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브러햄 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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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미국 역사상 최초로 건국 당시 13주 이외의 지역에서 태어난 대통령이자 공화당 출신 '''첫''' 대통령이기도 하다.'''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게티즈버그 연설 中.
미국의 역사를 논하는데 빠질 수 없는 정치가로,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명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 평가에서 흔히 톱3로 불리는 대통령은 국부 조지 워싱턴과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프랭클린 D. 루스벨트, 그리고 링컨 정도인데[1] 이중에서 1위를 제일 많이 차지한 대통령이 링컨이다. 못해도 2위, 드물게 3위에 랭크되는 정도.# 역사학자 등 전문가와 대중 모두에게 고르게 고평가 되고 있다는 것 역시 특기할만한 점. [2]
그가 남긴 게티즈버그 연설은 지금도 인용되는 명연설로 꼽히고 있다. 분열된 미국을 남북전쟁으로 통합하여 본격적인 '''하나의 미국'''을 만들었으며, 흑인'''노예해방'''을 선언해 사실상 현대적 의미의 통합된 나라 미국을 만드는 초석을 다졌다. 링컨 본인도 연방주의자였고, 결국 북부의 승리로 나라가 통합된지라 건국 초기 해밀턴 때부터 내려오던 연방주의가 미국에 정착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미국 정부는 강력한 연방주의를 고수하고 있는데, 가끔 가다 일부 주에서 연방 탈퇴 드립을 쳐도 대다수가 드립성 발언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국가 통합과 인권을 위해 활약한 대통령으로 딱히 인종/정파 가리지 않고 존경받고 있다. 다만 후술되어 있듯 살아생전엔 되레 실패도 많이 겪었으며, 이러한 실패가 역설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그의 다사다난한 일대기는 지금도 대중매체에 종종 소개된다.
2. 생애
2.1. 낙선, 실패, 패배로 점철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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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 2월 12일, 넉넉치 못한 목수 토머스 링컨(1778~1851)의 아들로 태어났다(애칭은 에이브). 아버지 토머스가 확고한 기독교적 신념의 소유자라 매우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틀에서 자랐다고 한다. 남매로는 누나인 세라 링컨 그릭스비(1807~1828)가 있는데 살던 곳이 워낙 시골 개척지라서 주변 이웃이 없던 탓에 누나와 친하게 지내며 놀았기에 누나와 정이 많았는데 세라는 결혼해서 아기를 낳다가 21살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 링컨을 슬프게 했다. 링컨 아버지가 그 주에서 3번째 고액 납세자라는 과세자료를 들어서 링컨은 아버지가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부유하게 자라지 못했다는 해석도 있고[3] 아버지가 매우 검소한 성격이라 부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가난하게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면, 링컨의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원래는 켄터키 주에서 15번째 가는 부농이었으나 링컨이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3번의 파산을 경험한 후 인디애나 주로 건너왔다. 더군다나 재혼 후에 식구가 불어나자 생활고에 찌들었다는 일화는 잘 알려진 것이기도 하고, 링컨에게 공부가 아닌 농사와 노동의 길을 강요하며 생계의 짐을 지웠다는 일화 역시 잘 알려져 있고 링컨 스스로도 자주 언급한 바 있다. 가족 소유의 농장에서만 일한게 아니라, 주변 이웃들의 농장에 품삯을 받고 일손으로 보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파산 이후로는 식구 모두가 원체 가난하게 살았다는 설이 더 신빙성 있다. 토머스 링컨은 새 아내인 사라와 달리 교육보다는 노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인물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애를 너무 부려먹는다"고 할 정도로 링컨을 혹사시켜 아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상당히 독선적인 아버지였다고 한다. 아들이 시간을 쪼개 독서와 공부에 매진하면 '''일을 안하려고 게으름 부린다'''고 생각했다고. 화전민에 가까운 개척농 집안이었다는 것과 아버지 본인이 까막눈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그렇게 단정했을 수도 있다. 다만, 한 사기꾼이 토머스 링컨이 문맹인걸 이용해 사기를 치려던 것을 사인하기 직전 에이브러햄 링컨이 막은 일이 있은 이후[4] 그가 공부하는 것을 인정했다고 한다.
링컨도 이것에 대해 불만을 품어 이후 자신은 아들(특히 셋째 윌리와 막내 테드)에게 매우 자상하고 친밀한 아버지가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굴렸던 기억 때문에 노예해방 사상을 품게 되었다는 주장(영어)도 있다. 즉, '''당해봤기에''' 인간이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노동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품었다는 얘기. 하지만 대통령 당선 후에는 한 명문 출신 상원의원이 "내가 지금 신은 구두도 토머스 링컨이 만든 것인데 그 아들이 대통령이 되다니 역사에 남을 것이다."라며 대놓고 아버지 토머스 링컨을 들어 링컨을 조롱하며 비웃자 '''오히려 고맙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다음은 그 때 링컨이 한 말이다.
링컨의 친어머니 낸시 링컨(1784~1817, 혼전 이름은 낸시 행크스)은 그가 8살 때 서양등골나물이라는 독초를 먹은 소의 우유를 먹고 걸리는 밀크병(Milk sickness)에 걸려 죽었다.[5] 그 후 아버지는 재혼했는데, 새어머니인 사라 부시 링컨(1788~1869)은 책을 좋아하던 링컨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지원했다. 그녀도 재혼 당시 미망인이라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이들도 링컨과 친형제처럼 잘 지냈다.[6] 토머스 링컨이 아들에게 노동의 길을 강요할 때도 링컨을 지지하고 도와주며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링컨은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지만 풍부한 독서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또한 사라는 유머 감각이 풍부하여 링컨과 곧잘 농담과 장난을 주고 받는 사이였다. 아래 더글러스와의 토론에서처럼 링컨이 정계에서 보인 유머 감각은 대부분 사라에게서 물려받았다는 것이 학계의 주류 의견이다. 이 때문에 에이브러햄 링컨 남매의 이 일화는 신데렐라, 콩쥐팥쥐나 지금은 종영한 MBC의 시사교양 프로그램 <꼭 한번 만나고 싶다> 등의 사례로 쌓인 '''계모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는 사례'''로 흔히 인용된다.[7][8]"의원님. 제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중략) 저도 구두를 조금은 다룰 줄 아니까 혹시 구두에 문제가 생기면 저에게 가져오십시오. 다만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어깨너머로 배운 거니까요. '''저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돈을 벌 겸 독립하려는 생각으로 집을 나와 미시시피 강을 따라 루이지애나로 간 뒤 그 후 우체국장, 뱃사공, 측량기사, '''프로레슬러'''[9] 등을 전전하다가 '''사업을 실패하고''' 다음해 치른 1832년 일리노이 주 의원 선거에서도 '''13명 중 8위로 낙선했다.''' 이듬해 그는 또 '''사업에 실패.''' 일설에 의하면 이 두번의 사업 실패의 빚을 갚는 데만도 17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간신히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1834년 일리노이 주 의원 선거에 다시 출마해 당선, 정치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일리노이 주 의원 의장에는 낙선.''' 1840년 대통령 선거인단으로도 '''낙선,''' 1844년에는 연방하원 의원 '''공천 탈락''', 1846년에야 간신히 하원의원에 당선되니 그의 나이 37세. 엄청 늦은 것이었다.
다시 1855년 연방상원의원 '''낙선''', 1856년 부통령 후보 경선에서도 1/3 정도의 지지(110/350)만 받으며 월리엄 데이튼에게 '''낙선''', 1858년엔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시 유명 정치인이던 스티븐 A. 더글러스와 경쟁을 벌인다. '''이 선거에서도 링컨은 낙선했지만''', 노예 문제에 대해 단호히 반대입장을 밝혀 노예제 반대 입장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 우뚝서게 된다. 이때 링컨과 더글라스가 벌인 세차례의 토론은 아직까지도 미국 역사에 남은 명토론으로 평가된다.
당시 이슈는 새로 미연방에 편입되는 주들에게 노예제를 금지할 것이냐 말 것이냐였다. 더글라스는 해당 주의 거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주장이었고, 링컨은 투표를 통하더라도 노예제를 허용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이후에도 벌어지는 링컨과의 라이벌 관계 때문에 더글라스가 매우 적극적인 노예제 찬성론자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고, 앞서 언급했듯이 주의 자율에 맡기자는 온건파에 가까워 도리어 남부 민주당 강경파들에겐 까이던 인사였다. 이 당시 링컨은 노예제를 이미 실시하고 있는 주들에서도 노예제를 바로 폐지해야 한다는 급진적 공화당 분파와 노예제에 찬성하지 않지만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했던 민주당 좌파의 중간에 위치하였다. 당시에는 미 연방 상원의원을 주의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했기 때문에, 링컨에 대한 지지 자체는 더 높았으나 선출되진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개표결과도 그렇게 큰 격차가 아니었다.
이 당시 토론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결국 흑인 노예제 문제가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던 1860년 말 치뤄진 대선에서, 링컨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당시 여당인 민주당이 북부 민주당(스티븐 더글러스)과 남부 민주당(존 C. 브레킨리지)으로 쪼개지면서 링컨으로선 어부지리적인 효과도 얻었다. 당시 스티븐 더글러스가 노예제를 '''각 주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민주당 출신치고 나름대로는 중립적인 발언을 해서 브레킨리지를 대표로 한 남부 출신 인사들의 미움을 산 것이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11] 더글러스는 유권자 선거에서는 100만 표 넘게 받으며 2위를 차지하지만, 텃밭이던 남부를 존 C. 브레킨리지가 가져가면서 선거인단은 '''12명'''밖에 못 얻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이한다.'''찬성측 입론(더글러스)'''
링컨은 상원의원 후보 지명 수락 연설인 '분열의 집(House Divided)'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그 연설문 중 일부를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분열되어 자기 자신을 향해 적대하는 집은 바로 설 수 없으리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이 정부가 절반은 노예제를 찬성하고 절반은 반대를 하는 상태로 영원히 버텨낼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집이 무너지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집의 분열이 그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결국 이쪽이든 저쪽이든 간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노예제도가 추가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 할 것이고 노예제도가 궁극적으로는 폐지되는 과정 속에 놓여있다는 신념이 대중 속에 뿌리내닐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반면에 노예제도 옹호론자들은 기존의 주에서부터 신생 주에 이르기까지, 남쪽에서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도가 합법화될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밀어붙이려 할 것입니다."
