챈슬러스빌 전투
1. 소개
남북전쟁 기간에 벌어진 전투 중 하나. 1863년 5월 1일~6일 즈음에 챈슬러스빌 지역에서 13만 3868명의 북군(포토맥군)과 6만 892명의 남군(연방군)이 맞붙은 전투이다.
전투가 일어난 챈슬러스빌 근처는 1862년 프레데릭스버그 개울가에서 남군에게 닥돌한 북군이 남군의 스톤월 잭슨에게 도륙당한 프레데릭스버그 전투가, 이후 북군 대장이 율리시스 그랜트로 교체된 다음 로버트 E. 리를 추격하다가 부하가 하도 많이 죽어 그랜트를 밤중에 울게 만든 스팟실베이니아 전투가 1864년 벌어진 나름 죽음의 땅이다.
2. 상세
포토맥군의 새 지휘관 후커는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이후 망가진 북군을 북부 자원의 힘으로 추스리고, 다수의 병력으로 로버트 리의 남군을 포위해 박살내겠다는 전략을 가진 채 전투 전 군대를 사열하러 온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이제 '''언제''' 남부의 수도를 점령하느냐는 문제만 남았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에 에이브러햄 링컨 왈, "그런데... 나는 암탉이 가장 똘똘한 동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놈은 알을 낳기 전에는 울지 않으니 말이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2]
북군은 계획대로 기동하여, 세지윅의 4만 군대는 4월 29일 밤에, 후커의 7만 군대는 4월 30일에 남군의 저항이 없는 가운데 강을 건너, 양쪽에서 남군을 포위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였다.
첫 총탄이 오간 것은 5월 1일 11시였는데, 교전 시작 후 후커는 로버트 E. 리의 명성에 쫄았는지, 현재 위치를 포기하고 숲으로 들어가 방어태세를 갖추라는 명령을 내려버렸다!
당시 2군단장 카우치 장군은 후일, "후커는, '그동안 우리는 성공적으로 기동하여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숲 속에 들어가 방어전투를 통해 그 동안의 성공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곁을 떠나면서 이 사람이 분명히 실성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라고 회고하였다고 한다.
리는 후커의 꼬락서니를 보고 상대의 생각을 간파하여, 세지윅 쪽 4만 병력 앞에 얼리의 1만 1천명만 남겨 견제하도록 하고, 6월 2일, 스톤월 잭슨에게 2만 8천 병력으로 북군의 우측면으로 19km를 우회기동하여 측후방을 기습하도록 하면서 그 동안 1만 3천으로 후커의 7만 북군을 견제하는 대담함을 보여주였다. 이는 근대 전쟁사에서 가장 훌륭한 전술 기동으로 손꼽힌다.
영화 Gods and Generals(2003) 후반에 묘사된 잭슨 부대의 기동(본격적인 돌격은 1:55초부터).
잭슨의 기동은 성공하였으나, 17시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북군에게 치명타를 먹이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세지윅 휘하의 레이놀즈군 2만명이 옮겨온 덕분에 북군은 거의 집중된 2배의 병력으로 남군의 두 부대를 박살낼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전투중에 남군의 포탄에 사령부가 피격을 당해 부상을 입은 후커는, 7만 6천명의 병력을 가지고 지휘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지휘권도 이양하지도 않은채 동쪽 2만의 세지윅군에게 전진할 것을 명하였다.
6월 3일 세지윅군이 프레데릭스버그 돌담을 돌파하고 얼리 군을 밀어내며 전진하자, 리는 맥그로우 사단을 급파하여 세지윅군의 전진을 지연시켰다.
후커가 움직이지 않을 것을 확신한 리는 6월 4일 앤더슨 사단을 추가로 세지윅 쪽으로 보냈고, 얼리 사단을 포함한 세 사단에 포위된 데다가 후커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화가 난 세지윅은 5월 5일 해뜨기 전 강을 건너 철수해버렸다. 이를 본 후커는 일부 부하 군단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월 5일 밤동안 철수하였다.
3. 전투 후
이 전투에서 어처구니없는 실책을 저지른 후커[3] 는 이후 결국 잘리고 후임으로 군단장이던 조지 고든 미드가 새 북군 사령관이 되었다.
