 외무장관으로 등장. 높은 인지도를 가진 인물임에도 능력치는 3성, 평균에 불과하다.

4. 관련 문서



[1] 총리 본인에 대한 경칭[2] 뒤에 the Younger가 붙은 것은 아버지(1700년생)의 성함도 "William Pitt"라서 구분짓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3] 입학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매우 이른나이에 대학에 진학한 것이다. 다만 건강상태가 좋지않아 정식 학위를 수여받지는 못했고 대신 학교에 계속해서 머물러 법학원에서 법률공부를 꾸준히하여 1779년에 변호사 자격증을 얻었다,[4] 이때 같이 따라 나온 이 중의 하나가 보수주의를 거의 창시한 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다. 자유주의에서 존 로크의 위치에 있다고 봐도 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