노예제도를 반대한다는 그의 얘기를 듣고 흑인 공화당원들은 아주 좋아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링컨은 멕시코 전쟁을 반대했습니다. 또한 노예도주법을 반대하고 워싱턴에서 노예 해방을 주장한 적도 있습니다. 링컨은 백인과 흑인에 대한 모든 사회제도 상의 평등을 주장하며 심지어는 흑인과 백인이 결혼할 수도 있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링컨의 주장은 사회적인 불안과 충돌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여기서 제가 밝혀둘 것은 제가 통과시킨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의 원래 취지는 무엇보다도 미합중국이 자치의 원칙에 따라 자신들의 문제를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 스스로가 결정하게 하자는 주권재민(Popular sovereignty)의 원칙에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 새로 편입되는 주의 지역주민들이 노예제도에 관해 허용할 지의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주권재민의 올바른 적용이야말로 노예제도로 인한 갈등을 끝내고 북부와 남부의 주들이 평화로운 공존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반대측 질문(링컨)'''
더글러스 후보는 저를 모함하는 많은 의문과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를 모함하는 자신의 주장들에 대해 아무런 근거를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의 질문에 대해 분명히 대답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그동안 취해왔던 정치적 입장들 중 일부는 제 개인의 의견이라기보다는 제가 속해 있는 공화당의 입장도 섞여있다는 점을 밝혀둡니다.
먼저 저는 도주 노예법의 폐지를 주장한 것이 아니고 수정을 요구했음을 밝혀 둡니다. 더글러스의 주장은 이렇듯 사실 부분에서 여러가지로 잘못된 점이 많습니다. 저는 '흑인은 헌법상 연방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재판을 청구할 자격이 없고 노예의 소유는 헌법에 보장된 재산권의 일부로써 보호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드레드 스콧 판결문을 지지했던 더글러스에게 묻습니다. 이 판결문의 법리대로라면 지역 주민 대다수가 노예제도의 폐지를 원한다고 해도 과연 가능키나 한 것일까요?
더글러스가 통과시킨 캔사스-네브래스카 법은 그동안 미합중국에서 노예제도가 인정될 수 없는 지역이라고 국가적 합의가 이루어졌던 지역에 다시 노예제도를 도입할 수 있는 길을 여는 행위 아닙니까? 더글러스야말로 노예제도를 미국 전역으로 확산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노예제도가 과연 주정부 자치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고 보십니까? 과연 주류법 같은 자치 영역의 문제들과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문제일까요?
'''반대측 입론(링컨)'''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론에 앞서 먼저 밝혀둘 것이 있습니다. 저와 더글러스가 결코 다투지 않고 기꺼이 합의하는 원칙들이 다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모든 주가 노예제도를 포함하여 자치 문제에 관해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그의 주장인데, 저 역시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는 제가 이 문제에 관해 그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거듭 주장했는데도 불구하고 제 견해를 계속 왜곡하고 있지만 이에 관한 제 입장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힙니다.
그는 '왜 우리 정부가 절반은 노예제도를 찬성하고 절반은 반대를 하는 상태로 영원히 버텨낼 수는 없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서 저의 그와 같은 의견에 대한 이유를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그의 또다른 질문 한 가지는 '왜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운 토대를 그대로 놔두지 않는가?'였는데 바로 이 점이 그와 제가 정확히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저는 더글러스와 그의 동료들이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이 다져 놓은 원래의 건국이념을 훼손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더글러스가 우리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이 노예 매매를 근절시켜서 노예제도의 근원을 차단했으며, 기존의 주 이외에 새로 생기는 주에서만큼은 노예제도를 제한시키는 제도를 채택했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건국의 아버지들의 의도는 너무나 명백해서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든 그것이 노예제도의 근절을 염두에 둔 포석임을 당연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더글러스는 저더러 왜 건국의 아버지들이 만든 그대로 놔둘 수 없느냐고 물었는데 오히려 제가 그에게 왜 그분들이 만든 대로 놔두지 않았는지 묻고 싶습니다.
하지만 더글러스와 그의 동료들은 이 건국 당시의 정책을 파기시켜버린 후에 미국 전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영구적인 제도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 어디서건 제가 요구하거나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건 오직 우리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원래 닦아놓은 법률적 토대로 이를 다시 되돌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노예제도를 이미 실시하고 있는 지역들에서만 합법화하고 새로운 주들에게로 확산시키지 않도록 제한함으로써 건국의 아버지들이 추구했던 정책으로 다시 되돌리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노예제도가 완전히 사라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캔자스-네브래스카 주에서 노예제도를 허용하는 것이 주권재민에 관한 문제인 양 본질을 호도하는 것은 자유인과 노예가 공존할 수 없다는 미국 건국이념에 위배된다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의 초점을 흐리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찬성측 질문(더글러스)'''
링컨은 국부들이 노예제도 폐지를 원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맞는 말입니까? 과연 그럴까요? 우리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하나인 토마스 제퍼슨은 이에 관해 뭐라고 말했을까요? 과연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이 링컨의 주장대로 생각했을까요? 미국 건국의 주역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우리 백인 남성들이었습니까? 아니면 흑인들이었습니까? 여러분들은 우리가 흑인들과 동등히 대우받아야 한다는 링컨의 주장에 찬성하십니까?
'''찬성측 반론(더글러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정부는 백인이 주축이 된 건국의 아버지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즉 백인에 의해, 백인의 이익을 보호하고, 백인의 무궁한 번영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다가올 모든 시대에도 백인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세워졌습니다. 링컨의 연설은 내전을 부추기는 연설입니다. 링컨이 드레드 스콧 판결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백인과 흑인 간의 인종 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가 주장하는 주권재민이야말로 우리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하나인 토머스 제퍼슨이 꿈꾸었던 지역분권형 정부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독립선언서들의 참여자들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선언했을 때, 흑인이나 인디언들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흑인이 백인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사회적, 정치적, 법적인 평등까지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에 동의하신다면 링컨에게 표를 던지십시오. 저는 노예해방뿐만 아니라 백인과 흑인의 사회적 통합까지 지지하는 링컨 같은 급진적인 공화당원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링컨은 북쪽으로만 가면 극단적인 노예해방론자처럼 굴면서도, 남쪽으로 가면 또 자신이 충실한 휘그당원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이렇게 링컨은 지역에 따라서 자신의 주장을 이리저리 바꾸는 사람입니다. 링컨처럼 가는 곳마다 주장이 달라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링컨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입니다. 또한 그는 예전에 자신이 경영하던 상점에서 법을 어기고 술을 판 적도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불법행위이고, 이렇게 법을 어긴 사람이 상원의원에 당선된다면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링컨은 절대로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밝혀두고 싶은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제가 만든 법안이 반드시 노예 해방 반대 입장 쪽으로만 이용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노예 해방을 원하는 주의 주민들은 지역 경찰법에 노예소유주가 도망간 노예를 경찰권으로 되찾아올 수 있는 조항을 제정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노예제도를 선택하지 않는 효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측 반론(링컨)'''
더글러스는 저더러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제가 얼굴이 하나 더 있었더라면 오늘처럼 중요한 날에 하필 잘생긴 얼굴을 놔두고 이렇게 못생긴 얼굴로 여기까지 나왔겠습니까?
그리고 더글러스가 제가 술을 팔았다는 얘길 한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가게를 운영하던 때에 제 가게에서 가장 술을 많이 사 먹던 고객이 바로 더글러스였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저는 이미 술을 파는 계산대를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더글러스는 아직까지도 그 술 파는 가게의 충실한 고객으로 남아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언제 백인과 흑인 간의 완전한 사회적, 정치적 평등을 주장한 적이 있습니까? 저는 흑인들이 투표권을 갖게 된다거나, 배심원이 된다거나 혹은 공직에 오르고 또 백인과 결혼하는 것까지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진 이후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 어디서도 흑인이 독립선언서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독립선언서에 흑인이 포함된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3년 전 어느 무렵부터 독립선언서의 '모든 사람'이란 말에 흑인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 물론 저를 오해하진 마십시오. 저는 3년 전보다 훨씬 더 이전부터 노예제도의 우위와 영속성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독립선언서에 대한 이러한 공격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제가 단언컨대, 적어도 3년 전까지는 아무도 감히 그것을 대놓고 공격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라도 믿는 척 가장하는 은밀한 방식이었던 것이 이 무렵부터 독립선언서에 흑인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꺼낸 사람은 드레드 스콧 사건의 수석필사인 테이니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바로 여러분이 아시는 더글러스이며, 아시다시피 그것은 지금 더글러스가 속해 있는 당 전체의 캐치프레이즈가 되었습니다.
또한 더글러스는 제 주장이 가는 곳마다 달라진다고 하는데 제 연설문은 아시다시피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가 되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직접 비교를 해 보시면 과연 제 말이 달라졌는지를 확인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인종평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지요? 네, 맞습니다. 사실 저는 노예해방론자들 못지않게 노예제도를 혐오해 왔습니다. 저는 노예제도 자체가 적법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싫습니다. 저는 이 제도가 미국이 민주국가로서의 모범을 전 세계에 보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싫습니다.
노예제도는 자유에 기반을 두는 민주주의 제도의 적이 될 수 있고, 우리를 위선자로 조롱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싫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 참된 동반자들이 우리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싫습니다. 노예제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독립선언문을 조롱하고 이기심 이외에는 인간에게 적절한 행동원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이나 전제들과 대립하도록 우리의 많은 선한 이웃들을 몰아가기 때문에 싫습니다. 노예제도는 정의를 추구하는 인간의 지향과 반대되는 이기심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싫습니다. 미주리 타협안을 배척하고 독립선언문을 무시하고 우리의 지난 모든 역사를 되돌린다 해도 고귀한 가치를 지향하는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을 모두 떨쳐버릴 수는 없습니다.노예제도의 확산이 나쁘다는 도덕적 판단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인간 심성 깊숙히 자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생명력을 유지할 것입니다.
자치의 원칙은 옳습니다. 절대적으로 영원히 옳습니다. 그러나 주권재민의 원칙은 이 문제에 관해 적용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노예제도에 자치의 원칙이 적용되는 문제는 흑인이 인간인지 아닌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흑인이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문제를 자치에 내맡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흑인이 인간이라면 그들 스스로를 규율할 수 있는 권리를 막는 것 그 자체가 자치의 원칙을 파괴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이 선거는 당선자의 득표율이 40%를 넘지 않은(39%) 유일한 선거다. 공화당의 분열 덕에 당선된 것으로 유명한 우드로 윌슨도 41%는 됐다.'''"악어와 흑인이 함께 있다면 나는 흑인을 도울 것이다. 하지만 백인과 흑인이 함께 있다면 백인을 돕겠다."'''
- 대선 연설전에서 스티븐 더글러스가 한 말.
여하간 정리하면 그는 인생에서 '''두 번의 사업 실패, 10번의 선거 중에 7번의 낙선을 밟았다.''' 거기에 10살 때 어머니를 잃고, 20살 때 누이를 잃고, 27살 때 약혼녀를 잃고, 42살 때 둘째 아들 에드워드, 53살 때 셋째 아들 윌리엄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겪었다. 그리고 자신도 제 명을 다하지 못했고, 아내도 출신 성분 때문에[12][13] 사치와 성질이 조금 심한(...) 여자였다고 한다. 게다가 평생의 훼방꾼(더글러스)이 따라붙어 곤욕을 치루기까지 했다.