리는 절반의 병력에도 불구하고, 두 배의 상대방을 포위하는 화려한 기동과 놀라운 공세능력을 보여주었다. 2일 잭슨의 우회기동은 남북전쟁 최고의 전술기동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러나 피해는 북군 1만 7197명(1606명 사망), 남군 1만 3303명(1665명 사망)으로, 피해 수준이 병력이 모자란 남군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더 컸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손실은 2일의 기습전 와중에 스톤월 잭슨 장군이 아군의 오발에 부상당하여 10일 사망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전쟁역사학자들은 전략적으로 숫적으로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거둔 남군의 승리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결론적으로 북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것에 실패하였으며, 남군은 스톤월 잭슨같은 유능한 장교를 잃었고 결정적으로 보급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슷한 숫자의 병력을 잃었다는 이유로 이 전투를 전형적인 피로스의 승리라고 보기도 한다.
잭슨은 과묵한 성격에 리의 명령을 잘 알아듣고 저돌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남군 최고로 손꼽히는 장군이었는데, 만약 그가 여기서 죽지 않고 게티스버그 전투까지 가서 롱스트리트의 위치에 있었다면 7월 3일 전투에서 북동쪽에서 이월의 포성이 들리지마자 주저없이 피켓 사단을 돌진시켰을 것이고, 그렇게만 되었더라면 게티스버그 전투는 남군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라는 게 만약을 달고 나오곤 하는 떡밥이다. 하지만 이는 역사학계에서 보통 부정당한다. 롱스트리트가 말했다시피 탁 트인 개활지에서 고지를 선점하고 엄폐물까지 있는 적을 상대로 하는 보병돌격은 성공할 수가 없다.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이를 증명했고, 피터스버그 전투에서도 이를 증명했다.
게티스버그에서 스톤월 잭슨의 빈 자리가 더 크게 나타난 것은 남군의 도박적 승부수였던 피켓의 돌격보다 첫 날인 7월 1일, '사단의 나머지가 올 때까지 전면 교전은 피하되, 가능하다면(if practicable) 세미터리 언덕을 점령하라'라는 로버트 리의 지시를 받고는 선두 병력이 지쳤고, 후위대는 다음 날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연방군 패잔병을 쫓아가 세미터리 언덕이나 그 옆의 컬프스 힐을 공격하지 않은 리처드 유얼의 결정이었다. 연방군은 다음날 남군이 북군 전선 중앙의 세미터리 언덕을 집중 공격하리라는 예상 하에 축성을 진행하는 중이었고, 로버트 리의 계획도 그 곳을 돌파해 연방군 전선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밤 새 완성된 참호선과 지원군의 도움을 받아 세미터리 힐의 북군은 게티스버그 전투 두번째 날과 세번째 날에 남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다. 만일 지휘에 익숙하지 않고 조심스러운 유얼 대신 공격적이며 리와 손발이 잘 맞는 잭슨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첫 날 세미터리 언덕과 컬프스 힐을 확보해서 두 번째 날의 전개가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다.
전쟁터는 1927년 미국의회의 허가를 얻어 프레데릭스버그와 스팟실베이니아 국립군사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 즉 '''"그렇게나 해놓고 얘기허드라고~."'''라고 한 건데 다시 설명하면 후커의 허풍이 평소에도 심했다는 증거이다.[2] 후커의 경우, 유달리 허풍이 심했다기보다는 기본적으로 항간의 평이 좋지 않았다. 언론에서 '싸우는 조(Fighting Joe)'라는 나름 멋진 별명을 붙여주긴 했지만, 병사들이 부른 별명이 '주정뱅이', '작업남(...)'이었고, 그의 지휘부는 파티와 도박으로 흥청거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하긴 술꼬장부리고, 여자를 꼬시고, 도박을 하는데 능했다면 확실히 허풍도 심했을 것 같기는 하다.[3] 전투 사상자 교환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북군은 '''후커 빼면 다 제몫을 했다.''' 후커가 공세만 제대로 취했어도 전투 결과는 북군의 압승일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