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사영

 


[image]
蜀漢四英
삼국시대 촉한의 뛰어난 정치가 4명을 묶어 이르는 병칭(竝稱).[1] 유비가 입촉을 완료한 214년부터 최후의 촉한사영인 비의가 암살당하는 253년까지 장장 40여 년간 촉한의 정사를 도맡아 나라를 부강케하고 안정시킨 명재상들이었다.[2]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화양국지 7권 유후주지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촉나라 사람들은 제갈량, 장완, 비의, 동윤을 사상(四相)으로 삼고 사영(四英)이라고 칭했다.

동윤전 주석 화양국지

촉한은 이 4명이 살아 있던 시기까지는 무능했던 유선을 데리고도 그럭저럭 시의에 맞는 판단을 하며 가장 약소국임에도 불구하고 위나라에 밀리지 않을 만큼 부강했지만,[3] 이들이 사망한 이후로 진지 때부터 간신 황호가 스물스물 등판하더니, 진지 사후엔 전면에서 득세하면서 국가가 얼마 가지 않아 막장테크를 타고만다.
위 동상은 쓰촨 성 면양(綿陽)의 부락산 공원에 있는 동상이다. 해당 지역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부락산은 면양의 제일산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부락산의 이름은 동산(東山)이었고 후한 헌제 건안 16년(서기 211년)에 익주목으로 있던 유장유비의 만남이 바로 부락산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부성회관 아래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문 위로 공연무대가 있다. 12m 쯤 떨어진 맞은편에 촉한이시(蜀漢伊始)라는 편액이 걸린 큰 건물이 있는데, 촉한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유비와 유장이 이곳에서 100일간 잔치를 벌이며 건너편 무대에서 벌이는 무희들의 춤을 바라보면서 술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동산은 당나라 때 부락산으로 이름이 바뀐다. "풍성하구나, 오늘의 즐거움이여!(富哉樂乎)"라며 술을 마시던 유비는 산 아래 펼쳐진 촉 지방의 기름진 농토를 바라보며 탄성을 쏟아냈고 후일 유비가 익주를 탈취하고 소원을 이룬 데 대해 당나라 때 이 고사를 기념하여 부락산이라고 개칭하고 부락사를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그때부터 부락산으로 불려진다고 한다. 이 공원에는 촉한사영 외에도 오호상장의 동상과 유장, 유비, 방통의 동상이 있다.
촉한사영은 모두 형주 출신이라며 같은 부류, 파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제갈량의 경우 서주 냥야 출신에 남양군의 호족들과 교류, 장완은 오지 취급이었던 형주 영릉군 출신, 비의는 강하군 출신으로 유비가 입촉하기 전에 유장의 인척이라 익주로 유학, 동윤은 아버지가 유장의 신료였는 데다가 집안이 원래 익주출신이고 익주로 집안이 복귀한 것도 유비의 입촉 전인지라[4] 흔히 언급하는 유비의 형주인재풀인 남양군-남군출신들과 들어맞는 것은 제갈량밖에 없다. 유비의 입촉 때 익주에 들어선 제갈량-장완과 원래 유장의 관료 및 인척으로 익주에 들어선 비의-동윤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말.
거기다 제갈량은 사실상 구 유장세력과 가까운 이들인 비의와 동윤을 중용하여 촉한의 최상위 관료로 성장시켰으니 이런 종류의 파벌론은 그 근거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1] 촉한사상(蜀漢四相)이라 불리기도 한다[2] 실제 재상에 해당하는 상국과 승상은 촉한에선 오로지 제갈량의 것이었다. 물론 장완, 비의가 제갈량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남겨둔 것이지 사실상의 승상 역할을 했기 때문에 재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동윤은 재상에 오르기 전에 사망했다. 자세한 건 각 인물들 문서 참조.[3] 이 시기에 위와 오는 반대급부로 정치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여서 그랬던 탓도 있긴 하다.[4] 동윤의 아버지 동화는 익주호족들과 충돌이 언급되고 동주병과도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등 오히려 유장 직속에 가까웠다.