다만 링컨의 학력에 대해선 이 당시 미국에서 의무교육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된다. 미국에서 의무교육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한것은 1852년 매사추세츠부터이고 전국적인 의무교육 보급은 19세기 후반이 되어서부터이니 링컨처럼 그 이전에 유소년기를 보낸 세대들은 당연히 무학자의 비율이 높았다. 거기에다가 좀 배웠다 하는 사람들도 집에서 가정교사를 따로 두며 공부를 하거나 독학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14] 대학은 부유한 집에서 교양 및 과시용으로 다니는 게 아니라면 순수하게 학문 자체를 하려는 사람들만 갔으며, 변호사도 변호사 사무소에서 일 좀 배운 뒤에 개업하는 경우가 더 많았을 정도였다.[15] 이처럼 정규교육을 안 받고도 자기 분야에 필요한 실력을 갖추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16] 즉, 의무교육제도가 정착된지 한참 된 21세기의 사정과 비교하기는 힘들다는 얘기이다.
2.2.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고 영웅이 되다
취임식 때부터 순탄치 않았는데,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자택에서 워싱턴DC로 향하는 링컨 대통령을 암살하겠다는 음모가 발각되는 사태와 워싱턴DC까지 직행열차가 없었던 시절 암살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링컨 대통령은 여러 번 여행 일정을 바꿔야 했다.
당시 노예제를 시행했던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열차를 갈아타는 시간은 일부러 새벽 3시 30분에 맞췄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다. 새벽 시간에 워싱턴DC에 도착한 링컨 대통령에 대해 당시 일부 신문은 "밤도둑처럼 수도에 들어왔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남부는 강경하게 노예제를 반대해 온 정치인이 대통령이 된 것에 대해서 심하게 반발하여 당선 직후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아메리카 연합국의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링컨이 '''"어느 주도 미연방에서 탈퇴하지 못한다"'''라고 선언함으로서 그의 취임 1달 만에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중이던 1864년 어렵사리 재선에 성공하였다. 결국 1865년에 남북전쟁은 남부의 항복으로 끝났지만, 종전 11일 후 그는 극장에서 극렬한 남부 지지자였던 배우 존 윌크스 부스에게 암살된다. 이 때 주치의가 상처에 '''미라 가루'''를 뿌렸다는 기록과 총알 꺼낸다고 눈을 쑤셨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한편 부스 추적과 일당 재판에 대해서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전해오는데, 역시 대통령 암살이라는 사건이라서 그럴 것이다.
한편, 링컨은 지금도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명인데, 그의 일생이 영웅적이고 인도주의적인 행보와 거룩한 희생으로 끝맺어졌다는 점과 함께 한 나라로서의 아메리카 연방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링컨 이전의 미국은 어디까지나 각 주(州)의 연합체였을 뿐 한 나라라는 의식은 희박했다. 조지 워싱턴이 물려준 미국이 주끼리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해체할 수 있는 연맹이었다면, 링컨이 물려준 미국은 하나의 나라이자 운명을 같이하는, 그야말로 진정한 '미'''합'''중국 The United States'였던 것이다. 그때까지 "The United States are~"라고 복수형으로 표현해서 주들의 연합체로 표현하던 합중국을 링컨 이후에는 "The United States is~"라고 단수형으로 표현해 하나의 국가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링컨 기념관에 새겨진 헌사가 '이 성전에는 미합중국 국민들의 마음을 담아 미국을 구원한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기억들이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링컨은 역대 미국 대통령 인기조사시 항상 최상위권에 드는 경우가 많으며,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고평가받는 대통령 중 한명으로 손꼽히고 있다. 덕분인지 반사효과로 그의 전임자 뷰캐넌과 후임자 앤드루 존슨은 인기조사 최하위를 두고 경합을 벌이는 수준이고, 전전임자인 프랭클린 피어스, 전전전임자인 밀러드 필모어도 낮은 편이다. 후후임자인 율리시스 S. 그랜트도 1913년부터 50달러 지폐의 모델이었으나 꽤나 최근까지 하위권이었다.
따지고 보면 까마득히 전인 앤드루 잭슨의 재선 이후 링컨이 당선된 32년 동안 미국에서 연임에 성공한 대통령은 한명도 없었고, 링컨 이후에도 연임 대통령은 그랜트를 제외하곤 한동안 없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띄엄띄엄 임기를 보냈고, 윌리엄 매킨리는 암살당했으며,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캘빈 쿨리지는 승계 후에야 연임, 우드로 윌슨은 반신불수로 보냈으니, 결과적으로 진정한 연임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때나 이루어진 것이다.
3. 사망
링컨 대통령 암살사건 참조.
4. 링컨과 노예제
결론부터 말하면, '''링컨은 노예제 폐지라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미합중국 헌법 제13조를 통과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실 링컨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후술되어있듯 그가 지역의 유불리에 따라서 상반된 발언을 했다는 점이나, 연방을 위해 노예제를 반대할 수도, 찬성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을 예로 들며 링컨이 노예제 문제는 뒷전으로 두고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를 막는데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자면 링컨의 최대 관심사는 연방의 유지와 노예제 폐지 '''둘 다'''였다.
사실 링컨은 급진파라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현실 정치인이었고[20] 그러다 보니 당선을 위해 아래 발언들처럼 (물론 추측의 영역이긴 하지만) 본심을 교묘히 숨긴 측면도 있어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볼 경우 링컨이 포퓰리스트적 측면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과감한 개혁을 시행하기 위해선 우선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노련한 정치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가져와서 링컨이 노예제에 관심이 없었고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이 사람 저 사람이니, 이 인종 저 인종이니, 다른 인종은 열등하므로 열등한 위치에 놓여야 한다는 등의 이 모든 궤변은 이제 버립시다. 이 모든 걸 버리고 이 땅 전역에서 한 국민으로 단결해 다시 한 번 일어서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합시다. -1858년 7월 일리노이 주 북부(시카고) 영어전문.
다만 이 문장은 주의할 것이, 그 뒤 계속되는 링컨의 연설을 '''짤라먹었다'''. 링컨은 바로 뒤에 이렇게 말했다.저는 백인종과 흑인종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평등을 가져오는 것에 찬성하지 않으며, 찬성한 적도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저는 흑인종(Negroes)을 투표인이나 배심원으로 만드는 것, 정권을 쥐게 하는 것, 백인들과 결혼하게 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고 찬성한 적도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저는 흑인과 백인종 사이엔 물리적인 차이점이 있으며 그 차이점이 영원히 두 인종이 사회적, 정치적 동등관계로 살아가는 것을 방지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할때 그들이 평등하게 살 수 없는 한,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동안 우월한 지위와 열등한 지위가 남아있어야 하며, 다른 그 누구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백인종에게 우월한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데 찬성'''합니다.
1858년 9월 일리노이 주 남부(찰스턴)에서 영어전문.
사실 이 문장도 그냥 보면 좀 의아할 수 있는데, 당시 링컨의 사상이 어떻게 변화해왔고 그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는지 좀 더 이해하면 청중들이 왜 웃었는지도 알게 된다. 이때 토론 상대방인 스티븐 더글라스는 링컨의 개인적인 취향이 '''흑인 매니아'''로, 그는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려고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흑인 소녀를 아내로 삼고 싶어한다는 흑색선전으로 링컨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링컨은 노예제는 반대하되, 흑인들이 투표권처럼 백인들과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당장 얻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라고 에둘러 반박했다.[21]...백인종에게 우월한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데 찬성'합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빌려 다시 이야기 하건데 저는 개인적으로 '''백인종에게 우월한 지위를 부여한다고 해서 흑인종이 모든 권리를 부정당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흑인 여인이 노예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해서 제가 그 흑인 여성분과 결혼하고 싶은 건 아니거든요. (환호와 웃음소리)
남북전쟁에서 연방군을 도운 흑인들을 보고 노예제와 흑인선거권에 대해서 마음을 고친 많은 백인들처럼, 링컨도 (본심이 뭐였든간에) 처음에는 '''흑인들이 하등하다고는 하나 그것이 노예가 되어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미국 독립선언문 정신에 따라서 신체의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번 것을 남들에게 이유없이 빼앗기지 않을 권리가 있다'''라는 사상에서 출발해서 전쟁 말기 쯤 되면 '''보상없고 즉각적인 노예해방 그리고 나라에 의무를 다한 흑인들에게 선거권'''이라는 급진보주의로 변하는 것. 그리고 청중들이 웃은 이유는 당시 노예 찬성론자들인 남부 지주들이 여성 흑인 노예들을 성노리개로 삼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였는데, 링컨이 자신이 흑인애호가라는 비난을 위트있게 부정하면서 정작 이런 흑색전선을 펴고 있는 민주당이 흑인 정부를 두고 있는 남부 지주들의 일정 지지를 받는 상황을 꼬집은 것이다.[22]
한편, 링컨은 이런 말도 했다.
다만 이 글만 보면 노예제 폐지보단 연방제를 더 중시한 것 아니냐고 볼 수도 있는 내용인데, 사실 링컨은 그 와중에도 노예제 폐지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소신은 변치 않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원문은 이렇다.[23]연방을 지키기 위해 노예제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다.
연방을 지키기 위해 노예제를 폐지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연방을 지키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이 다 필요하다면 그 역시 그렇게 하겠다.
참고로 링컨이 이 말을 한 배경은 '왜 일을 급진적으로 진행시키지 않느냐'는 노예 해방론자들에 대한 답변이었다. 위의 말은 1862년 7월(그러니까 남북전쟁 도중) 통과된 2차 몰수법(Second Confiscation Act)이 제대로 집행되고 있지 않고, 링컨이 여기에 대해서 태만한 태도를 보여 지지자를 실망시키고 있다고 쓴 호러스 그릴리(Horace Greeley, 당시 뉴욕『트리뷴(Tribune)』 주필)의 편지에 대한 링컨의 답장에서 나온 것이다.[24]이 싸움에서 내가 견지하는 최대의 목표는 ''바로'' 연방을 지키는 것이며 노예제를 지키거나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 어떤'' 노예도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모든''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며, 일부는 해방시키고 일부는 내버려둠으로써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역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내가 노예제나 유색인에 대해 취하는 행동은 그것이 이 연방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며, 내가 삼가는 행동은 그것이 연방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나는 여기서 내 ''공적'' 직무에 대한 내 견해에 따라 내 목적을 언급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어디서나 자유로울 수 있다는, 내가 자주 표명했던 ''개인적인'' 바람을 수정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전문에서 링컨은 "누군가가 노예제만 폐지된다면 연방이 분열되어도 상관없다 한다면 난 동의하지 않겠다, 누군가가 노예제를 유지할수만 있다면 연방이 분열되든 말든 상관없다 한다면 그 역시 반대한다"라고 밝히며 개인으로서의 링컨이 아닌 대통령으로서의 공직자 링컨은 연방을 지키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둘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명한다. 링컨 개인은 만인의 평등이란 가치를 신봉하였지만 그 가치를 위해 나라가 분열되는 꼴을 내버려둔다면 대통령으로서 옳은 처신이 아니고 또다른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는 나름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렇게 해명한 것이다. 링컨은 특히 전쟁 초기에는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비추었다.
왜냐하면 실제 남부가 떨어져 나가던 시기에도 끝까지 연방에 남길 고수하던 미주리, 켄터키, 델라웨어 주, 메릴랜드 등 노예제 주들은 적지 않게 있었는데, 만약 링컨이 노골적으로 노예제에 반대 표시를 했다면 이들은 최악의 경우 연방에서 탈퇴했을 것이고,[25] 그럼 어쩌면 남북전쟁의 흐름이 바뀌었을지도 모를 노릇이기 때문. 즉, 그는 사회운동가마냥 본인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살긴 어려운 현실적 상황이 있었다. 그리고 시대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급진적인 개혁은 아무리 그 시대에 필요했던 해결책이라 할지라도 반대파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해 좌절된 케이스 역시 많았다.
한편, 정치에 갓 입문한 초짜 시절의 링컨은 어떻게 보면 그의 정적 더글라스보다 더한 인종차별로 보일 수 있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바로 노예제를 폐지하고 흑인 노예를 아프리카로 되돌려 보내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26] 그러나 링컨 연구자들 중 상당수는 링컨의 이 주장이 인종차별적이라고 하기보다는 당시 현실을 고려한 결과라고 본다.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고 난 뒤에도 미국 사회의 편견과 차별사상 때문에 제대로 진입을 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결과라는 뜻이다. 당시엔 흑인, 백인 서로 구역 나눠살면 서로 싸울 일도 없고 좋다고 생각한 미국인들도 상당했다고 한다.
링컨은 전쟁 초반, 노예 해방의 급진적 진행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일례로 헨리 할렉(Henry Halleck) 장군은 노예들이 드나들며 적에게 군사정보를 보내고 있다고 믿고서는 1861년 11월 전선에서 모든 탈주 노예(contraband)의 부대 입대를 금지시키고 추방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링컨은 어떤 항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다 남부와 마찬가지로 북부 역시 붙잡힌 노예들이나 연방세력으로 돌아선 탈주 노예들이 자유인이 되긴 커녕 수용소에 갇혀 많은 숫자가 죽었다. 존 C. 프레몬트[27] 장군이 1861년 7월, 미주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에 반대한 그 주의 노예 소유주들의 모든 노예들은 자유라고 발표했을 때와 1862년 5월에 데이비드 헌터 장군이 조지아, 플로리다 및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모든 노예는 자유라고 선언하는 명령을 발했을 때도 링컨은 즉각 무효화시켰다고 한다. 이는 두번 다 전쟁 초기에 일어난 일인데 링컨은 이에 대해 노예해방에 대한 성급한 시도는 경계주의 상실을 의미하며, 켄터키 주를 잃는 것은 전체 전투에서 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전쟁 초기 양상이니 경계주와 북부 민주당원들의 남부 전향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같은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두번의 장군령 모두 해방론자들 사이에서 나름의 지지를 얻긴 했지만, 현실적 난관도 많았기에 링컨으로선 이를 취소시킬 수 밖에 없었다. 우선 프레몬트 장군의 경우 상관인 링컨 대통령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독단적으로 미주리주에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그 내용이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북 경계주인 미주리 지역에서 활발한 테러 활동을 벌이던 남부 게릴라들을 견제하기 위해 북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총을 소지한 민간인은 군법재판을 통해 처형될 수 있다"는 계엄령을 발표한 것인데 이 조치에 대한 보복으로 남군은 북부 지지자들을 처형했고 미주리 주 주변에선 그야말로 대학살이 벌어졌다. 그리고 프레몬트의 남부 지지자 소유인 노예는 모두 해방된다는 선포는 미주리와 켄터키, 그리고 북부를 지지하지만 노예해방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상당수를 남부 지지자로 만들었고 오히려 더 큰 테러를 불러왔다. 경계주의 이탈, 그중에서도 특히 켄터키의 남부화가 연방의 확실한 분열과 패전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던 북군으로선 '''가장 두려워하던 상황이 초래'''된 것. 링컨이 그 조치를 취소시킬 것을 건의하지만 프레몬트가 듣지 않고 오히려 아내를 보내 링컨을 상대로 협상을 제시하자 링컨은 자신이 나서서 계엄령을 해제하고 문제를 일으킨 프레몬트를 2개월 후 해임시킨 뒤 율리시스 그랜트를 임명하는 결정을 내렸다.[28]
또 한 명의 장군인 데이비드 헌터는 군사적 능력을 포함한 여러 방면에서 프레몬트보다 유능했고, 경험도 많았으며 충성심 등에 있어 링컨이 의심할 여지가 없었을 인물이란 것이 역사학자들의 평이다. 헌터 장군령의 궁극적인 의의는 그릴리가 편지에서 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흑인 병사들의 자유 참전이었다. 그러나 헌터의 장군령은 당시에도 말이 많았는데 우선 탈주 노예들 중 자신의 자유의지로 참전하는 용병들은 극소수에 가까웠고, 백인 부대원들이 아무 설명도 없이 일하고 있는 노예들을 납치하듯 강제로 끌고 가서 입대시킨다던가 하는 경우도 있어서 흑인들 사이에서도 괴담이 돌곤 하였다. 프레몬트 때와 달리 링컨은 헌터 장군에 대해 자신의 친구이자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조치를 취소시켰고 이후 1주일 뒤 흑인 병사들을 모집하는 것 자체는 당연히 찬성이지만 강압적으로 참전을 강요하거나, 전쟁에 적합하지 않은 흑인들까지 강제 동원시키는 것을 반대할 뿐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
당시 의회에는 흑인 병사 참전을 찬성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는데 반대 여론은 역시나 전쟁 초기 링컨이 가장 신경쓰고 있었던 켄터키 주를 앞세운 경계주의 의원들이었다. 헌터의 장군령이 무산으로 돌아간 이후 의회에서는 대안으로 1,2차 몰수법을 발의하는데 링컨은 이 법이 무조건적인 사권박탈법이라고 말하면서 법이 수정될 때까지 서명하는 것을 거절했으며, 거부권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그 법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표명하고 이를 수행하지 않았다.[29] 이에 대해 링컨은 의회 권력으로 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전쟁 사령관 직권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노예 해방 선언을 준비하게 된다.
어쨌거나 링컨은 자신의 생애 내내 노예제를 반대해왔으며 노예제를 '''미국의 암덩어리'''로 여겼다. 그의 행보를 보면 알겠지만 링컨은 급진적인 혁명가라기보다는 점진적인 노예제 폐지론자에 가까웠다. 당장 해결하기에는 어렵지만 연방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사라져야할 악습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릴리와의 편지 답장에 대해서 오랫동안 여러가지 해석이 있어왔으나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링컨이 노예제를 정치적으로만 이용했다거나, 노예제에 대해 반대하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링컨이 노예제를 철저하게 연방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만으로 생각했다는 의견에도 반박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의 경우 그의 발언이 오히려 북부의 백인 지상주의자들에게 노예제 철폐가 아닌 "연방의 유지"라는 명분을 제공하여 그들을 회유하려는 수단이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역사학자 스티븐 오츠의 경우 링컨이 전쟁 초반 경계주들의 이탈과 북부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했던 발언들만이 선택적으로 인용되어, 링컨이 했던 노예제 반대에 대한 다른 수많은 발언들과 당시의 정치, 군사적 맥락이 철저히 무시당하고 그릴리의 답장에 대한 해석이 왜곡되고 있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지적했다.
링컨 본인도 대통령이라는 자신의 직책과 정치인으로서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던 상황 등에 대한 나름의 회한이 존재했던 것 같다. 물론 만악의 근원은 노예제를 당연시하던 당시 상당수 지역의 사회 분위기였겠지만.'''노예정책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이라는 나의 직책이 이러한 의견에 대해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이전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고백하건대 그동안 내가 결과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결과가 나를 지배했었던 거 같다.
또한 초반에 급진적인 법안이 중립 입장을 취하고 있는 주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몸을 사리긴 했어도 링컨은 꾸준히 자신이 직접 제정할 노예 해방선언을 위한 준비를 성실하게 해나가고 있었다. 링컨은 반대의사를 표명했다고 알려진 몰수법에 대해서도 의회의 권력만으론 시행시킬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자신의 직권으로 그것을 가능케하고자 계획을 세워나가고 있었다. 실제로 2차 몰수법이 발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예 해방선언의 초안을 내각에 발표했고 이듬해에 마침내 노예 해방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남북전쟁이라는 상황과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도 과감하게 노예 해방을 발표한 것,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켜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한 것은 그 기저에 깔린 정치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링컨의 큰 '''업적'''이다. 전쟁이 끝났으니 노예 해방합시다! 그럽시다! 와! 이런 분위기가 결코 아니었다. 노예는 여전히 남부의 '''자산'''이었고 노예해방은 자산 강탈로 비추어졌다. 북부에서도 서민층은 자기보다 밑인 흑인노예와 동급이 되는 것을 그닥 달가워하진 않았고, 이를 반영한 여당과 야당 모두 노예해방에 조심스럽거나 적대적이었다. 링컨의 해방선언은 향후 미국의 역사가 인종차별의 철폐로 이어지도록 방향을 결정하였다. 즉, '''노예제 폐지와 인권 향상에 링컨은 큰 공적을 세운 것'''이다.
5. 개인사
사적으로 링컨은 외모에서는 비쩍 마르고 굉장히 매력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도회지가 아닌 시골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지라 말투조차 미국 남부 특유의 사투리가 약간 섞인 억양인데다 목소리도 가늘었다고 한다.[30] 심지어 그의 얼굴은 인신공격을 퍼붓는 일부 정적들에겐 고릴라(...)라고 까이는 소재로 이용되기도 했다. 참고로 그 중에는 연방군 사령관이자 그의 재선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된 매클레런도 있었다.[31]
링컨 본인도 자신의 외모에 불만이 있었는지, 링컨 - 더글러스 논쟁 중에 더글러스가 링컨에게 '''두 얼굴의 사나이'''라고 비난하자 '''"저한테 얼굴이 하나 더 있다면 잘생긴 얼굴로 하고 나왔지 이 얼굴을 하고 다니겠습니까!"'''라고 받아치기도 했을 정도다. 참고로 저 발언을 한 더글라스는 본래 링컨을 망신주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와서 시동을 걸기 위해 두 얼굴 이야기를 했다가 링컨의 위와 같은 재치있는 반격에 도리어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그의 정적 에드윈 스탠턴이 한 말. 스탠턴은 더글러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링컨의 숙적으로 선거기간 내내 연설할 때마다 링컨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를 공개적으로 적대시했다고 한다. 둘은 노예제에 대한 입장이 같아서 함께 더글라스를 상대해야 한 것을 계기로 처음 만남을 가졌는데 불같은 성격의 스탠턴이 그 당시 촌뜨기 신출내기 변호사이던 링컨을 자기와 함께 묶었다는 것에 노발대발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을 알아본 링컨은 참모진들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를 했음에도 그를 남북전쟁 중 전쟁부(Department of War, 육군부)장관에 임명했다.[32][33]여러분, 우리는 고릴라를 만나기 위하여 구태여 아프리카에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가면 링컨이라는 고릴라를 바로 만날 수 있습니다.
1863년 링컨의 한 연설에 대한 신문 사설의 평가다. 그런데 중요한 건 저 연설이 '''바로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이었다는 것이다.'''[36] 이렇듯 임기 내내 당시 미국 엘리트의 조롱과 멸시를 한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정치력을 발휘해서 미국을 구해냈다는 게 정말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외국 귀빈들에게 미합중국의 대통령이라고 소개될 저 인물의 '''멍청하고 시시껄렁하고 쓰레기와 같은''' 연설을 듣는다면 모든 미국인들은 부끄러움으로 뺨에 경련을 느끼게 될 것이다.[34]
- 시카고 타임즈[35]
그를 눈여겨 본 그레이스 베델이라는 소녀가 편지로 그에게 턱수염을 길렀으면 하고 조언한 일화는 유명하다. 미국에 보존되어 있는 링컨이 살았던 집에 가보면 실제로 이 편지가 그의 집무실 벽에 꽂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실제로 링컨은 그 후로 기르기 시작한 턱수염 덕분에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었고, 인자하고 따뜻한 인상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후 베델을 만나게 된 링컨은 "덕분에 내가 대통령이 되었다"며 감사인사와 함께 뺨에 입을 맞추었다고 한다.
'''가장 위대하고 가장 재밌었던 우리들의 대통령'''
'''평소 위트가 넘쳐났다.''' 가끔은 넘치다 못해서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활력으로까지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는 툭하면 찾아오는 공직희망자들이나 의회와의 관계를 유지할 때 그 힘이 발휘되었다고 한다. 한번은 장관 한 명이 지병으로 사망하자 그 자리에 들어가겠다는 공직희망자 중 한 명에게 "장의사가 동의하면 관속에 들어가도 좋습니다"라고도 했었고 매일같이 공직희망자에 시달리다 전염력이 강한 병에 걸렸을 때에는 주치의를 보며 "드디어 제가 뭘 좀 나눠줄만한 게 생겼네요." 하고 빙그래 웃기도 했다. 이는 결국 자유분방하게 자랐기 때문이다. 덕분에 행동에도 그다지 기품이 없고, 업무 중에도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 책을 읽는 등 거리낌없이 행동했다. 성격은 쾌활했지만 분위기를 못 읽는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의 측근들은 링컨이 시도때도 없이 썰렁한 농담을 해대는 것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했다.암소 몇 마리를 포획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 조지 B. 매클렐런[38]
'''우유를 짜십시오.''' - A. 링컨[39]
젊었을 적에는 평소에 영 맘에 안 든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놀리는 말을 작은 쪽지에 써서 길가에 슬쩍 떨어뜨리고는 누군가 그걸 주워 읽고 재미있어 하는 걸 몰래 지켜보면서 즐거워 했다고 한다. 어느날 쉴즈라는 사람의 나쁜 점을 지적하는 글을 익명으로 신문사에 올렸는데, 해학, 풍자적으로 쓴 글에 구독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쉴즈가 게시자가 링컨이라는 걸 알아내고서는 다짜고짜 찾아와 결투[40] 신청까지 하고 말았다.[41] 다행히 링컨의 친구 한 명이 적극 중재를 해준 덕에 결투 당일 결투가 취소되어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링컨은 결투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쉴즈는 계속 밀어붙였기에 어쩔 수 없이 약속장소까지 갔다. 결투 직전까지도 칼을 들었지만 싸울 의향이 없었다고. 그 일로 링컨은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타인을 조롱하는 짓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42][43] 하지만 세 살 버릇은 뭐시기라고 그 후로도 가끔씩 비방글을 쓰기도 했는데, 결투사건 이후로는 그냥 혼자만 읽고 즐기는 글로 썼다가 없애버렸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링컨은 자수성가한 변호사답게 거리낌없이 남을 모욕하거나 자기 도취적인 발언을 일삼았는데, 이 시점부터 변화하기 시작해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시점에서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소심한 링컨의 인격으로 발전했다고 한다.[44]
성격이 제법 소심했는지 대놓고 남 앞에서는 욕이나 비난을 못하고 뒷담화를 하거나 노트에 일일이 그 사람을 욕하는 글을 잔뜩 써 놓았다고 한다. 이게 나중에 가서는 재치가 넘치는 위트로 발전한다. 게티스버그의 연방군 사령관 '조지 미드'가 대표적인 경우다. 미드의 경우는 게티스버그 전투 승리 이후에 후퇴하는 남부연합군을 쫓지 않아서 사실상 전쟁의 종결을 방치한 측면이 있다. 물론 그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점도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뒤늦게 추격했을 때조차도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그 며칠 사이에 충분한 기회가 있음에도 놓쳤다는 게 안습이다. 사실 어찌보면 그 정도의 실책을 거두고도 즉각 해임이나 공개적인 비난을 하지 않은 링컨이 오히려 대인배일지도 모른다.[45]
링컨도 이 때의 일을 교훈삼기로 했던 듯 하다. 한 일화가 있는데, 대통령 취임 후, 정적이었던 에드윈 스탠턴을 국방부장관에 발탁시킨 일로 그와 관계가 호전되었을 때, 스탠턴이 평소 사이가 안 좋던 번 사이드 육군장관과 사람들 앞에서 대판 싸우고 나서 링컨에게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사이드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며 씩씩거리자 링컨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더니 스탠턴이 '편지를 보내 뜨거운 맛을 보여줄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링컨은 '조금 전에 나한테 털어놓았던 것까지 다 포함해서 지금 당장 편지를 쓰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스탠턴은 그 자리에서 엄청난 장문의 편지를 휘갈겼는데, 편지를 읽어본 링컨이 '이제 부치기만 하면 됩니까?'라고 묻고, 스탠턴이 그렇다고 하자 링컨은 '''"그렇다면 저 벽난로 속으로 부치십시오. 분노로 쓰는 편지는 칼이 되어 상대를 찌르게 됩니다."'''라고 스탠턴을 설득했고, 스탠턴도 마지못해 편지를 벽난로 속에 던졌다고 한다.
5.1. 링컨과 아내, 아이들 그리고 우울증
젊은 시절에 에이미 스튜어트(1812~1836)라는 여성을 사랑하여 청혼까지 했는데 그녀도 링컨을 좋아하여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달 안가 그녀가 갑작스럽게 장티푸스로 죽은 탓에 슬픔에 빠져 한동안 여성을 사귀지 않았다가 1842년에 메리 토드라는 남부 출신 여성을 소개받아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메리 토드의 전 남친은 더글러스였다고 한다.(...)
헌데 불행히도 메리 토드 링컨(1818~1882)은 '''악처'''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데, 실제 메리 링컨은 히스테리, 편집증 증세가 있었고 이는 남편과 후술된 아이, 형제자매들의 사망 이후엔 거의 정신병 수준으로 심해진다.[46] 다만 악처설은 정적들이 남부 출신으로 노예주의 딸이었던 메리 링컨을 잠재적 반역자로 간주한 내전 시기의 견해가 증폭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실제 부부간 사이는 생각보단 큰 갈등 없이 유지되었다고 한다. 물론 공처가였던 링컨이 부인의 성화를 참고 살았다는 게 중론이긴 하지만(...).
하지만, 메리 토드 링컨이 실제 처신을 잘못한 부분도 분명 있긴 한데, 예를 들어 메리 링컨의 여동생은 남군 육군 준장의 아내였는데, 메리는 제부가 남북전쟁 당시 서부전선에서 전사하자 그 전투가 연방군의 승리였음에도 공식석상에서 눈물을 보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남부에 살던 동생을 백악관으로 불러서 며칠 묵고 가게 하기까지''' 하는 등, 전시에는 그다지 적절치 않아 보이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런 행적 덕에 남편과 달리 메리 토드는 미 역사상 최악의 영부인으로 꼽히기도 한다.[47]
링컨은 장남을 제외한 자식들이 요절한 것으로도 나름 알려져 있다. 일단 첫째는 풀 네임 로버트 토드 링컨(1843~1926)으로, 유일하게 장수해서 당시 기준으론 정말 오래 산 82세까지 살았다. 관직에도 진출하고 사업가로도 성공을 거두고, 결혼해서 자손도 남겼다. 남북전쟁 시기의 인간이 제1차 세계대전까지 보고 죽었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감이 올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암살에 대한 음모론 때문에 본의 아니게 맘고생을 많이 하기도 했다. 실제 그는 미국 역사상 4건 있었던 대통령 암살 사건 중 '''3번'''이나 연관이 있는데, 20대 가필드 대통령, 25대 매킨리 대통령 둘 다 그를 만나거나 만나러 갔다가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두 대통령 모두 암살 직전 자기가 죽는 꿈을 꾸고 이를 알아보려고 로버트 링컨을 불렀지만, 그가 오기도 전에 암살당했다. 그리고 두 차례의 사건을 겪은 뒤, 로버트 링컨은 대통령과 관련된 곳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일화는 2020년 1월 26일 방영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900회 방송분에 소개되었다.
차남 에드워드 베이커 링컨은 1846년 3월 10일 태어났다. 이때 링컨은 절친 조슈아 스페드에게 "자네 아들 어릴 때를 똑 닮았다"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에디는 고작 4세 때, 디프테리아에 걸려 무려 52일을 앓다가 1850년 2월 11일, 생일을 한 달 앞두고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사망 일주일 후 누군가가 링컨에게 '작은 에디(Little Eddie)'라는 제목의 에디를 추모하는 시를 보냈다.
그런데 이 시를 지어 보낸 이가 누구인지 아직도 규명되질 않았다고 한다. 에드워드는 후치슨 공원에 매장되었는데, 1865년 스프링필드에 있는 링컨의 묘 옆으로 이장되었다.Those midnight stars are sadly dimmed,
That late so brilliantly shone,
And the crimson tinge from cheek and lip,
With the heart’s warm life has flown—
The angel death was hovering nigh,
And the lovely boy was called to die.
The silken waves of his glossy hair
Lie still over his marble brow,
And the pallid lip and pearly cheek
The presence of Death avow.
Pure little bud in kindness given,
In mercy taken to bloom in heaven.
Happier far is the angel child
With the harp and the crown of gold,
Who warbles now at the Saviour’s feet
The glories to us untold.
Eddie, meet blossom of heavenly love,
Dwells in the spirit-world above.
Angel boy—fare thee well, farewell
Sweet Eddie, we bid thee adieu!
Affection’s wail cannot reach thee now,
Deep though it be, and true.
Bright is the home to him now given,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Heaven.”
삼남 윌리엄 월레스 링컨은 에디가 사망한 1850년 그 해 12월 21일에 태어났다. 장남 로버트의 아내인 윌리엄 월레스 박사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 링컨이 어찌나 기뻐했는지 '먼저 떠난 에드워드 대신 윌리엄을 주셨다'며 감사기도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대 증언에 따르면 두 형보다도 아버지를 닮았다고 한다. 성격도 아버지를 닮았고, 어머니 토드도 "아버지를 닮아 신앙이 깊었다"라고 언급했다. 1861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동생 테드와 함께 백악관이 있는 워싱턴으로 이사를 갔는데, 백악관으로 온 지 1년이 막 지나자마자 장티푸스에 감염되고 말았고, 결국 2년 째를 맞이한 1862년 2월 20일 1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워낙 예의바르고 주변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아들이라 장례식에 참석한 지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고난이 닥쳐도 꿈쩍않던 그 링컨이 아들의 죽음 앞에 주저앉아 넋을 잃었다."라고 언급했다. 시신은 조지타운의 오크 힐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이후 링컨이 암살당하자 작은 형 에디와 함께 이장되었다.
막내아들 토머스 '테드' 링컨은 1853년 4월 4일 생이다. 세 형제 중에선 그나마(...) 더 오래 산 아들이다. 유난히 머리가 커서 어린 나이에 머리 무게를 잘 감당하지 못해 머리를 흔드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붙은 별명이 '올챙이 머리'. 또 태어나면서부터 구강구조에 이상이 있어 발음이 불분명하고 어조도 이상했다고 전해진다. 형과는 다르게 굉장한 말썽꾸러기였는데, 서고의 책을 몽땅 뒤엎어놓는가 하면 고관들에게 소방호스로 물대포를 퍼붓는다든지, 찻잔을 복도에 늘어놓는 장난을 자주 쳐서 백악관의 골칫거리로 꼽힐 정도였다고 한다. 형 윌리엄과도 장난감 때문에 많이 싸웠다고.
보다못한 토드가 가정교사를 구했지만, 테드는 공부를 상당히 싫어했고, 교육에 큰 진척이 없었다. 형처럼 아버지와 극장에 가는 걸 좋아했는데, 무슨 우연인지 링컨이 암살당한 1865년 포드 극장에 가던 날, 에드는 포드 극장에 가지 않고 선생님을 따라 그로버 극장에서 아동극 《알라딘》을 관람했다. 그런데 공연 관리자가 링컨 대통령이 옆 포드 극장에서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쇼크를 받았는지 소리를 지르며 날뛰었고, 겨우겨우 백악관으로 후송되다시피 돌아와 잠이 들었다. 다음날에야 아버지가 죽었다는 걸 제대로 알았는지, '''그 때부터 사람이 바뀌었다고 한다.''' 가족들이 침통한 분위기인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가 하면, 우는 어머니에게 다가가 끌어안고 위로까지 했다고 한다. 테드를 위로하러 온 백악관 직원에게도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난 이제 대통령의 아들이 아니다. 언젠가 나도 아버지의 곁으로 갈 거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을 보면 아버지의 죽음을 제대로 실감했으면서도 이를 참아낸 것으로 보인다.
링컨이 사망한 후, 링컨 가족은 백악관을 떠나 시카고로 이사했는데, 아버지를 닮아 글 실력이 뛰어났던 테드는 브라운 초등학교에서 학교 신문 편집부에 소속되어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19살이 되던 1871년, 갑자기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져 앓기 시작했고, 체중이 급속도로 줄어드는 등 심각한 증세를 보였다. 그리고 결국 2개월 뒤, 어떻게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7월 15일 사망하고 말았다. 테드의 병명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대부분은 폐결핵을 유력하게 꼽는데, 폐렴, 흉막염 등도 가능성으로 거론되고 있다. 테드의 시신은 두 형처럼 나란히 아버지의 곁에 매장되었다. 당시 맏형 로버트가 관을 운구했는데, 어머니 메리 토드는 세 아들을 연달아 잃은 쇼크가 극심했는지 장례식 내내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다시 링컨 얘기로 돌아와서, 이렇게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매우 힘든 삶을 살다보니, 링컨은 거의 평생에 걸쳐 우울증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우울증이 시작된 정확한 계기에 대해선 확실한 설이 없지만, 가장 인기있는 설은 그가 20대 중반일 때 장티푸스로 사랑하던 여인 에이미 스튜어트를 잃고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는 것이다. 하여튼 링컨의 정신장애는 그가 훗날 대통령이 되고 나서 아내의 히스테리, 어린 아들의 죽음,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살상 속에서 더욱 악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평온한 성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오히려 초조·불안해 하는 각료들에게 농담을 던져 긴장을 풀어주곤 했다. 실제로 링컨 본인은 "나는 울지 않기 위해서 웃는다, 그게 전부야, 그것밖에 다른 이유가 없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링컨이 마르팡 증후군 환자였기 때문에 우울증을 앓았다는 건 가설에 불과하며, DNA 검사를 하지 않는 이상[48] 입증할 방법이 없다. 의학자들은 링컨이 앓은 것이 마르팡 증후군일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마르팡 증후군 환자에게 흔히 따라오는 특성 - 저시력, 심혈관계 질환, 30살 남짓에 불과한 기대 수명, 약한 관절, 낮은 운동 능력 등등이 링컨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 링컨은 50대 중반까지 멀쩡히 걸어다니고 일도 하던 도중에 사망했고, 젊었을 땐 막노동에 프로레슬링까지 할 정도로 건강했었다.
현재 유력한 가설은 링컨이 다발성 내분비계 종양을 앓고 있었으며 이 병이 친모인 낸시 링컨에게서 유전되었다는 것이다. 낸시 역시 키가 매우 크고 팔다리가 길쭉하며 깡말랐고, 두개골에 마르파노이드 환자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며 30대에 사망했다는 것이 그 근거.
추가적으로 현재에는 거의 낭설로 치부되는 링컨 매독설도 있다. 한국에도 번역되어 나온 책인 데버러 헤이든의 <매독>[49] 의 주장에 따르면, 링컨이 매독 말기로 실제 '''뇌가 상당수 파괴'''되어 있었다고 한다. 메리 토드에게 옮은 건 아니고 링컨이 젊을 때 알고 지내던(?) 여성에게 옮았다는 주장. 일설에는 링컨 막내아들인 토머스(1853~1871)의 병사 역시 이 후유증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책의 주장에 따르면 링컨이 총에, 그것도 뇌에 맞아 죽는 통에 정신질환 말기 증세까지는 겪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인 메리는 그 뒤 17년 동안 서서히 증세가 나타나면서 같은 신발을 64켤레나 마구 사고 거리에서 욕하면서 날뛰고 그야말로 참혹하게 지내야 했다고 써 있다. 하지만 링컨의 매독설은 한 전기작가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해 딱히 그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보이진 않는다.
6. 링컨과 기독교
사실 링컨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지 여부는 전문가 간에도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일단 그가 정치적 면에서나 사적인 면에서 신앙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링컨의 종교적인 믿음 부분에 관해서는 현대의 역사가들도 가타부타 왈가왈부하는 부분이 많다. 다만 기독교 여부가 아닌 이신론과 무신론의 여부로, 그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교회를 출석하기는 했지만 한 교회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다닌 적이 없었고, 우선 본인은 공공연한 자리에서 종교적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종교적 취향을 숨기는 쪽에 가까웠고, 대신 타인의 믿음은 존중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주변의 친구들 역시 링컨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될 만한 언행을 한 적이 거의 없다고 말하였다. 오히려 친구들 앞에서는 이신론자 내지는 무신론자라고 생각되는 언행을 했다. 다만 이후 아내 메리의 증언을 들어보면, 기독교나 타 종교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고, 말년 상심에 빠진 후부터는 기독교적 믿음에 집착을 나타냈다는 묘사를 보아 아들의 죽음 등 일련의 사건들이 그의 종교에 대한 생각에 심적인 변화를 일으켰을 수는 있다. 어린 시절을 살펴보자면, 링컨의 아버지인 토머스 링컨이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지라 기본적으로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기독교적 믿음이나 사상에 대해선 상당히 잘 알고 있었고 그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암살당한 포드 극장에 갔을 때는 피탄 직전에 아내에게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예루살렘과 골고다 언덕에 가보고 싶다"라고도 했다고 한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도, 확고한 신자였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링컨은 비교적 자유분방한 쪽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어릴 때 어머니가 유품으로 남긴 성경책을 죽기 전까지 소장하며 읽었다고 하니 그가 기독교에 어떤 애정을 갖고 있었는지는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식석상에서의 링컨의 언행을 보면, 기독교인이라 봐도 괜찮은 수준으로 보이나, 이도 어떤 면에서 보면 정치적인 립서비스일 가능성이 높다.[50] 링컨이 정적들에게 허구한 날 트집 잡히던 것 중 하나가 '''기독교를 제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링컨이 평생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다는 주장은 아인슈타인이 죽기 전에 신을 믿었다는 정도의 소문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51] 다만 아인슈타인과 다른 점이라면 링컨은 실제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독교 신앙이 점점 강해졌다는 것이다.
남북전쟁 중에는 어느 기도집회에서 신도들이 "우리 북군의 편이 되셔서 우리가 이기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듣고는 "하나님이 북군 편에 서실 것이 아니라 북군이 하나님 편에 서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의지를 인간의 의지보다 우선시한다. 하나님은 (그의 뜻대로 기도한다면) 기도를 들어주시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북군의 편에 서 달라는 기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교리상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성품 및 지능과 판단력은 불완전한 것으로 보며 그 인간의 창조자인 하나님과 절대로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없다. 즉, 인간의 판단력에 기초한 기도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된장을 원치 않으니 똥을 먹게 해달라는 기도로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말은 링컨의 심드렁한 기독교 신앙을 드러낸 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북군은 하나님의 완벽한 판단을 의지하겠다는 의미이자 북군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면 그 의지를 꺾어서 하나님의 뜻에 맞추겠다는 의미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링컨이 성경과 신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링컨은 신이 인류를 향해 가진 계획이 있다고 믿고 있었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즉 이신론적 생각은 있었지만 성경과 기존 신학을 배제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링컨과 개인신앙(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링컨은 기독교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링컨과 교회의 기존 교리(혹은 교리로 보이는 분위기)로 봤을 때 링컨은 이신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말년에는 특히, 가장 사랑하던 아들 '윌리'가 장티푸스에 걸리자 아들의 침대 옆에서 철야기도를 하다가 잠이 들곤 했고, 윌리를 잃은 후에는 기독교 신앙(예수를 구세주라고 언급하면서)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다며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한 적도 있다. 아내인 메리는 링컨은 전에는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종교적인 인물이었다고 표현하였으나 아들 윌리가 죽은 이후부터는 그가 기독교적 믿음에 의지하여 신에게 자기자신을 모두 바쳤다고 했다고 한다, 즉 이 시점에서 링컨이 무신론자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역사가 알렌 C. 구엘조는 링컨의 신앙을 '칼뱅화된 이신론'이라고 불렀다. 그 1999년 저술하고 출판한 <링컨:구원자 대통령> (Lincoln: Redeemer President)에서는 그의 유소년기에 접했던 칼빈주의 사상과 뿌리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이 구엘조의 칼뱅화된 이신론(Calvinized Deism)이란 흔히 우리가 알고있는 신의 창조 후 인간역사에 무개입하는 그 이신론을 뜻한 것이 아니다. 칼뱅의 대표적 신학사상인 그리스도의 구원론과 예정론은 창조 후 신의 무개입과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인데 이러한 모순적인 뜻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기 때문이다. 구엘조의 칼빈주의적 이신론이란 건강한 정교분리를 갈망하고 당시 혼란스런 종교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링컨의 내면을 대변하고자 사용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구엘조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아래 국가 인문 위원회 National Council in Humanities 위원으로 임명되었었다).
링컨의 신앙관에 관해 언급하는 저명한 연구서적으로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미국사 교수인 리처드 커워딘(Richard Cawardine)이 집필한 <링컨: 목적과 권력의 삶>(Lincoln: Life of Purpose and Power)인데 이곳에서 커워딘은 링컨의 북부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을 그들이 신의 택함 받은 사람들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조성하고 키워 미합중국의 깃발 아래 결집시킨 그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2006년 2월 19일자 뉴욕타임즈의 커워딘 교수의 책에 대한 기사에서는 이에 대해 "이러한 특출난 재능이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로 의심되었던 사람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결국 그는 종교적 회의론자인 동시에 연방의 유지와 노예해방을 어떠한 높고 신비한 목적과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링컨의 내면을 묘사했다. 해당 NYT 기사
중립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는 어느 특정 교단의 멤버가 아니었으며,[52] 만인평등 정신에 위배되는 노예제도에 찬성하거나 침묵했던 당시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판자이자 회의론자'''였으며 어릴 적부터 '''칼빈주의적 사상에 깊게 영향을 받아 복음주의 바탕에서 성경의 권위를 인지했던 사람'''이라는 게 다수 현대 역사가들의 결론이다.[53]
7. 평가
8. 기타
- 깡마른 인상으로 인해 잘 매치가 되지 않지만, 힘이 엄청난 장사였다고 한다. 젊은 시절 막노동을 했을 정도로 엄청나게 힘이 셌다고. 이와 관련해 동네 불한당이 시비를 걸어온 일화가 나름 유명하다. 링컨은 시비를 피할 수 없어서 결국 1:1 싸움이 벌어졌는데, 많은 구경꾼들이 키는 크지만 깡마른 링컨보다는 다부진 체격의 불한당의 승리를 점쳤다. 허나 예상과는 달리 링컨이 상대를 가볍게 발라버렸고, 이후 링컨과 불한당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전말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자료를 인용하자면...
- 젊은 시절 링컨의 벌목 실력 또한 당시 자주 회자되던 이야기였다. 실제로 링컨의 젊은 시절을 묘사한 그림 중에는 그가 거대한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는 모습이 많다. 링컨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몇 배 이상 빠르게 엄청난 도끼질로 나무를 넘겨대던 괴력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는 듯. 저 아래 "도끼질로 뱀파이어 때려잡는 링컨"의 괴랄한 상상은 이 이미지에서 파생된 것. 에이브러햄 링컨: 뱀파이어 헌터라는 영화가 몇 년 전 개봉했는데, 이 이미지에서 파생된 듯 하다. 인자한 빼빼마른 할아버지 같은 링컨 대통령이 사실 젊었을 적에는 엄청난 파워캐릭터였다는 것이 소소한 아이러니.
-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공통점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링컨과 케네디의 공통점 항목 참조. 다만 파고보면 상당수는 도시전설 수준으로, 예를 들어 많은 실패와 고난 속에 역경을 헤쳐온 링컨과 달리, 케네디는 엘리트 집안 출신으로 정치 인생도 꽤나 탄탄대로였다. 다만 케네디도 아예 역경이 없었던건 아닌데, 우선 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적도 있었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이후 후유증으로 고생도 많이 했다.
- 노무현 前 대통령이 링컨 전기를 쓴 적이 있다. 심지어 링컨박물관장의 말에 의하면 세계에서 링컨 전기를 쓴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한다.# 책 제목은 2001년 집필한 '노무현이 만난 링컨'. 실제로 워싱턴 D.C. 포드 극장 박물관에 특별 전시되어 있다.#
- 그림 실력 향상을 위해 소묘를 할 때 애용되는 모델. 워낙 얼굴의 요철이 강해 윤곽이 두드러지는지라 해칭하는 맛이 일품이다.
- 게이 의혹이 있어 Gay Bar의 뮤직비디오는 1863년 백악관을 무대로 하는 것으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다만 여기에 대해선 이견도 있다. 자세한 설명은 위의 문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 대통령이 되기 전에 미국-멕시코 전쟁을 반대했던 전력이 있다. 이미 멕시코의 영토인 곳을 점령하는 것은 부도덕한 침략전쟁이라는 얘기인데, 당시 그런 논리로써 침략전쟁을 반대한 사람이 링컨만이었던 건 아니지만, 그 때 전쟁을 해서 텍사스~캘리포니아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멕시코에게서 빼앗아왔기 때문에 미국은 서해안으로 진출하고 최강대국의 기틀을 다진 것이다.[55] 만약 그가 대통령이 십몇년 빨리 되어서 미국-멕시코 전쟁을 막았다면 그는 최악의 대통령 순위표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 링컨은 남북전쟁 당시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 자주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을 방문해 군인들과 밤새 놀고 이야기 하길 좋아했다고 한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당시 남부연합 해군의 가장 강력한 철갑군함이었던 메리맥(Merrimack) 함[56] 이 버려져 있던 한 해군 기지를 공략하는 군대를 시찰갔다. 가서 지휘관에게 공격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자 대장은 "수심이 얼마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고, 링컨은 흔쾌히 "그럼 여기 나하고, 육군장관하고 재무부장관하고 가서 확인하고 오겠네." 라고 말했고, 장병들의 극구 반대에도 밤에 몰래 미군 최고 수뇌부 세명이 가서 수심을 확인하고 아침에 멀쩡히 돌아왔다. 이후 이 이야기는 링컨의 모험담 중 링컨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된다.
- 남북전쟁 당시 당장 전쟁을 그만두라는 어명을 내리신 노턴 1세에게 소환장을 받은 바 있으나 가지 않았다.
- 과거 링컨 관련 이런 유머글이 돈 적이 있었다.
다만 이게 여러 버전이 있어서 링컨이 아니라 존 F.케네디를 넣는 경우도 많았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40대라면 케네디가 딱(링컨은 51살에 대통령이며 케네디는 44살에 대통령이 되었으니)이었으니... 아빠와 아들을 직장 상사와 부하로, 링컨을 고르바초프로 바꾼 버전도 있다.
- 한 많은(?) 인생을 살다 간 인물이라서 그런지 워낙에 대중적인 인지도와 명성이 드높은 대통령이라서 그런지 어쨌는지 링컨은 백악관에 가장 자주 출몰하는 유령으로도 유명하다. 덕분에 이런 류의 괴담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암살로 억울한 죽음을 당해서 혼이 이승을 못 떠나고 있다는 떡밥으로 써먹히는 중. 진실 여부는 그렇다치고 백악관은 건물이 낡아서 그런지 유령에 대한 목격담이 한둘이 아닌데 목격자들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독 링컨의 유령을 봤다고 지목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백악관에는 링컨의 침실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문과 링컨이 당시 사용한 책걸상 및 침대 등이 놓여 있는데 윈스턴 처칠은 귀빈으로써 백악관에 묵을 당시 이 링컨 침실에 묵었다가 링컨의 유령을 보았고 말을 건넸다고 한다.[57]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당시 백악관 보좌관들 중 몇몇은 링컨의 유령을 목격하여 비명을 지르고 뛰쳐나간 적이 있으며, FDR의 아내 엘리너 루스벨트 영부인은 유령을 보진 못했지만 링컨의 존재를 느꼈다고 증언했다. 빌헬미나(네덜란드) 여왕은 백악관에 묵을 당시 한밤중에 누가 노크를 하길래 문을 열었다가 링컨의 유령이 서있는 모습을 보고 기절했다는 소문도 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밤새 링컨 유령의 악몽에 시달렸고, 심지어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겪은 뒤 링컨의 유령을 보기도 했다고. 결국 빡친 나머지 백악관을 불도져로 밀어버리고 리모델링 했다고 한다.[58]
- 링컨의 사진 중 하나는 합성 사진이다.
좌측 사진은 사실 링컨의 풍모가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해서, 당당한 체구의 정치인의 사진에 링컨의 머리만 붙인 것이다. 웃긴 것은 그 정치인이 존 칼훈이라는 것. 존 칼훈은 부통령을 두 차례나 지냈을 정도의 유명 정치인이지만, 주의 분리와 독립, 노예제도 유지를 지지했던 남부 옹호세력의 거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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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한 존 윌크스 부스는 링컨을 암살하고 난 후 "폭군의 말로는 언제나 이렇다." 라는 의미의 라틴어 "Sic Semper Tyrannis"를 외쳤다고 한다.
- 링컨이란 인지도 때문인지 상표명으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링컨 자동차 등.
- 놀랍게도 현상 수배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다만 이는 링컨이 뭔가 잘못했다는게 아니라, 우연의 일치로 현상 수배범이 된 사람이 있었는데 하필 그 사람이 링컨의 외모와 닮았다는 것. 이 얘기는 스펀지에서도 다룬 바 있고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도 주인공인 장고가 처음 처리하여 부적으로 들고다니는 현상수배범의 포스터로도 다루었다.
- 에이브러햄 링컨의 혈흔이 남아있는 전보와 머리카락 뭉치가 경매에서 8만1천달러(약 9천600만원)에 팔렸다.#
8.1. 인터넷 드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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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는 출처가 불분명한 명언들을 까기 위해 누군가가 만든 이미지. '''링컨이 살았던 시절에 인터넷은 커녕 컴퓨터조차도 있었을 리 없으므로''' 이 이미지 자체가 해당 주장의 강력한 근거이기도 하다."인터넷에서 본 글을 사진과 인용문이 있다고 해서 다 믿지 마라."
9. 대중매체에서
- 박물관이 살아있다 2에서는 링컨 기념관에 있는 링컨 대리석상 모습으로 등장.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물체들이 다 그렇듯 아크멘라 석판의 힘으로 생명을 얻었다. 석상이라서 그런지 비둘기를 무척 싫어하며, 파라오 카문라가 소환한 라의 병사들을 겁먹게 만든다(...).[59]
- 미국의 국민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도 가끔 출연한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는 편. 의외로 심슨 가문과 놀라운 인연을 가지고 있는데, 노예제가 성행하던 시절 심슨 가문의 딸인 일라이자 심슨이 자신의 집에 숨겨주던 노예 버질을 일라이자의 어머니 메이블 심슨이 대신 데리고 도망치던중 버질과 메이블이 수배를 당하게 되고 난관에 봉착한다. 이때 이들을 지켜보던 링컨이 그들을 돕는다. 트레이드 마크인 모자를 빌려주며 메이블의 마지 심슨 스타일의 눈에 띄는 머리를 감추라고 제안한 것. 이때 메이블이 어떠냐고 물으니까 아래가 불룩한 난로같다고 대답하곤 메이블이 못마땅해하자 "솔직한 에이브(Honest Abe)잖아요"라며 껄껄 웃고 변명한 뒤 난 너무 재밌는거 같다며 스스로는 만족한다(...). 이후 메이블과 버질은 도망쳐서 새 가정을 이루고 그들 사이에서 아이도 태어나는데 이 아들이 현재 호머 심슨의 아버지되는 에이브 심슨의 증조부인 에이브러햄 심슨 1세다. 링컨이 버질과 메이블을 탈출을 직접적으로 도와주었으니 링컨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가능성이 높은듯. 할로윈 특집 에피소드로 유명인사들에게 광고비를 지불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광고에 출연할 정도로 유명인사를 호머 심슨이 돈을 받고 죽이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떤 광고에 조지 워싱턴과 링컨이 격렬히 키스를 하는 광고가 천국에 방영된다. 조지 워싱턴은 분노하는데 비해 링컨은 불편해하는 척 하면서 웃고 있다(...). 나중엔 천국에 간 호머 심슨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엔딩. 링컨의 아내도 자신의 그런 지향을 이해했다고...[60]
- 팀 포트리스 2에선 1850년대 블루팀의 첫번째 파이로는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고 한다.팀 포트리스 2의 게임모드중 아레나 모드가 제일 좋다고 연설한바가 있으며 세익스페라클레스[61] 라는 작가 겸 발명가가 로켓 발사기랑 2층집은 발명했는데 계단은 발명하지 못해 사람들이 집의 2층에 로켓점프로 올라가고 있던 정신나간 상황에서 1857년에 운좋게 계단을 발명하였고 암살당하지는 않았으나, 계단의 사용법을 완벽히 익히지 못해 포드 극장의 연구소에 있는 계단에서 로켓 점프를 하다가 사망하였다. 그 이후 로켓 점프 실수로 다리를 잃은 루즈벨트가 링컨의 낡은 노트를 통해 계단을 개량함으로서 더 이상 인류는 로켓 점프로 2층에 올라갈 필요가 없어졌다.
-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남북전쟁(분리전쟁) 패배로 인해 하야하고 북부에서도 이뭐병 취급을 받는 운동가로[62] 처음 나온다. 이후 1884년의 2차 멕시코 전쟁 때 남부연합에 포로로 잡힌다거나 하는 모험 뒤에 사회주의에 감동하여 마르크스를 잇는 사회주의 이론가로 활약하여 북부에 사회당 결성의 아버지가 된다(...).[63]
- Ugly Americans에선 좀비가 되었으며(...), 그 세계의 현 미국 대통령이기도 하다. 트웨인과 존 윌크스 부스가 2차 암살을 계획하나...
- 2010년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영화 음모자(The Conspirator)는 링컨 암살을 다루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링컨은 작중 초반에 죽고(...) 링컨 암살자들 가운데서도 메리 서럿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 잭 런던의 소설 강철군화의 인용문에 따르면 링컨은 그가 죽기 직전 "이 나라는 통합되었지만 이제는 정치의 나라가 아니라 트러스트(=재벌)의 나라가 된다."라는 투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어쨌든 지금 미국의 향방을 가르는 것은 노예제도가 아닌 빈부격차긴 하다.
- 키아누 리브스가 이름 없던 시절 나온 영화 엑설런트 어드벤쳐에도 나온다. 이 영화는 타임머신을 타고 잔 다르크, 루트비히 판 베토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칭기스 칸, 빌리 더 키드, 프로이트 같은 역사적 위인을 현대로 데리고 오면서 벌어지는 코미디영화인데 링컨은 그나마 덜 망가진다. 미국 백화점 여기저길 둘러보는데 흑인들도 많이 오고가는 걸 보고, 놀라워하고 백화점 안에서 연설하다가 사람들이 미친 놈보듯이 하지만 일부는 그래도 연기 잘하네? 라는 투로 손뼉까지 쳐준다. 그리고...경비원들에게 끌려나간다... 전자 키보드 연주에 매달리는 베토벤이나 백화점 안에서 사람들을 흥미롭게 보고 정신 분석학을 이야기하는 프로이트와 더불어 그나마 잘 나온 셈. 칭기스 칸은 가장 망가지고...나폴레옹도 망가지고 잔다르크는 에어로빅 강사가 된다든지 캐붕된 다른 위인들에 견주면 확실히 나은 편이었다. 연설에 뛰어난 정치인인데다 근대 미국인인 만큼 등장 위인들 중에 의사소통이 잘된다는 점 때문에[64] 빌과 테드의 구술시험 마지막에 학생들을 상대로 대표로 마지막 인사를 멋들어지게 했다.
-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책의 판권을 사들여 영화로 제작했으며 제목은 링컨으로 2012년 12월 16일(미국)에 개봉. 링컨 역을 맡은 배우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이다. 작중에서 링컨과의 싱크로는 100%를 넘어서 어마어마한 연기력을 보여준다. 영화 상에 딱히 액션이나 볼거리는 없는 잔잔한 드라마를 가진 영화로, 극적인 재미는 없어도 진지한 주제의식과 함께 배우들의 연기력과 영상미가 돋보인다. 영화 해설은 이 글을 참조.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 영화로 2013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흥행도 대박이라서 제작비 6500만 달러로 저렴하게 만들어 북미에서 1억 8220만 7973달러를 벌어들였다. 뉴욕 타임즈에서도 이례적으로 다수의 영화평이 나오는 등 미국에서는 대중적 흥행과 더불어 지식인들의 격찬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북미를 제외한 세계 흥행수익은 9300만 달러로 역시 미국인들 역사적 이야기라서 다른 나라에선 그다지 흥미로운 구석이 없는 듯 싶다. 3월에 한국에서도 개봉했으나 전국 10만 관객을 겨우 넘기면서 막을 내려 개봉한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 브라이언 싱어의 시리즈 영화 엑스맨 2에서 백악관의 큐레이터가 링컨의 초상화 앞에서 그가 취임식에서 16대 대통령으로써 첫번째로 한 말을 관광객들에게 소개한다. "우리는 적이 아닌 친구입니다. 우리는 절대 적이 돼서는 안됩니다. 열기에 긴장했을 수 있지만, 우리의 유대감을 깰 수 없습니다.[65] " 이어 큐레이터는 이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라고 하며 영화의 오프닝이 시작된다.
- 그밖에도 2012년 6월에 팀 버튼이 제작한 에이브러햄 링컨: 뱀파이어 헌터(...)가 개봉했다. 소설이 원작. 에이브러햄 링컨이 뱀파이어 헌터로서(...) 대통령이 된 것도 사실 뱀파이어들로부터 미국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것. 소시적 벌목공으로 잘 다루던 도끼로 뱀파이어들을 때려잡고 다닌다. 당연히 미국에서도 컬트 영화 취급이다.
- 소설 해저 2만리와 이를 오마쥬한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는 이 대통령의 이름을 딴 미합중국 해군 소속 순양함 USS 에이브러햄 링컨 함이 등장한다. 그리고 작 초반부에 미지의 바다 괴물의 공격을 받고 선체가 파손, 혼란의 와중에 주인공들이 물에 빠진 줄도 모르고 퇴각해 버린다. 이 이름은 현재 실존하는 미 해군의 니미츠급 항공모함 한 척에 붙어 있으며, 함번은 CVN-72이다.
- 대한민국 전쟁소설 데프콘에서는 위의 항모 링컨 함이 서해에서 가상의 대한민국 해군의 214급 잠수함 신채호함이 쏜 어뢰에 피격당해 격침된다. 공저자인 김경진이나 윤민혁 둘 중 한 명이 역덕이나 밀덕, 오덕들을 노리고 집어넣은, 위 두 작품의 오마주로 추정된다.
- 해저 2만리 후속작인 신비의 섬에선 온갖 자원이 풍부한 무인도에 표류한 주인공들이 섬에 링컨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북부 출신 미국인들답게 자유를 위해 싸우는 위대한 시민이라는 칭호를 아끼지 않는데 이걸 엿들은 네모 선장이 인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고 주인공 일행을 도와주게 된다.
- 문명 4 비욘드 더 소드의 오프닝에서는 남북전쟁 후 남군의 조인서를 주머니 속에 넣고 간지나는 연설을 하는 링컨이 그대로 링컨 기념관에 있는 자신의 석상과 오버랩되는 명연출을 보여준다. 두 번째 확장팩인 비욘드 더 소드에서 미국의 지도자로 링컨이 추가되기 때문인데[66] , 링컨 자체의 특성은 나쁘지 않으나 미국 문명 자체가 문명 6 이전까지 그닥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암울한 신세는 면하기 어렵다.
- 세계정복 ~모략의 즈베즈다~의 히로인 호시미야 케이트의 말에 따르면 링컨에게는 총탄에 약했다는 결점이 있었다고 한다(...).
- 음악 'Gay bar'뮤비에서는 링컨이 연상되는 인물이 게이로 나온다.
10. 관련 어록
하나님이 백인에게 자유를 주셨듯 오늘은 흑인에게도 자유를 주셨으니 오늘 모든 노예들에게 자유를 선포한다.
- 1863년 1월 1일 노예 해방령 선포와 함께 노예들에게.
나는 책의 내용을 두 감각으로 파악한다. 책을 큰 소리로 읽으면, 보는 동시에 듣는 셈이 되기 때문에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기억은 잘 할 수 있다.
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cannot stand.
(스스로) 분열된 집안은 유지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시냐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있느냐는 것일세.
- 남북전쟁 종결 후 자신의 비서가 "신께서 우리 편에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을 때 한 대답.
세상에 천한 사람이 있을 뿐이지, 천한 직업은 없다네.
- 백악관에서 직접 구두를 닦는데 비서가 천한 일이라며 말릴 때.
Home Sweet Home
즐거운 나의 집
Whichever way the war ends, I have the impression that I shall not last long after the war...
어떤 식으로 전쟁이 끝나든지, 전쟁 뒤에 나는 얼마 못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You can fool all the people some of the time, and some of the people all the time, but you cannot fool all the people all the time.
모든 사람들을 잠깐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또 일부의 사람들을 영원히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The ballot is stronger than the bullet.
표는 총알보다 강하다.
I am a slow walker but i never walk back.
나는 천천히 걷는 사람이지만 결코 뒷걸음치지는 않는다.
11. 소속 정당
12. 선거 이력
주 하원의원 선거와 1번의 연방 하원의원 선거를 제외하면 대통령 선거 전의 주요한 선거는 모조리 졌다. 참고로, 미 연방상원의원 선거가 직선제가 된 것은 수정헌법 제17조가 비준된 1913년부터이며, 링컨 당대에는 주 의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